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사는 태고종의 본산, 태고총림이다.
‘태고종의 본산’은 태고종의 본가가 되는 절이라는 의미로
‘총림’은 스님을 양성하는 종합대학이라고 보면 된다.
유일한 태고종 총림 선암사에서 공부하고 인정을 받아야 태고종 스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미술사학자 유홍준은 이 절을 두고 “내 마음속의 문화유산, 남도 답사의 필수처”라 말했다.
선암사 진입로는 특별하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우리나라 산사 건축은 진입로로부터 시작된다.
산사의 진입로는 그 자체가 건축적, 조경적 의미를 지닌 산사의 얼굴이다”라고 했다.
선암사 진입로는 아스팔트 길이 아니라 걷는 맛 좋은 흙길이요,
쭉 뻗은 길이 아니라 모퉁이에서 무엇이 나타날지 모르는 굽이진 길이다.
내내 계곡을 끼고 걸어 물소리가 흥을 북돋는다.
주차장에서 일주문까지 1.5km 흙길은 정겹기까지 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유도 우리나라 전통 사찰의 모습,
그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어서 이다.
승선교
신선이 하늘로 오른다는 다리다.
보물로 지정돼 있는 이 다리는 높이가 7m, 길이가 14m요, 너비가 3.5m다.
길쭉한 화강암을 다듬어 장대석(長臺石)으로 만들어 연결해 반원형의 무지개(虹蜺)다리로,
다른 보조장치를 사용하지 않고 아치형으로만 돌을 연결한 정교한 솜씨가 일품이다.
다리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무지개 다리의
부드럽고 둥근 천장모양은 예술작품의 극치를 보여준다.
가히 신선이 다리위로 승천할 것 같은 분위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승선교는 선암사 제일의 포토 존으로,
승선교 너머에 2층 정자인 강선루가 있는데,
다리의 반원에 강선루가 들어앉은 모습이 특이하다.
다리가 물에 반사되면 둥근 원이 되는 점이 아름답다.
승선교는 계곡의 자연 암반을 이용해 홍수에 휩쓸리지 않게 했고,
큼지막한 돌을 이어 무지개 모양으로 돌리고 그 위에 잡석을 쌓은 다음 흙으로 덮었다.
홍예 한가운데 용 머리가 있는데 이것이 다리의 균형을 잡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용은 부처님 세계로 가기 위해 다리를 건널 때 물에서 나쁜 기운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눈을 부릅뜨고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반원에 들어찬 강선루가 아름답다.
승선교와 강선루에는 신선 ‘선(仙)’ 자가 들어간다.
신선이 내려온 누각과 신선이 다시 하늘로 올라간 다리다.
순천, 하늘의 뜻을 따르는 땅에 온 신선이 몸을 씻고 노닐었을 만큼 계곡물이 맑다.
물은 흐르고 흘러 순천만까지 간다.
삼인당
전남 기념물 제4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삼인당(三印塘.못당)은
긴 타원형 모양의 연못 안에 섬이 있는 독특한 양식으로
신라 경문왕 2년(862)에 도선국사가 만든 것이라고 한다.
삼인이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의
삼법인을 뜻하는 것으로 불교의 중심사상을 나타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독특한 이름과 모양을 가진 연못은 선암사에서만 볼 수 있다.
타원형 못인 삼인당을 지나 일주문 앞에 선다.
삼인당을 지나면 바로 나타나는 이름 없는 석조물이다.
비신(碑身)이 없어진 방부형의 지대석과 이수(옥개석)인 듯하다.
일주문
선암사의 일주문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도 유일하게 피해를 입지 않은 건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확한 내용은 확인할 길이 없다.
전체적으로 전통적인 사찰의 일주문 양식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일주문 중에 공포가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단층 맞배 기와집으로 외4출목의 다포식 집이다.
원형의 주초위에 굵은 배흘림 원형기둥을 세웠고
소맷돌 계단에는 투박한 석수상(石獸像, 龍身)이 좌우에 조각되어 있다.
강희(康熙)18년(1719)에 작성된 '조계문중창상량문(曹溪門重創上樑門)'에
조계문이 1719년에 중창되었다고 적혀 있다.
지금의 일주문의 전신이 조계문이라 한다.
"曹溪山仙巖寺(조계산 선암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뒷쪽에는 "古淸凉山 海川寺(고청량산 해천사)"라는 편액이 붙어 있는데,
옛 청량산 해천사를 나타낸 것이다.
