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해 최수모의 청리초등학교 4학년 시절 담임선생님이셨던 차정숙선생님(당시22세/현재 85세)께서 법해의 타계 소식과 법해 유고 산문집 준비 소식을 듣고 아쉬운 추억과 그리움의 정을 글에 담아 보내오셨습니다.
<수모군! 자네가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여보게, 수모군!
자네가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지난해 2021년 여름, 사상 최고의 찜통더위가 물러나고, 가을이 문턱을 넘어오던 어느 날, 바람에 실려 온 자네의 소식은 너무 놀랍고 뜻밖이라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아 정신을 차리지 못했네. 자네가 소천을 하다니……. 처음엔 내 귀를 의심했지만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현실을 거역할 수는 없었네.
한 마을의 수호신처럼 우뚝 서 있던 버팀목이 무너지듯, 그렇게 강건하고 바위처럼 단단하던 자네가 이렇게 허무하게 쓰러지다니……. 아끼고 사랑하던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정들인 지인들을 두고 이렇게 무심히 떠날 사람은 아닐 텐데, 왜 이렇게 남 먼저 떠나야 하는가?
지난해에도 자네는 좋은 글을 써서 내게 보내면서 부족한 점을 지적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든가?
자네가 내게 보내 온 글들, ‘우리 오매에게 나는 신앙이었다’, ‘우리 아버지의 두 가지 별명’, ‘부처와 아내 사이’, ‘섭생’……. 이런 글들은 하나같이 가슴에 감동으로 와닿는 글이었다네. 자네가 보낸 수필은 모두 내가 뭐라고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주 잘 쓴 글이었네. 앞으로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겠다는 희망을 보았네.
자네의 글 속에서 부모님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읽었지. 또 속 깊은 아내를 부처님처럼 모시고 산다는 바다같이 넓은 자네의 마음을 읽는 순간, 정말 부처님은 아내가 아니라 자네가 맞다고 생각했다네.
언젠가 보잘것없는 내 글을 보고 눈물 콧물을 흘려 애꿎은 화장지만 찾았다는 자네의 말을 듣고, 그 큰 덩치에 여자처럼 울기는 왜 우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고맙고 미안한 마음, 그리고 부끄러운 생각까지 들어서, 참 혼란스러웠다네. 평소에는 과묵하고 말수가 적은 편으로 알았는데 속마음은 비단결같이 곱고 여리기만 하구나, 하고 생각을 했다네.
자네가 떠난 지 벌써 일 년. 다행히 뜻있는 친구들이 고마움 마음을 모아 자네의 유고집을 발간한다니 반가운 마음은 한이 없지만 슬프고 애통한 내 마음을 어찌 달랠 수 있을까?
그동안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님 모셨고, 자식들 위해 몸과 마음 다 바치고 살았으니, 이제는 남은 여생 자신을 위해 즐기면서 살아야 할 때인데, 이를 버리고 남보다 앞서 떠났으니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네. 자네보다 더 오래 사는 내가 미안하지만, 먼저 간 자네의 명복을 빌고 빌면서 지금부터 자네와 맺었던 추억을 되새겨 보겠네.
1959년 3월
내가 자네를 처음 만났던 청리초등학교 4학년 2반 교실. 나는 22살의 병아리 선생이고, 자네는 10살을 갓 넘은 까까머리 소년. 내가 처음 교실에 들어가니 60여 명의 남녀 혼합반 학생들이 새로 부임한 낯선 선생에게 대한 호기심으로 까만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네.
남학생 여럿 중에 몇 사람이 검정색 상의로 된 교복을 입고 있는 게 눈에 띄어서 ‘아 여기는 교복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네. 내가 있었던 전 임지 외남학교는 여기 청리보다 20리 떨어진 산골이라 차도 버스도 다니지 않아 기차 구경도 못한 사람들이 많은데, 이곳 청리는 기차가 다니는 철도 연변으로 인근 도시에서 통근하는 직장인들과 학생들이 드나드는 곳이라 도시 냄새가 난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네.
우리 교실은 교장실 바로 옆이라, 특히 조용히 해야 한다는 평소의 내 생각 때문에 나는 무척 긴장하였다네. 4학년이라면 한창 짓궂은 장난을 많이 하고, 복도를 뛰어다니거나 유리창 틀에 올라가서 뛰어내리기도 하는 남자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지. 신경이 많이 쓰여서 각별한 주의를 하도록 당부하면서, 앞으로 재미있는 학교생활을 하자고 다짐을 했네.
학년 초가 되어 새 교실에 환경정리를 한다고 분주하던 어느 날, 큰 사고가 났었지.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간 아이들이 청상마을 골짜기에서 놀다가 6.25 전쟁의 잔해물인 폭발물로 인해 사고가 난 걸세. 우리 학교 학생이 2명이나 숨졌는데, 그중 한 명이 우리 반 반장 김복수가 희생을 당했네. 그 끔직한 사고는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악몽이 되었다네.
