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모자 / 김해림
순녀는 침대머리의 비상등을 껐다. 어둠이 순식간에 병실을 덮쳤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았다. 세 명의 말기암 환자들의 숨소리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어둠의 장막을 찢으며 거칠게 살아났다. 코에 산소 공급 호스를 끼운 환자들의 가쁜 숨소리에는 생명줄을 놓지 않으려는 처절한 안간힘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보조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잠을 청할수록 순녀의 정신은 더욱 또렷해졌다. 언니 필녀가 이곳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지 한 달이 지나 병원 생활에도 제법 익숙해졌지만 불면증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나이가 들면 시나브로 잠이 적어진다고는 해도, 하루에 기껏 두세 시간 눈을 붙이면 그만이었다. 순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언니가 암에 걸린 사실을 납득할 수 없었다. 필녀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무쇠 같다는 소리를 듣던 사람이었다. 성격도 씩씩하고 활달했다. 선병질에다 소극적이고 어리보기였던 순녀에게 언니는 언제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생전에 어머니는 순녀만 보면 한숨 끝에 말하곤 했다. 아이고, 니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니 언니 반만 닮아도 걱정이 없으련만……. 어머니는 늘 작은딸이 당신보다 먼저 죽을까 봐 걱정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걱정은 기우였다. 순녀는 지난해에 회갑을 지냈다.
필녀가 끄응, 하고 신음을 했다. 순녀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창 밖 외등 불빛이 병실의 어둠을 얼마쯤 몰아낸 탓에 침대 위에 웅크리고 있는 언니의 모습이 금방 시야에 들어왔다. 홑이불을 덮고 있는 몸이 마치 바람 샌 튜브 같았다. 필녀는 잠결에도 왼쪽 아랫배의 인공항문 위에 손을 얹은 채였다. 순녀는 혹시나 싶어 항문에 끼워놓은 비닐 주머니를 더듬어 보았다. 비닐 주머니는 납작했다. 인공항문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순녀는 침대머리에 세워진 쇠막대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거기엔 시간에 맞추어 적정량의 모르핀이 자동으로 링거액에 섞이도록 만들어진 특수 장치가 부착되어 있었다. 통증을 없애주는 대신 모르핀은 필녀의 몸을 시시각각 마비시키고 있을 터였다. .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초꼬슴에 필녀는 모르핀 주사를 처음 맞고 나서 통증이 가시자 눈물까지 글썽이며 좋아했다. 천당이 따로 없다. 여기가 바로 천당이야. 세상에 아편이 이렇게 좋구나. 이래서 아편쟁이들이 생긴 게야. 호스피스 병동에서 환자를 돌보는 의사와 간호사들의 태도는 일반 병동과 확실히 달랐다. 의사들은 환자들이 끝도 없이 호소하는 온갖 통증에 대해 인내심을 갖고 귀를 기울였고, 간호사들은 틈나는 대로 뼈와 가죽만 남은 말기암 환자들의 얼굴에 자신의 볼을 비비대고, 삭정이 같은 어깨를 끌어안아 주었다.
삐옹삐옹삐옹……
앰뷸런스가 숨가쁘게 병실 아래를 지나갔다. 순녀는 창 밖을 내려다보았다. 구급대원들이 막 도착한 앰뷸런스에서 환자가 실린 이동 침대를 꺼내 응급센터 안으로 황급히 밀고 달려갔다. 하필이면 응급실이 호스피스 병동 옆에 자리하고 있는 탓에 3층에 있는 이곳 병실 사람들은 시도때도없이 사이렌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녀는 사이렌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매번 가슴이 떨리고 벌렁거려서 어쩔 줄을 몰랐다.
순녀는 맞바래기 언덕의 사제관 앞뜰에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성모상을 절박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성모상 주위에 활짝 핀 벚꽃들은 외등 불빛을 받아 하얀 눈꽃처럼 탐스러웠다. 산들바람에 한들거리는 꽃가지에서 꽃잎들이 금방이라도 호르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이 밤중에 또 누가 실려왔을 거나."
