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편 1장:내가 1937년 12월 16일에 태어나다
내 고향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장호원에는 어디를 봐도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매산중턱에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는 고틱식의 성당입니다.
이 성당은 1920년대에 프랑스 신부님이신 임신부님께서
지으셨는데 서울 명동성당 버금가는 멋진 성당입니다.
1920년경에는 장호원은 작은 시골이었고 중심가에만 기와집과
초가집들이 모여 있고 그 외에는 한적한 벌판이었다고 합니다.
장호원 시내에는 강이 흐르는데 (후에 강이 얕아져 냇물로 변함) 장호원을 둘로 갈라 놓았습니다.
후에 강을 건너기 전을 충북 음성장호원이라고 하고
강을 건너면 경기도 이천장호원이라고 합니다.
조그만 동네가 둘로 갈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일제시대이기에 그냥 다
충북 음성 장호원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1937년 12월 16일에 아버지 정태일 (루가)와
어머니 민유순 (데레사)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태어난지 3일 안에 임 신부님으로부터
임마누엘 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후에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그때 장호원에서는 가장 행복한 가정으로 소문이 났었다"
라고 하시며 모두 우리집 가문을 부러워 했다고 합니다.
잠시 시간을 뛰어넘어 내가 청주 교동국민학교 4학년일 때
어머니가
"세근아"
"응 엄마"
"내일 나하고 장호원 외삼촌집에 가자"라고 하시기에
"왜?"
"네 외삼촌 딸이 결혼한단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청주에서 기차를 타고 음성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무극을 지나 장호원에 이릅니다.
우리가 다리 건너 이천장호원 외삼촌 집으로 가자 다른집들은
거의 초가집인데 외삼촌집은 늘늘이 기와집입니다.
어머니가 솟을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가자 마당에는 천막이 쳐져 있고
많은사람들이 결혼준비하느라고 여념이 없습니다.
이때 마당에서 부치개를 부치던 부인이 우리를 보고 반가워 하며
"아니 얘가 그때 똥을 쌌다고 하던 아이인가요? 많이 컸네 !"
라고 하시는데 이 순간 어머니의 표정이 싹 변하면서
고개를 홱 돌리고 나를 끌고 방으로 들어갑니다.
나는 이제까지 이런 모습을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일을 금방 잊어버립니다.
그 후 내가 어른이 되었을때 병원에 가서 나의 몸을 검사하자
의사가 나의 오른쪽 다리를 엑스레이를 찍어보더니
"어떻게 이렇게 되었어요?"라고 묻기에
어머니가 나에게 귀가 닳도록한 말을 그대로 했습니다.
"제가 홍역을 앓을 때 삼이 들어간 약을 먹였더니
열이나서 이렇게 되었대요"
"그게 아닌데요, 어떤 큰 물리적인 충격이 아니면
생길 수 없는 상처입니다"라고 하는데
나는 3살때 다친 다리때문에 장애자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오른쪽 다리 엉덩이와 허벅지 쪽에는 아직도 살이
쑥 들어간 깊은 곳에 직경 2.5mm의 큰 상처가 아직까지
2개가 남아 있고 다리가 가늘고 짧습니다.
나는 나에게 생긴 다리의 상처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는데 의사의 말을 듣고보니 그때 펏득 생각이 난 것은
"얘가 그때 똥을 쌌다고 하던 아이인가요?"라는 그 말입니다.
내 다리와 똥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나는 추리를 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제19편 1장 끝
제19편 2장:우리집의 모든 비극의 중심에는 내가 있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단 한가지뿐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무릎에 앉히고 장호원강에서 잡은 잉어살점을
수저에 올려놓고 먹여 주시던 그 한 번의 장면만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바로 옆의 성당에서 울려퍼지는 종소리가 귀에 익습니다.
그 다음에 기억이 나는것은 어머니가 나를 포대기로 싸서 안고
장호원 읍내를 돌아다니며 병원으로 들어가는데, 간호원으로
보이는 여자가 다른데로 가라고 쫓는 장면입니다.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어느 기와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동네의 한 집으로 들어가 방에 누이는데,
주인 아저씨가 마구 소리치며 야단치는 것입니다.
"이 망할놈의 새끼같으니라고, 이 천하에 고얀놈 같으니라구 !"
어머니가 나를 방에 누이고 밖으로 나가고
주인아저씨도 밖으로 나가고 나만 남았습니다.
내가 상반신을 일으켜 내 모습을 바라보는데 포대기로 싼
다리쪽으로 시뻘건 피가 가득 묻어 있는게 보입니다.
그리고 그 후 의식이 없습니다.
후에 안 일은,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충주로 달려가 병원에서
수술을 하였는데 그때가 내가 3살되던해인 1939년입니다.
