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 - Cantata 'Ach Gott, wie manches Herzeleid' BWV3
바흐 - 칸타타 3번 ‘아 하나님, 지금 내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요' BWV3
Johann Sebastian Bach [1685 ~1750]
Gächinger Kantorei
Bach-Collegium Stuttgart
HELMUTH RILLING
1. Coro: Ach Gott, wie manches Herzeleid
2. Recitativo e Choral (T, A, S, B): Wie schwerlich läßt sich Fleisch und Blut
3. Aria (B): Empfind ich Höllenangst und Pein
4. Recitativo (T): Es mag mir Leib und Geist verschmachten
5. Aria (Duetto S, A): Wenn Sorgen auf mich dringen
6. Choral: Erhalt mein Herz im Glauben
바흐와 칸타타(Cantata)
음악에 있어 바로크 시대의 정점은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와 헨델(George Frideric Handel, 1685~1759)이었다고 할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독일 개신교에 근간을 두고 있지만 작품에 있어서는 서로 매우 다른 길을 걸었다. 바흐의 음악은 성악과 기악을 막론하고 교회 음악에 치중하여, 성악과 기악을 위한 교회칸타타, 오르간 독주로 대표되는 기악 교회 음악 등을 많이 작곡했다. 바흐의 수난곡은 독일 수난곡의 전통 을 절정으로 이끌었다. 헨델은 좀 더 국제적인 성향을 가졌던 작곡가로, 처 음에는 이탈리아에서 인기를 얻으며 활동했고, 이후에는 영국으로 가 헨리 퍼셀(Henry Purcell, 1659-1695)사후의 공백을 메우며 흥행 작곡가로서 의 입지를 굳혔다.서양음악의 기초가 된 바흐의 음악은 이 시대의 거의 모든 음악에 그의 음악기법이 반영되고 있다. 바흐는 독일의 전통적인 음악양식 아래에서 성 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 생애의 음악 경력으로 볼 때 그는 오페라를 제 외한 독일의 모든 주요한 양식, 형식과 장르를 포용했을 뿐 아니라 프랑스 나 이탈리아와 같은 새로운 음악양식을 받아들여 이들을 혼합하고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바흐는 평생 프로테스탄트적 신앙생활을 하며 열정적인 교회음악 활동으로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고 특히 루터파 교회음악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특히 라이프치히에서 ‘음악감독인 ‘칸토르(cantor))로 활동하면서 교회음악 작곡에 많은 힘을 쏟았는데 그 중 대부분이 칸타타이다. 약 300여 곡의 칸타타를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는 약 200여 곡 만 이 전해져 오고 있다. 그 중 대부분의 칸타타는 한 달에 한 곡 혹은 두 곡을 연주할 의무로 작곡되었다. 그러나 의무로 만들어진 곡임에도 불구하고 바흐의 풍부한 창의성과 다양성, 뛰어난 기교가 절실히 드러나고 있다. 바흐의 업적이 한 시대의 음악양식을 완성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크 시대의 음악을 뛰어 넘어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으로 이어지는 고전악파로의 연결 역할을 해주었다. 이러한 신앙적인 측면과 음악적인 측면 이 하나가 되어 표현되는 바흐의 칸타타를 통해 시대를 주도하는 그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바흐가 죽은 지 3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의 음악은 널리 연주 되고 있으며 많은 후배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바흐는 한 작품을 쓰기 위해 보통 일주일 정도를 필요로 했는데, 이러한 빠른 속도의 작곡을 통해 우리는 그의 천재성을 엿 볼 수가 있으며, 그의 일상적 작곡활동까지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바흐의 칸타타들에서 그의 강직성과 신앙성이 눈에 띈다. 비교해 보자면, 가령 텔레만의 경우에는 주어진 테마를 교묘하게 처리해 가는 손재주가 종종 느껴지는데 반해 바흐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점을 전혀 느낄 수 없다. 비록 바흐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생 동안 작곡에 매여 살았지만 그 는 이 임무에 시종일관 성실히 임했으며,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작업을 통해 언제나 창작에의 지극한 기쁨을 느꼈다는 점이다. 그의 천재성은 속박 아래에서도 늘 번득였으며 ‘아름다운 작품’을 스스로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이 점은 바흐가 자신의 많은 작품들을 일일이 다시 손질하는 면밀함을 통 해 가장 잘 증명될 수 있다. 그는 어떤 작품이라도 좀 더 치밀하고 완전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그리고 음언어의 정확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바흐는 300곡 이상의 칸타타들을 지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현재 남아있는 바흐의 칸타타들은 200곡 정도로 알려져 있고, 카페하우스에서 연주한 세속 칸타타들도 24개를 작곡하였으나 상당수가 유실되었다. 그의 칸타타들이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초기 뮐하우젠 시대로부터 후기 라이프치히 시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칸타타가 지속적으로 작곡되어 오르간 곡과 함께 그 발전사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베토벤에게 현악사중주가 중요하듯이 바흐에게는 칸타타가 중요하다.