필녀의 목소리였다. 순녀는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필녀가 몸을 일으켜달라고 손짓했다. 순녀는 침대 위로 올라가 언니를 뒤에서 안아 일으켰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언니의 양 겨드랑이를 힘껏 눌렀다.
"아이고, 편하다."
필녀는 허깨비 같은 몸을 동생에게 고스란히 기댔다. 그녀는 잠에서 깨어날 때 엄습하는 통증을 가장 두려워했다. 순녀는 익숙한 솜씨로 언니의 몸 곳곳을 압박하여 통증을 쫓았다. 늘어진 살가죽 위로 툭툭 불거진 앙상한 뼈가 손끝에 만져질 때마다 순녀는 마치 그 뼈에 자신의 폐부가 찔리는 것 같아 고통스러웠다.
옆 침대의 폐암 환자가 갑자기 숨을 거세게 몰아쉬었다. 필녀가 옆으로 고개를 돌려 폐암 환자를 건너다보면서 혼잣말을 했다.
"저 바둑알…… 오래 못 가지……."
사십대인 옆 환자는 너무도 말라 마치 살을 다 발라낸 횟감 같았다. 광대뼈 위로 돌출한 커다란 안구 한가운데에 검정 바둑알처럼 도드라진 검은 눈자위 때문에 필녀는 폐암 환자를 '바둑알'이라고 불렀다. 순녀는 어쩌다 바둑알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무섬증이 확 일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꼭 해골 위에 누런 망사를 씌워놓은 형상이었다. 목에 가래가 걸렸는지 바둑알의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병실 입구 쪽에 있는 뇌암 환자의 숨소리는 거칠기는 해도 비교적 고른 편이었다. 그녀는 필녀보다 세 살이나 많았지만 아직 소화기관은 괜찮은지 늘 입을 오물거리고 살았다. 특히 껍질에 점박이가 생긴 물렁한 바나나를 좋아한다고 해서 병실에서는 바나나 할머니로 통했다. 언어 장애와 심한 두통에 시달리긴 해도, 잘 먹어댄 탓인지 바둑알이나 필녀에 비하면 말기암 환자 티가 훨씬 덜했다. 옆에서 잠든 그녀의 아들은 가끔 물 속에 있다가 나온 사람처럼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며 입맛을 쩝쩝 다셨다.
순녀는 바둑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필녀의 몸을 창 쪽으로 돌려놓고 속삭였다.
"언니, 저 벚꽃 좀 봐. 정말 곱지?"
"숨을 저렇게 쉬면…… 며칠 못 간다."
"우리 애들 어렸을 때, 언니네랑 함께 창경원에 벚꽃놀이 갔던 거 생각나?"
"저번에 저 자리에 있던 늙은이도…… 저렇게 숨을 쉬다가…… 이틀만에 가지 않더냐."
"창경원에, 그 벚꽃들 말이우, 지금도 그렇게 탐스러울까. 그 땐 참 굉장했는데……."
"후유, 갈 사람은 어서어서…… 가야지."
"언니!"
"됐다. 너도 눈 좀 붙여라."
필녀는 손을 내젓다가 습관처럼 항문 위를 더듬었다.
"내 똥창자에는…… 뭣이 들어서…… 이리 막혀버렸단 말이냐. 시원하게 설사똥 한 번 싸봤으면…… 원이 없겄다."
필녀는 느닷없이 발작을 하듯 아랫배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순녀는 언니의 손을 움켜잡았다. 힘을 주면 바스라져버릴 것 같은 앙상한 손이었다. 필녀는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창문으로 흘러드는 외등 불빛이 필녀가 쓰고 있는 노란 모자에 조명처럼 내려앉았다.
필녀가 직장암 수술을 받은 건 옹근 4년 전이었다. 대변에 피가 섞여 나와 병원에 갔더니 직장암 말기라고 했다. 그 전에는 어떤 자각 증세도 없었다. 의사는 항문을 꿰매버리고 배에 인공 항문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필녀는 펄쩍 뛰었다. 세상에, 날더러 배에 똥자루를 차고 살란 말이냐? 난 그렇게는 못 산다. 나이 예순이면 살만큼 살았지.
