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한글)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명칭(한자) 慶州 甘山寺 石造彌勒菩薩立像
문화재지정 국보
시대/연대 시대 통일신라 연대
719년(성덕왕18년,
당(唐) 현종(玄宗)
개원(開元)7년)
유형/재질 유형 불상명 재질 돌
크기 미륵보살상 광배 높이 189.4cm, 너비 107.6cm, 글자 폭 2.4cm
출토지
(구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내동면 신계리의 논밭(감산사지)
소재지
(구주소)
(한국)국립중앙박물관-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서체 행서
제작자 찬자 설총(薛聰) 서자 석경융(釋京融)과
김취원(金驟源)
각자 미상
개관
감산사미륵보살입상은 1916년에 경북 경주시 내동면(內東面) 신계리(薪溪里)
감산사터에서 아미타여래입상과 함께 일본인 학자가 발견한 것이다. 두 불상
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불상의 광배 뒷면에 불상을 만
든 경위를 자세하게 적은 글이 남아 있다. 이 글에 따르면, 미륵보살상은
719년(성덕왕 18) 김지성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 아울러 국왕과 당시 정치
실력자였던 개원(愷元) 및 자신의 가족, 모든 중생들의 복을 빌기 위하여 만
들었다고 한다. 김지성(金志誠)은 6두품으로 집사부시랑을 역임한 인물이다.
아미타여래상의 글을 지은 설총이 글을 지었던 것으로 보이고, 또 승려 경융
(京融)과 김취원(金驟源)이 글자를 새겼던 것으로 추정된다. 글의 내용은 6두
품 출신 김지성(金志誠)의 행적과 신앙, 그리고 8세기 통일신라의 불교사상
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나아가 이것과 아미타여래상은 만든 연대
를 알 수 있어 통일신라 불상 양식의 변천과정을 연구할 때 가장 중요한 기
준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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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개관
감산사 출토 두 불상은 광배(미륵보살상 높이 189.4cm 너비 107.6cm, 아미
타여래상 높이 206cm 너비 109.1cm)의 뒷면에 행서(글자 폭 2.4cm)로 그
조상기가 새겨져 있다. 두 불상은 현재 국립 중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그 수습 경위는 1916년 도변창(渡邊彰)과 말송웅언(末松熊彦)이 경주 지방
고적을 조사할 때 내동면(內東面) 신계리(薪溪里)의 논(감산사지)에 박혀 있
던 불상을 발견하여 경복궁으로 옮겼다. 그 해 3월 조선총독부에서 시정 5주
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열었을 때 총독부 안의 특설 미술관에 전시되었는
데 그후 이 미술관이 박물관으로 개칭되었다. 그리하여 해방 이후 지금까지
국립 중앙 박물관 불상실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조상기에 의하면 두 불상을 조성한 목적은 중아찬(重阿飡)인 김지성(金志誠)
[김지전(金志全)]이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의 명복을 빌고 아울러 국왕과
이찬 개원(愷元), 자신의 가족 그리고 일체 중생의 복을 빌기 위한 것이었다.
미륵보살상의 조성 연대는 719년(성덕왕 18), 아미타상은 720년(성덕왕 19)
으로 밝혀져 있다. 조상기의 찬자(撰者)는 아미타상에 나마(奈麻) 총(聰)으로
밝혀져 있어 설총으로 추정되며 글씨는 승려인 석경융(釋京融)과 대사(大舍)
인 김취원(金驟源)이 썼을 것으로 보이는데 행서체이다. 통일 초기의 금석문
들이 구양순체의 해서로 쓰여졌던 것과는 달리 이 조상기는 행서로 되어 있
다.
감산사의 미륵·아미타불상 두 조상기는 8세기 초 김지성이라는 6두품 출신
인물의 사상과 행적, 신라 법상종의 신앙을 알려주는 구체적인 자료이며, 동
시에 당시의 장법(葬法), 개인의 사원 건립과 불상 조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 금석학과 신라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두 불상 또한 미술사의 시대
양식 설정에 기준이 되는 중요 자료이다.
『삼국유사』(권3 탑상 남월산조(南月山條))에 요약 게재된 내용에는 금당주
(金堂主) 미륵상은 망비(亡妣)를 위하여, 미타상은 망고(亡考)를 위하여 조성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미륵상은 금당에 모셔지고 아미타상은 『아미타경』에
따라 강당에 모셔진 본존으로 추정되는데, 이러한 불상 봉안 방식은 법상종
사찰에 공통된 것으로 미륵과 아미타를 함께 받드는 신라 법상종의 신앙과
관련된 것이다. 이처럼 미륵보살상과 아미타상을 조성한 것은 발원자인 김지
성의 신앙과 사상에 의한 것이다.
김지성의 사상에 대하여는 불교·도교가 혼연 융화되어 신봉되었다거나 신라
사상의 유·불·도 3교일치 경향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하였으나 그 주류는 불
교 곧 『유가론(瑜伽論)』을 중심으로 하는 유식(唯識) 사상이라고 할 수 있
다.
아울러 이 두 불상은 직접 인도의 영향을 받고 수(隋)·당(唐)의 수법과 조화
시켜 7세기 중엽 ‘이상적 사실주의’라는 신라 특유의 불상 미술을 성립시킨
대표적인 예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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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단행본
(단행본)權悳永, 2002, 『韓國古代金石文綜合索引』, 학연문화사
(단행본)國史編纂委員會, 1995, 『韓國古代金石文資料集』Ⅲ, 國史編纂委員
會
(단행본)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1992,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 駕洛國史
蹟開發硏究院
(단행본)許興植, 1984, 『韓國金石全文』古代篇, 亞細亞文化社
(단행본)梁柱東, 1965, 『古歌硏究』, 一潮閣.
논문
(논문)南豊鉉, 1993, 「신라시대 이두문의 해독」『書誌學報』9, 한국서지학
회
(논문)金英美, 1988, 「聖德王代 專制王權에 대한 一考察-甘山寺 彌勒像 ·
阿彌陀像銘文과 관련하여-」『梨大史苑』22·23合, 이대 사학회
(논문)崔範勳, 1987, 「金石文에 나타난 吏讀硏究」『京畿大學校 論文集』21
(논문)齋藤忠, 1981, 「新羅の葬制から見た甘山寺跡石造阿彌陀如來像彌勒菩
薩像銘文の一解釋」『朝鮮學報』99 · 100, 朝鮮學會
(논문)文明大, 1974, 「新羅 法相宗(瑜伽宗)의 成立問題와 그 美術(上) -甘山
寺 彌勒菩薩像 및 阿彌陀佛像과 그 銘文을 中心으로-」『歷史學報』62
(논문)文明大, 1974, 「新羅 法相宗(瑜伽宗)의 成立問題와 그 美術(下) -甘山
寺 彌勒菩薩像 및 阿彌陀佛像과 그 銘文을 中心으로-」『歷史學報』63
(논문)鮎貝房之進, 1934, 「葛項寺塔記, 甘山寺彌勒菩薩阿彌陀如來光背記, 開
仙寺石燈記, 大安寺寂忽禪師照輪淸淨塔碑末記, 无盡寺鐘記, 上院寺鐘記, 石佛
光背記, 蓮池寺鐘記, 中初寺幢竿石柱記」『雜攷』6-上
(논문)末松保和, 1932, 「甘山寺彌勒尊像及び阿彌陀佛の火光後記」『朝鮮』
211 ; 1954, 『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 1995, 『新羅の政治と社會』
下, 吉川弘文館
관련금석문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조상기(甘山寺石造阿彌陀佛立像造像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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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독
판독자 김남윤
開元七年1)己未二月十五日2) 重阿飡3) 金志誠4)奉」
爲亡考仁章一吉飡5)亡妣觀肖里6)敬造甘7)」
山寺8) 一所9)石阿彌陀10)像一軀石彌勒11)像一軀」
盖聞至道玄微不生不滅能仁12)眞寂無去無來」
所以顯法應之三身13)隨機拯濟表天師之十號14)」
有願咸成弟子志誠生於聖世歷任榮班」
無智略以匡時僅免罹於刑憲15)性諧山水慕莊16)」
老17)之逍遙志重眞宗18)希無著19)
1) 719년, 성덕왕 18년.
