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포와 봉사, 2022년 10월 23일 전교주일 강론 원고>
민족들의 복음화
1. 전례의 취지
오늘은 ‘전교 주일’이다. 교회는 전교 사업에 종사하는 선교사와 전교 지역의 교회를 돕고자 해마다 10월을 전교의 달로 정하고 마지막 주일의 앞 주일을 ‘전교 주일’로 정하여, 신자들에게 교회 본연의 사명인 선교에 대한 의식을 일깨우고 있다.
2. 말씀의 흐름
2-1. 제1독서: 이사 2,1-5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고난받는 주님의 종의 노래’(이사 42,1-9; 49,1-7; 50,4-11; 52,13-53,12)로 매우 선명하게 그려낸 예언자이다. 그가 지닌 예언자적 상상력과 통찰력은 탁월하여 메시아가 고난받게 되는 원인도 꿰뚫어 보았으니, 그 정확성은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공생활을 시작할 때 그의 예언(이사 61,1-2)을 인용하신 것에서 확인된다(루카 4,16-21). 이사야가 내다본 메시아 고난의 원인이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 때문인데,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고난을 통해서라도 수행해야 할 그 위대한 사명이 가져다줄 미래 전망까지도 내다보았다(이사 2,3). 그 미래란 새로운 ‘예루살렘’과 그 도성의 언덕인 새로운 ‘시온’에서 진리가 퍼져 나오고 이 진리가 바탕이 되어 평화가 실현되는 세상이다. 이 전망은 훗날 부활하신 메시아 예수께서 초대교회 신자들 안에 현존하시면서 박해 속에서도 승리를 이끄시어 ‘새 예루살렘’과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룩하리라는 사도 요한의 묵시적 예언으로 메아리치게 된다(묵시 21,1-8.9-27).
2-2. 복음: 마태 28,16-20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 앞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마태 28,18)을 당신이 지니고 계심을 공표하면서, 이 전권(全權)으로 세상 끝 날까지 제자들과 함께 하시겠노라고 다짐하는 한편, 이 현존 약속을 믿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와 평화의 복음을 전하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였다. 이는 그리스도교가 전하는 예수의 가르침은 진리와 평화를 실현할 수 있는 전망과 능력을 지니고 있어서, 여타의 다른 자연종교들의 가르침에 비해 차원 높은 진리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 역사의 제2천년기 내내 서방 교회 선교사들이 이 선교 명령을 여타 종교의 신봉자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킬 명분으로 삼은 결과, 진리와 평화를 실현하고자 했던 예수의 보편적인 복음이 종파 차원의 주장으로 협소해졌음은 물론 종교간 대결을 초래하는 개선주의적 선교 이데올로기로 작동되어 버렸다. 더욱이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마주친 아시아의 전통 종교들은 그리스도교보다 더 오랜 역사적 전통을 지니고 있었으며, 인간 존중에 있어서도 그리스도교보다 더 심오한 영성을 지닌 고등 종교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서양 선교사들은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대륙에서 마주쳤던 토속 종교들을 대했던 것처럼 아주 간단히 우상을 숭배하는 미신으로 간주하고 말았다. 이 바람에 엄청난 문화적 충돌과 갈등이 빚어졌으며,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교 박해가 일어나게 만들었다.
백 년 동안 최소 2만 명이 애꿎게 치명해야 했던 끔찍한 박해를 초래한 조선의 조상제사금지령도 그 한 예였다. 만일 이 금지령(1715)이 내려지지 않았거나 또는 애초에 중국의례논쟁으로 촉발되어 반세기 전에 또 다시 내려져 있었던 이 금지령(1742)을 조선시대 한국인 신자들에게도 막무가내로 적용하기 전에 조선 천주교 신자들의 의견을 들어 실상을 파악했더라면, 한국교회의 운명은 물론 조선왕조의 국운과 한반도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격동의 국제정세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동북아시아에 살던 아시아인들의 비극과 불행이 예방되었을 것은 물론 아시아의 복음화에 있어서도 지금보다 훨씬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교황청은 박해가 종식되고 나서(1886; 1899) 한 세대가 지나서야 뒤늦게 조상제사금지령을 취소했다(1939). 하지만 이로 인한 박해로 희생된 신자들 중 일부를 시복시성했을 뿐 공식 사과는 없었고 이 금지령으로 인해 배교자로 몰린 이들에 대해서도 그 어떠한 명예 회복 조치를 지금까지 취하지 않고 있다. 대희년을 맞아 교회가 인류 앞에 참회한 문건 「쇄신과 화해」에서도 유독 이 문제만큼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원칙이 무색하게도, 원인이 무효가 되었는데도 결과는 무효화되지 않고 있는 미해결 사태가 장기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로마보다 더 로마적"일 만큼 로마 교황청에 충성스러우며, 교황청에서도 이 점을 잘 알고 자립교회를 관할하는 주교부가 아니라 미자립 전교지방 교회를 관할하는 복음화부를 통해 섭정을 하고 있어서 그럴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 점, 선교 명령에 담긴 예수의 신성과 교회의 계시성이 어떻게 선교로 나타나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검토를 요청하는 역사적 사례이다.