l. 교회 칸타타
바흐는 그 생애를 통하여 수많은 칸타타를 작곡하였다. 교회 칸타타는 바흐가 악장으로 일한 교회의 예배를 위하여 주로 작곡되었다.바흐는 라이프치히 교회 재직 당시만 해도 적어도 5년 동안은 매주일의 예배와 기타 성일(聖日) 에 필요한 칸타타를 새로이 작곡하였다. 라이프치히 교회는 전체적으로 매년 58곡의 칸타타를 필요로 하였고, 거기에 덧붙여서 성금요일을 위한 수난곡과 연 3회의 대 축제일의 저녁예배(Vespers)를 위한 마그니피카트, 시위회의 취 임식을 위한 연례적인 1곡의 칸타타, 그리고 칸토르가 특별하게 급료를 받는 장례식을 위한 모테트나 결혼식을 위한 칸타타 같은 특별한 경우의 음악이 추가되었다. 바흐는 스스로 교회 예배용의 작품을 되도록 많이 만들려고 애썼으나, 처음 몇 년 동안 그는 주당 칸타타 1곡 정도를 썼다. 현존하는 그의 칸타타는 200곡 정도이다. 그가 작곡한 교회 칸타타의 25%정도가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며, 세속 칸타타의 경우는 현존하는 작품보다 유실된 것이 많다. 바흐의 칸타타는 그의 활동시기에 따라 뮐하우젠(1707∼1708), 바이마르 (1708∼1717), 쾨텐(1717∼1723), 라이프치히(1723∼1750)로 분류할 수 있다,
교회 칸타타는 성서에서 취한 가사, 코랄의 가 사, 자신의 독창적인 가사 등을 독립적으로 사용하거나 혼합하여 사용하고 있다. 코랄은 칸타타의 마지막 악장에서 반드시 사용하고 시작과 중간, 끝 부분에서는 정선율로 혹은 변형된 형태로 사용된다. 칸타타 80번 “내 주는 강한 성이요(Ein'feste Burg ist unser Gott()’는 1715년에 작곡되었고, 1724년의 라이프치히 종교개혁 축제 행사를 위하여 개정되었다. 음악은 D장조의 코랄 판타지아로 시작하며 현악기로 중복되는 각 성부는 푸가적으로 나타난다. 칸타타 140번 “깨어라, 한 목소리가 우리를 부르고 있다(Wachet auf, ruft aus die Stimme)”는 1731년 라이프치히 에서 작곡된 칸타타로, 성서의 마태복음 25장 1절에서 13절까지를 가사로 하고 있다.
뮐하우젠 시대 (1707-1708) :
초기의 칸타타 창작은 1707-8년 뮐하우젠에서 작곡된 네곡의 작품들(BWV 131, 106, 71, 196) 그리고 역시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BWV 4, 150에서 더듬어 볼 수 있다. 이 작품들은 칸타타의 모태격으로서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로 이루어진 이탈리아 오페의 형식에 따르지 않는다. 하지만, 바흐는 당시에 이미 구식으로 취급 받던 칸타타에의 코랄 사용을 고수하고 있으며, 이는 지속적으로 그의 창작의 핵심적 수법으로 자리잡는다. 바흐의 현존하는 최초의 칸타타는 뮐하우젠 시대로 거슬러간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106, 131, 150, 196번 등이 있으며, 이 중 장례 칸타타인 106번은 그 형태나 내용 면에서 뛰어나며 이 시대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시대의 바흐는 아직 뚜렷한 자신의 양식을 확립하기 이전의 시도기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시기의 칸타타는 당 시대에 유행하는 기악 및 성악양식들을 혼합 시킨 여러 형식의 나열로 볼 수 있다. 이 작품들은 대체로 기악적인 서주가 간결하며, 그 뒤에 분리된 성악 부분들이 나타난다. 대개는 앞과 끝, 그리고 중앙에 코랄이 나타난다. 코랄은 당시에 절정을 이룬 성악 콘체르타토 양식을 따라 기악 반주와 어울려 완성된 전체를 이룬다. 칸타타에 사용된 가사들은 주로 성경이나 코랄에 근거하며, 가사의 의미를 표현하는데 있어 대단히 심혈 을 기울이고 있어 루터파 성가의 이념을 성실히 지키고 있다고 보여진다.