2) 2월 15일은 석가모니의 열반일로 특별히 이 날을 기하여 불상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3) 중아찬: 아찬은 신라 제 6위의 관등으로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상한이며 대아찬으로 오를 수 없기 때문에 중아찬(重阿飡)에
서 사중아찬(四重阿飡)까지를 첨가 설치하였다. 그러므로 이 관등을 가진 사람들은 6두품이라고 볼 수 있다(변태섭, 1956 ).
『삼국유사』남월산조(南月山條)에는 찬(飡)자가 모두 식(喰)으로 되어있다.
4) 김지성: 감산사와 두 불상을 조성한 발원자이다. 아미타상 조상기에는 이름이 김지전(金志全)으로 되어 있으며 이것은 동일인
에 대한 한자 표기를 달리한 것이다.『삼국유사』에는 전망성(全忘誠)으로 되어 있다.
5) 일길찬: 신라 17관등 중 제 7위.
6) 감산사의 두 조상기에 나오는 여인의 이름은 끝에 里자가 붙어 있어 후대의 택호(宅號)처럼 생가(生家)의 이명(里名)을 칭한
것으로 추측된 바 있다(鮎貝房之進).
7) 감산사: 그 사지는 경북 경주 내동면 신계리에 있다.
8) 감산사: 그 사지는 경북 경주 내동면 신계리에 있다.
9) 불사(佛寺)의 수를 나타낸 말.
10) 아미타: 오랜 옛날 과거세에 세자재왕불의 감화를 받은 법장(法藏) 비구가 정토를 건설하기로 하여 48원(願)을 세우고 자기
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며 오랫동안 수행하여 성불하고 아미타불이 되었다. 아미타불을 신앙하는 정토교의 근본
경전으로 정토 3부경이 있다.
11) 미륵: 바라문의 가문에 태어나 석존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보살의 몸으로 천인
들을 교화하고 있으며, 먼 미래에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용화수 밑에서 성도하고 3회의 설법으로 석존의 교화에 빠진 모든 중
생을 제도한다고 하는 미래불. 당래보처보살(當來補處菩薩)이라고 하며 따로 미륵의 일을 설한 6부경이 있다. 또한 유식사상
관계 경론(經論)의 설주(說主)가 미륵보살로 되어있기 때문에 법상종에서는 미륵보살이 주불(主佛)로 신앙되고 금당에 모셔지
며, 법상종의 성행과 함께 신라 중대의 미륵에 대한 여러 신앙 사례들은 대체로 미륵상생신앙에 의한 것이다(김남윤). 아울러
원효·경흥 등의 미륵경에 대한 저술에서도 하생경보다 상생경이 중시되었다(안계현).
12) 능인: Śākya-muni의 한역(漢譯).
13) 三身: 불신(佛身)을 그 성질로 보아 셋으로 나누어 말하는데, 만유의 본체로 형상이 없는 이불(理佛)인 법신(法身), 인(因)에
따라 나타난 불신으로 원을 세워 수행한 결과로 부처가 된 아미타불과 같은 보신(報身), 역사적 존재인 석가모니와 같은 응
신(應身)을 말한다. 『최승왕경』에서는 법신·응신·화신을 들고『섭대승론』에서는 진신·보신·응신을 삼신으로 하는 등 여러
설이 있다.
14) 십호: 부처의 공덕상(功德相)을 나타내는 열가지 칭호이며 여래(如來)·응공(應共)·정편지(正遍知)·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
세간해(世間解)·무상사(無上士)·조어장부(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세존(佛世尊). 앞의 천사(天師)는 천(天)과 인(人)의 스승
인 천인사(天人師)를 약(略)한 칭호로 보인다.
15) 이 부분을 문명대는, 효소왕 9년 이찬 경영(慶永)의 모반 사건에 중시 순원(順元)이 연좌되어 파면당한 사건(『삼국사기』권
8 효소왕 9년)이 있었는데 순원은 이 비문에 나오는 개원과 밀접한 인척이고 김지성도 이들과 유대가 있었을 것이며 또한
모반 사건에 연루된 것을 표현한 것이라 추측하였다.
16) 장자(莊子)와 노자(老子).
17) 장자(莊子)와 노자(老子).
18) 眞宗: 구극의 진리를 설한 가르침. 다른 종교에 대하여 불교를 말할 때 또는 불교 각 종파에서 자신의 종파를 진종이라고
한다.
19) 무착(無著): Asaṅga(310~390), 무착(無着)이라고도 쓴다. 처음에 소승의 공관을 수행하다가 대승에 들어 큰 깨달음을 얻고
당시까지의 대승불교를 집성하고 유가유식학(瑜伽唯識學)을 확립한 인도의 논사(論師)이며 『섭대승론』 등 다수의 유식사상
논서(論書)를 저술하였다.『섭대승론』은 수나라 때 진제(眞諦)에 의해 번역 강의되어 널리 퍼졌으며, 원광·자장에 의해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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之玄寂年六十有」
七致王事於淸朝遂歸田於閒野披閱五20)」
千言之道德21)弃名位而入玄窮研十七地之法22)」
門23)壞色空而俱滅尋復降旌命於草廬典」
邇都之劇務雖在官而染俗塵外之心無捨罄」
志誠之資業建甘山之伽藍伏願以此微誠上」
資國主大王24)履千年之遐壽延萬福之鴻」
休愷元25) 伊飡26)公出有漏27)之囂埃28)證无生之妙果」
弟29) 良誠30) 小舍31)玄度師姉古巴里前妻古老里後」
妻阿好里兼庶兄32) 及漢33)一吉飡一憧薩飡34) 聰敬35)」
大舍36)妹首盻買里37)及无邊法界一切衆生同出」
六塵38)咸登十號縱使誠▨有盡此願无窮劫石39)」
巳消40)尊容不▨无求不果有願咸成如有順此」
心願者庶同營其41)善因也亡妣官肖里夫人」
年六十六古人成之東海欣支邊散之42)」
[출전:『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
에 도입 강의되었고, 현장(玄奘)의 신유식사상 수용 이후에도 원효·태현 등 여러 승려들이 그에 대한 주석서를 저술하여 7, 8
세기에 크게 성행한 것으로 보인다.
20) 『도덕경』을 말함. 노자(老子)의『도덕경』은 81장 5천여 자로 되어 있다.