예수께서 받으신 전권은 그리스도교가 종교로서 다른 종교들에 대해 우월한 지위를 담보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가 내다본 진리와 평화의 현실에 대한 신적인 권위를 확인해 주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예수가 가르친 모든 것을 가르쳐라.” 하는 삼중의 선교 명령 또한 예수께서 공생활 동안 이스라엘에서 보여주신 삶을 가감 없이 이어받아야만 이 현실을 이룩할 수 있다는 사명과 책임과 의무를 뜻하는 복음화의 조건이었다. 따라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따라서 모든 민족들을 – 제자가 아니라 - 이웃으로 삼는 ‘착한 사마리아인’이어야 하고, 교회가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베푸는 세례는 – 교세 확장의 수단이 아니라 - 선교사들은 물론 세례받는 이들도 예수처럼 살기를 다짐하고 당부하는 진솔한 표현이어야 하며, 예수의 가르침 역시 세례를 베푸는 이들이나 세례를 받는 이들 모두가 함께 지켜나가야 할 진리와 평화의 복음임을 알아야 한다. 공의회의 관점에서 보면, 진리와 평화의 복음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위탁되어 있는 백지수표가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할 때만이 실현될 수 있음을 알려주는 약속어음일 뿐이다.
그런데 아시아 대륙의 선교 실패 사례를 통해 교회가 얻은 교훈이 있다. 그것은 지금 “세계의 선교 상황이 아직 출발선상에 머물러 있다.”(회칙 「교회의 선교사명」, 1항)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언급이 그것이다. 아시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는데다가, 또 이제까지의 모든 선교적 시행착오를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게 된 덕분에 아시아 교회는 예수의 선교를 재현할 수 있는 역사상 최초의 교회가 될 것이기 때문에도 이 언급은 아시아의 선교 상황에 정확히 적중한다.
시선을 세계로 돌려보면, 모든 형태의 빈곤과 소외로부터의 자유를 열망하는 사조가 지구촌 전체에 확산되어 있다는 것이 21세기에 나타나는 시대의 징표인데,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착취와 억압에 시달렸던 아시아인들에게는 그리스도교 선교가 이 빈곤과 소외를 부채질했었다는 역사적 기억이 뼈아플 수밖에 없다. 이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아시아 주교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 결성된(1974) 아시아 주교 연합회의(FABC)가 열릴 때마다 이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였다.
25년에 걸쳐 숙고한 끝에 아시아 주교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주어야 할 세례’의 명령을 선교적으로 해석하였다. 즉 세례 예식상의 선언만이 아니라 삼중(三重)의 대화 필요성으로 간주한 것이다. 즉, “아시아에서 복음화를 이룩하려면 – 전례적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 아니라 - 아시아 종교들과 대화를 해야 하고, - 서구화된 그리스도교 문화를 강요할 것이 아니라 - 아시아 문화들과도 대화를 해야 하며, - 서구화된 엘리트가 아니라 -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과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선교 출발점을 삼고 노력한다면, 아시아의 종교 전통을 물려받고 있고 또한 아시아적 문화 감수성을 지니고 있는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이 빈곤과 소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들이 도움으로써 아시아의 복음화가 실현 가능하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즉, 아시아 선교는 전통 종교와 대결하여 교세 경쟁이나 개종 노력을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감수성을 존중하면서 가난한 이들을 이웃으로 삼아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1998년 아시아 주교 시노드에서 표명된 ‘교회의 새로운 존재양식’이다.