1759년(영조35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지으면서,
1761년 상월(霜月)스님이 청량산 해천사로 다시 바꿨다 한다.
이때 내건 것인지 아니면, 다시 조계산 선암사로 바꾸면서(1824,
순조24, 海鵬·訥庵스님) 기리려 남긴 것인지 모를 일이다.
「古淸凉山 海川寺」편액은 풍관산인(楓觀散人) 안택희(安宅熙)의 글씨이다.
일주문 계단 석조물
선암사에는 사천왕상이 없다.
대웅전 왼쪽 처마 너머에 봉우리가 조계산 최고봉, 장군봉(884m)이다.
장군봉이 절을 수호해서 선암사에는 일주문 다음에 나오는 사천왕문이 없다.
육조고사
만세루(萬世樓)는 선암사의 강당건물이다.
정면 3칸에 측면 2칸, 홑처마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전면에는 만세루(萬世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뒷쪽 벽면에는 육조고사(六朝古寺)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육조고사라는 글씨는
추증 영의정 김익겸(1614~1636년, 구운몽의 저자 서포 김만중의 부친)의 글씨라고 한다.
중국 선종의 최종 완성자라고 할 수 있는 6조 혜능대사가 조계산에서 주석한 것을
이곳 조계산과 연결하여 6조 대사의 법맥이 전하는 고찰이라는 뜻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
‘고사(古寺)’라고 한 것은 ‘선종의 법통을 이어받은 오랜 전통의 절’이란 의미이고.
‘육조(六朝)’는 중국 광동성(廣東省) 소관(韶關)의 조계산(曹溪山)에는
남종선(南宗禪)의 시조(始祖) 혜능선사(慧能先師)의 등신불이 있는 남화사(南華寺)가 있다.
혜능(慧能)은 37년간 이곳에 머물며 선법(禪法)을 전파하였다.
혜능(638∼713)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아버지는 일찍 여의고 나뭇짐을 내다 팔아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하루는 탁발승의 ‘금강경’ 독경 소리를 듣고,
어머니와 작별하고 동산사(東山寺)로 홍인대사(弘忍大師)를 찾아간다.
행자 생활 여덟 달만에 홍인대사의 후계자 선발을 위한 공모에 응모한다.
결국 스승의 마음을 얻어 의법전수를 받고 산문을 나서 남쪽으로 향한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혜능(慧能)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나와 불법을 전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의 가르침의 핵심은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다.
즉 사람은 저마다 자기 안에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으며,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주장이인 셈이다.
인간성의 해방 그것이다.
한마디로 혜능에 의하여 불교라는 종교가 마침내 중국화한 것이다.
이러한 혜능(慧能)을 가리켜 ‘육조(六祖)’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인도에서 건너와 중국 선종(禪宗)을 창시한 달마선사(達磨先師)가
선종의 시조(始祖) 즉 일조(一祖)가 되며,
그 법통을 혜능이 여섯 번째로 이어 받았기 때문이다.
6祖는 곧 혜능(慧能)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국 불교의 주류인 조계종은 한국 선종(禪宗)의 시원(始原)을
바로 이 ‘혜능’으로 보기 때문에 종단의 명칭도
그가 선법을 펼쳤던 중국 소관의 조계산(曹溪山)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여기 선암사를 품고 있는 산 이름 또한 조계산이다.
그렇다면 선암사 만세루의 또 하나의 현판 ‘六朝古寺’의
두 번째 글자는 ‘祖’를 ‘朝’로 잘못 썼다고도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런 가정 하에 해석을 해보면
'중국 선종 육조(六祖)인 혜능선사의 법통을 이어 받은 역사 깊은 사찰’ 정도가 되겠다.
선암사는 가람배치는 대개 대웅전을 중심으로 전각을 배치하는데,
선암사가 서른 개가 넘는 전각이 위아래로 조밀하게 들어차 있는데도 비좁고
답답해 보이지 않는 것은 급한 경사지를 여러 단(段)으로 깎고
축대를 쌓아 조성한 대지에 전각들을 배치해 공간을 오르는 방향으로
시선이 분절되기 때문이고, 위아래에 비해 좌우가 다소 넓어서 이고.
전각 사이를 화단으로 자연스레 연결해 줌으로써,
선암사는 어느 당우 하나에 힘을 주지 않아서인지 위압적이지 않고,
한옥마을에 온 듯 시골 돌담길을 걷는 듯 편안하다.