그무렵의 한국 의사들의 수준이 얼마나 원시적이었는지
나의 피투성이 된 오른쪽 다리를 수술하는데 엉덩이 관절을
잘못 맞추어 그때부터 몹시 아파 신음을 내며
평생 다리의 아픔 속에서 살게 됩니다.
"얘가 그때 똥을 쌌다고 그러던 아이인가요?"에서
내가 어떻게 똥을 어디에 쌌길래 그러는가?
그 무렵 나의 아버지는 장호원에서
가장 잘나가는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일본인의 금융조합에 근무하며
일본 문화에 흠뿍 빠진 친일파였다고 합니다.
나는 후에 아버지가 멋진 양복을 입거나
일본의 기모노 옷을 입고 게다짝을 신고 다닌 사진이 있었고
일본인과 테니스를 치거나 사냥을 다니던 사진이 있고
일본인과 마작을 두거나 무슨 이상한 악기를 연주하는
사진을 봤습니다.
후에 들은 소문에는 아버지가 일본인들과 어울리며 기생집도
드나들고 장호원을 휩쓸고 다니는 한량이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회사에서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외에 또 다른 문제로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집에와
나를 안았을때 내가 아버지의 멋진 양복에 똥을 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추리해 봅니다.
아버지가 순간 화가 나서 나를 집어내 던졌을까?
아니면 어떤 다른 물체로 나를 가격하였을까?
아무리 악한 아버지라도 아기가 똥을 쌌다고 하여
그렇게 화를 낼 수 있을까?
내가 보지 않은 이상 알수가 없습니다.
내 다리가 무엇에 밟히거나 충격을 받아 뼈가 튕글어 졌을까?
그리고 X_RAY 사진을 보면 사타구니 앞의 8자로 보이는
방광뼈의 한쪽이 우글어져 있는데 이는 상당한 충격이 아니면
생겨날 수 없는 모습입니다.
그곳을 누가 밟았는가?
지나가다가 모르고 밟았는가?
혹시 아버지가 술에 취해 나를 밟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것이 가장 가능성있는 해답으로 보입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로부터 호된 야단을 맞고 집을 나가버립니다.
아버지는 금융조합에서 돈을 다 찾아가지고 집을 나가
기생집에서 기거하며 돈을 다 탕진하고 아편 중독자가 되어
몇달만에 집에 돌아와 한달 후에 죽었다고 합니다.
이 모든 비극 앞에는 내가 있습니다.
그 후 우리집 가문이 붕괴되는데 그 중심은 바로 나입니다.
6.25 피난 때도 내가 중병에 걸려 어머니가 나를 업고 피난을
가다가 돌아가시는데 그 앞에는 항상 내가 있습니다.
내가 우리집 가문을 망가뜨린 장본인입니다.
제19편 2장 끝
제19편 3장:가산을 정리하고 우리는 무극 삼촌집으로 가고 어머니는 서울로
내가 3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우리 삼형제의
앞날이 걱정이 되어 우리들을 충북 음성군 무극면의 삼촌집에
맡겨두고 가산을 정리하고 삼촌에게 충분한 양육비를 드리고
어머니는 단신 경성(서울)으로 올라가서
낮에는 직장에 다니고 밤에는 야학에 다닙니다.
무극 삼촌집에는 초가집이고 방이 3개인데 둘은 삼촌가족들이
쓰고 사랑방에는 할아버지와 우리 3형제들이 사용합니다.
삼촌은 어머니가 드린 양육비를 노름으로
다 탕진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다리가 아파 하루종일 누워 칭얼거립니다.
1940년 내가 4살이 되었지만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고
맨날 다리가 아파 울면서 지내는데, 할아버지가 보다 못하여
나를 업고 서울로 올라와서 어머니에게 맡기고
할아버지는 바로 무극으로 내려 가십니다.
어머니는 나를 업고 어느 기와집이 많은 동네의
골목으로 들어갑니다.
어느집의 대문 앞에서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어머니가
쓰는 방은 아주 작아 어른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입니다.
어머니는 나를 방에 뉘이고 무우로 죽을 쑤어 내 머리맡에
덮어 놓고 "이따가 배가 고프면 먹어라"고 하시며
새벽에 출근을 합니다.
그리고 밤 9시가 넘어서 들어오십니다.
나는 누워서 밖의 골목길의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만 듣고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중에
어머니의 발자국 소리를 기억해 냅니다.
"또박 또박"
어머니가 대문 앞에서 잠시 머물고 대문을 열면
"삐꺼억 !"하는 소리가 납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성급하게 "얘 세근아?"하고 부르면
나는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아 엉엉"하고 웁니다.
어머니가 들어와 나를 껴 안고 어머니도 웁니다.
이런 생활을 하다가 어느날은 "얘 세근아?"라고 나를
불렀는데도 불꺼진 방에서는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제19편 3장 끝
제19편 4장:내가 죽음에서 살아나다.