2-3. 제2독서: 로마 10,9-18
로마서는 로마의 복음화를 선교적으로 기대하며 쓴 편지로서, 사도 바오로가 지닌 사도적 성찰과 선교적 체험의 종합판이었으며, 과연 그가 로마에서 치명한 후 2백여 년 만에 로마제국은 박해를 멈추고 신앙을 공인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가 로마인들에게 권고했던,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사가 나서지 않으면 어떻게 복음을 고백하고 믿을 수 있겠는가?” 하는 호소는 새로운 선교 출발선에 선 아시아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절박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예수의 선교를 재현하려는 아시아의 복음화 과업에 있어서도 – 서양에서는 더 이상 선교사로 자원할 인력도 없거니와 - 자신을 봉헌할 아시아 선교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헌신은 종교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아시아인들은 예수를 서양 성현으로 인정하지만 하느님으로는 믿지 않고 있어서 아시아 선교의 요체는 예수의 신성을 증거하는 데 그 성패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여느 종교 창시자 성현들과 반열이 다른 존재로서 하느님이심을 믿고 있으며 또 이 진리를 선포해야 할 사명도 받고 있다(아시아 교회, 10항). 그런데 “현대인들은 스승의 말보다 좋은 표양을 주는 사람의 말을 기꺼이 듣는 법이다”(요한 바오로 2세, 회칙 「교회의 선교사명」, 41항). 그래서 예수의 선교를 출발선상에서 재현해야 하는 아시아의 선교 상황은 차라리 축복이다. 이전까지의 역사적 시행착오를 반면교사로 삼아 아시아 복음화와 사랑의 문명이 성취될 경우에, 덩달아서 누리게 될 보편적인 진리와 평화를 바라는 보편교회의 도움을 전방위적으로 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원래의 선교를 아시아 선교에서 정확하게 실천하여 ‘사랑의 문명’을 이룩한다면, 거기서 비추어지는 진리와 평화의 빛은 아시아인들에게만 비추는 것이 아니라 보편교회와 온 인류를 비출 것이다. 오늘 미사의 제2독서 본문인 ‘고백과 믿음’이 겨냥하는 선교적 현실이 바로 이것이다.
3. 선교 개념의 진화: 전교, 발전, 복음화
공의회 이전에는 선교가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세례를 베푸는 ‘전교’(傳敎)를 주로 뜻했다. 이는 인적인 선교를 지칭하는 개념으로서 이교인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면 세상은 복음화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개념이었다. 여기서는 역사적이고 사회 문화적인 상황과는 전혀 별개로, 오직 신자들의 수를 나타내는 교세가 복음화의 지표로 작용한다.
그런데 공의회 이후에 사목헌장을 잇는 회칙 「민족들의 발전」(바오로 6세, 1967)이 반포되면서 선교 개념은 ‘발전’이라는 새로운 단계로 매우 혁신적으로 진화하였다. 이 회칙에서 규정하는 ‘발전’이란 네 단계로 분류된다(1항). 첫째, 기아와 빈곤, 질병과 무지 등 절대적 빈곤으로부터 해방되는 단계. 둘째, 인간의 자질을 더욱 적극적으로 향상시키고 문명의 혜택을 누림으로써 상대적 빈곤에서 벗어나는 단계. 셋째, 경제적 발전으로 빈곤에서 벗어나서는 정신적으로도 더 성숙하고자 노력하는 단계. 넷째, 경제적 발전과 정신적 성숙까지 이룩한 경우에는 앞선 첫째와 둘째 발전 단계에서 노력하는 이들을 돕는 단계(참조: 81항).