필녀는 배에 인공항문을 만들어 대변을 받아내야 한다는 것을 더 없이 수치스러운 일로 여겼다. 두 아들과 의사는 인공항문 수술을 받은 환자들의 사례를 들어가며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러나 아무도 목곧은 그녀를 이기지 못했다. 두 아들은 순녀에게 매달렸다.
조카들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순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언니를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필녀는 예사 언니가 아니었다. 순녀는 날마다 언니에게 울면서 호소했다. 수술도 받지 않고 바짝 말라죽으면 자식들은 평생 가슴속에 한을 품게 될 거고, 그러면 자식들도 결국 언니처럼 몹쓸 병에 걸리고 말 거라는 협박까지 했다. 자식의 일이라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을 필녀의 지극한 모성애를 자극하자 마침내 그녀는 고집을 꺾었다. 단, 인공항문 대신 원래의 항문을 살린다는 조건부였다.
수술보다 더 힘든 일이 장세척 과정이었다. 장 속에 주입한 관장액이 주입하기 전의 청결 상태를 유지한 채 다시 나올 때까지 되풀이되는 장세척 과정은 수술도 받기 전에 환자를 나가떨어지게 만들었다. 관장액 속에 티끌 만한 분비물만 섞여 나와도 간호사는 가차없이 관장액을 다시 주입하곤 했다. 그렇게 받아낸 관장액이 두 양동이도 넘었다. 젊은 사람도 장세척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중도에 수술을 포기하는 사람이 있다며 간호사는 필녀의 강인한 인내심에 혀를 내둘렀다. 뜻밖에 항문을 살린 수술 결과는 좋다고 했다. 의사는 종양의 위치가 생각했던 것보다 위쪽에 있어서 항문을 살리는 데 큰 무리가 없었지만, 종양이 워낙 크고 암세포가 이미 골반 부위로 전이된 상태라 오래 살지는 못할 거라고 선고했다.
필녀는 수술 결과가 좋다는 말만 믿고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았다. 타고난 건강체질 덕택인지 회복도 빨랐다. 하지만 여섯 달 만에 병이 재발했다. 음식을 먹으면 수돗물처럼 좍좍 쏟아져 내렸다. 이번에는 설득이고 뭐고 할 겨를이 없었다. 모든 것을 의사의 판단에 맡기기로 했다. 다섯 개의 크고 작은 링거병을 주렁주렁 달고 입원실로 돌아온 필녀의 배꼽 아래 왼쪽 배에는 마치 갓난아기의 주먹 같은 불그레한 살덩이가 비죽 솟아 있었다. 순녀는 너무도 섬뜩하여 그 붉은 살덩이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수술 받은 날 저녁에 의사가 와서 국소 마취를 하고 인공항문을 성형하기 시작했다. 가위로 살갗을 잘라내고 실로 껍질 주변을 밖으로 말아 배에 붙여 꿰매는 동안 필녀의 질끈 감은 눈가에는 물엿 같은 눈물 줄기가 흘러내렸다.
"자, 어떻습니까? 아름다운 장미꽃 한 송이가 활짝 피었습니다."
성형을 끝낸 의사가 가족들을 향해 눈을 찡긋해 보이며 농담을 했다.
"어머, 어쩜 솜씨가 그렇게 좋으세요? 정말 장미꽃 같아요."
필녀의 작은며느리가 짐짓 호들갑을 떨어보아도 필녀는 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
음식을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인공항문으로 대변을 유도하는 관장은 또 다른 사투였다. 게다가 폐쇄한 항문에 생긴 염증치료가 환자를 기진맥진하게 만들었다. 아침마다 소독액에 좌욕을 하고 나면 수련의 한 명이 핀셋을 이용하여 염증으로 부푼 피부 조직을 일일이 뜯어냈다. 피부가 뜯길 때마다 필녀는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지만 정작 못 견뎌 하는 것은 수치심이었다. 나이 어린 의사에게 아침마다 엉덩이를 내맡긴 채 신음을 연발하는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창피하다고 했다.