어머니가 방에 들어와 전등을 켜고 보니
내가 싸늘하게 죽어 있었다고 합니다.
심장도 뛰지 않아 아예 병원은 생각지도 못하고 성당으로
달려갔는데, 아마 명동성당인것으로 보아
어머니가 사는 동네도 남산밑의 한옥 마을 같았습니다.
후에 어머니가 나에게 이 이야기를 다 해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신부님을 모시고 올려했지만 신부님이 출타중이어서
수녀님 두분을 모시고 집으로 오는데
"혹시 모르니 의사에게 왕진을 부탁해 봅시다"라고 하며
의사를 모시고 집에 왔다고 합니다.
의사는 가망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고 무슨 주사를 한대
놔주며"2시간 후에 깨어나지 않으면 장례를 지내야 합니다"라고 한 후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나는 그때의 일을 아주 소상히 기억을 합니다.
내가 마치 잠을 깬 듯이 뿌시시 일어나 앉았는데
어머니가 서서 울고 있었고 검은 옷을 입고 머리에 부풀어 올린
하얀 꼬갈모자를 쓴 수녀님 두분이 앉아 있는것이 보입니다.
수녀님이 반가워 하시며 어머니가 사다놓은
미루꾸(캐러멜의 일본말) 한갑을 내 손에 쥐어주는데
그게 그렇게 반가운 것입니다.
또 다른 수녀님이 나에게 미깡(귤의일본말)을
하나 쥐어 주자 내가 좋아하였습니다.
그때의 기억은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 후의 기억은 어머니가 나를 다시 업고
충북 음성군 무극면의 삼촌집이었습니다.
내가 또 매일 칭얼거리고 옷에 똥을 싸고 하니
작은 어머니와 가족들이 나를 이뻐할 리가 없습니다.
그당시 옷 하나가 얼마나 귀하고 가난하여
달랑 입은게 전부가 아닌가?
그런 옷에 맨날 똥을 싸니 내가 미움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비누도 없던 시대입니다.
할아버지는 나를 불쌍히 여겨 침쟁이를 불러
내 아픈다리에 침을 자주 놓습니다.
그 덕 때문인지 내 다리의 아픔이 줄어 들었지만
아직 아프고 걸음을 걷지 못합니다.
내가 계속 똥을 싸고 울자 삼촌이 나를 발가벗겨
추운 겨울의 눈위에 나를 앉혀 놓기도 하고
어느날은 숙모가 화로에 꽂힌 뜨거운 부젓가락을 나에게
냅다 던지는 바람에 부젓가락이 내머리의 뒤통수에 꽂혀
버리는 일이 일어나 또 애를 먹습니다.
지금도 내머리 뒤통수 중간의 아래에는 구멍이 뚫린채
해골이 메워지지도 않고 말랑말랑한채 아직도 남아 있고
만지면 찌릿찌릿합니다.
(훗날 심촌과 숙모는 벌을 받아서인지 반신불수가 되어
10년간 고생하다가 죽습니다)
내가 5살이 되자 지팡이를 잡고 걸음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지팡이 없이도 걸음을 걷게 됩니다.
제19편 4장 끝
제19편 5장:한국인의 수가 줄어들기를 바라는 일본인들
내가 5살이 되었고 걸음을 걷자 숙모가 바구니를 하나 주며
"논에 들어가 벼 이삭을 주어 오너라"고 하십니다.
나는 논에 들어가 논에 떨어진 벼 이삭을 주워 오자
숙모가"오늘은 밥값을 했네"라고 합니다.
내가 6살이 되고 봄이 오자 숙모가 호미를 주며
"밭에 가서 밭을 매거라"고 하십니다.
삼촌네의 9명의 형제들 중에 6명이 국민학교에 다니고
우리 두명의 형제들도 무극 국민학교에 다니는데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모두 일본말을 합니다.
형들은 집에와서도 일본 노래를 부르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갓떼 구르사또 이사마시꾸`라는 노래와
`기미가요 `일본국가를 아직도 부를줄 압니다.
학교에서는 매일 일본을 향하여 절을하고
기미가요를 부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두 한국 이름도 일본말로 개명을 합니다.
내 이름은 `세이꼬`입니다.
가을이 되면 농민들이 농사지은 것을 절반이상을 걷어가는데
이를 `공출`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다음해에 곡식이 다 떨어져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굶어죽는 자들이 많이 나옵니다.
한달에 두번씩 무장한 일본 순사가 한국인 안내자를 앞세워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정리 정돈이 잘 되어 있는지
검사를 하고 잘못되었으면 주재소를 끌려가 애를 먹습니다.
후에 안 일은 일본은 이렇게 지능적으로
한국인들을 꼼짝 못하게 관리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순사가 온다고 하면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고
깨끗이 하는데 그러면 순사가 와서 고개를 끄덕이며
벽에 합격이라는 딱지를 붙여 줍니다.