이 네 단계의 발전에 있어서 유념해야 할 기준에 대해서 이 회칙에서는 ‘전인적(全人的)이고 보편적(普遍的)인 발전’으로 제시하였다(14항). 전인적 발전이라 함은 인간은 육신과 영혼의 결합체이기에 경제적인 사정만 배려해서는 부족하고 정신적이고 문화적이며 또 영적인 사정까지 배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보편적 발전이라 함은 인류는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정신적으로 유식한 이들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고 가난하고 무지한 이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에 소수의 엘리트들에게만 발전의 혜택이 돌아가서는 안 되고 가난하고 무지한 이들까지 포함한 다수에게 발전의 혜택이 고르게 돌아가도록 우선적인 배려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추세에 따라 병원사업이나 교육사업 등도 전교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간접 선교’로 보는 인식이 자리를 잡기는 했으나 선교를 ‘발전’으로 보는 이 개념은 이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인간을 ‘전인적이고 보편적인 존재’로 보는 통합적이고 인문주의적인 사회교리 철학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선교를 주제로 열린 주교 대의원 회의에서 뜨거운 논쟁을 거쳐 교황권고 「현대의 복음선교」(1975)가 반포되고, 사목헌장의 가르침(사목헌장, 90항; 참조 「민족들의 발전」, 5항)에 따른 정의평화위원회가 교황청과 각 교구마다 설립되면서 사회적 환경이 선교의 간접적 요인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에 의해 선교가 좌우될 수 있는 결정적 요인이라는 인식이 퍼졌고 ‘복음화’라는 용어가 더욱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이는 교회가 복음이라는 말씀의 텍스트(Text)에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콘텍스트(Context) 즉 상황을 인지하기 시작한 데 따른 것이다. ‘북한 선교’라는 용어가 ‘민족 복음화’ 또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로 바뀌기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장애자, 노동자, 빈민 등 예전 같으면 간접 선교의 수혜자로 머물던 이들이 공동체 운동을 통해서 복음화의 주체로 등장하기 시작한 흐름도, '전교'에서 '발전', 다시 '발전'에서 '복음화'로 선교 개념이 진화하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선교의 개념이 이렇게 「전교–발전–복음화」로 진화해 온 배경에는 ‘현대의 성령강림 사건’이라고 부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있다. 공의회 초기에 교황청 사무국에서 마련했던 보수적 초안이 비유럽 대륙의 주교들에 의해서 거부된 것을 시작으로, 1962년부터 1965년까지 4회기가 흐르는 동안 유럽 일변도의 분위기가 그야말로 제3교회를 대변하는 하느님 백성의 목소리가 폭넓게 반영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선교에 국한해서만 보더라도, 회기 초반에는 “교회에서 파견된 복음 선포자들이 온 세상에 가서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민족과 집단에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 자체를 심는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 활동”(선교교령, 6항)이 선교라고 규정하더니, 회기 말에 가서는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인 것”(사목헌장, 1항)이라고 바뀐 것이다. 전교 차원의 부식적(扶植的) 선교관에서 복음화 차원의 사목적인 선교관으로 바뀐 이 변화는 선교의 중심이 유럽으로부터 선교 현장으로 바뀌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 같은 자각은 예수의 강생적 국면이 선교 활동에 있어서도 진지하게 고려된 결과이다. 하느님으로서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땅으로 강생하셨을 뿐만 아니라, 땅에서도 가난한 처지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회적 강생의 삶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성령의 이끄심은 공의회 회기가 종료된 후에도 이어졌다. 1974년에 로마에서 선교를 주제로 하여 열린 주교 대의원 회의에서는, 복음 선교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기타 다른 성사를 주는 것만이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 계획에 상반되는 인간의 판단 기준, 가치관, 관심의 초점, 사상의 동향, 생활양식 등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그것들을 역전시키고 바로잡는 것(바오로 6세, 「현대의 복음 선교」, 17-19항)이라고 새롭게 정의하였다.
4. 아시아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하여
4-1. 아시아 주교들의 통찰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시아에서 태어나셨다. 아시아에서 자라난 그분의 교회도 이 아시아에서부터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되었다. 예수께서 태어나셨고 교회가 출현한 이스라엘이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지점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복음은 동진할 수도, 서진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 지중해 문명의 중심이었던 로마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다가 끝내 이 제국이 그리스도 신앙을 공인하도록 만들면서, 교회의 로마화와 더불어 복음화의 방향이 서진하게 되었다. 그 후 교회가 제1천년기에는 유럽 대륙에 십자가를 세우고 제2천년기에는 아프리카 대륙과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는데, 서진하여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온 이 제3천년기에는 아시아 대륙에서 ‘사랑의 문명’을 이룩함으로써 예수께서 당부하신 선교 명령을 완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고 있다(요한 바오로 2세, 교황권고 「아시아 교회」).
제1, 제2천년기 동안에 보편교회 안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해온 동방 ‘제1교회’와 라틴 ‘제2교회’는 오늘날 신앙의 활력이 현저하게 쇠퇴한 데 비해, 유럽 이외의 대륙인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에 세워진 ‘제3교회’가 제삼천년기에는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리라고 전망되고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 교회 등 ‘제3교회’가 속한 지역에서의 대다수 민중은 여전한 고질적인 빈곤과 만성적인 사회부조리로 말미암아 고통을 겪고 있으며, 특히 아시아에서는 인구 대비 신자율이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여러 지역교회들이 이슬람교나 힌두교, 불교 등 다른 전통 종교들의 위세에 눌려 현상유지에 급급하거나, 더 나아가 거의 만회불가능한 침체상태로 빠져드는 기미를 보이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이보다 사정이 나은 일본과 대만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이 나라의 교회들은 현상유지도 힘들 정도로 침체일로에 처해 있는가 하면, 공산 사회주의 국가들인 중국과 북한의 교회들은 신앙의 자유를 거의 누리지 못하고 있거나 존재감도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적이고 아시아적인 교회의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는 지난 70년대 이래 높은 경제 성장력을 이룩한 사회 안에서 이례적으로 경이적인 교세 신장을 이룩하였다. 한국교회는 5백만의 신자들을 포용하면서 인구 대비 10%를 상회하는 신자율을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한국교회는 아시아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경제적 안정을 이룩한 결과 대규모의 본당, 회관, 학교, 병원, 복지시설 및 기타 시설을 다수 건립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한 가운데 본당 사목과 사회복지 사목을 활발하게 전개하는 중이다.
