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안읍성
해미읍성, 고창읍성과 함께 현재에도 원형이 잘 남아있는 대표적인 조선시대의 읍성으로
사적 제302호로 지정되었다.
안동 하회마을, 경주시 양동마을 등과 함께
대한민국에서 전통적인 촌락 형태가 온전하게 남아있는 몇 안 되는 마을이다.
낙안읍성(사적 제302호)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지방계획도시다.
조선시대 전기부터 600여년의 역사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성내에 주민이 거주한다는 점이다. 이곳에는 세 마을의 주민들이 모여 산다.
돌담과 고샅
낙안읍성 객사 옆에는 전라남도 기념물 제133호[공식명칭 낙안읍성노거수]로 지정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은행나무 수령은 최소 600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왜군과 싸우기 위해서 의병을 모집했다.
그런데 지원자 중에서 유독 낙안읍성 출신들이 많았다.
이순신 장군은 우국지사가 많은 낙안읍성을 격려하기 위해서 방문했다.
이에 많은 주민이 의병에 지원했고, 군량미도 내놓았다.
이순신 장군은 의병과 군량미를 모아서 돌아가는데,
은행나무 앞에서 마차의 바퀴가 빠져 잠시 머물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 일행은 마차를 수리하고 좌수영으로 돌아가는데,
낙안에서 순천으로 향하는 길목의 커다란 다리가 무너져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주변 사람들에게 사연을 물어보니,
얼마 전에 큰 굉음과 함께 다리가 무너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순신 장군이 그 날짜를 셈해 보니, 바퀴가 빠져 낙안의 은행나무 밑에서 쉬고 있을 시간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은행나무 목신(木神)이 자신을 보호해 준 것이라 생각했다.
1960년대 마을 주민이 은행나무를 자신의 소유라 주장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목재상에게 거금을 받고 팔아 버렸다.
목재상과 나무꾼들이 은행나무를 베기 위해서 왔다.
그러나 갑자기 커다란 구렁이가 나타나 나무를 휘감고, 목재상을 위협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날 밤에 은행나무와 관련하여 신이한 꿈을 꾸었다.
「낙안읍성 은행나무」의 모티프는 ‘우주목[당산목]’, ‘위기와 조력’ 이다.
마을 당산신의 신격(神格)이 현현(顯現)[뚜렷이 나타나거나 나타냄]하고
좌정(坐定)[자리를 잡고 앉음]하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마을신화’의 성격을 지녔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젖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 “乳株”
낙안읍성 안에 아름드리은행나무 몇 그루가 돛대처럼 솟구쳐 자라고 있다.
그 중에서도 ‘유주’를 달고 있는 은행나무는 2주 뿐이다.
낙안읍성 은행나무의 역사를 거슬러 보면 김빈길 장군이 토성을 쌓을 때 심었으므로
800년이 넘었다는 설이 있는 반면 임경업 장군이 석성을 축조할 때 심었으므로 500년 설이 있다.
2023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