동네의 어느 집에서는 예쁜 딸을 일본으로 데려가
교육을 시킨다고 강제로 데려가기도 합니다.
훗날 알게 된 것은 그것이 바로 위안부였습니다.
1940년대에는 우리나라 모든 가정의 위생관념이
전무한 상태입니다.
일본인들은 우리국민들에게 위생문제에 대하여
하나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그것은 우리나라 각 가정에는
아이들이 보통 7~8명 이상 낫는데 그들이 다 자라는게 아니고
한두명은 병에 걸려 죽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배앓이를하고 어른들도 매일 살사를 하며
살기에 60만되어도 장수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비누도 없었고 각 가정의 부엌의 부뚜막위에는
작은 옹기 항아리그릇이 있는데 그것을 자싯물 그릇이라고 하여 그 하나에서 설거지를 합니다.
모든 그릇을 그곳에서 닦고 다시 맑은 물에 행구지 않고
더러운 퀴퀴한 냄새가 나는 행주로 물기를 쓰윽 닦으면
설거지 끝입니다.
그런 그릇으로 음식을 먹으니 모두 배탈이 납니다.
일본인들이 그걸 모르지 않습니다.
일본인들은 빨리 한국인의 수가 줄어들기를 바랍니다.
한국을 완전히 일본화 하기 위함입니다.
아이들이 맨날 배가 아프다고하면 할머니가 아이들 배를
쓰다듬어 줍니다.
그러면 아프지 않게 되니 `할머니 손은 약손` 이라는
말이 생겨납니다.
제19편 5장 끝
제19편 6장:어머니가 우리를 데릴러 오시다.
내가 7살이 되고 8살이 될때 집이 너무 가난하여
좁쌀로 죽을 쑤워 먹는데 할아버지는 멀건 죽을 후루룩 마시고
밑에 가라앉은 건더기를 나에게 주시는데나는 철이 없어 그것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어머니가 그동안 서울 생활을 접고 충북 청주로 내려와
집을 얻고 우리를 데릴러 오셨습니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회충약을 먹였고 이를 닦아 주시는데
이가 다 썩었다고 합니다.
다음날 내가 마당에서 똥을 누웠는데 똥이 아니고
돌돌뭉친 회충들이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그런것을 여러번 봤기에 나는 하나도 놀라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어머니는 우리 삼형제들을 데리고 무극을 떠나 12km인
음성으로 가는데 나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 갑니다.
음성에 이르러 어느 한적한 곳의 여인숙에 머뭅니다.
내일은 기차를 타고 청주로 간다고 합니다.
나는 오래간만에 엄마의 품 안에서
엄마의 가슴을 만지며 잠을 잡니다.
나에게는 더 없이 행복한 밤이었습니다.
다음날 새벽에 우리는 여인숙을 나와
음성 정거장으로 가는데 꽤 멉니다.
신작로가 곧게 뻗어 있고 양쪽에는 논에서 벼가 자라고 있습니다.
이때 늑대의 무리가 몇마리는 신작로로 오고
몇마리는 논둑길로 옵니다.
"엄마 늑대야" 작은 형이 말을 합니다.
우리는 무서워 조심스럽게 가는데 늑대들은 겁도 없이
우리옆을지나며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 보고 그냥 지나갑니다.
우리가 무극에 살때 날만 어두우면 늑대의 때가 동네로 몰려와
일제히"우....."하고 울면 겁이나서 사람들이 밖에 나가지
못합니다.
동네로 마실을 가려면 괭가리를 치거나 횃불을 들고 가야 합니다.
우리가 음성 기차역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그때 기차철로를 처음 봅니다.
그 좁은 철길로 큰 기차가 다닌다는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곧 멀리서
"삐익 ! 칙칙폭폭 칙칙폭폭"하며 큰 기차가 검은 연기를
내 뿜으며 길게 꼬리를 달고 오는데 어마어마 합니다.
기차가 멈추고 우리가 올라탔습니다.
크고 긴 방에는 사람들이 많이 탔습니다.
기차가 곧 출발을 하는데 이렇게 큰 차가 버스나 트럭같이
흔들리지도 않고 얌전하게 굴러가는게 아닌가?
"와 !"
나는 너무 신기합니다.
그렇게 하여 청주역에 도착을 합니다.
우리는 어머니 따라 정거장에서
가까운 수동에 갔는데 모두 기와집입니다.
어머니는 우리를 데리고 어느 기와 집으로 들어가는데
집이크고 너무 깨끗합니다.
방에 들어가니 천정과 벽이 네모 반듯하고 깨끗이 도배되어
있는데 무극의 우리가 살던 집은 파리똥과 빈대의 핏자국이
가득한데 여기는 너무 깨끗하여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여 어머니와 헤어진지 5년만에
좋은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된 것입니다.