21) 『도덕경』을 말함. 노자(老子)의『도덕경』은 81장 5천여 자로 되어 있다.
22)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을 말함. 요가(Yoga, 瑜伽)의 관행(觀行)을 닦는 경계를 17地로 나누어 설하였으며, 도솔천에 있
는 미륵이 설한 것을 듣고 무착(無著)이 편찬하였다 한다. 당(唐) 현장은 이 책의 완질을 구하기 위해 인도에 유학하였고 귀
국 후 새로 번역하여 법상종의 중요한 논서가 되었다.
23)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을 말함. 요가(Yoga, 瑜伽)의 관행(觀行)을 닦는 경계를 17地로 나누어 설하였으며, 도솔천에 있
는 미륵이 설한 것을 듣고 무착(無著)이 편찬하였다 한다. 당(唐) 현장은 이 책의 완질을 구하기 위해 인도에 유학하였고 귀
국 후 새로 번역하여 법상종의 중요한 논서가 되었다.
24) 성덕왕을 가리킴. 감산사를 건립한 719년이 성덕왕 18년이다.
25) 개원(愷元)은『삼국유사』권3 탑상 남월산조의 협주에 태종 춘추의 6자(子)이자 문희의 소생으로 나온다. 문명대(1974)는
문무왕 11년에 중시가 된 이찬 예원(禮元)과 동일인으로 추정하였다.
26) 이찬: 신라 17관등 중 제 1위.
27) 有漏: 번뇌. 무루(無漏)의 반대. 누(漏)는 누설한다는 뜻이며 사람의 6문(門)으로 누설하는 것 곧 번뇌.
28) 囂埃: 시끄럽고 귀찮은 세속의 일.
29)『삼국유사』에는 제(第)로 되어있다.
30) 양성(良誠)은『삼국유사』에 간성(懇誠)으로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 조상기」에는 양성(梁誠)으로 되어있다.
31) 小舍: 신라 17관등 중 13위이며 사지(舍之)라고도 한다.
32)『삼국유사』에는 족(族)으로 되어있다.
33)『삼국유사』에는 급막(及漠)으로 되어 있다.
34) 薩飡: 신라 17관등 중 8위이며 사찬(沙飡) 또는 사돌간(沙咄干)이라고도 한다.
35) 『삼국유사』에는 총민(聰敏)으로 되어 있다.
36) 大舍: 신라 17관등 중 12위이며 한사(韓舍)라고도 한다.
37) 『삼국유사』에는 수힐매(首肹買)로 리(里)자가 빠져 있다.
38) 육진(六塵): 육경(六境),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6경은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
根)을 통하여 몸 속에 들어가 정심(淨心)을 더럽히고 진성(眞性)을 흐리게 하므로 육진이라 한다.
39) 천인의 옷이 넓은 돌을 스쳐서 그것이 다 없어지는 기간이 1겁이라고 한다
40) 천인의 옷이 넓은 돌을 스쳐서 그것이 다 없어지는 기간이 1겁이라고 한다.
41) 『삼국유사』에는 자(玆)로 되어있다.
42) 이 부분은『삼국유사』에 “…東海攸友邊散也”로 되어 있다. 양주동의 『고가연구(古歌硏究)』에서는 “…東海攸反邊散也”로
보고 攸反은 ‘바외’로 訓讀되며 동해암변(東海岩邊)에 유골을 뿌렸다는 것으로 당시 불법(佛法)에 의한 화장(火葬)으로 보았다
(1965 證訂版, 일조각, 202쪽). 이러한 장법(葬法)에 대하여는 풍장(風葬)(葛城末治, 1935)으로, 또는 불교 사상에 근거한 ‘灰
身滅智’의 가장 극단적이고 신성한 장법으로 동해 영일 해변에서 행해진 산골(散骨) 풍습(齋藤忠)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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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독자 末松保和
開元七年己未二月十五日重阿飡金志誠奉」
爲 亡考仁章一吉飡亡妣觀肖里敬造甘」
山寺一所石阿彌陀像一軀石彌勒像一軀」
盖聞至道玄微不生不滅能仁眞寂無去無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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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塵咸登十號縱使誠▨有盡此願旡窮劫石」
已消尊容不▨旡求不果有願咸成如有順此」
心願者庶同營其善因也 亡妣官肖里夫人」
年六十六古人成之東海欣支邊散之」
[출전:『新羅史の諸問題』(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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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독자 문명대
開元七年己未二月十五日重阿飡金志誠奉」
爲亡考仁章一吉飡亡妣觀肖里敬造甘」
山寺一所石阿彌陀像一軀石彌勒像一軀」
盖聞至道玄微不生不滅能仁眞寂無去無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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門壞色空而俱滅尋復降旌命於草盧典」
彌都之劇務雖在官而染俗塵外之心無捨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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妻阿好里兼庶兄及漢一吉飡一憧薩飡聰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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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塵咸登十號縱使城▨有盡此願無窮劫石」
己消尊容不▨无求不果有願咸成如有順此」
心願者庶同營其善因也亡妣官肖里夫人」
年六十六古人成之東海欣支邊散之」
[출전:『韓國彫刻史』(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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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元七年己未二月十五日重阿飡金志誠奉」
爲 亡考仁章一吉飡亡妣觀肖里敬造甘」
山寺一所石阿彌陀像一軀石彌勒像一軀」
盖聞至道玄微不生不滅能仁眞寂無去無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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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舍妹首盻買里及旡邊法界一切衆生同出」
六塵咸登十號縱使誠▨有盡此願旡窮刧石」
己消尊容不▨旡求不果有願咸成如有順此」
心願者庶同營其善因也 亡妣官肖里夫人」
年六十六古人成之東海欣支邊散之」
[출전:『雜攷』6-上(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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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독자 朝鮮金石總覽
開元七年已未二月十五日重阿湌金志誠奉」
爲 亡考仁章一吉湌亡妣觀肖里敬造甘」
山寺一所石阿彌陁像一軀石彌勒像一軀」
盖聞至道玄微不生不滅能仁眞寂無去無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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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願咸成弟子志誠生於 聖世歷任榮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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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之逍遙志重眞宗希無著之玄寂年六十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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休愷元伊湌公出有漏之囂埃證旡生之妙果」
弟良誠小舍玄度師姉古巴里前妻古老里後」
妻阿好里兼庶兄及漢一吉湌一憧薩湌聰敬」
大舍妹首盻買里及旡邊法界一切衆生同出」
六塵咸登十號縱使誠▨有盡此願旡窮劫石」
已消尊容不▨旡求不果有願咸成如有順此」
心願者庶同營其善因也 亡妣官肖里夫人」
年六十六古人成之東海欣支邊散之」
[출전:『朝鮮金石總覽』(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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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독자 中吉功
開元七年己未二月十五日重阿飡金志誠奉」
為 亡考仁章一吉飡亡妣観肖里敬造甘」
