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해병대는 그동안 갈고 닦은 체력과 정신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다. 연일 패주하는 육군과 유엔군과는 달리, 나가는 전투마다 대승을 거뒀다. 전쟁 초기부터 ‘귀신 잡는 해병’의 신화를 만들어 나갔다.
첫 번째 승리는 8월 1일부터 12일 사이 경남 창원군 진동리에서 거뒀다. 지금은 마산시 합포구로 행정구역이 바뀐 이 지역 전투에서 김성은 부대는 부대원 전원 1계급 특진이라는 진기한 기록을 세웠다.
파죽지세처럼 호남지방을 유린하고 경남 진주를 거쳐 고성까지 쳐들어 온 인민군 6사단은 8월을 앞두고 부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낙동강 주 전선보다 상대적으로 허술해 보이는 남해안으로 우회해 통영과 진해를 위협해 왔다.
‘귀신 잡는 해병’ 신화 탄생
남해안 전선은 미 육군25사단 작전지역이었다. 제주도에서 급거 출동해 마산에 상륙한 김성은 부대는 미 25사단에 작전 배속돼 미군의 지휘를 받게 됐다. 처음 부여된 작전명령은 함안∼진동리 간 도로를 확보하라는 것이었다. 8월 1일부터 진주∼마산 국도 진동리 분기점 요소마다 병력을 배치하고 이틀을 잠복 중이던 3일 새벽 3시쯤 도로변 주막에서 여인의 비명소리가 나더니, 곧 차량의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인민군 6사단 정찰대였다. 전 대원을 깨워 비상경계에 들어간 해병대는 기척을 죽여 적을 코앞에까지 유인해 일제히 요격을 가했다. 별다른 저항을 받아본 일이 없었던 적은 크게 당황했는지, 어둠 속에서 우왕좌왕 갈팡질팡하다가 궤멸됐다. 뒤 이어 본대가 달려왔을 때 해병대는 신속히 철수해 또 다른 매복지에 몸을 숨겼다. 적이 출현하면 또 기습을 가하고 철수하는 기동성이 유감없이 발휘됐다.
이 전공은 아군 실종자들에 의해 해군 수뇌부에 즉각 보고됐다. 실종됐던 본부중대장 염태복 상사는 우여곡절 끝에 마산 해군헌병대를 찾아갔는데, 마침 그곳에 나와 있던 통제부사령장관 김성삼 대령에게 상황보고를 하게 됐다. 입담이 좋은 염상사의 보고를 받고 흥분한 김대령은 손원일 참모총장에게 보고했다. 신생 해병대의 첫 전과에 크게 고무된 손제독은 국방부장관에게 건의해 전 부대원에게 1계급 특진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사기가 오른 김성은 부대는 5일에는 적이 장악한 진동리 전방의 야반산 고지를 육박전으로 공격했다. 구식 소총과 수류탄만으로 전차를 가진 주력부대를 궤멸시켰고, 7일부터는 진동리 북쪽 4km까지 진출한 적을 격퇴하고 마산으로 통하는 도로의 요충지를 완전히 장악했다. 이 작전에서 미군과의 통역문제에 얽힌 에피소드가 있다.
김성은 부대원 전원 1계급 특진
미 25사단에 배속된 김성은 부대에는 통역관이 없어 불편했는데, 민간인 한 사람이 찾아와 통역관 자원봉사를 청했다. 손제독 처남 홍성은 씨였다. 미국 아메리칸 대학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미 군정청장관 비서실장을 지낸 경력의 소유자였다. 미군 참모들과 김성은 부대장 사이에서 통역 서비스를 하던 그는 며칠 후 슬그머니 행방을 감추었다.
격전지를 수행하면서 통역하는 일이 무섭기도 했을 것이다. 그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사이 다른 통역관이 나타났다. 미 25사단장 통역관으로 부임하던 현봉학(아주대 명예교수) 씨가 백남표 소령에게 붙잡혀 온 것이다.통역이 없어 갑갑해하던 부대장을 본 백소령은 현씨가 영어를 잘한다는 걸 알고 반강제로 끌고 왔다.
해군본부가 제공한 지프를 타고 마산으로 가는 현씨 차를 세우고 검문을 한 것이었다. “수고 많으십니다. 저는 미 25사단장 통역관으로 가는 현봉학이라는 사람입니다.” 어디로 가는 누구냐는 물음에 그는 국방부장관 추천서를 내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