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결혼식 선물이 있었다고 한다. 선물은 숟가락 세트였다. 일본 유학 직후부터 김환태 선생은 도산 안창호 선생과 자주 만났으며 친분을 이어갔다고 한다. 그리하여 김환태 선생도 일제의 감시 대상에 올라있었다.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일본은 전쟁을 위해 학도병 징병 제도를 실시하였고, 일제는 이를 위해 문학가들과 교사들을 앞세운 홍보와 감언이설로 젊은이들을 끌어냈다. 일부 문학가들은 이때 변절하여 친일 문학을 썼으며, 징병 제도를 찬양해 학생들을 전장으로 내몰았다. 이런 선동에 앞장선 사람이 바로 이광수와 최남선이었다. 막강한 2인 문단 권력을 이용한 친일행적이었다.
그러나 김환태는 끝까지 동조하지 않았고 결국 1936년 동대문 경찰서에 수감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1개월 후 풀려났지만, 일제의 국어 말살 정책과 친일 문학이 문단을 휩쓸자 김환태는 1940년 결국 절필 선언하고 낙향하였다.
눌인 김환태의 조명은 늦은 감이 있었지만 활발하게 이어졌다. 김환태 문학상이 제절 되었고 김환태 추모사업이 이어져 매년 김환태 문학제가 열리고 있다. 또한 <문학사상사>가 1989년에 김환태의 비평 정신을 기리고 한국의 비평문학의 발전을 위해 <김환태 평론문학상>을 제정하였다. 김환태 평론문학상은 월간 <문학 사상> 편집진이 1년 동안 각 매체에 발표된 작품을 수집하여 문학상 운영 위원회에서 대학교수, 평론가, 작가, 문예지 편집장, 월간지 문학 담당 기자 등약 100명에게 의뢰하여 가장 우수한 한 편을 선정하여 수여한다. 제1회 김윤식 교수가 1990년 3월에 첫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며, 매년 기라성 같은 한국문학의 선구자들이 김환태 평론문학상을 수상하고 있다.
2020년 11월 8일에 열린 김환태 문학제에서 김환태 평론 문학상은 31회째를 맞았다. 심사총평에서 김미현 교수의 <그림자의 빛>을 선고 위원회가 선정했다. 선고 위원회는 권영민 교수와 방민호 교수는 선정 이유를 보면 이랬다.
<눌인 김환태는 어둡고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문학이, 그리고 무엇보다 비평이 어떤 의미를 지니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려준 문학인이었다. 그의 활동 시기는 비록 짧았으나 그의 비평은 넓고도 날카로웠다. 김환태 문학상은 그러한 김환태의 정신을 기리는 상이라 할 수 있다. 김미현 교수의 평론집 《그림자의 빛》 (민음사, 2020)은 심사위원들로서는 오랜만에 마주 대하는 정통적이고 또 전통적인 문학평론집이라 할 수 있다. 문학평론집으로서 《그림자의 빛》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은 문학평론이라는 하나의 문학 장르가 성립할 수 있는 근본적 조건을 진지하고도 새롭게 질문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일제강점기에 문학평론 활동을 펼친 눌인 김환태는 정론적 비평, 시류적 비평과 달리 문학의 본질적 의미를 묻는 글들로 당대 문단에 경종을 울렸던 바, 이제 김미현 교수는 통상'빛'이라 말해질 수 있는 작품 또는
이론에 대해 '그림자'의 역할에 머무를 듯한 비평, 평론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묻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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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
김환태 선생의 문학비는 설천면에 있는 나제통문 옆에 세워져 있다. 이 또한 <문학사상사>에서 1986년 건립사업을 주관하여 같은 해 5월 25일에 덕유산 자락 나제통문 앞에 문학비를 제정했다.
김동리, 박두진, 최승범, 이어령 등 52명의 문인들이 뜻을 모아 건립했다고 한다. 건립 위원장은 소설가 김동리, 제자 휘호 김동리, 비문 휘호 박두진, 조각 작품 제작은 조각가 백현옥이 참여했다.
김환태 선생에 대한 인터넷 자료에 있는 주소로 묘소를 찾는 일도 애를 먹었다. 옛날 주소로 내비게이션에 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주읍 당산리로 검색은 안되었다. 무주읍 괴목로 1359-72번지, 무주 추모의 집으로 검색해야 했다. 추모원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정문에서 조금 위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확 트인 전망이 아름다웠다. 그의 묘소는 석공예처럼 독특한 구조로 설치되어 있었다. 부인 박봉자 여사와 나란히 안장되어 있었다. 미망인 박봉자 여사는 미국에서 아들 김영진 교수와 살다가 영면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유해를 고국으로 어떻게 모시고 왔는지에 대해서는 취재하지 못했다.
호남의 삼한 중 제1루라 일컫는 <무주 한풍루>를 중심으로 한 지남공원에 김환태 문학관이 있다. 18세기 중엽 그러니까 조선 후기의 화가 최북 미술관과 함께 있었다.
김환태 문학관은 무주군에서 무주 출신 김환태의 순수 비평문학을 기리고 눌인이 남긴 문학적 유산을 향유하며 무주의 문화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2012년 6월 8일 개관하였다고 한다. 김환태 문학관에는 100여 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김환태의 생전의 사진과 <김환태 비평 선집>, 다수의 저서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눌인이 사망하고 가족들이 떠났지만, 그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반갑고 기뻤다. <김환태 평론 문학상>, <김환태 문학제>, 등이 문학관에서 개최된다고 한다.
생가에서 현재 살고 있는 김병와 씨와 그의 아버님 김정하 선생을 만난 다은 날 나는 김병와 선생의 안내로 눌인 김환태 문학 기념사업회 회장을 엮임 한 전선자 선생을 만났다. 전선자 회장은 시인이며 김환태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아 눌인의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해 헌신하신 분이었다.
생가에서 만난 김병와 선생의 아버님 김정하 선생은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지만 김환태 선생 가족에 대해서는 기억하는 것이 별로 없다고 하셨다. 6.25 전쟁 직후에 정미소를 운영하던 사람에게 인수를 했다고 했다. 그러니까 김환태 선생의 부인 박봉자 여사가 마지막으로 살다가 생가는 다른 사람에게 매매가 됐던 것이었다. 처음 인수했던 사람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현재 살고 있는 김정하 선생에게 혹시 김환태 선생의 유품이나 김환태 선생 가족이 쓰던 물건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안타까웠다. 너무 오래전의 일이었다.
김환태 문학기념사업회장을 엮임 한 전선자 선생을 만나니 그 의문은 조금 풀렸으나 별다른 것은 더 이상 없었다. 가족이 모두 미국으로 떠났기 때문에 유품도 남아 있는 것이 없고 그의 아들과 딸도 모두 나이가 들어 더 이싱 한국에 오지 못할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