두명의 형들은 학교에 들어갔고 나는 내년에 들어갑니다,
나는 8살이지만 자라다만 아이처럼 키가 작고 6살로 보입니다.
제19편 6장 끝
제19편 7장:내가 9살때 초등학교에 들어가다.
충북 청주시 수동의 우리집 앞에는 작은 개울이 흘러가고
개울 옆은 사꾸라맛지 라고 부르는 벚꽃길이 있는데,
벚꽃은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꽃이기에
우리나라의 모든 제방과 신작로에는 다 벚꽃나무를 심습니다.
일요일에는 어머니가 빨래를 하기위해 무침천으로 가는데
우리형제들도 따라가서 수영도 하고 물장구를 치며 놀거나
물고기도 잡습니다.
무심천의 폭은 거의 200m가 됩니다.
양쪽 제방에는 일본인들이 심은 벚나무들이 이미 고목이 되어
끝이 보이지 않고 봄에 꽃이피면 웅장하고 장엄해 보이기까지
하고 일본인들은 전등을 달아 밤벚꽃 놀이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방 밑으로는 잔디를 심어
소도 배지 못하여 아주 잘 가꾸어 놨습니다.
내가 어머니 옆에서 물 놀이를 하다가 물살이 너무 세워
내가 그만 물속에 빠져 떠내려 갑니다.
그러자 큰 형이 나를 들어 올립니다.
나는 8살이지만 자라다만 아이처럼 키가 작고
어려보여 아직도 6살쯤으로 보입니다.
나는 일요일에는 어머니 따라 성당에 가는데,
수동의 우리집 앞에서 50m가면 기차철로를 넘고
거기에서 100m를 가면 북문로 신작로가 나오는데
신작로 옆길로 들어가면 길 옆에 순천향 병원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청주중학교가 나오고
조금 더 가면 바로 천주교회가 나옵니다.
천주교회는 양철집이고 아주 작아서 남작해 보입니다.
마당에는 고목이 된 느티나무 2그루가 있고
버드나무 3그루가 있습니다.
내가 1945년에 학교에 들어갑니다.
청주시 교동국민학교1학년에 입학을 하는데
국민학생들이 3000명이라고 합니다.
우리집에서 아침에 학교에 가려면 1km를 걸어서 가야합니다.
나는 학교다니는 것이 참 좋습니다.
많은 아이들과 놀 수있고 친구가 된다는 것이 무척 기쁩니다.
그러나 꼭 좋은것만은 아닙니다.
내가 다리를 절룩거리기에 아이들이 나를 놀립니다.
"절룩배기야"
"이 병신아 "
그것까지는 그런대로 참을 수 있지만 나를 쫓아다니며
절룩절룩 흉내를 낼때는 너무 화가 나고 창피하기도 합니다.
전에 어머니는 나에게
"네가 다리를 저는 것은, 네가 3살때 홍역을 앓을때
삼이 들어간 약을 먹어서 열이 생겨 다리가 그렇게 된 것이란다"
라고 여러번 말을 하여 나는
`아 내가 홍역을 앓을때 삼든 약을 먹어서 그렇게 되었구나` 하고 늘 생각해 옵니다.
그리고 어머니뿐만이 아니고우리의 친척들이
마치 입을 맞춘듯이 모두 나를 보면
`홍역을 앓을때 삼이 들어간 약을 먹어 열이 나서
그렇게 되었단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후에 어른들이 다 돌아가시고 내가 어른이 되어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을때 의사에게 그 말을 하자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합니다.
나는 우리반 아이들이 나를 볼때마다 절름발이라고
놀리는 바람에 학교에 가는 것이 싫어집니다.
체육시간에는 더욱 싫어 화장실에 숨어 있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그동안 다리를 앓느라고 여러해 동안
누워서 지냈고 그런 아픔속에서 삼촌네 집에서
구박을 받느라고 그런지 항상 움츠러들고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왔고 열등감이 가득합니다.
그것이 내가 학교에 다니면서 더욱 나는 움츠러 듭니다.
제19편 7장 끝
제19편 8장:북한의 고도의 심리전
어머니는 영단(지금의 농협의 전신)에서 일을 하고
큰형은 청주 농업고등학교에 다니고
작은 형은 주성 중학교에 다닙니다.
나는 교동 국민학교에 다닙니다.
내가 4학년이 되자 조금씩 철이 듭니다.
학교 성적이 그동안 거의 꼴찌였다가
이제는 상위권으로 올라갑니다.
이 무렵에 우리나라 전국은 북한의 빨찌산들이 준동하여
몹시 시끄럽습니다.
이때 제주도에서는 학살사건이 일어나고 전남 여수와
순천에서도 빨찌산들의 행패가 일어나
사람들을 많이 죽이는 일이 일어납니다.