바이마르 시대 (1708-1717) :
많은 오르간 걸작들이 탄생한 이 시기는 또한 그의 칸타타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 시기이다. 이 시기에 바흐는 비로소 레치타보와 아리아로 이루어진 이탈리아 오페라의 형식을 받아들여 그의 칸타타 창작의 기본 틀로 삼게 된다. 이때 잘로모 프랑크의 시는 바흐의 칸타타 창작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바이마르 시기는 초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바이마르 후기는 1714년에 시작되는데, 바흐는 같은 해 3월, 바흐는 궁정교회의 칸토르로 임명되어 사실 상 악장의 직무를 위임 받았기 때문에 1714년부터 1716년까지 교회칸타타의 작 곡에 주력하게 되었다. 이 시대의 작품으로 판명된 것이 20곡 이상이 있는데, 그것은 바흐의 교회 칸타타 중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칸타타의 역사에 있어서 도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말하는 작품인 것이다. 바이마르 시기의 작품들은 바흐의 개인적인 양식의 확립기로 향하는 과도기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특히 그는 이 시기에 처음으로 레치타티보를 사용하게 된다. 또한 바흐는 그의 칸타타에 있어서 본격적으로 시인들의 가사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노이마이스터의 가사를 사용하게 된 것은 그의 칸타타 발전 에 있어 획기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노이마이스터는 정통 루터교회의 목사 로 당시 유행하던 오페라의 영향을 받아 소위 ‘마드리갈풍’이라고 불리는 극적 인 가사를 시도하였으며, 오페라적인 세코레치타티보와 당시 진보적인 다 카 포 아리아 양식(A B A형식)을 고려한 구성방식을 채택한 것이 그의 수법상의 특징이다. 한편 바흐는 후랑크(Salomo Frank, 1659-1725)와의 교류를 갖게 된다. 그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서기이며, 또한 궁정사서로서 명망 있는 시인이었다. 그 의 가사는 노이마이스터에 비해 보수적이며 심오하고 신비스러운 세계를 갖고 있어 바흐가 관심을 가졌다. 이 두 사람의 가사는 바흐 칸타타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바이마르 초기 칸타타는 1714년에 쓴 것으로, 후랑크가 가사를 쓴 12, 152, 172, 182번과, 노이마이스터가 가사를 쓴 18, 61번 등이 있다. 이 작품들은 다소 실험적 성격을 띄고 있다. 당시 바흐는 비발디 협주곡 등의 이태리풍의 음악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러한 영향이 선율과 아리아에 반영되어 있다. 바이마르 칸타타는 거의 후랑크의 가사를 사용하며, 코랄과 기악적인 형식과의 결합은 그 의 칸타타가 새로운 형식으로 발전되어 가며 점차 기악 부분이 증가하고 있음 을 보여주고 있다.
쾨텐 시대 (1717-1723) :
이 시기에는 1년에 두 곡 정도의 칸타타가 작곡되었을 것이라고 하나 불분명하다. 전체적으로 교회용 성악작품과 오르간 곡들이 많지 않았던 시기이며, 그 대신 귀중한 다른 기악 독주곡들이 창작된 시기였다. 쾨텐에서는 바흐 자신의 직분과 관련되어 교회 칸타타를 쓰지 않았다. 그러 나 궁정 악장으로서 축하연을 위한 몇 개의 세속 칸타타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흐의 대부분의 칸타타는 라이프치히에서 만들어졌다, 그는 처음 4년 동안 연속되는 3년 분의 예배를 위한 칸타타를 새로 마련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전체 작품들은 4기로 나뉜다.
