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과 현대를 가로지르는 휠덜린, 그의 시 세계(1)/ 장영태
세기를 뛰어넘은 시인의 귀환
휠덜린은 온전한 정신으로 지내는 동안 자신의 시집을 한 권도 내지 못했다. 그가 정신착란을 앓은 지 20년이 지난 1826년에 이르러서야 울란트와 슈바프가 한 권의 작은 휠덜린 시집을 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가 그때까지 쓴 시의 절반도 실리지 않았다. 그나마 이 작은 시 선집을 통해서 휠덜린이 시인으로서 처음 대중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휠덜린이 시 연감이나 문학잡지 등에 간간히 발표했던 작품들은 인쇄된 상태로 전해졌지만 그렇지 못한 작품들은 읽어내기 어려운 육필원고의 상태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묻혀 있었다. 심지어 그의 의미심장한 찬가 <평화의 축제> 원고는 1954년 런던에서 처음 발견되기도 했다.
이러한 휠덜린이 시인으로서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된 것은 20세기 초 1913년~1916년, 청년 고전어문학도이자 독문학도인 헬링라트와 제바스가 공동으로 펴낸 6권짜리 '뮌헨-라이프치히판 전집'(1913~1916)이 계기가 되었다. 특히 헬링라트가 12쪽에 달하는 서문과 함께 펴낸 이 전집의 제4권<1800~1806년의 시>는 휠덜린의 현대적 수용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휠덜린 르네상스를 불러일으켰다. 그 후1943~1985년 바이너스가 편집하여 펴낸 이른바 '슈트가르트판 전집'(1943~1985)을 통해서 휠덜린의 작품들이 온전히 판독되고 많은 독본의 출판을 위한 길이 열렸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19세기에 휠덜린은 소설 <휘페리온>의 저자로서만 순수한 문명(文名)을 얻고 있었다. 그가 쓴 시들 가운데 매우 적은 시들만이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았을 뿐이다. 독일문학에서 오늘날 가장 잘 알려진 시에 속하는 <반평생>도 당대에는 상당한 수준의 독자들조차 이해를 거부했다. 반전이 일어난 것은 20세기 초 앞서 언급한 헬링라트에 의해서였다. 이와 함께 마침 표현주의와 상징주의가 등장하면서 현대 서정시인들의 상승된 감수성에 의해 서정시인 휠덜린은 매우 빠르게 최고 수준의 시인으로 끌어올려졌다. 모든 수식(修飾)에서 해방된 진술의 집중성, 은유의 과감성, 특히 헬링라트가 '휠덜린 문학의 심장이며,핵심이자 정점'이라고 한 1800년 이후의 후기 시에 나타나는 전통적인 규범으로부터의 탈피가 휠덜린을 현대 서정시의 선구자이자 고유한 표현예술의 때 이른 완성자로 부각시켜주었다. 20세기의 위대한 시인들, 릴케에서 첼란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인들이 휠덜린을 모범으로 여겼던 데는 이유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1936년 로마에서 행한 강연 <휠덜린 시의 본질>에서 "유달리 시의 본질을 시화(詩化)했다"는 아주 탁월한 의미에서 휠덜린은 우리에게 "시인의 시인"이라고 확언했다. 1993년 그뉘크는 <휠덜린에게. 현시대 시인들의 시>이라는 시 모음집을 냈다. 거기에는 전후(戰後) 동서로 분단된 독일의 당대 시인들이 휠덜린에게 바친 헌정시들이 실려 있다 아이히, 첼란, 그리고 비어만 등 서른 두 명의 시인이 쓴 마흔 네 편의 헌정시들이다. 모두 20세기 휠덜린의 부활을 알리는 증거들이었다.
시인과 광인으로서의 삶, 그러나 모두 세계 속의 세계
휠덜린이 학생시절에 쓴 시들과,1806년 이후 세상을 떠난 1843년까지의 긴 정신착란의 시기에 쓴 시들을 제외한다면, 그가 본격적으로 시를 쓴 것은 1788년 가을 튀빙겐 신학교에 입학한 18세에서 셀링이 휠덜린의 "완전한 정신이상"을 헤겔에게 알린 1803년, 33세에 이르기까지의 길지 않은 세월 동안이었다. 1803년 이후 홈부르크에서 튀빙겐으로 강제 이송된 1806년까지 휠덜린이 새롭게 무엇을 썼는지 명확하게 구분해 말하기는 어렵지만, 몇몇 초안, 단편을 쓰고 앞서 쓴 시들을 부분적으로 가필하거나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시인으로서의 반평생은 여기서 막을 내린다. 나머지 36년을 그는 튀빙겐의 소위 휠덜린 옥탑에 은거한 광인으로 살았다.
그러나 왕성한 시 창작기의 전후에 쓴 작품들도 읽어야 하는 명백한 이유가 있다. 휠덜린의 시 창작단계들은 뚜렷이 대조를 이루며 구분되고 각 단계마다 고유한 세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매 단계가 '세계 속의 세계'인 것이다.