아울러 한국교회는 70년대 이래 인권이 제약되는 권위주의적 군사정권 하에서 인권옹호와 사회정의 및 민주화 실현을 위해 투신하는 가운데 범국민적 신뢰를 받으며 사회적으로도 다른 어느 집단에 못지않은 높은 위상을 확보하기에 이르렀으며, 많은 신자들이 사회 주류층으로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등 실로 괄목할만한 활력을 내외에 과시하고 있다. 필리핀을 제외하고 아시아에서 한국교회와 같은 강력하고 드높은 위상을 사회적으로 확보한 지역교회는 없는 실정이다.
4-2.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메시지
그리하여 2014년에 아시아 교회 중에서는 첫 번째로 한국교회를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 주교단에 대해서 매우 강한 어조로 발언하였다: “세속화와 능률화의 온갖 유혹을 물리치십시오. 사랑의 이중 계명을 지키려고 목숨까지 바쳤던 순교자들에 대한 기억의 지킴이가 되고, 그 순교자들이 증거했던 바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복음 진리에 대한 희망의 지킴이가 되십시오.”
그러고 나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대전 월드컵 경기장에서 거행된 성모 승천 대축일 미사에서, 성모 마리아께서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사건은 예수님께서 어머니의 삶과 그 품위를 천상의 상급으로 심판해 주신 승천의 신비로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표양이요 목표임을 언급하면서 일종의 영적 전투에 임해야 하는 우리의 처지를 상기시켰다: “이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정신적 쇄신을 가져오는 풍성한 힘이 되기를 빕니다. 그들이 올바른 정신적 가치와 문화를 짓누르는 물질주의의 유혹에 맞서 싸우기를 빕니다. 이기주의와 분열을 일으키는 무한 경쟁의 사조에 맞서 싸우기를 빕니다.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 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 모델들을 거부하기를 빕니다. 생명이신 하느님과 하느님의 모상을 경시하고, 모든 남성과 여성과 어린이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죽음의 문화를 배척하기를 빕니다.”
그 다음 방한 일정의 주요 행사였던 124위 순교자 시복미사에서 교황은 이렇게 강론하였다: “순교자들은 그들의 모범으로, 신앙생활에서 애덕의 중요성에 관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 증언의 순수성이었고, 세례 받은 모든 이가 동등한 존엄성을 지녔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대의 엄격한 사회구조에 맞서는 형제적 삶을 이루도록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이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중 계명을 분리하는 데 대한 그들의 거부였습니다. … 막대한 부요함 곁에서 매우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들 안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순교자들의 모범은 많은 것을 일깨워줍니다.” 그러니까 일반 신자들에게는 사회적 메시지와 영적 메시지를 두 차례에 걸쳐 전해 준 것이다.
4-3.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방한 메시지
이처럼 주교단과 일반 신자들에게 각기 다른 결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전한 메시지는 1980년대에 두 번이나 방한하여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보낸 바 있었던 총론적 메시지 위에 보탠 각론이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다른 나라 교회에 비해 뒤떨어져서가 아니라, 민족이 분단되고 전쟁까지 겪은 후 70년째 그 분단을 이어오는 등 유난히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으면서도 놀라운 경제성장과 교세신장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하여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려 25년 동안 교황직에 있으면서 요한 바오로 2세는 늘 기도목록에 ‘한반도’를 올려놓고 기도해 주었다. 세계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자생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선각자들의 땅, 백년 박해를 보란 듯이 이겨낸 순교자들의 땅, 그러면서도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갈라진 땅, 이 한반도에서 다시 한 번 하느님의 섭리가 빛을 발하여 신앙의 진리가 평화의 진리로 피어나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잊어버린 채 갈라져 있는 인류가 한민족을 통하여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를 목격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첫 번째 방문은 한국교회가 청했지만 두 번째 방한은 요한 바오로 2세가 자청하였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에페 2,14)라는 성경 말씀을 주제로 정해주어 서울에서 세계성체대회를 개최하도록 권유함으로써, 아시아를 비롯한 전 세계의 주교들을 한 자리에 불러놓고 바야흐로 한민족에 의해 시작될 인류 평화를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하게 하였다.