山寺一所石阿弥陁像一躯石弥勒像一躯」
盖聞至道玄微不生不滅能仁真寂無去無来」
所以顕法応之三身隨機拯済表天師之十号」
有願咸成弟子志誠生於 聖世歷任栄班」
無智略以匡時僅免罹於刑憲性諧山水慕荘」
老之逍遙志重真宗希無著之玄寂年六十有」
七致 王事於淸朝遂帰田於閒野披閱五」
千言之道德弃名位而入玄竆研十七地之法」
門壞色空而俱滅尋復降 旌命於草廬典」
邇都之劇務雖在官而染俗塵外之心無捨罄」
志誠之資業建甘山之伽藍伏願以此微誠上」
資 國主大王履千年之遐寿延万福之鴻」
休愷元伊飡公出有漏之囂埃証旡生之妙果」
弟良誠小舍玄度師姉古巴里前妻古老里後」
妻阿好里兼庶兄及漢一吉飡一憧薩飡聰敬」
大舎妹首盻買里及旡辺法界一切衆生同出」
六塵咸登十号縱使誠▨有尽此願旡窮劫石」
已消尊容不亡旡求不果有願咸成如有順此」
心願者庶同営其善因也 亡妣官肖里夫人」
年六十六古人成之東海欣支辺散之」
[출전:『新羅高麗の佛像』(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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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독자 허흥식
開元七年已未二月十五日重阿湌金志誠奉」
爲 亡考仁章一吉湌亡妣觀肖里敬造甘」
山寺一所石阿彌陁像一軀石彌勒像一軀」
盖聞至道玄微不生不滅能仁眞寂無去無來」
所以顯法應之三身隨機拯濟表天師之十號」
有願咸成弟子志誠生於 聖世歷任榮班」
無智略以匡時僅免罹於刑憲性諧山水慕莊」
老之逍遙志重眞宗希無著之玄寂年六十有」
七致 王事於淸朝遂歸田於閒野披閱五」
千言之道德弃名位而入玄窮研十七地之法」
門壞色空而俱滅尋復降 旌命於草廬典」
邇都之劇務雖在官而染俗塵外之心無捨罄」
志誠之資業建甘山之伽藍伏願以此微誠上」
資 國主大王履千年之遐壽延萬福之鴻」
休愷元伊湌公出有漏之囂埃證无生之妙果」
弟良誠小舍玄度師姉古巴里前妻古老里後」
妻阿好里兼庶兄及漢一吉湌一憧薩湌聰敬」
大舍妹首盻買里及旡邊法界一切衆生同出」
六塵咸登十號縱使誠▨有盡此願无窮劫石」
已消尊容不▨无求不果有願咸成加有順此」
心願者庶同營其善因也 亡妣官肖里夫人」
年六十六古人成之東海欣支邊散之」
[출전:『韓國金石全文』古代篇(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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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
해석자 김남윤
개원 7년 기미 2월 15일 중아찬 김지성(金志誠)은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찬과 돌아
가신 어머니 관초리(觀肖里)를 위하여 감산사와 석조 아미타상 1구와 미륵상 1구를 삼가 조성
하였다.
듣건대 지극한 도는 그윽하고 미묘하여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니 능인(能仁)의 참된
자취는 가고 옴이 없다. 이런 까닭으로 현신·법신·응신의 삼신불은 근기에 따라 제도하여 천사
(天師)의 열가지 공덕상을 나타내었고 원(願)이 있으면 모두 이루었다.
제자 지성은 성세에 태어나 영화로운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지략이 없어 시폐를 바르게 하려다
가 겨우 형(刑)과 법에 걸리는 것을 면하였다. 성품은 산수를 좋아하여 장자(莊子)·노자(老子)
의 유유자적함을 사모하였고 뜻은 진종(眞宗)[불교]을 중히 여겨 무착(無著)의 그윽하고 적적
함을 희구하였다. 나이 67세에 조정에서 임금이 맡긴 일을 사퇴하고 드디어 한적한 전원에 돌
아가 오천 언의 『도덕경』을 들춰 보고 명예와 지위를 버리고 현묘한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
17지(地)의 유가법문을 깊이 연구하여 색(色)과 공(空)이 무너져 모두 민멸함을 알았다. 이윽고
다시 왕명을 초려에 내리니 멀리 도성의 바쁜 직무를 맡아 비록 관에 있으나 세속을 꺼리고
세간 밖에 둔 마음을 버리지 아니하여 지성의 자산과 업을 다하여 감산의 가람을 세웠다.
엎드려 바라건대 이 작은 정성이, 위로는 국주대왕께서 천년의 장수를 누리시고 만복이 널리
뻗치시며, 개원 이찬공은 번뇌의 세속사를 벗어나 태어남이 없는 묘과(妙果)를 증득하고, 동생
양성 소사, 현도사, 누나 고파리, 전처 고노리, 후처 아호리와 서형 급한 일길찬, 일동 살찬, 총
경 대사, 누이 수힐매리 그리고 끝없는 법계의 일체 중생에게 미쳐 함께 세속을 벗어나 다 부
처의 경지에 오르소서. 비록 정성스러운 ▨으로 하여 이 원(願)을 다하여 무궁한 겁에 돌이 이
미 닳아 없어지더라도 존용은 ▨하지 아니하여 구하면 과보를 얻지 아니함이 없고 원이 있으
면 다 이루어지기를. 만일 이 마음의 서원에 따름이 있다면 모두 함께 그 선인(善因)을 지었
다.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 부인은 나이 66세에 고인이 되어 동해 바윗가에 (유골을) 흩뿌렸다.
[출전:『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
............................................
............................................
명칭(한글)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
명칭(한자) 慶州 甘山寺 石造阿彌陀如來立像
문화재지정 국보
시대/연대 시대 통일신라 연대
720년(성덕왕19년,
당(唐) 현종(玄宗)
개원(開元)8년)
유형/재질 유형 불상명 재질 돌
크기 아미타여래상 광배 높이 206cm, 너비 109.1cm 글자 폭 2.4cm
출토지
(구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내동명 신계리의 논밭(감산사지)
소재지
(구주소)
(한국)국립중앙박물관-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서체 행서(行書)
제작자 찬자 설총(薛聰) 서자 석경융(釋京融)과
김취원(金驟源)
각자 미상
개관
감산사아미타여래상은 1916년에 경북 경주시 내동면(內東面) 신계리(薪溪里)
감산사터에서 미륵보상입상과 함께 일본인 학자가 발견한 것이다. 두 불상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불상의 광배 뒷면에 불상을 만든
경위를 자세하게 적은 글이 남아 있다. 이 글에 따르면, 아미타여래상은 720
년(성덕왕 19) 김지전(金志全)이 국왕과 당시 정치실력자였던 개원(愷元), 부
모 및 가족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김지전은 미륵보살입
상을 만든 김지성(金志誠)과 동일 인물이다. 그는 6두품으로 집사부시랑을
역임하다가 67세에 퇴임하였다. 글은 통일신라의 문장가로 유명한 설총이 지
었고, 글자는 승려 경융(京融)과 김취원(金驟源)이 새겼다. 글의 내용은 6두
품 출신 김지전(성)의 행적과 신앙, 그리고 8세기 통일신라의 불교사상을 연
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나아가 이것과 미륵보상입상은 만든 연대를 알
수 있어 통일신라 불상 양식의 변천과정을 연구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 자료
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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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개관
감산사 출토 두 불상은 광배(미륵보살상 높이 189.4cm 너비 107.6cm, 아미
타여래상 높이 206cm 너비 109.1cm)의 뒷면에 행서(글자 폭 2.4cm)로 그
조상기가 새겨져 있다. 두 불상은 현재 국립 중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그 수습 경위는 1916년 도변창(渡邊彰)과 말송웅언(末松熊彦)이 경주 지방
고적을 조사할 때 내동면(內東面) 신계리(薪溪里)의 논(감산사지)에 박혀 있
던 불상을 발견하여 경복궁으로 옮겼다. 그 해 3월 조선총독부에서 시정 5주
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열었을 때 총독부 안의 특설 미술관에 전시되었는
데 그후 이 미술관이 박물관으로 개칭되었다. 그리하여 해방 이후 지금까지
국립 중앙 박물관 불상실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조상기에 의하면 두 불상을 조성한 목적은 중아찬(重阿飡)인 김지성(金志誠)
[김지전(金志全)]이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의 명복을 빌고 아울러 국왕과
이찬 개원(愷元), 자신의 가족 그리고 일체 중생의 복을 빌기 위한 것이었다.
