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 배우기
전선현
(1) 남자는 다리가 길었다. 자전거에서 내릴 때 길고 날씬한 다리는 더 돋보였다. 그는 <인간실격>이라는 소설에 반해 무작정 일본에 온 한국 유학생이었다. 지금은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소설가가 구술하는 작품을 컴퓨터로 옮기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가 원고지 형식으로 원고를 출력해 큰 창 가득 붙이면 소설가는 틀린 표현이 없는지 살펴보았다.
(2) 그때 카메라는 초록 잎들에 머물다 원고로 옮겨간 햇빛을 비추고 있었다. 마치, 햇빛이 소설을 읽기라도 하는 양. 화면 가득히 비치는 이국의 글자들은 신비로왔다.
“여기, ‘2개월은’ ‘ケ’(케) 말고 ‘カ’(카)로 해줘. ‘ ケ’자는 왠지 바보같거든”
소설가는 고칠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글자가 바보같다니. 소설가의 상상력은 저 정도구나, 나는 그녀의 감성에 매혹되고 말았다. 나도 햇빛처럼 그들 곁에 서 있고 싶었다. 그 말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저 언어를 배우면 그 감성을 얻을 수 있을까, 저 나라 말을 배우고 싶다는 욕망이 불같이 일었다.
(3) 다음 날 홀린 듯 일본어 학원에 등록했다. 히라가나, 카타카나부터 배우다 보면 그 뜻을 이해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라도 할 듯, 바보 같았다. 영화 속 남자는 일본에서 산 지 9년째였지만, 자신의 실력으로 그 일이 어렵다고 말했었는데, 나의 바람이 이루어질 날이 올까. 나는 히라가나만 외우다 포기한 횟수만 세 번째, 일본엔 가 본 적도 없다. 일본어를 쓸 일 없는 상황에 있다. 하지만 초급반에 출석했다. 충동적이었다.
(4) 한 달에 열 번 수업, 45분 한국인 선생님, 45분 일본인 선생님이 진행하는 수업이었다. 각기 다른 연령대의 일곱 명의 수강생, 모두 일본 여행 경험들이 있었다. 한국인 선생님이 문법을 설명하시고 난 후 그 내용을 일본인 선생님과 한 번 더 반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일본 사람을 만난 건 처음이었다. 일본 말은 내가 평소에 말하던 것보다 조금 높은 톤으로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기분도 약간 올라가는 것 같았다. 표정이 풍부하고 재미있는 몸동작을 구사하는 일본인 선생님의 수업이 마냥 좋았다.
(5) 첫날 히라가나 오십음도 익히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묵혀둔 경험도 영 쓸모없는 것이 아니었는지 기억이 남아 있는 부분들이 있었다. 문법적으로 일본어는 우리말과 어순이 같고, 조사체계도 비슷하다. 이론적으로는 단어만 잘 암기하면 되는 셈이다. 우리말로 사과를 일본어로는 りんこ, 이렇게 외우기만 하면 된다. 거기다 일상에서 가끔씩 접하던 단어들도 있다. 발음과 억양도 그렇게 유별나지 않다.
(6) 그런데, 카타카나를 배우는 두 번째 시간부터 수업 시간 내내 몹시 긴장되었다. 카타카나가 도통 외워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봐도 봐도 헷갈렸다. 수고하셨습니다에 해당하는 ‘おつかれさまてした’ (오츠카레사마데시다)가 입에 익는 데는 꼬박 2박 3일이 걸렸다.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다시 들여다보기 몇 번을 해도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선생님의 질문에 빨리 답할 수 없다는 것이 몹시 곤욕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7) 한 친구는 내 이야기에 시간도 많다며 학원비 모아 일본 여행이나 다니며 놀지 머리 아프게 뭐하냐고 핀잔이었다. 일본어 학원에 등록했다고 하면 열에 아홉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 효용을 따졌다. 스스로도 수업 횟수를 더해 갈수록 단어 외우기가 이렇게 어려워서 그만뒀었구나하며 포기했던 과거를 용서할 지경이었다.
(8) 하지만 이번에도 그만둔다면 꼴이 우습다. 오십이 넘어서도 충동적이라는 것이 괜시리 부끄럽다. 가족들에게 멋있다는 눈빛 대신 그럴 줄 알았지라는 눈길을 받고 싶진 않다. 호기심에 이끌려 겁 없이 시도했다가 몇 달을 못 채우고 던져버린 적이 너무 많은 과거였다. 재미를 느끼는 일에만 열중하다 보니 열매가 없었다. 회사도 오래 다니지 못했고, 취미로 배웠던 그림이며 글쓰기, 바느질이며 뜨개질 반도 늘 초급 수준에 머물렀었다. 빛나는 작품 속에 들어있는 인고의 시간은 외면하고 재능만 탓했던 까닭이다. 조금 어려워지면 늘 포기했기 때문이다.
(9) 일단 학원의 고급반을 마칠 때까지는 멈추지 않기로 결심했다. 빨리 외워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외워질 때까지 도전하겠다는 생각으로 바꿨다. 서랍 구석에 넣어두었던 카드장을 찾았다. ‘앞면에는 수고하셨습니다.’ 를 쓰고 뒷면에는 ‘おつかれさまてした’를 쓰는 식으로 수업 내용을 정리했다. 카드를 링에 묶어 들고 다니며 틈틈이 꺼내 보았다. 핸드폰을 들고 있던 시간이 카드 묶음을 들춰 보는 시간들로 변해갔다. 핸드폰을 보던 시간들은 허공에 흩어져 버리는 듯 했는데 카드를 들추는 시간들은 내 몸에 축적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것에 작은 쾌감이 있었다. 잘 외워지지 않는 데서 오는 고통만큼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기쁨도 있었다. 열심히 선생님 말씀에 집중할 때는 초등학생이 된 것 같았다. 시간을 거꾸로 되돌린 느낌이랄까.
(10) 새로운 언어 속에서 익숙한 것들은 전부 새 이름표를 달고 서 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다른 세계의 문을 열고, 낯설음 속에 나를 밀어 넣는 행위다. 나는 겸손의 길을 닦아 가는 시간을 만들고 있다. 서툰 것이 당연한 그 어린 아이가 되어야 한다.
(11) 배움은 젊음의 묘약이었다. 아직 배울 것이 많은 인생, 배우고 싶은 것이 많은 인생엔 설렘의 빛깔이 흘러 넘친다. 초급반 한 달 수업을 결석 없이 마쳤다. 젊어질 시간이 내 앞에 선물처럼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