전국에서도 북한 빨찌산들은 난동으로 국민들이 애를 먹지만
날이갈수록 더욱 심하고 이때 김구선생이 암살을 당하는 일도
벌어집니다.
청주에서 산성에 숨어 있던 빨찌산들이 거의 매일 우
암산에 나타나 봉화불을 놓고 노래를 부르는데
그 소리가 확성기에서 흘러나와 소리가 하도 크기에
내가 그 노래를 배웁니다.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어
우리의 주검을 슬퍼 말아라
깃빨을 바라보아라 붉은 깃빨을 !"
이 노래는 그들의 혁명가였는데
나는 지금까지 그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는 산성에 숨어 있던 빨찌산들이
밤중에 청주 도청을 태워 버립니다.
사람들이 밤중에 총소리에 놀라 모두 밖에 나와
멀리 도청에서 우리 경찰들과 총질을 합니다.
그리고 도청이 불타는 장면을 봅니다.
다음날 나는 학교에 갔다가 학교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도청에 가 보니 큰 건물이 불에 타서 엉망입니다.
우리 경찰들이 많이 죽었다고 합니다.
나는 후에 알았지만 이것은 북한 공산당의 `심리전`이었습니다.
북한은 남한을 점령하려고 김일성이 쏘련을 드나들며 비행기,
탱크, 트럭,각종 무기들을 아무도 몰래 북한으로 실어나릅니다.
한국에는 해방 후 미군들이 각지역에 많이 주둔해 있었지만,
그리고 한국은 그동안 36년 간이나 일본의 식민지로
압박을 받고 있었는데 일본이 패망하느라고
한국에 와 있던 일본인들이 모두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미국은 사실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을 해방시켰기에
한국을 통일 시켜줄 국제법상의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에 와서 본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인재가 하나도 없고.지하자원도 없고
뭐 하나 나라를 세우고 지킬만한 자가 하나도 없는 것을 보며
한국을 통일시켜봐야 운영도 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더구나 북한은 이미 쏘련의 세계 공산화전략으로 북한이
공산당이 되었기에 북한은 건들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자 한국에 주둔한 미군들은 태평년월을 노래하며
한국 여자들이나 건들며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데
미군이나 한국인들은 매일 빨찌신의 사건으로
거기에만 정신이 팔려 지금 북한이 뭘 하는지 조차 모릅니다.
그렇게 1950년 이 돌아옵니다.
나도 이제는 교동국민학교 6학년이 되었습니다.
나의 큰형은 학교에서 수재로 통합니다.
그리고 영어를 아주 잘 하여 청주에 머물고 있는 미군들과 친하게 되어
미군들과 놀다가 쵸컬릿 같은 과자를 얻어오기도 합니다.
한국에는 짙은 전운이 감돌고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제19편 8장 끝
제19편 9장:1950년 6월 27일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나라를 지켜야 하는 고위정치인들이나, 군 장성들이나,
한국 유명인들은 태평스럽기만한 한국이 자기들만의 나라인양 일요일만 오면, 숨겨진 요정에 모여 기생들을 끼고 밤이 가도록 즐기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5년간이나 비밀스럽게 계획해 오던 남북통일을 이루기 위해
세벽 4시에 탱크를 앞세운 북한 군인들이 38선을 넘어
남한을 침공한 것입니다.
그러자 이승만 대통령은 라디오 방송에서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 북한 인민군들이 38선을 넘어
새벽에 남한을 쳐들어왔습니다.그러나 아무 걱정하시마시오,
용감한 우리 국군들이 곧 물리칠 것입네다."
그러나 서울이 아틀만에 함락이 됩니다.
그러자 이승만은 수원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대전으로 도망을 칩니다.
우리국군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국민따위의 안전에 대해서는
생각이 없고 적들이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바로 다리를 끊어놓는게 일입니다.
그러나 적들은 미리 그럴줄 알고
거기에 대한 준비를 다 해놓은 상태입니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것은 우리 군인들은
무조건 다리먼저 폭파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고통을 받는자들이 바로 국민입니다.
한강, 금강 ,낙동강등 남한의 모든 강을 후에 다 끊어 놓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국군들의 작전인가?
1950년 6월 27일 나의 교동 국민학교의 마지막 수업입니다.
"어린이 여러분 !
선생님이 다시 나오라고 할때 까지 학교를 쉽니다."
그러자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 아이들은 쉰다는 말에
신이나서 소리지르며 밖으로 뛰쳐 나갑니다.
쉰다는 말이 그렇게 좋은가 봅니다.
그러나 나는 갑자기 눈 앞이 캄캄해 지고
하늘이 하얗게 보입니다.
전신의 힘이 다 빠져 나가고 아무데서나 드러눕고 싶어집니다.