4-4. 민족 복음화의 선행조건
한국 교회는 아시아 지역교회들 사이에서 아시아 복음화를 위한 삼중 대화를 선도할 역량을 보유한 교회로서 아시아 복음화의 가장 중요한 거점이라고 보편교회에서도 이구동성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니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그토록 한국교회에게 공을 들였던 숨은 이유가 아시아 복음화에 나서달라는 뜻이었는데, 원대한 이 목표를 위해 나서기 위한 채비로 교회를 쇄신하라는 뜻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가 그토록 절절했던 것이었다. 그리되면 우리 민족의 그토록 바라는 한반도 평화는 예수님 말씀대로(마태 6,25-34), 덤으로 주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깔고 있는 복음적 훈수였다. 따라서 “제삼천년기를 맞이한 한국교회의 새 복음화는 민족 복음화에만 초점을 맞추고 국내적 사목을 겨냥하는 데 머물 것이 아니라 거시적 안목으로 아시아 내지 인류 복음화를 자기 본연의 새 복음화 목표로 설정해야 할 것이다”(심상태).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교회에 촉구한 ‘기억의 지킴이와 희망의 지킴이’ 역할은 아시아 복음화를 위하여 선교적이면서도 복음적인 교회 쇄신을 단행할 것을 선행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여기에 이미 주어진 좋은 전범(典範)이 있으니 그것은 전국 사목회의 의안이다. 사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 시에 던진 메시지들은 이미 이 의안들 속에 하느님 백성의 소리를 담아 12개 주제별로 자리잡고 있었다.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맞이하여 열렸던 전국 사목회의(1981~1984)는 실로 예언자적인 움직임이었기에, 이 회의에서 4년 간 하느님 백성이 모여 숙고한 의안들이 선교 300년대를 지향하는 사목 향방 설정에 큰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막상 1995년에 출간된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에 일부 반영되었을 뿐 더 많고 커다란 제안 사항들은 까맣게 잊혀진 채로 사장되어 왔다. 그러다가 최근에 주교회의에서 12개 분야에 걸친 「전국사목회의 의안집」을 발간했는데, 이는 이 의안들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한국 현실에 맞추어 수렴한 값진 메시지들을 담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한국 교회가 진작부터 이 사목의안들을 숙고하여 적극적이고 전향적으로 수렴했었더라면,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당시에 주교단에게 보낸 쓴 소리 대신에 격려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전국 사목회의(1981~1984)도 2년 후에는 벌써 폐막된 지 40주년이 된다. 이 의안은 선교 3세기를 이미 한참 살아가고 있는 한국 교회를 위해서 아직 유효한 예언적 메시지이다. 한국교회에 주어지고 있는 섭리를 알아듣고 우리 교회가 이 예언적 메시지에 따라 교회를 쇄신하는 일이야말로 하느님께서 한반도 평화와 민족 복음화라는 선물을 주실 수 있는 값진 봉헌이 될 것이다. 아마 한국교회가 요한 바오로 2세와 프란치스코, 이 두 교황의 메시지를 잘 받아들여 아시아 복음화를 지향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사목의안을 통해 하느님 백성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복음화를 위한 교회 쇄신에 진지하게 나서게 된다면, 보편교회의 여망에 따라 교황청에서도 한국교회가 아시아 복음화 과업을 주도할 수 있도록 걸맞는 책임과 자율성을 허용하게 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전망하고자 한다. 그렇게 되면 조상제사금지령 발동과 해제 조치에 따른 '결자해지' 조치와 '지체된 정의'의 해소도 자연히 따라올 것이며, 평신도 사도직이 활성화됨으로써 아시아 복음화에 헌신할 선교사도 출현할 것이다.
첫댓글 청탁받은 원고라서 강론이지만 이 난에 올려 놓습니다. 내용은 '새 것'은 아니고 최근에 작성한 강론들에 담은 묵상과 사색이 중복된 '고물'입니다. 복음화, 그것도 민족들의 복음화라는 주제가 워낙 중요한 것이어서 평소의 지면보다 넉넉하길래 좀더 자세히 그러나 좀더 치밀하게 다듬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