두 달만에 퇴원한 필녀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음식을 먹으면 곧바로 항문에 붙여 놓은 비닐 주머니 속으로 대변이 꾸역꾸역 밀려나오는 것을 못 견뎌 하고 혐오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몸을 씻고 향수를 뿌리고는 순녀만 보면 묻기부터 했다. 얘야, 나한테서 똥 냄새 안 나냐? 그렇게 4년을 지내다가 마침내 호스피스 병동까지 오고 말았다.
희붐한 새벽 하늘이 창 밖에 떠 있었다. 순녀는 놀라 몸을 일으켰다. 필녀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가느다란 신음을 뱉고 있었다. 손은 여전히 인공항문 위에 놓여 있었다. 순녀는 밤새 받아진 소변 양을 카드에 기록하고 나서 소변 주머니를 들고 화장실로 갔다. 변기에 막 소변을 쏟아 부으려는데 옆 세면장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하이고, 허리야. 빚을 내서락도 간병인을 쓰덩가 해사제 내사마 죽겄다 아이가. 하루 이틀도 아이고, 이캉 어째 사노?"
바나나 노파의 아들이었다.
"누가 아니래? 노인네가 저렇게 잘 먹어대니 빨리 가시긴 틀렸어. 여보, 형님네한테 말해서 집으로 옮길까?"
며느리가 심란해 죽겠다는 듯 대꾸했다.
"또 소동 날라꼬? 모르핀 맛을 봐 놔서 인자 안 된다카이."
"노인네 땜에 이게 뭐야? 돈도 돈이지만 증말 힘들어서 못 살겠어. 당신 빨리 옷 갈아입고 해장국이나 한 그릇 사먹고 출근해요."
"하이고, 알았데이."
그들은 피곤과 짜증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가살을 피웠다. 순녀는 그들이 욕실에서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소변을 처리했다. 입맛이 썼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은 언니의 두 아들을 보아도 틀리지 않았다. 언니가 재수술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조카들은 간병인을 두지 않고 번갈아 가며 병실을 지켰다. 그러나 통증이 시작되면서 입원과 퇴원을 일삼게 되자 지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지금은 아예 손님처럼 하루에 한 명씩 당번을 정해 얼굴만 내밀고 가는 정도였다. 나름대로 이유는 충분했다. 큰아들은 대기업체의 간부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했고, 큰며느리는 고3 아이를 뒷바라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작은 아들 내외는 맞벌이를 하는 데다 아이들이 어려 좀체 틈을 낼 수 없다고 했다. 그런 조카들이 순녀로서는 서운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내리사랑이라지만 순녀는 언니가 혼잣몸으로 자식들을 어떻게 키웠는가를 지켜본 산증인이었다. 하지만 필녀는 오히려 살여울 같은 세상에 자식들을 낳아 놓은 것 자체를 미안해하고 죄스러워할 뿐이었다.
천주교 신자인 큰며느리의 주선으로 필녀가 호스피스 병동으로 오게 되자 순녀는 언니의 간병을 도맡기로 했다. 그녀 자신도 평소에 이런저런 병들을 껴안고 살다시피 해 늘 골골하는 처지였지만 언니의 마지막 가는 길을 남의 손에 맡기고 싶지 않았다. 중풍으로 쓰러져 5년여를 누워지내다가 지난해에 세상을 떠난 남편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아니, 설사 남편이 살아 있다 해도 그녀는 언니의 병상을 지켰을 터였다. 함께 사는 아들과 출가한 두 딸도 그녀의 그런 마음을 잘 이해했다.