미륵보살상의 조성 연대는 719년(성덕왕 18), 아미타상은 720년(성덕왕 19)
으로 밝혀져 있다. 조상기의 찬자(撰者)는 아미타상에 나마(奈麻) 총(聰)으로
밝혀져 있어 설총으로 추정되며 글씨는 승려인 석경융(釋京融)과 대사(大舍)
인 김취원(金驟源)이 썼을 것으로 보이는데 행서체이다. 통일 초기의 금석문
들이 구양순체의 해서로 쓰여졌던 것과는 달리 이 조상기는 행서로 되어 있
다.
감산사의 미륵·아미타불상 두 조상기는 8세기 초 김지성이라는 6두품 출신
인물의 사상과 행적, 신라 법상종의 신앙을 알려주는 구체적인 자료이며, 동
시에 당시의 장법(葬法), 개인의 사원 건립과 불상 조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 금석학과 신라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두 불상 또한 미술사의 시대
양식 설정에 기준이 되는 중요 자료이다.
『삼국유사』(권3 탑상 남월산조(南月山條))에 요약 게재된 내용에는 금당주
(金堂主) 미륵상은 망비(亡妣)를 위하여, 미타상은 망고(亡考)를 위하여 조성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미륵상은 금당에 모셔지고 아미타상은 『아미타경』에
따라 강당에 모셔진 본존으로 추정되는데, 이러한 불상 봉안 방식은 법상종
사찰에 공통된 것으로 미륵과 아미타를 함께 받드는 신라 법상종의 신앙과
관련된 것이다. 이처럼 미륵보살상과 아미타상을 조성한 것은 발원자인 김지
성의 신앙과 사상에 의한 것이다.
김지성의 사상에 대하여는 불교·도교가 혼연 융화되어 신봉되었다거나 신라
사상의 유·불·도 3교일치 경향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하였으나 그 주류는 불
교 곧 『유가론(瑜伽論)』을 중심으로 하는 유식(唯識) 사상이라고 할 수 있
다.
아울러 이 두 불상은 직접 인도의 영향을 받고 수(隋)·당(唐)의 수법과 조화
시켜 7세기 중엽 ‘이상적 사실주의’라는 신라 특유의 불상 미술을 성립시킨
대표적인 예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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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단행본
(단행본)權悳永, 2002, 『韓國古代金石文綜合索引』, 학연문화사
(단행본)國史編纂委員會, 1995, 『韓國古代金石文資料集』Ⅲ, 國史編纂委員
會
(단행본)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1992,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 駕洛國史
蹟開發硏究院
(단행본)許興植, 1984, 『韓國金石全文』古代篇, 亞細亞文化社
논문
(논문)南豊鉉, 1993, 「신라시대 이두문의 해독」『書誌學報』9, 한국서지학
회
(논문)金英美, 1988, 「聖德王代 專制王權에 대한 一考察-甘山寺 彌勒像 ·
阿彌陀像銘文과 관련하여-」『梨大史苑』22·23合, 이대 사학회
(논문)崔範勳, 1987, 「金石文에 나타난 吏讀硏究」『京畿大學校 論文集』21
(논문)齋藤忠, 1981, 「新羅の葬制から見た甘山寺跡石造阿彌陀如來像彌勒菩
薩像銘文の一解釋」『朝鮮學報』99 · 100, 朝鮮學會
(논문)金理那, 1976, 「新羅甘山寺如來式佛像の衣文と日本佛像との關係」
『佛敎藝術』110
(논문)文明大, 1974, 「新羅 法相宗(瑜伽宗)의 成立問題와 그 美術(上) -甘山
寺 彌勒菩薩像 및 阿彌陀佛像과 그 銘文을 中心으로-」『歷史學報』62
(논문)文明大, 1974, 「新羅 法相宗(瑜伽宗)의 成立問題와 그 美術(下) -甘山
寺 彌勒菩薩像 및 阿彌陀佛像과 그 銘文을 中心으로-」『歷史學報』63
(논문)鮎貝房之進, 1934, 「葛項寺塔記, 甘山寺彌勒菩薩阿彌陀如來光背記, 開
仙寺石燈記, 大安寺寂忽禪師照輪淸淨塔碑末記, 无盡寺鐘記, 上院寺鐘記, 石佛
光背記, 蓮池寺鐘記, 中初寺幢竿石柱記」『雜攷』6-上
(논문)末松保和, 1932, 「甘山寺彌勒尊像及び阿彌陀佛の火光後記」『朝鮮』
211 ; 1954, 『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 1995, 『新羅の政治と社會』
下, 吉川弘文館
관련금석문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조상기(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造像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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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독
판독자 김남윤
若夫至道者不生不滅猶表跡於周宵1)能仁者若去若」
來尙流形於漢夢2)濫觴肇自西域傳燈3)及至東土遂乃」
佛日之影奄日域以照臨貝葉之文4)越浿川5)而啓發龍6)」
宮7)錯峙鴈塔8)駢羅舍衛9)之境在斯極樂10)之邦密爾有重」
阿飡金志全誕靈河岳降德星辰性叶雲霞情友山水」
蘊賢材而命代懷智略以佐時朝鳳闕而銜綸則授尙11)」
舍12)奉御逡雞林而曳綬則任執事侍郞13)年六十七懸車14)」
致仕避世閑居侔四皓15)之高尙辭榮養性同兩疎16)之見」
機仰慕無著眞宗時時讀瑜伽之論兼愛莊周17)玄道日」
日覽逍遙之篇18)以爲報德慈親莫如十號之力酬恩」
1) 周宵: 석가의 탄생 연대를 가리킴.『해동고승전』의연조에는 고구려승 의연(義淵)이 북제(北齊)의 법상(法上)에게 석가의 탄
생·출가·성도의 연시를 질문하여 불탄일은 ‘희주(姬周) 26년’(서기전 1027년)이라는 답을 들었다. 신라에서도 이 연대를 사용
했으리라 여겨지며 현재 우리 나라에서 사용되는 불탄 연대와도 같다. 석가의 탄생 입멸 연대에 대하여는 몇가지 설이 있는
데 이것은 법림(法琳)이 확정한『주서이기(周書異記)』에 의거한 북방설(서기전 1027년 탄생, 949년 입멸)이다.