라이프찌히 시대 (1723-1750) :
이 시기는 바흐의 칸타타가 가장 왕성하게 작곡된 시기였다. 라이프찌히에 부임한 뒤 삼위일체주일인 1723년 5월 30일 예배에 사용할 칸타타를 작곡하기 시작하여 1725년 5월 27일에 이르기까지 2년 동안, 그리고 1725년 12월 25일 성탄절에서 시작하여 다음 해인 1726년 11월 24일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졌다. 작곡 여부가 불분명한 시기도 있고, 작곡하였다 하더라도 처음과 같이 지속적으로 작곡한 것도 아니었지만 대체로 칸타타 작곡은 1735까지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 같다. 라이프찌히 시대의 칸타타는 일반적으로 그의 칸타타의 틀을 유지하면서 첫 합창이 더욱 충실해졌다. 바흐 연구가이자 멘델스죤과 슈만과 공동으로 바흐 부흥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모리츠 하웊트만의 비유에 따르면 바흐의 칸타타는 기차와 같다. 즉, 기관차 격인 도입부의 합창이 여러 개의 객차 격인 아리아와 레치타티보를 이끌며 제일 나중에 우편차인 코랄이 따른다는 것이다. 도입합창이 특히 중요한데, 여기서 합창이 콘체르티노로서 기악합주나 관현악의 리피에노에 대응하면서 코랄 편곡이나 푸가를 연주한다.
(1) 1723-1724년 :
라이프찌히 시대 초기인 1723-25년에 걸쳐서 칸타타 창작에 있어서의 새로운 수확은 코랄 칸타타이다. 이는 찬송가의 제1절에 의해 정교하게 만들어진 코랄 판타지로 시작하여 단순하게 화성을 붙여서 회중들이 함께 부르도록 한 마지막절로 끝맺으며, 그 사이의 여러 절들은 독창자들이 연주하는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를 위하여 고쳐 쓴 가사들로 채워진다. 여러 개의 악장들은 예배의 형식과 서로 결합되어 짜여진다. 이 기간은 정확히 1723년 5월 30일, 즉 삼위일체 후 첫 주일 (1st Sunday after Trinity)에서 시작되어 1724년의 삼위일체 주일인 6월 4일 까지를 말한다. 이 기간에는 제75번에서 시작되는 60곡의 칸타타가 있다. 라이프찌히 첫 해 동안에는 작품들의 개작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칸타타 4번도 이 시기에 부활절 예배를 위해 개작되었다. 이 작품들 가운데는 쾨텐 시대의 세속 칸타타를 고친 134, 173, 184번 등도 있는데, 가사는 새롭게 바뀌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대체로 규모가 크고, 대게는 서주에 코랄을 갖고 있다. 이들은 통일된 몇 개의 유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구 별할 수 있다.
성서 인용구-레치타티보-아리아-레치타티보-아리아-코랄: 46, 105, 136
성서 인용구-레치타티보-코랄-아리아-레치타티보-아리아-코랄: 40, 48, 64
성서 인용구-아리아-코랄-레치타티보-아리아-코랄: 86, 144, 166
대개 악기 사용법이나 기악적인 기교가 세련되며, 관악기들이 자주 사용된다.
(2) 1724 - 1725년 :
이 기간은 1724년 삼위일체 첫 주일, 6월 11일부터 다음해 5 월 27일까지에 해당된다. 이 기간에는 새롭게 작곡된 칸타타 곡이 주를 이룬다. 이 기간 중 1725년 3월 25일 이전까지의 약 3/4정도의 작품은 코랄 칸타타라고 불리우는 바흐의 독특한 작품양식에 속한다. 이 코랄 칸타타들은 각기 특정 성가를 바탕으로 작곡된 것으로서 시작과 끝, 혹은 중간에 인용구가 삽입되고, 나머지 부분에 코랄이 들어간다. 일반적으로 코랄의 인용은 한 칸타타 내에서 2번 내지 3번 인용된다. 즉 칸타타의 시작과 끝은 동일한 한 코랄 의 처음과 마지막 절(stanza)로 이루어진다. 대개 첫 스탄자는 대규모적인 코럴 판타지(Chorale Fantasy)로 구성되며 마지막 코랄은 전체 회중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단순한 사성화음의 성가가 되는 셈이다. 이 중간에는 항상 여러 내용을 담은 레치타티보와 아리아가 나타난다. 이 기간 중 바흐는 이 엄격한 코랄 칸타타의 시기가 끝나면 다시 초기와 같이 성서에 바탕을 둔 합창곡 시대로 들어간 다. 이들 엄격한 칸타타의 중간에 삽입된 가사들이 누구의 가사인지 현재 알 수 없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 10곡은 마리안느 폰 찌글러(Mariane von Ziegler)라는 여류 시인의 것으로 상당히 성공적인 평가를 받는다.