식전 기도를 하기 위해 수녀가 간호사들과 함께 병실로 왔다. 수녀는 침대를 일일이 들여다보며 환자들의 손을 잡아주었다. 옆 침대의 폐암 환자는 웅크리고 누운 채 수녀를 향해 성호를 그었다. 밤새 통증에 시달린 탓인지 그녀의 안구는 전날보다 훨씬 더 돌출해 있었다.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까만 바둑알이 툭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수녀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온통 주름 투성이로 변했다. 언뜻 보면 우는 표정 같지만 그녀로서는 반가움의 미소를 짓는 거였다. 거의 매일이다시피 면회를 오는 천주교 신도들은 외과 의사의 아내인 그녀가 살아 있는 성인이라고 할 만큼 평소에 선행을 많이 하고 신앙심도 훌륭하다고 입을 모았다. 모르핀 투여를 받지 않고 오직 기도와 성가로 통증을 물리치고 있는 그녀의 신앙심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필녀는 얼굴을 찌푸린 채 아까부터 연신 항문 주변을 주무르며 자신에게 보내는 수녀의 시선을 몽따고 있었다. 수녀는 기도를 시작했다.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병자들을 위한 기도 내용은 언제나처럼 간절했다. 수녀의 성심 어린 기도를 들을 때마다 순녀는 광신도였던 생전의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의 광적인 신앙심은 결국 순녀 자매로 하여금 교회라면 진저리를 치게 했지만, 요즈음 순녀는 언니를 살릴 수만 있다면 광신도라는 소리를 들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기도 시간이 되면 그녀는 절실한 마음으로 수녀의 기도에 귀를 기울였다.
"……천주의 성모여, 이제와 우리 죽을 때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으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신께. 아멘."
기도를 마친 수녀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필녀에게 다가왔다. 필녀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항문 주위를 주무르고 있었다. 검버섯이 번진 누렇게 뜬 얼굴에 비해 머리에 쓰고 있는 노란색 모자는 아침 햇살 속에서 턱없이 화사했다.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머리카락이 뭉턱뭉턱 빠지기 시작하자 필녀는 수술을 받을 때보다 더 절망했다. 처음에는 며느리들이 사온 가발을 열심히 쓰곤 했지만 병세가 점점 나빠지면서부터는 가발을 쓰는 것도 힘겨워했다. 순녀는 가볍고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모자를 몇 개 사와서 가발 대신 쓰게 했다. 필녀는 노란색 면으로 된, 고무 박음질로 잔주름을 촘촘히 잡은 동그란 모자를 제일 좋아했다.
"개나리 할머니, 기도 많이 하셨어요?"
필녀의 노란색 주름 모자가 꼭 활짝 핀 개나리꽃 같다고 해서 수녀와 간호사들은 그녀를 개나리 할머니라고 불렀다.
"흥, 기도는 예수쟁이들이나 하는 거지……."
필녀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아유, 고집쟁이 우리 할머니.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할머니 같은 분의 기도를 더 잘 들어 주신다니까요. 의심을 버리시고 겸손한 마음으로 매달리세요."
"여기서 똥만 펑펑 쏟아져 나오면 내가 믿는다니까."
필녀는 항문을 쥐어뜯으며 살천스레 역정을 냈다.
"그럼요. 꼭 그렇게 되실 거예요."
수녀는 필녀의 손을 꼭 잡아주고는 병실을 나갔다.
"이 병원은 다 좋은데…… 기도하는 건 딱 질색이야."
필녀는 수녀의 뒤에 대고 들으란 듯이 이죽댔다. 그 순간 바둑알이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몸을 일으키더니 필녀를 향해 성호를 긋고 나서 엎드려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필녀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일 터였다.
순녀는 간호사실로 가서 소독 기구와 거즈를 가져왔다. 아침 식사시간 전에 언니의 욕창 소독을 해야 했다. 통증을 조금이라도 덜 느끼려고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앉아 지내는 필녀의 오른쪽 엉덩이에는 작은 사과 크기의 구멍이 뚫렸다. 원래 욕창 소독은 간호사들의 몫이었지만 깔끔한 성격의 필녀는 남에게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죽기만큼 싫어했다. 순녀는 전날 구멍에 박아둔 거즈들을 핀셋으로 하나씩 집어냈다. 구멍 안쪽으로 갈수록 진물에 젖은 거즈는 심한 악취를 풍겼다. 거즈를 모두 뽑아내자 구멍 안쪽에 희부연 뼈가 드러났다. 순녀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녀는 허리를 펴고 심호흡을 한 차례 하고 나서 환부를 소독하고 새 거즈를 차곡차곡 박아 넣었다.
