■ 서설(瑞雪)에 무등(無等)을 허심(虛心)으로 오른다.
(2011년 제50 차 광주 무등산 정기산행)
◆ 산행개요
♣ 산행일시 : 2011년 12월 22일 (목요일)
♣ 산 행 지 : 무등산(無等山 1,187m)
♣ 소 재 지 : 광주광역시 북구, 화순군 이서면, 담양군 남면과의 경계
♣ 산행코스 : 증심사주차장 → 새인봉 → 중머리재 → 장불재 → 입석대 → 서석대 → 중머리재 → 주차장
♣ 산행주관 : 중앙산악회
♣ 산행시간 : 약 5 시간
♣ 산행회비 : 28,000원 / 인
♣ 산행준비 : 산행간식 방한 겉옷 및 아이젠 스펫치 지참
♣ 기 타 : 산행 하산 후 식당에서 이뿐이표 닭볶음탕 뒤풀이
◆ 산행참고
♣ 무등산(無等山 1,186 m)
무등산은 광주광역시 동쪽 에 솟아난 산으로 북쪽은 나주평야(羅州平野)와 남쪽은 남령산지(南嶺山地)로 연결되어 있는 웅대한 광주의 진산이며 1972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산의 명칭은 통일신라 때 무진악(武珍岳) 또는 무악(武岳)으로 쓰여 지다가 고려 때 서석산(瑞石山)이란 별칭과 함께 무등산이라 불렸다. 산세의 북부는
중생대에 생성된 화강암이 분포하고 남부는 퇴적암지대이다. 대부분 완만한 흙산이며 중턱에는 커다란 조약돌들이 넓게 깔린 너덜을 이루고 있어 특색이 있는 이곳을 지공너덜이라고 한다.
정상 가까이에는 원기둥 모양의 절리(節理)가 발달하여 기암괴석의 경치가 뛰어나다. 동쪽 경사면에서 정상을 향하는 곳에 입석대(立石臺)·서석대(瑞石臺)·삼존석(三尊石) 규봉암(圭峰庵) 등이 있고 정상 부근에는 수신대(隨身臺)가 있다. 산의 북쪽 기슭인 충효동에는 환벽당·소쇄원·식영정 등의 누각과 정자가 세워져 있으며 산행기점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철감국사(哲鑑國師) 도윤(道允)이 창건한 무등산 최대의 사찰인 증심사(證心寺)는 오백나한전·오 층 석탑·칠 층 석탑·석조보살입상·철조비노사나불좌상(鐵造毘盧舍那佛坐像, 보물 제131호)등을 소장하고 있으며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한 원효사는, 증심사와 함께 6·25전쟁 때 공비 토벌작전으로 소실되었다가, 근년에 복구되었다. 시내에서 원효사에 이르는 도중의 충효동(忠孝洞)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 덕령 장군의 출생지이며, 그의 의복(중요민속자료 111)이 보관돼있고, 또 충장공(忠壯公)으로 추증(追贈)된 공을 모시는 충장사(忠壯祠)와 묘소가 있다.
무등산의 웅장한 자태에서 분출되는 정기는 광주학생운동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애국지사·문인·예술가 등을 배출시키는 터전이 되었고 가깝게는 민주화 운동의 애절한 역사를 잉태한 곳으로 특산물인 수박은 늦여름까지 시원한 진미를 보여주고 있다.
◆ 산행사진
◐ 증심사(證心寺)
광주광역시 동구 무등산(無等山)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헌안왕 4년(860년) 철감선사(澈鑑禪師)가 창건하였고, 1094년(선종 11)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중수하였으며, 1443년(세종 25) 전라도 관찰사 김방(金倣)이 자신의 녹봉으로 중창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자 1609년(광해군 1) 석경(釋經) · 수장(修裝) · 도광(道光) 등의 선사들이 중창하였고,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임제종(臨濟宗) 운동의 본부가 되었다. 그 뒤에도 중수를 거듭하다가 1951년 4월 50여 명의 무장공비들에 의하여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 버렸으며, 1971년에 크게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989년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오백전(五百殿)과 대웅전 · 지장전(地藏殿) · 비로전(毘盧殿) · 적묵당(寂默堂) · 종각 · 일주문 · 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오백 전을 제외한 건물들은 최근에 지어진 것이다. 오백 전은 대웅전 뒤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초기에 지어진 강진 무위사(無爲寺)의 극락전과 같은 계통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전내의 오백나한상은 1443년의 중창 때 김발이 조성한 것이라고 전해 오는데, 전국적으로 보기 드문 불상이다. 오백전 옆에는 높이 205㎝의 석불 1구가 있는데, 고려시대(10세기경) 작품으로 추정되는 석조보살입상으로 1989년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비로전 안에 안치된 높이 90㎝ 정도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철불은 본래 광산군 서방면 동계리에 있던 것을 1934년에 옮겨온 것이다.
이밖에도 문화재로는 증심사 창건 때 만들었다는 1972년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삼층석탑,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1933년의 보수 때 탑내에서 금동석가여래입상과 금동보살 입상 등이 나왔던 오 층 석탑, 조선 중기의 것으로 보이는 칠 층 석탑 등이 있다. 특히, 오 층 석탑에서 발견된 금동석가여래입상과 석조보살입상은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분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이 절 입구의 왼쪽 산록에는 약 3만여 평의 차밭이 있다. 이 차밭은 원래 증심사에서 공양을 위하여 가꾸어왔던 것이나,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경영하였고 광복 후에는 허백련(許百鍊)이 인수하여 고유의 차를 재배하였다. 1984년 절 주변이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