2) 서기 67년 후한(後漢) 명제(明帝)가 꿈에 정수리에서 광채를 발하는 금인(金人)을 보고 인도에 사신을 파견하여 가섭마등(迦
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의 두 고승을 청해 와서 중국에 불교를 처음으로 받아들인 일(『후한기』·『후한서』 등).
3) 燈: 법등(法燈). 세상의 어두운 마음을 밝히는 등불과 같다는 뜻으로 불법(佛法)을 말함.
4) 불경을 말함. 패엽(Pattra, 패다라(貝多羅)·패다(貝多))은 인도에서 종이 대신 글자를 적는데 사용된 다라(多羅) 나무의 잎을
말한다.
5) 패수(浿水), 곧 신라의 삼국 통일 후 국경지대가 된 대동강을 말함.
6) 용궁: 불전에 용왕은 권속을 거느리고 바다나 호수 밑에 칠보(七寶)로 만들어진 궁전에 살고 있다고 한다. 『용수보살전』에
는 용수(龍樹)가 용궁에 가서 대승경전을 받아왔다고 전해지며 용궁에 모든 경전이 수장되어 있다는 설화가 있다. 여기서는
절을 가리키는 것 같다.
7) 용궁: 불전에 용왕은 권속을 거느리고 바다나 호수 밑에 칠보(七寶)로 만들어진 궁전에 살고 있다고 한다. 『용수보살전』에
는 용수(龍樹)가 용궁에 가서 대승경전을 받아왔다고 전해지며 용궁에 모든 경전이 수장되어 있다는 설화가 있다. 여기서는
절을 가리키는 것 같다.
8) 鴈塔: 안탑(雁塔), 일반적으로 탑을 가리킨다. 범어로 Haṃsa-stūpa이며 선사탑(亙娑塔)이라 음역된다. 인도에 있는 탑으로
보살이 승려를 인도하기 위해 기러기가 되어 날다 공중에서 떨어져 죽은 유적이라 한다.
9) 舍衛: Śrāvastī. 중인도 코오살라국의 도성으로 석가모니 생존시에 불교를 후원한 파사익왕, 유리왕이 살았으며 성 남쪽에 기
원정사가 있다.
10) 극락: 이 사바세계에서 서쪽으로 10만억 불토를 지난 곳에 있다는 아미타불의 정토. 아미타불의 전신인 법장(法藏) 비구의
이상이 실현된 곳으로 아미타불이 항상 설법하고 있으며 모든 일이 다 갖추어져 즐거움만 있는 자유롭고 안락한 이상향. 안
양(安養)·안락(安樂)·안온(安穩)·묘락(妙樂) 등으로도 쓰인다.
11) 尙舍: 궁중에서 음식·의복 등을 관장하는 직책. 이 부분은 『삼국유사』에 “曾以尙衣奉御”로 되어 있다.
12) 尙舍: 궁중에서 음식·의복 등을 관장하는 직책. 이 부분은 『삼국유사』에 “曾以尙衣奉御”로 되어 있다.
13) 집사시랑: 집사성(執事省)의 차관급 관리. 집사성은 국가 기밀과 서정을 맡은 최고의 행정기관으로, 진덕여왕 5년 품주(稟
主)를 개편한 것이며 그 장은 중시(中侍)이고 그 밑에 전대등(典大等) 2인을 두었다가 경덕왕 때(747년) 시랑(侍郞)으로 고쳤
다고 되어 있다(『삼국사기』권38 잡지 7 직관 상). 따라서 집사시랑의 관직명은 김지성의 생존 기간과는 맞지 않으며 김지
성이 719년 불상을 조성하기 시작한 얼마 후 돌아가고 30여년 뒤(747년 이후) 아미타상이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불상 양
식으로 보아도 719년경의 미륵상보다 얼마간 시대가 떨어지는 것이라 한다(문명대).
14) 현거: 현조기거(懸釣其車)의 준말로 벼슬을 버리고 낚싯대를 수레에 매달고 한가롭게 산다는 뜻.
15) 四皓: 한(漢) 고조 때 상산(商山)에 숨은 네 노인. 동원공(東園公)·기이계(綺里季)·하황공(夏黃公)·녹리(甪里)선생을 말하며 수
염과 눈썹이 모두 희다고 하여 호(皓)라 하였다.
16) 兩疎: 양소(兩疏)가 맞다. 곧 소광(疏廣)과 소수(疏受)를 말하는데, 이들은 숙질간으로 한(漢) 선제(宣帝; 재위기간 서기전
73~49) 때 족함을 알고 벼슬에서 물러나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17) 莊周: 장자의 본이름.
18) 『장자』의 「소요유(逍遙遊)」편. 한가로이 벗어나 구애받지 않고 편안히 자적한다는 뜻에서 취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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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主無過三寶19)之因20)故奉爲國主大王伊飡愷」
元公亡考亡妣亡弟小舍梁誠沙門玄度亡妻古路」
里亡妹古寶里又爲妻阿好里等捨其甘山莊田21)建此」
伽藍仍造石阿彌陀22)像一軀伏願託此微因超昇」
彼岸四生23) 六道24)並證菩提25)」
開元七年歲在己未二月十五日奈麻聰26)」
撰奉敎沙門釋京融大舍金驟源▨▨▨」
亡考仁章一吉飡年卌七古人成之東海」
欣支邊散也後代追愛人者此善助在哉」
金志全重阿飡敬生已前此善業造歲▨27)」
十九28)庚申年四月廿二日長逝爲▨之」
[출전:『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
19) 삼보: 불교의 교주인 불(佛), 그 가르침인 법(法), 그것을 받드는 사람들의 집단인 승(僧)의 세 가지를 보(寶)에 비유한 것.
20) 이 부분은 부모와 임금에 대한 불교적 보은의 관념을 보여준다. 신라에서는 불국토 사상에 따라 국가를 진호하는 데는 불력
(佛力)에 의지해야 하고, 효(孝)는 부모로 하여금 삼보를 믿게 하여 성불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공덕이라는 사상이 널리 퍼
져 있었다고 한다(안계현).
21) 甘山莊田: 감산 일대의 토지와 부속된 건물. 왕실 귀족 사원이 소유한 대규모의 토지와 그 경영에 필요한 부속건물을 포함
하여 전장(田莊)이라고 하는데 장전(莊田)도 같은 의미로 보인다.
22) 유가유식사상과 아미타신앙의 관계는 유가파의 중요 논서인『섭대승론』·『유가론』 등에 아미타사상이 정연하게 논술되어
있고, 아미타사상을 논할 때 이 양론이 많이 인용되었다고 한다. 특히 원효의 미타정토사상 저술에는『무량수경』다음으로
『유가론』이 많이 인용되어 있다고 한다(안계현).
23) 四生: 생물이 나는 네 가지 방법, 곧 태생(胎生)·난생(卵生)·습생(濕生)·화생(化生).
24) 六道: 중생이 업(業)과 인(因)에 따라 윤회하는 여섯가지 길.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도.
25) 菩提: Bodhi의 음역이며 각(覺)이라 번역된다. 불교 최고의 이상인 정각(正覺)의 지혜 곧 불과(佛果) 또는 그것을 얻기 위하
여 닦는 도(道)를 말하며 우리나라에서는 보리로 읽는다.
26) 설총(薛聰)으로 비정됨(葛城末治).