나는 넓은 교정을 지나고
학교 밖으로 나오는데 바로 신작로 입니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 밑을 보며 길을 건느는데,
트럭이 `찌익 ! `미끌어지듯이 급정차하며 내 몸에 살짝 닿습니다.
나는길을 건너 집으로 오는데 집이 수동이 아니고 얼마전에
우암동으로 옮겼는데 학교에서 2km의 거리입니다.
나는 사력을 다하여 집에 이르러 문지방을 넘지못하고
(한국의 모든 집들은 문지방이 있었습니다.)
마루에 쓰러져 정신을 잃습니다.
큰 형이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나를 발견하고
밖으로 뛰쳐나가 공중전화로 어머니에게 전화를 합니다.
어머니가 놀라 달려옵니다
제19편 9장 끝
제19편 10장:42도 2부의 고혈로 의식을 잃다.
어머니가 영단에서 달려와 나를 들쳐업고 병원으로 가서
내가 깨어 납니다.
병원에서는 나의 병이 `학질`(말라리아)이라고 오진을 합니다.
그때는 많은 사람들이 학질에 걸리는데
그것을 하루걸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학질의 특효약이 `키니네` 라고 하여
나는 아직도 기억을 할 만큼 유명한 약입니다.
내가 키니네를 먹어도 나의 병이 낫기는 커녕
점점 더 심해져 갑니다.
어머니는 청주시내의 병원이란 병원은 다 다녀봤지만
모두 하나같이 학질이라고 합니다.
한방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람들은 피난을 가기 시작하는데 어머니는 애가 탑니다.
정부에서는 피난가라고 다그치며 북한군인들이 탱크로
사람들을 깔아뭉갠다고 겁을 주어 다 피난을갑니다.
그때가 1950년 7월 3일쯤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열이 40도 까지 올라가더니 나중에는
42도 2부까지 올라가 내가 의식을 잃었다고 합니다.
나의 생명은 그야말로 꺼져가는 촛불입니다.
어머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쩔쩔 매는데
이때 어느 사람이 "성당 가는 길목에 `순천향 병원` 이 있는데
거길 가 보세요 용합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병원은 나도 어머니 따라 성당에 가느라고 수도 없이
본 병원인데 새로 지은 병원이 아니고 아주 작은 기와집입니다.
간판도 아주 작습니다.
누가봐도 `별로 유명하지 않은 병원`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지금 어머니는 그것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나를 업고 순천향 병원으로 들어가자 여자 의사가
피난가려고 보따리를 싸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여자 의사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하신 분입니다.
죽어가는 나를 보고 그냥 포기할 분이 아닙니다,
그 의사는 몇가지 검사를 한뒤에
"이 병은 `척추뇌막염` 입니다.'라고 하며
바로 수술로 들어가 나를 기어코 살려 냅니다.
나는 후에 그 유명한 `순천향 병원`에 전화를 걸어
그때의 그 병원이냐고 물어보자 `아니` 라고 합니다.
다음날 어머니는 나를 들쳐 업고 피난을 갑니다.
제19편10장 끝
(계속해서 제19편11장이 연재되오니 많은 구독 바랍니다.)
제19편11장:제가 써야 할 제 일생의 글은 다 썼어요
제가 6.25 이야기를 쓰려고 하다가
다시 살펴 보니 전에 이미 다 썼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제 일생의 모든 이야기들을 여기에 다 기록을 하였습니다.
나이가 많아 그런지 자꾸만 쓴 글을 또 쓰고 또 썼기에
독자들에게 죄송합니다.
이제 제 일생에 관한 이야기는 멈춥니다.
그외의 다 쓰지 못한 이야기를 찾거나 혹은 제가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나 쓰려 하오니 널리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곳의 다른 글도 읽어보겠습니다.
그동안 뭐가 그리 바쁜지 다른 좋은 글도 읽지 않고
돌아다닌 것에도 죄송하게 생각을 합니다.
이곳 한국은 지금 밤 2시 50분입니다.
제가 낮에 잠을 자기도 하고 저녁에 일찍 잠을 자기에
밤중에 일찍 깹니다.
그리고 가장 조용할 때 글을 씁니다.
정신 집중하기에 좋은 시간입니다.
제가 올해 83세인데,몸의 불구자가 이렇게 오래 산다는 것은
주님의 큰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
몸의 어느 한 부분이 손상되면 수명이 짧아지는 것은 당연하지요
저는 애초에 많이 살아야 65세까지밖에 못 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덤으로 오래 살다니
분명히 주님의 은총이 아니고는 불가능 합니다.
지금 제가 3살때 다친 오른쪽 다리는 짧고 가늘고 약해
절룩 거리며 걷습니다.
평생 그렇게 해 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항상 의문을 갖는 것은 주님께서는 제가 어디에
쓸모가 있다고 수명을 이렇게 늘려주시는가? 입니다.
제가 똑똑하고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 입니다.