학창시절: 현실을 바꾸어보려는 꿈과 열정으로 채우다
중등학교 시절(1781~1788)의 시들은 비록 시적 가치는 아직 미미했지만 경건주의라는 종교적 배경을 둔 시 세계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때의 작품들은 덴켄도르프와 마울브론 수도원학교의 생명적대적인 편협성과 엄격성에 고통을 표현하고, 멜랑콜리한 고독의 감상, 우정의 절실함, 내면으로의 은신 그리고 원대한 명에욕을 노래하고 있다. 이 명예욕은 위대한 문학적 성취라는 목표를 향해 가는 가운데 다시 내면에 형성된다. 그가 모범으로 삼은 것은 클롭슈토크와 '괴텡숲 결사',슈바르트와 초기의 쉴러, 세계고문학과 페허문학이었다. 이러한 시인의 기본 태도는 그가 튀빙겐 신학교에 입학한 1789년까지도 유지된다. 휠덜린은 신학을 공부하기로 약속하고 다니게 된 뷔르템베르크의 수도원학교(이들 가운데는 헤겔과 셀링이 포함되어 있었다)과 함께 1793년 말까지 튀빙겐 신학교를 다녔다.
1790년 이미 공화적 사상을 품은 신학교 동료들이 감동적으로 환영해마지 않았던 프랑스대혁명과 칸트의 비판철학과의 만남, 그리고 그리스 문학과 철학의 수용이 휠덜린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이 새로운 상황과 전망의 세계는 이 시기 휠덜린문학의 음조를 결정해준다. 이른바 '튀빙겐의 찬가들'은 혁명적으로 해방된 인간이라는 이상을 노래한다. 자유, 평등, 박애가 그것이다. 따라서 정치적-사회적-정신적으로 속박에서 해방된 인간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 <인류에 바치는 찬가>(1791)는 이 시기의 핵심적인 텍스트이다. 이 찬가는 '튀빙겐 찬가들'의 호소구조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제 1~8행에 이르는 짧은 서주, 제9~10행에 이르는 역사적 모법과 인물에 대한 담론, 제41~80행에 이르는 당대인들을 향한 경고의 시구 그리고 제81~88행에 이르는 간결한 종결구로 구성되어 있다. 경고의 시구들을 통해서 휠덜린은 예지적인 시인으로서 정치적, 공개적인 입장 표명의 가능성을 얻고 있다.
예지적 시인은 사회의 개혁을 촉구한다. '튀빙겐 찬가들'을 이끌고 있는 주도적 개념은 "조국"이다. 휠덜린 자신은 이 개념을 민족적인 것으로 국한하려고 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념적-정신적인 본향으로서의 조국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독자의 입장에서 이념적인 조국의 정치적인 측면을 배제할 수 없는 일이다. 베르디토도 이러한 사실을 지적한다. "당대의 언어 사용법에서 '귀족 대 애국자'라는 대립각은 유효했다. 이것이 후일 휠덜린의 조국이라는 단어에 하나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즉 귀족들과 종들은 어떤 조국도 가지고 있지 않다. 오로지 자유로운 인간들만이 조국을 지닌다. 이것이 혁명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튀빙겐 신학교 시절의 찬가들에서 조국은 혁명적인 투쟁의 개념으로 채색된다. 현존하는 권력 관계들은 실질적으로 혁신의 대상이다. 하나가 된 형제들의 결합이 "독재자들에게 인간의 권리를 상기시키고". 팔려가는 노예들에게 자신을 주장할 "용기"를 가지게 한다 (<불멸에 바치는 찬가>). 조국은, 귀족이건, 성직자이건, "그런 도적들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인류에 바치는 찬가>). 평등권, 계급사회 해체, 인권의 공고화에 대한 정치적 요구는 자결(自決)이라는 계명에 근거한다. "우리 안의 신이 지배자로 모셔졌다"(<인류에 바치는 찬가>) 인간이 신과의 유사성을 대면하고 날조와 상실의 현재적 징후들은 마땅히 제거되어야 한다. 휠덜린은 '튀빙겐 찬가'을 통해서 혁명을 신적 질서의 재현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적 조국 사상은 18세기를 특징짓는 우주적 조화라는 사상에 접합된다. 쉴러의 <환희에 부쳐>가 이에 대한 하나의 범례이다. 이러한 우주적 조화 사상은 '튀빙겐 찬가들'인 <조화의 여신에 바치는 찬가>와 <사랑에 바치는 찬가>에 잘 표현되어 있다.
모든 각운을 갖춘 이 찬가들은 사실적인 것을 이상적인 추상세계로 승화시킨다. 이 세계는 시어 "그리하여"같은 접속사 또는 "보라!"나 "아!" 같은 감탄사로 예고된다. 경고로부터 축제적인 전망으로, 찬가적인 환호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찬가적인 결구들은 명백하게 현재를 넘어선다. 억압, 분열과 고립을 초월하고 충만한 미래의 영상을 내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환호하라,승리의 도취여!
우리는 예감했었노라 - 그리고 마침내 이루었도다.
영겁의 시간에 어떤 힘도 이루지 못한 것을 -
<인류에게 바치는 찬가> 중에서
이렇게 하여 휠덜린의 문학은 한층 넓은 지평을 바라보게 된다. 이미 오피츠가 <독일의 시문학서>에서 찬가문학의 대상으로서 추상적이며 신화적인 요소들의 가치를 든 이래, 고독에 바치는 찬가, 기쁨에 바치는 찬가, 영원에 바치는 찬가 등으로 그 노래의 대상은 확장되었으며, 휠덜린의 튀빙겐 찬가들은 이러한 경향을 증언해주고 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