27) 세재십구(歲在十九)로 보면(문명대) 성덕왕 19년(720) 경신이 된다. 말송보화(末松保和)는 세육십구(歲六十九)로 보아 김지
성이 69세에 사망한 것으로 하여 생몰년을 652~720년으로 추정하였다.
28) 세재십구(歲在十九)로 보면(문명대) 성덕왕 19년(720) 경신이 된다. 말송보화(末松保和)는 세육십구(歲六十九)로 보아 김지
성이 69세에 사망한 것으로 하여 생몰년을 652~720년으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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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독자 末松保和
若夫至道者不生不滅猶表跡於周宵能仁者若去若」
來尙流形於漢夢濫觴肇自西域傳燈及至東土遂乃」
佛日之影奄日域以照臨貝葉之文越浿川而啓發龍」
宮錯峙鴈塔駢羅舍衞之境在斯極樂之邦密爾有重」
阿飡金志全誕靈河岳降德星辰性叶雲霞情友山水」
蘊賢材而命代懷智略以佐時朝鳯闕而銜綸則授尙」
舍奉御逡雞林而曳綬則任執事侍郞年六十七懸車」
致仕避世閑居侔四皓之高尙辭榮養性同兩踈之見」
機仰慕無著眞宗時時讀瑜伽之論兼愛莊周玄道日」
日覽逍遙之篇以爲報德慈親莫如十號之力酬恩」
聖主無過三寶之因故奉爲 國主大王伊飡愷」
元公 亡考亡妣亡弟小舍梁誠沙門玄度亡妻古路」
里亡妹古寶里又爲妻阿好里等捨其甘山莊田建此」
伽藍仍造石阿彌陁像一軀 伏願託此微因超昇」
彼岸四生六道並證菩提」
開元七年歲在己未二月十五日奈麻聰」
撰奉敎沙門釋京融大舍金驟源▨▨▨」
亡考仁章一吉飡年卅七古人成之東海」
欣支邊散也後代追愛人者此善助在哉」
金志全重阿飡敬生已前此善業造歲六」
十九庚申年四月廿二日長逝爲▨之」
[출전:『新羅史の諸問題』(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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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독자 문명대
若大至道者不生不滅猶表跡於周宵能仁者若去若」
來尙流形於漢蒙濫觴肈自西域傳燈及至東土遂乃」
佛日之影奄日域以照貝葉之文越浿川而啓發龍」
宮錯峙鴈塔駢羅舍衛之境在斯極樂之邦密爾有重」
阿飡金志全誕靈阿岳降德星辰性叶雲霞情友山水」
蘊賢材而命代懷智略以佐時朝鳯闕而銜綸則授尙」
舍奉御逡雞林而曳綬則任執事侍郞年六十七懸車」
致仕避世閑居牟四皓之高尙辭榮養性同兩疎之見」
機仰慕無著眞宗時時讀瑜伽之論兼愛莊周玄度日」
日覽逍遙之篇以爲報德慈親莫如十號之力酬恩」
聖主無過三寶之因故奉爲國主大王伊飡愷」
元公亡考亡妣亡弟小舍梁誠沙門玄道亡妻古路」
里亡姉古寶里又爲妻阿好里等捨其甘山莊田建此」
伽藍仍造石阿彌陀像一軀伏願託此微田因超昇」
彼岸四生六道並證菩提」
開元七年歲在己未二月十五日奈麻聰」
撰奉敎沙門釋京融大舍金驟源▨▨▨」
亡考仁章一吉飡年冊七古人成之東海」
欣支邊散也後代追愛人者此善助在哉」
金志全重阿飡敬生已前此善業造歲▨」
十九庚申年四月廿二日長逝爲▨之」
[출전:『韓國彫刻史』(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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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독자 齋藤忠
若夫至道者不生不滅猶表跡於周宵能仁者若去若」
來尙流形於漢夢濫觴肇自西域傳燈及至東土遂乃」
佛日之影奄日域以照臨貝葉之文越浿川而啓發龍」
宮錯峙鴈塔駢羅舍衞之境在斯極樂之邦密爾有重」
阿湌金志全誕靈河岳降德星辰性叶雲霞情友山水」
蘊賢材而命代懷智略以佐時朝鳯闕而銜綸則授尙」
舍奉御逡雞林而曳綬則任執事侍郞年六十七懸車」
致仕避世閑居侔四皓之高尙辭榮養性同兩踈之見」
機仰慕無著眞宗時時讀瑜伽之論兼愛莊周玄道日」
日覽逍遙之篇以爲報德慈親莫如十號之力酬恩」
聖主無過三寶之因故奉爲國主大王伊湌愷」
元公 亡考亡妣亡弟小舍梁誠沙門玄度亡妻古路」
里亡妹古寶里又爲妻阿好里等捨其甘山莊田建此」
伽藍仍造石阿彌陀像一軀 伏願託此微因超昇」
彼岸四生六道並證菩提」
開元七年歲在己未二月十五日奈麻聰」
撰奉敎沙門釋京融大舍金驟源▨▨▨」
亡考仁章一吉湌年卌七古人成之東海」
欣支邊散也後代追愛人者此善助在哉」
金志全重阿湌敬生已前此善業造歲▨」
十九庚申年四月廿二日長逝爲▨之」
[출전:『古代朝鮮日本金石文資料集成』(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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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독자 鮎貝房之進
若夫至道者不生不滅猶表跡於周宵能仁者若去若」
來尙流形於漢夢濫觴肇自西域傳燈及至東土遂乃」
佛日之影奄日域以照臨貝葉之文越浿川而啓發龍」
宮錯峙鴈塔駢羅舍衞之境在斯極樂之邦密爾有重」
阿湌金志全誕靈河岳降德星辰性叶雲霞情友山水」
薀賢材而命代懷智略以佐時朝鳳闕而銜綸則授尙」
舍奉御逡雞林而曳綬則任執事侍郞年六十七懸車」
致仕避世閑居侔四皓之高尙辭榮養性同兩踈之見」
機仰慕無著眞宗時時讀瑜伽之論兼愛莊周玄道日」
日覽逍遙之篇以爲報德慈親莫如十號之力酬恩」
聖主無過三寶之因故奉爲 國主大王伊飡愷」
元公 亡考亡妣亡弟小舍梁誠沙門玄度亡妻古路」
里亡妹古寶里又爲妻阿好里等捨其甘山莊田建此」
伽藍仍造石阿彌陀像一軀 伏願託此微因超昇」
彼岸四生六道並菩提」
開元七年歲在己未二月十五日奈麻聰」
撰奉敎沙門釋京融大舍金驟源▨▨▨」
亡考仁章一吉飡年卌七古人成之東海」
欣支邊散也後代追愛人者此善助在哉」
金志全重阿飡敬生己前此善業造歲▨」
十九庚申年四月廿二日長逝爲▨之」
[출전:『雜攷』6-上(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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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독자 朝鮮金石總覽
若夫至道者不生不滅猶表跡於周宵能仁者若去若」
來尙流形於漢夢濫觴肇自西域傳燈及至東土遂乃」
佛日之影奄日域以照臨貝葉之文越浿川而啓發龍」
宮錯峙鴈塔駢羅舍衞之境在斯極樂之邦密爾有重」
阿湌金志全誕靈河岳降德星辰性叶雲霞情友山水」
蘊賢材而命代懷智略以佐時朝鳯闕而銜綸則授尙」