할머니 집에 온 것 같은 아늑함이 있다고 하겠다.
대웅전
대웅전(보물 제1311호)은 앞면과 옆면이 각각 3칸이고,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겹처마 팔작지붕 이다.
이전에 불탄 것을 순조 24년(1824)에 중창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대웅전(大雄殿)은 선암사의 본전(本殿)으로 정면3칸, 측면3칸, 겹처마에 팔작지붕이고
공포는 다포식이다. 고려시대 의천에 의해 중창된 대웅전이
어느 시기에 다시 지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조선시대 정유재란(1597)으로 불에 타 없어졌던 것을 1660년(현종 1)에 새로 지었다고 한다.
그 후 1766년(영조 42)에 다시 화재에 의해 소실된 것을 1824년(순조 24)에 지었다.
대웅전 편액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창조인 영안부원군
김조순(순조 임금의 장인)의 글씨이다.
대웅전 주련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巍巍堂堂萬法王(외외당당만법왕) 높고 높아 당당하신 만법왕 부처님
三十二相百千光(삼십이상백천광) 32상의 백천 광명 눈부시구나
莫謂慈容難得見(막위자용난득견) 자비로운 그 모습 뵈옵기 어렵다 말하지 말라
不離祗園大道場(불리기원대도량) 기원정사 떠나지 않고 항상 이 대도량에 계시네.
새로 단청을 하지 않고 천연염료로 보존 처리만 함으로써. 고졸한 멋을 느낄 수 있다.
대웅전 앞뜰에 쌍탑(雙塔)을 좌우 두었고, 앞에는 강당(만세루)을,
좌우에는 선방(심검당)과 요사(설선당)를 위치시켰다.
이러한 배치구조는 조선후기의 사찰가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ㅁ자형 구조이다.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삼층석탑
동·서 삼층석탑(보물 제395호)으로, 도선국사가 만들었다는 ‘2보탑’이다.
2단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형태로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형식이다.
탑의 규모나 건축 기법이 같아 동시대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하나씩의 기둥 모양을 새기고,
각 기단의 윗면에는 3층의 굴곡을 이룬 괴임돌을 두어 윗돌을 받치고 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우주)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옥개석)은 처마밑이 수평이고 밑받침은 4단이다.
지붕돌(옥개석) 정상에는 2단의 굴곡을 이룬 괴임이 있는데,
지붕돌에 이와 같은 수법을 한 것은 희귀한 일이다.
탑의 머리장식으로는 노반이 남아 있고 그 위에 작은 석재들이 놓여 있다.
이 두 탑은 완전히 동일한 수법으로 만들어졌으며, 각 부에 다소의 손상을 입기는 했으나
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다.
다만 기단의 가운데 기둥 조각이 하나로 줄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도
각 층 4단으로 줄어 신라 중기 이후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불조전
과거칠불(過去七佛)과 미래억겁천불의 불조인 오십삼불(五十三佛)을 봉안하였다.
즉 육십불(六十佛)을 모시는 전각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주심포 형식에 익공형식이 가미된 조선후기의 건물이다.
응진당(應眞堂)
응진전(應眞殿)․나한전(羅漢殿)이라고도 하며, 중앙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고,
좌우에는 10대 제자 혹은 16나한 혹은 500나한을 모신 전각이다.
응진전은 주존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고
협시보살로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과거불인 정광여래의 화신인 제화갈라보살과 현재불인 석가모니 부처님,
그리고 미래불인 미륵보살을 모셔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상징하고
그 좌우로 8위씩 16나한을 봉안해 놓았다.
나한이란 아라한 또는 줄여 나한이라고 하는데, 응공, 또는 응진이라고 하며,
마땅히 존경 받을 만한 분, 공양 받을 만한 분이라는 뜻이다.
나한은 부처님이 되지는 못했지만 이미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였으므로
초자연적인 신통력과 독특한 표정으로 자유스러운 자세를 하고 있다.
또한 나한은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중생들을 제도하라는 수기를 받은 분들이고,
민간신앙에서는 나한에 대한 무수한 설화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서민들의 기복신앙으로 자리잡아 왔다.
‘무량수각(無量壽閣)' 편액
해남 대흥사 백설당의 편액과 흡사한데
이는 제주도 유배 가는 길에 대흥사에 들려 초의선사가 써주고 간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다.
원통전에서 해우소로 향하는 길, 커다란 와송이 있다.