그 반장의 후임으로 자네가 반장을 맡은 것 같은데, 63년 전의 일이라 기억이 희미해서 확실한지 모르겠네. 그 까마득한 때, 그 어리던 시절의 기억은 흐려졌지만, 그 후 50년이 지나고 우리가 만난 재회의 기쁨은 참으로 기적 같은 선물이었다네.
2007년 10월,
내가 70살이 되던 생일날 아침. 내게 낯선 택배가 하나가 배달되어 왔었네.
보낸 이는 이종각
받는 이는 차정숙.
처음에는 모르는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주저했지만 내 이름이 정확해서 조심스레 포장을 풀었더니 정성스레 싼 포장지 안에 양주 2병과 편지가 들어 있었네. 차정숙 선생님께 라고 쓰인 봉투를 열고 편지를 읽는 순간 나는 아!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네. 너무 기쁘고 고마워서
그 옛날 청리초등학교 4학년짜리 꼬마들이 어느새 60대의 중늙은이가 되어 나를 수소문해서 찾았다는 것이 너무 반갑고 고마워서 웃음이 나오더니 금세 눈물로 변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네.
서울에 사는 친구들이 모일 때마다 내 얘기를 하고, 드디어 찾아보자고 공론을 했다니 이보다 더 큰 호사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나에게 보낸 선물과 편지가 있고, 편지를 보낸 주인공들의 이름이 편지 마지막에 나란히 적혀 있었지. 나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네.
- 김길수 : 키는 작고 얼굴은 좁고 약간 검은 편
- 김진숙 : 여자라는 생각뿐이고 얼굴이 기억 나지 않음
- 이대호 : 키가 키고 얼굴이 길고 희다. 청상에 살고 폭발물 사고 때 나와 동행했음. 상주 농고에서 남편의 제자가 됨. 우리들의 신혼집 방문.
- 이종각 : 키는 중간, 얼굴이 동그랗고 귀엽게 생김.
- 최수모 : 키가 크다는 것 외에 별다른 기억이 없어 미안.
1968년에 남편이 진주교대로 발령받아 전근을 오면서 나도 사표를 내고 이사를 왔으니 그때부터 소식이 끊어져 행방불명이 된 나를 수사반장 이대호가 범인을 찾는 수법으로 나를 찾았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텔레비전에서 옛 스승을 찾는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너무 좋았네.
그해 가을 우리 부부는 고려수지침 학회에 참석하러 서울에 간다고 연락을 했더니 자네들이 남부터미널까지 마중을 나왔어.
“50년 전 꼬마들을 어떻게 찾지? 꽃을 달고 만날까?”
내가 보낸 메일에 “단박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고 답장이 왔더군. 정말 우리는 신기하게 잘 알아보고 50 년만의 재회를 하지 않았나.
그날 일식집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노래방까지 가서 동요도 부르며, 정말 즐겁게 시간을 보냈지. 자네들이 예약해 놓은 호텔에서 편하게 단잠을 잤네. 다음날 용산고등학교에서 무사히 학회를 마치고 돌아와서도 나는 꿈길을 헤매는 듯했네. 그날의 만남을 생각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살았다네.
그 뒤 진주의 유등축제 때 자네들을 초대했지만, 서로의 시간이 맞지 않아 오랜 시간 벼르고 벼른 뒤에야 진주를 찾아온 자네들과 진주성을 거닐며 산책도 하고, 주막에 들려 동동주도 마시며 정담을 나누었고, 우리 집에 안내하여 초라한 아침상도 차려 먹었지. 그때 밥상에 마주 앉은 우리는 사제지간(師弟之間)이 아니라 동년배의 친구 같은 느낌이 들었네. 60대와 70대의 머리칼에 모두 서리가 내리고 있었으니 스승과 제자는 서로 닮은꼴이 되어있었기 때문이지.
그 후 우리는 메일과 카톡으로 좋은 글, 좋은 그림, 그리고 새로운 정보를 공유하며 안부를 전하고 살았잖아. 나는 지금도 자네들과 주고받았던 메일을 따로 저장해 놓고, 심심하면 한 번씩 읽어 보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있는데 이렇게 뜻밖에 자네의 비보를 듣다니 하늘도 무심하지 않은가?
지금 내가 85세를 넘은 망구(望九)의 노인인데, 앞으로 살면 얼마나 더 살겠나? 이제 주변을 정리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했네. 자네가 떠난 지 벌써 일 년이 되었으니 이제 내 카톡에서 자네의 이름을 지우려고 생각하니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게.
인명은 재천이란 말을 거역할 수 없는 인간이라면, 부디 고통 없는 세상에서 편히 영면하기를 바라네.
머지않아 우리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며, 서러운 마음 접으려 하네.
2022년 7월 25일/ 부끄럽고 미안한 사람, 차정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