舍奉御逡雞林而曳綬則任執事侍郞年六十七懸車」
致仕避世閑居侔四皓之高尙辭榮養性同兩踈之見」
機仰慕無著眞宗時時讀瑜伽之論兼愛莊周玄道日」
日覽逍遙之篇以爲報德慈親莫如十號之力酬恩」
聖主無過三寶之因故奉爲 國主大王伊湌愷」
元公 亡考亡妣亡弟小舍梁誠沙門玄度亡妻古路」
里亡妹古寶里又爲妻阿好里等捨其甘山莊田建此」
伽藍仍造石阿彌陁像一軀 伏願託此微因超昇」
彼岸四生六道並證菩提」
開元七年歲在己未二月十五日奈麻聰」
撰奉敎沙門釋京融大舍金驟源▨▨▨」
亡考仁章一吉湌年卌七古人成之東海」
欣支邊散也後代追愛人者此善助在哉」
金志全重阿湌敬生已前此善業造歲▨」
十九庚申年四月廿二日長逝爲▨之」
[출전:『朝鮮金石總覽』(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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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독자 中吉功
若夫至道者不生不滅猶表跡於周宵能仁者若去若」
来尙流形於漢夢濫觴肇自西域伝燈及至東土遂乃」
仏日之影奄日域以照臨貝葉之文越浿川而啓発竜」
宮錯峙雁塔駢羅舍衛之境在斯極楽之邦密爾有重」
阿飡金志全誕霊河岳降德星辰性叶雲霞情友山水」
蘊賢材而命代懷智略以佐時朝鳯闕而銜綸則授尚」
舍奉御逡雞林而曳綬則任執事侍郞年六十七懸車」
致仕避世閑居侔四皓之高尚辭栄養性同兩踈之見」
機仰慕無著真宗時時読瑜伽之論兼愛荘周玄道日」
日覽逍遙之篇以為報德慈親莫如十号之力酬恩」
聖主無過三寶之因故奉為 国主大王伊飡愷」
元公 亡考亡妣亡弟小舍梁誠沙門玄度亡妻古路」
里亡妹古宝里又為妻阿好里等捨其甘山荘田建此」
伽藍仍造石阿弥陁像一躯 伏願託此微因超昇」
彼岸四生六道並証菩提」
開元七年歲在己未二月十五日奈麻聡」
撰奉敎沙門釈京融大舍金驟源▨▨▨」
亡考仁章一吉飡年卅七古人成之東海」
欣支辺散也後代追愛人者此善助在哉」
金志全重阿飡敬生已前此善業造歲▨」
十九庚申年四月廿二日長逝為▨之」
[출전:『新羅高麗の佛像』(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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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독자 허흥식
若夫至道者不生不滅猶表跡於周宵能仁者若去若」
來尙流形於漢夢濫觴肇自西域傳燈及至東土遂乃」
佛日之影奄日域以照臨貝葉之文越浿川而啓發龍」
宮錯峙鴈塔駢羅舍衞之境在斯極樂之邦密爾有重」
阿湌金志全誕靈河岳降德星辰性叶雲霞情友山水」
蘊賢材而命代懷智略以佐時朝鳯闕而銜綸則授尙」
舍奉御逡雞林而曳綬則任執事侍郞年六十七懸車」
致仕避世閑居侔四皓之高尙辭榮養性同兩踈之見」
機仰慕無著眞宗時時讀瑜伽之論兼愛莊周玄道日」
日覽逍遙之篇以爲報德慈親莫如十號之力酬恩」
聖主無過三寶之因故奉爲 國主大王伊湌愷」
元公 亡考亡妣亡弟小舍梁誠沙門玄度亡妻古路」
里亡妹古寶里又爲妻阿好里等捨其甘山莊田建此」
伽藍仍造石阿彌陁像一軀 伏願託此微因超昇」
彼岸四生六道並證菩提」
開元七年歲在己未二月十五日奈麻聰」
撰奉敎沙門釋京融大舍金驟源▨▨▨」
亡考仁章一吉湌年卌七古人成之東海」
欣支邊散也後代追愛人者此善助在哉」
金志全重阿湌敬生已前此善業造歲▨」
十九庚申年四月廿二日長逝爲▨之」
[출전:『韓國金石全文』古代篇(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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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
해석자 김남윤
무릇 지극한 도란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것이나 오히려 주(周)나라 때 자취를 드러내었
고 능인(能仁)은 가고 옴이 있어 일찍이 한(漢) 명제(明帝)의 꿈에 모습이 보여 남상(濫觴)이
되어 비로소 서역으로부터 법등을 전하여 동방에 이르렀다. 드디어 이에 불일(佛日)의 그림자
가 해가 뜨는 땅을 가리워 비추었고 패엽(貝葉)에 기록된 경문은 패수(浿水)를 넘어와 (동방을)
계발하였다. 용궁같은 절이 우뚝우뚝 솟고 기러기처럼 탑이 벌려져 있어 사위성(舍衛城)의 경
계가 여기에 있고 극락과도 같이 빽빽하였다.
중아찬 김지전(金志全)은 신령스러운 산천의 정기로 탄생하여 성진(星辰)이 내린 덕을 받아 성
품은 구름과 노을에 맞고 정은 산수와 벗하였다. 현명한 자질을 갖추어 명(命)을 이어서 받았
고 지략을 품어서 시정을 보좌하니 대궐에 나아가 경륜을 쌓아 곧 상사(尙舍)를 제수하여 어명
을 받들었고 계림에 뛰어나 관인(官印)을 끌고 집사시랑을 맡았다. 나이 67세에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세간을 피하고 한적한 곳에 거처하니 사호(四皓)의 고상함과 같았고 영화를 버리고 성
품을 기르니 양소(兩疏)가 물러날 때를 안 것과 같았다. 무착(無著)의 진종(眞宗)을 우러러 사
모하여 때때로『유가론』을 읽고 겸하여 장주(莊周)의 그윽한 도를 사랑하여 날마다 「소요편」
을 열람하고, 자애로운 부모 은덕에 보답함은 부처님의 힘 만한 것이 없으며 성스러운 임금의
은혜에 보답함은 삼보의 인을 넘는 것이 없다고 여기었다.
그러므로 국주대왕과 이찬 개원공, 망고, 망비, 망제 소사 양성, 사문 현도, 망처 고로리, 망매
고보리 또 처 아호리 등을 위하여 그의 감산장전을 희사하여 이 가람을 세웠다. 이에 석조 아
미타상 1구를 조성하니 엎드려 바라건대 이 작은 인연이 피안에까지 넘어가 사생 육도의 중생
모두 보리를 증득하소서.
개원 7년 기미 2월 15일 내마 총(聰)이 교를 받들어 지었고 사문 석경융(釋京融) 대사 김취원
(金驟源) ▨▨▨ … (교를 받들어 썼다).
망고 인장 일길찬은 나이 47세에 고인이 되어 동해 바윗가에 (유골을) 흩뿌렸다. 후대에 추모
하고 그리워하는 자는 이 선업의 도움이 있으리라. 김지전 중아찬은 삼가 생전에 이 선업을 만
들었으며, ▨ (69세인) 경신년 4월 22일 서거하여 ▨ 하였다.
[출전:『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