한 뿌리에서 줄기가 갈라져 하나는 누워서, 하나는 서서 자란다.
누워 있는 소나무는 선종(마음 수양으로 깨우치는 것),
서 있는 소나무는 교종(경전을 읽고 깨우치는 것)을 상징한다.
와송은 선종과 교종의 근본 뿌리는 하나라는 선교양종대본산 선암사의 성격을 보여준다.
배움은 높이 쌓되 자신을 낮출 것, 이건 맞고 저건 틀렸다 분별하지 말 것.
600년 수령의 소나무가 가르침을 준다.
600년 수령의 토종 매화인 선암매
선암사는일 년 내내 꽃 대궐로,
매화, 겹벚꽃, 금목서, 은목서, 동백 등 꽃나무가 지천에 있지만
절을 대표하는 꽃은 역시 매화로, ‘선암매’라고 한다.
각황전 돌담길의 홍매화, 원통전 담장 뒤편의 백매화는 ‘선암매’라는 이름으로
천연기념물이고 수령은 600년 정도로 추정한다.
봄의 선암매를 보려면 4월 초가 적기 이다.
예닐곱 그루 성긴 매화 등걸이
참 서늘도 하다
서늘한 매화꽃 듬성듬성 피어
달빛 흩는데 그 그늘 속
무우전(無憂殿) 푸른 전각 한 채도
잠들어 서늘하다
- 송수권 '조선 매화'
원통전(圓通殿)
주원융통(周圓融通)한 자비를 구한다는 뜻에서 원통전이라는 호칭이 붙었다.
그 사찰의 부불전(副佛殿)에 속하는 경우 관음전(觀音殿)이라고도 한다.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단독상으로 모시고,
후불탱화에서 협시로 남순동자(南巡童子) 해상용왕(海上龍王)을 나타내었다.
관세음보살은 중생들을 모든 고난에서 구제하고 해탈로 인도해주는 보살이다.
그리고 조선 22대 정조대왕이 후사가 없자 선암사 눌암대사에게 100일 기도를 부탁하여
순조임금을 얻게 되었는데 후에 순조임금이 그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인(人)’, ‘천(天)’, ‘대복전(大福田)’이란 친필 현판을 하사하였는데
현재 건물의 내부에 "御筆 大福田"(어필 대복전)이란 편액만 걸려있고,
‘인(人)’과 ‘천(天)’을 나타낸 현판은 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원통전은 사찰의 비밀기지 같다.
두 개의 전각이 앞을 가로막아 은밀한 느낌이다.
선암사 경내에서 가장 개성적인 건물이 원통전이다.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고 순조 임금을 있게 한 기도처이기도 하다.
원통전 안의 대복전(大福田)이라는 현판은
자신이 태어난 것에 대한 보답으로 순조가 쓴 어필이에요.
절이 ‘큰 복을 받은 터전’이라는 의미로, 원통전은 구조가 독특하다.
우선 사찰 건축에서 보기 드물게 건물 평면이 T자형이다.
앞에는 팔상전과 불조전, 두 개의 전각이 가로막아 원통전을 엄폐한다.
기둥 아래를 보면 같은 위치에 홈이 있어요. 이건 홈에 마루를 걸었다는 얘기이다.
전각에 바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한 번 더 차단을 했다는 뜻이다.
불단이 있는 내부도 세 면에 벽을 둘러 집 안에 또 하나의 집이 있는 것 같다.
이는 단순한 전각이 아니라 왕실의 기도처가 있는 은밀한 공간이었다는 의미이다.
원통전은 문살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문살 조각을 각기 끼워 맞춘 게 아니라
하나의 원목에 조각을 해서 공력이 들어간 작품이다.
문살의 꽃은 모란, 부귀영화를 표현하고.
문살 아래에는 방아 찧는 달나라 토끼와 새를 장식했다.
선암사 중수비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선암사 무우전 뒤편에 세워진 호암 약휴의 중수비.
선암사중수비는 정유재란과 병자호란으로 소실된 선암사의 중수를 위해 노력한
호암(護巖) 약휴(若休)[1664~1738]의 공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1707년 비문을 채팽윤(蔡彭胤)이 짓고 이진휴(李震休)가 글씨를 썼으며 권규(權珪)가 전액을 썼다.
후면에는 계음(桂陰) 호연(浩然)이 글을 짓고, 전형(典炯)이 글을 썼다.
무우전(無憂殿)에서 운수암(雲水庵)으로 오르는 길목의 평평한 곳에 있다.
