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명성을 떨쳤던 슈퍼 아이돌 중 한명으로 최후의 정통파 아이돌이라 불리던 그녀.
마츠다 세이코의 직속 후배로서 깨꿋하고 청순한 모범생 이미지로 활동하며 크게 성공하였다.
수없이 많은 아이돌 스타들이 속출하던 아이돌 쇄도기였던 당시를 감안하면
데뷔 초 부터 커다란 인기를 모았던 그녀의 존재는 독보적이었다.
평범한 학생이었던 그녀가 가수가 되기로 결심하여
예능 신인 발굴 프로그램인 '스타 탄생'에 출연하기를 희망하자
(전설적인 아이돌 야마구치 모모에와 나카모리 아키나도 이 프로그램 출신,
오카다 유키코가 이 프로그램의 최후의 우승자였으며 이후 방송은 종영)
그녀의 부모는 결사반대하며 3가지 조건을 내건다.
그 조건이란,
1. 교내 테스트로 학년 1등급을 딸 것.
2. 충부 통일시험으로 학년 5위 이내에 들 것.
3. 명문 고교에 합격할 것.
부모로서는 무리한 조건을 내걸어 그녀를 포기시킬 요량이었으나,
그녀는 독하게도 세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켜내고 프로그램에 출전하여 당당히 우승을 하게 된다.
데뷔하자마자 스타덤에 오르며 신인상을 휩쓸었던 그녀는
살이 쉽게 찌는 체질로 언제나 다이어트의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았으며
하루에 3~4시간의 수면으로 버티어 내는 등, 근면 성실한 타입인데다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에 완벽주의 성향마저 있어
또래의 아이돌에 비해 자신을 굉장히 몰아부치는 스타일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던 그녀가 19살이 되던 해, 1986년 4월 8일.
(이 날은 일본의 유명 여배우 사와지리 에리카의 출생날짜와 일치하여
한때 사와지리 에리카는 오카다 유키코의 환생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소속사에서 마련해준 맨션에서 하숙을 하며 생활하던 그녀.
오전 9시 즈음, 같은 맨션의 거주자가 가스 냄새가 난다는 의혹을 품고 맨션 관리인에게 연락을 취한다.
관리인이 가스 누출의 근원을 찾기 위해 가구별로 맨션을 방문하던 와중,
402호의 벨을 눌렀지만 응답은 없었다. 틈새로 부터는 강한 가스 냄새가 떠돌았고
도어는 체인락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윽고 구급차의 출동 요청으로 도착한 소방대원들이 체인락을 절단하고 가내로 들어가자
오카다 유키코가 벽장 밑에서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왼쪽 손목에는 길이 5cm에 달하는 열상이 2개나 새겨져 있었다.
칼로 손목을 긋고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판단되었으며, 피는 대부분 멈추었으나 주위에 선혈이 흥건했다.
그녀는 곧바로 구급차에 실려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에 도착한 그녀는 상처의 소독과 봉합 수술을 받았다.
4바늘을 꼬맸으며 안정을 위해 정신 안정제가 투여되었다.
열상의 깊이가 상당하여 신경의 손상을 우려한 의사는 그녀에게 손을 움직여 보길 요구했다.
손은 정상적으로 움직였으며, 이후 의사는 의식의 혼탁 정도에 관한 간단한 질문을 하였다.
그녀는 침착하게 생년월일, 주소, 이름을 대답하였고 후유증과 같은 소견은 발견되지 않았다.
의사는 즉시 퇴원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곧이어 연락을 받은 그녀의 매니저와 소속사의 전무가 병원에 도착했다.
그녀는 신발을 신지 못한채 병원에 실려갔기에 병원의 간소한 슬리퍼를 빌려
병원을 빠져나왔다. 택시를 잡고 소속사 본사로 향하던 3명은 시종일관 말이 없었다.
11시 50분, 오카다 유키코 자살미수의 첫 소식이 언론에 유출되었다.
곧 취재진이 소속사 본사를 향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소속사 건물 내에서 그녀는 매니저와 단 둘이 남아있었다.
그러던 그녀가 생수를 엎질러 쏟았고, 「티슈...」 라는 그녀의 말에
이윽고 매니져는 티슈를 찾기 위해 일순 시선을 돌렸고, 그 틈을 타 그녀는 사라졌다.
12시 6분, 방을 빠져나간 그녀는
그 길로 곧장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가 투신한다.
머리가 깨져 뇌수가 사방에 퍼졌고, 피가 넘쳐났다.
발빠른 기자들은 앞다투어 현장에 도착하여 피를 흘리며 주검이 된 그녀의 시신을 촬영하였고,
이튿날 아스팔트에 뇌수가 흩어져 있는 그녀의 모습을 여과 없이 잡지 전면에 내보냈다.
비보를 접한 소속사 사장은 그녀의 일기장과 소지품을 수거해오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녀는 늘 중요한 일이나 사항들을 메모하는 습관이 있었고,
몇년동안 꾸준히 일기장을 써오고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사안들이 매스컴에 흘러들어갈 경우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사장의 신속한 대응으로 일기장의 전면적 사항들은 비공개 처리 되었으나,
그 대략적인 내용에 따르면 선배 여가수에 대한 온갖 저주와 욕이 담겨 있었고
(그 대상이 마츠다 세이코라는 의견이 당시 지배적이었다)
또한 연정 관계에 있던 연상의 탤런트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자신은 단지 성적인 파트너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상심을 금할 수 없어 자살을 택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소속사 측에서는 일기장에는 그 남자의 정체가 담겨 있어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의문의 남자 텔런트의 정체를 두고 한차례 소동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논란으로 불거졌던 사안은 그녀의 자살을 접했던 미디어의 태도였다.
이미 그녀의 일차적 자살 시도(가스 누출, 동맥 절단 시도)가 보도된 이후에
몰려든 취재진들은 이미 그녀가 충동적으로 자살을 재차 시도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은 그녀를 말리거나 회유하는 대신
특종에 눈이 어두워 특종이 될 사진을 건져낼 궁리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결국 그녀의 주변에 잠복하고 있던 기자들은
자신의 눈 앞에서 떨어진 그녀의 시신을 덮어주거나 가려주려는 시도조차 없이
그 참혹한 현장에서 정신없이 현장 사진을 찍어댔으며
더욱 드라마틱한 한 컷을 건지려는 야심에
이미 사망한 그녀의 시신을 발로 건드리는 등,
보다 자극적인 한 컷을 위한 연출 및 시신의 훼손도 서슴지 않았다.
더욱이 그녀의 자살이 사회적 현상처럼 번져나간 것은 그 이후였다.
그녀의 자살 과정 자체의 충격적인 행보와 시신의 적나라한 노출 등
자극적인 보도들이 잇다르던 와중,
몇몇의 소녀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투신자살을 하기 시작한 것.
이후 모방 자살은 걷잡을수 없이 2주 사이에 31명의 팬이 집단 자살.
한 달 이내에 60여명 가량,
불과 몇달 만에 수백명에 이르는 십대 청소년들이 연쇄적으로 자살해
일본 당국에 초 비상 사태가 벌어졌다.
그 해의 청소년 자살율을 전년에 비해 56%나 급증한 경이적인 기록이었으며
결국 일본 정부는 이 현상을 '오카다 증후군' (혹은 유키코 현상/윳코 신드롬) 이라고 명명하고
연일 국회 문교 위원회에서 성토되었으며
이는 전국민적 대대적인 자살방지 캠페인으로 이어졌다.
출처: *PopS WorlD* 글쓴이: 깨야소두
첫댓글 무섭네요~!! ㅠ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