(3) 1725 - 1727 :
이 기간은 1725년 성탄절부터 1727년 2월 9일 칠순절 까지의 14개월에 해당된다. 이 기간 동안 17-18곡 정도의 칸타타는 그의 친척인 마이닝겐(Meiningen)의 궁중 지휘자 요한 루드비히 바하(Johann Ludwig Bach, 1677∼1731)의 작품을 사용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가사들은 노이마이스터(28 번), 후랑크(72번), 렘즈(16, 32, 35, 57, 110, 151, 170번 등)것이 사용되었다. 또 한 전 시기의 기악곡들이 칸타타에 도입되어 사용되는 예가 빈번하였다. 한편 독창을 위주로 하는 솔로 칸타타가 이 시기에 많이 나타난다.
4) 1727년 이후:
이 시기 대부분의 작품이 분실된 것으로 보인다. 1729년 이후 20년 동안의 교회 칸타타는 별로 남아있지 않다. 바흐는 텔레만에 의해 창설된 콜레지움 무지쿰의 지휘자가 된 후 이 단체를 위해 많은 기악곡과 세속 칸타타를 작곡하였으며, 세속 칸타타를 오라토리오로 편곡하는 일에 힘썼으며 1734 년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Christmas Oratorio)"를 그리고 1735년에 "그의 왕국에서 주님을 찬양하라(Lobet Gott in seinen Reichen)"(BWV11) - "승천 오라토리오(Himmelfahrtsoratorium, Ascension Oratorio)"를 작곡했다. 이 시기의 들은 교회에서 연주되지 않은 곡들로 지난 곡들을 연주 하거나 개작하여 연주한 것으로 보인다. 라이프치히 칸타타는 그의 초기 칸타타와 비교하면 전체적인 스타일은 확립되어 있지만 각각의 작품마다 독특하고 다양한 기능성을 추구하고 있으며, 특 히 도입부분의 코랄이 충실하게 포함되어 있다.
Il. 세속 칸타타
세속 칸타타는 바흐 자신이 말한 대로 일종의 음악극(drama per musica)이다. 오페라는 한편도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세속 칸타타나 마태 수난곡 등의 작품에서 볼 때 바흐는 오페라 양식의 극적 표현에도 능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세속 칸타타들은 특별한 행사를 위하여 작곡되었다. 이 들은 라이프치히의 토마스 교회, 콜레지움 무지쿰 연주회장, 그리고 귀족들 의 개인 저택에서 연주되었다. 세속 칸타타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신화적, 우화적, 전원적인 것으로 대부분이 단순한 내용이었다 .바흐는 많은 수의 세속 칸타타를 썼으나 상당수가 유실되어 현존하는 세속 칸타타는 그 수가 많지 않다. 세속 칸타타는 바흐 자신이 말한 대로 일종의 음 악극(drama per musica)이다. 이러한 칸타타는 귀족의 결혼, 생일, 라이프치히 대학의 행사, 명명일 등과 같은 특별한 행사를 위해 작곡되었다. 이들은 라이프치히의 토마스 교회, 콜레지움 무지쿰 연주회장, 그리고 귀족들의 개인 저택 에서 연주되었다. 세속 칸타타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신화적, 우화적, 전원적인 것으로 대부분이 단순한 내용이었다.
세속 칸타타는 때로 여러 번 사용되기도 하였고, 상대에 따라 가사를 고쳐 조금씩 표현을 달리하기도 하였다. 바이마르 시기의 칸타타 208번은 1713년 후랑크의 가사에 크리스틴 공작(Duke Christian of Saxe- Weissenfel) 의 생일을 위해 작곡한 곡이었는데, 1716년경 에른스트 왕자(Prince Ernst August of Saxe)의 생일에도 사용되었다. 또한 전 15곡 중 제 7, 13곡을 개작 하여, 1725년에 성령강림절 칸타타인 “이토록 하느님은 세상을 사랑하셨도다 (BWV 68)”로 연주하였다. 이 중에서 오스티나토 베이스 부분은 바이올린, 오보에와 콘티누오를 위한 기악곡 “트리오악장 F장조, BWV 1040)”로 개 작하였으며, 마지막 합창은 1728년 149번의 서두 합창에 사용하였다. 쾨텐 시기의 세속 칸타타는 12개가 넘지만 완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한 작 품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일부 혹은 개작으로 남아있거나 분실되었다. 대부분의 세속 칸타타는 라이프치히에서 작곡되었다. 바흐의 가장 유명한 세속 칸타타는 희극적 내용의 시를 사용하고 그 구성이 오라토리오적인 “커피 칸타타 (BWV 211)”와 “농민 칸타타 (BWV 212)” 이다.
[글 출처] 바흐 칸타타 이야기 - (3) 바흐와 칸타타|작성자 Patri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