선암사 무우전. 마치 여염집처럼 안존하게 서 있는 이 전각 주변이 가장 아름다웠다.
선암사 사적비와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비의 형태는 귀부, 비신,
이수를 갖추고 있는 전형적인 한국 비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하단에는 앙련[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무늬]을 조식하였고
그 윗부분에는 쌍용이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을 매우 치밀하게 조각하였다.
비신 앞면 상단에 전서(篆書)로 ‘조계산선암사중수비(曹溪山仙巖寺重修碑)’라고 제액하였다.
비제는 해서(楷書)로 ‘승평부조계산선암사중수비명창서(昇平府曹溪山仙巖寺重修碑銘幷序)’라 하였다.
[비의 내용] 순천 선암사가 호남 3암의 하나로서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가 창건하고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1055~1101]이 중건하였는데
정유재란에 대부분이 불타 경잠 등이 중창한 것을
호암대사가 이어 원통각과 53불 등을 조성하였음을 서술하였다.
선암사 동승탑
선암사 경내 3기의 부도 가운데 가장 웅대하고 규모가 크다.
팔각 원당형 양식몸돌의 전후로 자물쇠를 죄우로 인왕상을 돋을 새김하였다.
조성시기는 10세기로 추정한다.
각황전
화려하고 날렵한 처마의 각황전
무우전 뒤의 각황전은 도선국사가 만들었다는 ‘1철불’을 모신 곳이다.
아픈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약사여래부처님이 앉아 계신다.
선암사 창건은 백제 성왕 7년(529)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설과
통일신라 헌강왕 1년(875) 선각국사 도선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한다.
아도화상의 경우에는 남아 있는 유물이 없고,
도선은 창건설을 뒷받침하는 유물로. 도선이 세웠다는 ‘1철불 2보탑 3부도’가 있다.
1철불은 각황전에 있고, 2보탑은 대웅전 앞 두 개의 석탑을 말하고,
3부도 역시 부도밭에 남아 있다.
학계에서 아도화상 창건설보다 도선 창건설을 유력하게 보는 이유이다.
누가 창건했든지 간에 선암사는 지어진 지 천 년이 넘는 고찰임은 틀림없다.
선암사는 자연이 만들고 세월이 시공한 절이다.
문화재도 많지만 자연과 어우러진 절 그 자체가 보물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정호승 시인의 ‘선암사’
선암사 해천당 옆에
수백년 묵은 뒷간 하나 있습니다
거기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
문 틈새 이마 위로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목어(木魚) 흔들어 깨우고 가는
청솔 바람소리 보입니다
부스럭부스럭 누군가 밑닦는 소리 들리는데
눈 맑은 동박새가
매화 등걸 우듬지에 앉아
두리번두리번 뭐라고 짖어댑니다
천년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고
새로운 천년이 무섭게 밀려오는지,
그 울음소리 대숲 하늘 한 폭 찢어놓고
앞산머리 훠이 날아갑니다
하릴없이 대나무 대롱 끝에 입술을 대고
한 모금 찬물을 삼키다가 옳거니
매화꽃 봉오리 움트는 소리,
겨울 산그늘 얼음꽃 깨치고
봄 햇살 걸어오는 것 보았습니다.
- 나종영 <우수(雨水)> 전문
선암사에는 세가지가 없다
즉 삼무(三無)가 있는데, 첫째는 다른 사찰과 다르게 선암사에는 사천왕문이 없다.
그 이유는 조계산의 주봉이 장군봉이라 장군이 지켜주기 때문에
불법의 호법신인 사천왕상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둘째는 주련인데 다른 사찰의 대웅전에는 주련이 기둥에 붙어 있는데
선암사는 개구즉착(開口卽錯, 입을 열면 틀리다)이라고 하여서
곧 깨달으면 말이 필요 없다는 뜻으로 해서 주련을 달지 않았다.
(현재 범종루, 대웅전, 조사당 건물에는 주련이걸려 있다.)
셋째는 어간문이 없는데
어간문이란 대웅전의 정중앙에 있는 문으로
다른 사찰에는 정중앙의 문에도 사람이 출입이 가능하지만
선암사에는 부처님처럼 깨달은 분만이 이 어간문을 통하여 통과할 수 있다고 하여
어간문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 외에 더우기 선암사는, 山强水弱(산강약수)로 물이 눌린다 하여 석등(石燈)도 세우지 않았다.
2023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