아침 식사로 물 같은 미음이 나왔지만 필녀는 겨우 두어 번 입에 넣고 수저를 놓았다. 그녀는 간이탁자 위에 반찬을 죽 늘어놓고 앉아서 밥을 먹는 바나나 노파를 바라보았다. 노파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집요했다. 먹이를 빼앗긴 들짐승의 적의에 찬 눈빛이 저렇지, 싶었다. 노파는 필녀의 시선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고 국에 말은 밥을 후루루 소리내어 먹고 있었다.
"언니, 조금만 더 삼켜봐요."
순녀는 미음을 뜬 수저를 필녀의 입으로 가져갔다.
"무슨 팔자길래…… 암 중에서도 하필이면…… 먹지도 못하는…… 악질 암에 걸렸을까."
탄식을 하며 숟가락을 놓는 필녀의 얼굴이 한없이 쓸쓸해 보였다. 순녀는 미음 그릇을 치우고 바나나 노파 쪽을 가리고 앉아 언니의 다리를 주물렀다. 필녀의 탄력을 잃어버린 다리 살은 순녀의 손길에 따라 무른 밀가루 반죽처럼 이리저리 밀렸다.
"좀 어떠세요?"
회진을 온 주치의가 필녀의 인공항문 주위를 꾹꾹 눌러보며 물었다.
"보면 모르시겠수? 아이고, 박사님. 제발 나…… 똥 좀 싸게 해줘요."
필녀는 주치의의 손을 덥썩 잡으며 매달렸다. 주치의는 간호사에게 관장을 지시했다.
"그놈의 관장은…… 백 날 천 날 해봤자…… 쓸데없다니까!"
필녀는 항문에 붙여놓은 비닐 봉지를 확 잡아뜯어서 의사 앞에 흔들어 보이며 심통을 부렸다. 접착제가 닿은 부분의 피부가 벌겋게 성이 나 있었다.
"아휴, 우리 할머니가 진짜 힘드신가 보네."
주치의는 필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박사님! 그럼 아편이나…… 몽땅 놔줘요. 콱 죽어버리게! 이렇게 살아 뭘 하겠어요?"
필녀는 온힘을 다해 쥐어짜는 소리로 부르대며 주삿바늘이 꽂혀 있는 손을 흔들어댔다. 주삿바늘에 연결된 링거 호스가 역류한 피로 붉게 물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필녀에게 집중되었다. 동굴처럼 깊게 꺼진 그녀의 눈에 분노와 절망이 곰비임비 내려앉았다.
"언니!"
순녀는 언니를 끌어안았다. 필녀는 한 마리 병든 짐승처럼 동생의 품에 안겨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불거져 나온 쇄골이 금방 늘어진 살가죽을 뚫고 나올 듯 위태롭게 솟구쳤다.
"안녕하세요?"
분홍색 가운을 입은 자원 봉사자 네 명이 벚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병실로 들어섰다.
"미친년들!"
필녀는 봉사자들을 보자마자 고개를 돌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봉사자들은 모두 일정기간 호스피스 교육 과정을 거친 신자들로서 환자들 곁에서 성경을 읽어주고 성가를 불러주며 기도를 해주었다. 그네들은 툭하면 말기암의 통증마저도 견뎌내는 바둑알의 강건한 신앙심을 드러내놓고 칭찬해서 필녀의 신경을 건드렸다. 필녀는 그네들이 말기암 환자들의 약한 마음을 선교활동에 이용하는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개나리 할머니, 간밤엔 잘 주무셨어요?"
바둑알의 침대를 에워싸고 한바탕 열띤 기도를 한 봉사자들이 우르르 필녀에게 몰려왔다.
"얘야, 관장이나 하러 가자."
필녀는 봉사자들을 외면하고 순녀에게 손짓했다. 순녀는 봉사자들에게 눈짓을 보내 미안한 마음을 표시했다. 필녀의 그런 태도에 이골이 난 봉사자들은 생글생글 웃었다.
"할머니 잘 다녀오세요."
봉사자들은 병실을 나서는 필녀에게 아이들처럼 합창을 했다.
"여편네들이 아침부터 저렇게…… 밖으로 싸돌면 집구석 꼴은…… 오죽헐까. 쯧쯧."
필녀는 치료실로 가면서 계속 봉사자들을 비난했다.