혹시 하느님께서 우리집 식구들을 일찌기 다 빼앗아가서
저에게 미안하여 오래살게 내 버려 두시는가? 라고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하느님께 원방스러운 일이 있는데
그것은 저 하나 때문에 저희집 부모님과 형들이
다 일찍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일찍 죽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하느님께 원망을 많이 합니다.
저도 이제 머지 않아 죽게될 것입니다.
아무 공을 세운 것도 없이 죽으면 주님앞에 가서
뭐라고 해야 할지 그것도 걱정입니다.
벌써 밤3시가 넘었네요 이제 그만 마치겠습니다.
모든 분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빌며.....
제19편 12장:에필로그
1955년에 서울 매형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나는 청주로 내려 왔습니다.
그리고 청주에 하나밖에 없는 북문로3가 천주교회에는
미국 메리놀 신부님들이 충북을 관장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때 성당에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야간 중학을 다니고 야간 고등학교를 다닙니다.
1961년에 고등학교 3학년이 됩니다.
나는 그동안 피아노를 배우고 음대에 갈 준비를 하느라고
다른 공부는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음악이나 미술이나 무용 하나만 잘 해도
대학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해에 5.16 군사 쿠테타가 일어나
박정희군인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나중에는 그가 민간인으로 대통령이 되었고 문교시책을
뜯어고치는 바람에 대학에 가려면 먼저 국가 예비고사에
합격을 해야만 했는데 나는 음악공부만 하느라고
도저히 자신이 없어 음대를 포기합니다.
그무렵 청주에는 3개의 성당이 새로지어집니다.
내덕동 교구청성당,
수동의 천주교회
그리고 서운동 성당이 세워지고 나는 서운동 성당으로 갑니다.
초대 유 (fred,Luhmann) 신부님이 오셨고
다음해에는 길 (James,Gilligan)신부님이 오셨는데
제가 겪어본 신부님중에 가장 악한 신부님입니다.
내가 그에게서 2년간 있었지만 그는 한번도 웃지 않았고
농담 한 번 하지 않았고 항상 나를 미워하고 내가 나가주기를
바랬지만 차마 나가란 말은 못합니다.
그는 전부터 데리고 다니는 한국인 식모가 있는데
그 식모말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는 좀 괴팍한 신부입니다.
식모는 성당의 모든일에까지 관여하여 고안드레아회장,
임 데레사회장,최로살리아회장님들이 애를 먹습니다.
어느날 신부님 캐비넷 속의 돈이 없어졌다고
길신부가 나를 경찰에 고발을 합니다.
그때는 내가 너무 순진하고 바보같아서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미국에서는 증거없이 함부로 범인 취급을 못합니다.
그러나 아무 증거없이 나를 경찰이 데려가 조사하라고 했습니다.
나는 경찰서로 끌려가 밤 9시까지 문초를 받습니다.
그때의 경찰은 지금의 현대화된 경찰이 아닙니다.
아무 증거를 찾지못한 경찰이 나를 보고 가라고 합니다.
내가 휘청거리며 밖에 나와 전봇대를 끌어안고 한동안 쉬는데
바지가랭이로 아까 싼 똥이 흘러내립니다.
나는 전봇대에 소변을 보고 집으로 옵니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밤중에 성당으로 가서 길신부를 만납니다.
나는 한손을 들어올리고 선서하듯이
"신부님 왜 저를 의심하세요? 저는 하느님깨 맹세하지만
돈을 훔치지 않았어요"라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래도 신부는 나를 믿지 않았습니다.
나는 다음날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가 10년간
노숙자 생활을 합니다.완전한 거지입니다.
"내가 살아야 할만큼 가치가 있는가?"
나는 자살을 합니다.
그때 나를 구해주신 분이 서울교구의 김택구 신부님이십니다.
세월이 지나고 또 지나고 2019년 1월이 왔습니다.
나는 서울 광진구 중곡동에 있는 "메리놀 외방전교회 한국지부의
원장신부님이신 함제도 (제랄드)신부님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나를 도둑놈으로 경찰에 고발한 길신부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라고 묻자 함신부님이 집으로 답장을
보내주었습니다.
"길신부는 여러해 전에 죽었습니다. 제가 대신 사과 드립니다"
러고 합니다.
내 목에 걸어준 멍에를 벗겨주지도 못하고 죽다니 !
2003년에 그 무렵 청주서운동의 원장 수녀님이셨던 이 아가다
수녀님이 나의 집을 수소문하여 알아가지고
강원도 덕풍계곡의 우리집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신부님방의 돈을 훔쳐간 사람이
사무장이던 강요셉이었어요"라고 합니다.
-끝-
-그동안 구독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9년9월13일(금) 형광등등 씀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청송(靑松) 카페지기 베드로 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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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7월22일(목)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청송(靑松)카페지기
베드로 문 拜上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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