"언니, 저 사람들 좋은 일 하고 있잖어. 그냥 좋게 생각해요."
"흥, 예수에 미쳐서…… 가정 파탄낸 여편네들…… 내가 한둘 봤냐?"
"……"
순녀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폐결핵을 앓던 아버지가 세상을 뜨던 날 밤, 옥양목 이불깃에 아버지가 토해놓은 검붉은 피를 본 순녀 자매는 서로 꼭 끌어안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아버지가 죽은 것보다 검붉은 피가 더 무섭고 떨렸다. 어머니는 그 날도 외갓집으로 아버지 약값을 얻으러 가고 없었다. 아버지가 병을 앓은 10여 년 동안 어머니는 집은 물론 가재도구까지 내다 팔았다. 셋방살이를 시작하면서부터 어머니는 걸핏하면 외갓집으로 가서 돈을 얻어왔다. 부잣집 고명딸로 자란 어머니는 생활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산에 아버지를 묻고 돌아온 어머니는 대책 없이 몸져눕고 말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필녀는 중학교에 가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지만 어머니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앓기만 했다. 필녀는 주인집 아주머니의 소개로 시장 옷가게에 점원으로 취직했다. 그녀가 받아오는 월급으로 세 식구가 애오라지 목구멍에 풀칠을 했다.
어느 날 동네 교회 목사가 찾아왔다. 그는 어머니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울면서 기도했다. 그 뒤로 목사와 교인들은 거의 매일 찾아왔다. 한 달이 지나자 어머니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날마다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새벽마다 잠에 취한 두 딸을 두드려 깨워 교회에 데리고 다녔다. 그렇게 1년쯤 지나서였다. 어머니는 목사의 설교대 앞에 서서 간증을 했다. 때론 격한 울음을 토해가며, 때론 행복에 겨운 웃음소리를 내며 언죽번죽 달변을 토해내는 어머니가 너무도 낯설었다. 간증을 끝낸 어머니는 신도들을 향해 외쳤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 그런 건 공기 속의 티끌만도 못 한 거요. 진정 영화로운 세상은 바로 하나님 나랍니다. 아기처럼 순진무구한 자만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필녀는 어머니가 단상에서 내려오기 전에 교회를 뛰쳐나갔다. 그리고 다시는 교회 앞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 날 이후 어머니가 강원도 산 속 기도원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신앙으로 인한 모녀 사이의 갈등의 골은 한 치도 메워지지 않았다.
치료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순녀는 간호사실로 전화를 했다. 간호사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언니의 인공항문 주변을 깨끗이 소독했다. 항문 주변의 배는 돌처럼 단단했다. 간호사가 주사기와 가느다란 호스를 이용해서 관장액을 넣으려고 시도했지만 항문은 줄곧 액체를 거부했다. 필녀는 어느 때보다 열심히 항문 주위를 주물러 간호사를 도왔다. 이미 장기가 마비되어 관장액조차 주입할 수 없는 항문을 보면 관장은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눈치 빠른 필녀가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투와도 같은 관장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할머니, 뭐하세요!"
젖은 환자복을 갈아 입히려고 새 옷을 갖고 오는데 간호사의 놀란 목소리가 복도까지 들렸다. 순녀는 깜짝 놀라 치료실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필녀는 손가락으로 항문 구멍을 헤집고 있었다. 항문 주변에 검붉은 피가 흘렀다.
"아이고, 언니!"
순녀는 언니의 손을 꼭 붙잡았다. 얼마나 애를 썼는지 얼굴에는 진땀이 흐르고 있었다.
"이거 놔라. 답답해 미치겠다. 세상 천지에…… 이게 무슨 꼴이냐. 이봐, 간호사 아가씨. 칼로…… 내 배 좀 째보자니깐."
"아휴, 우리 개나리 할머닌 농담도 잘 하셔."
간호사는 항문 주위를 소독하고 약을 바른 뒤에 비닐 주머니를 붙이더니 필녀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그러고는 마치 투정하는 아이를 달래듯 필녀의 얼굴에 볼을 비비대고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순녀는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네들을 바라보았다.
순녀가 휠체어를 밀고 오는데 간호사들이 산소 통을 들고 급히 병실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병실로 들어서자 의사와 간호사들이 바둑알의 침대를 둘러싸고 서 있었다. 산소 마스크를 쓴 바둑알의 가슴이 통째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에게서 시어터진 홍시 냄새가 풍겼다.
"언니, 우리 바람 쐬러 가요."
순녀는 서둘러 언니의 어깨 위에 스웨터를 걸쳐주고 무릎을 담요로 감쌌다.
"저 여편네…… 오늘 못 넘기겠다."
필녀는 주문을 외우듯 억양이 없는 소리로 말했다. 순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재빨리 휠체어를 밀고 나갔다. 병동을 나서자 4월의 따스한 햇살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햇빛을 받은 필녀의 모자는 노란색이 더욱 선연했다. 뺨을 스치는 미풍이 솜털처럼 부드러웠다. 순녀는 심호흡을 했다. 가슴이 탁 트였다. 사제관으로 향하는 비탈길을 천천히 올라갔다. 휠체어 쇠막대에 걸려 있는 링거병이 마구 흔드렁댔다. 비탈길 양쪽에 늘어선 벚나무에서 꽃잎들이 잘게 오린 색종이처럼 흩날렸다. 사제관 앞뜰은 만개한 벚꽃과 끝물로 접어든 목련꽃, 앙증맞게 꽃망울을 막 내밀기 시작한 철쭉꽃이 한데 어우러져 축제 분위기였다. 꽃나무 아래마다 환자들과 가족들이 둘러앉아 무르익은 봄의 정취를 만끽하고 있었다. 성모상 앞에는 한 아낙네가 얼굴을 땅바닥에 묻고 엎드려 어깨를 들썩거렸다.
순녀는 벤치 앞에 휠체어를 고정시켰다. 필녀는 길게 늘어진 꽃가지를 잡아당겨 얼굴에 대고 문질렀다.
"이 꽃도…… 더는 못 보겠지."
필녀는 눈이 부신 듯 얼굴을 찌푸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순녀는 뭐라고 대꾸를 해주어야 할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늘 아래서 본 언니의 누렇게 뜬, 깡마른 얼굴은 어떤 가식적인 위로의 말도 단호히 거부하는 것처럼 완강했다. 화사한 꽃가지를 잡고 있는 거친 손등마저도 혈관을 찾기 위해 쑤셔댄 주사 자국마다 피멍이 들어 성한 곳이 없었다.
신부 두 사람이 사제관에서 나와 순녀네 옆을 지나가며 다정한 눈인사를 보냈다. 까만 사제복 속에서 살짝 이마를 내민 하얀 칼라가 목련꽃처럼 빛났다.
"난 말이다…… 차라리…… 신부를 믿으라면 믿겠드라."
신부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필녀가 뜻밖의 말을 했다.
"그렇지? 나도 그래."
순녀는 재빨리 맞장구를 쳐주었다.
"참말…… 하늘나라가…… 있을거나?"
필녀가 가늘게 뜬 눈으로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을 했다.
"……"
엇먹기만 하던 언니의 신앙에 대한 생각에 마침내 균열이 생긴 걸까? 순녀는 얼핏 언니의 침울한 얼굴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다. 문득 운명하는 순간까지 딸들의 영혼을 걱정하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순녀야, 구원을 얻어야 한다. 청맹과니 같은 니 언니가 구원을 얻도록 니가 도와줘야 해. 이 세상은 잠시 쉬어 가는 곳일 뿐이다. 구원을 얻어야 영생의 길을 갈 수 있단다. 하지만 어머니가 아무리 구원을 강조해도 순녀의 마음은 열리지 않았다.
"언니, 우리……, 신부님들을 믿는다 생각하고 한 번 믿어 볼까?"
"……."
"사실 아침저녁으로 기도할 때마다 언니가 딴청 피울 때면 수녀님 보기가 민망해. 우리야 예수 말만 들어도 몸에 두드러기가 나지만 다른 사람들이야 어디 우리 맘을 알겠수?"
"……"
"기도 소리 들어보면 나쁜 말은 하나도 없잖습디까? 민이 에미는 언니가 안 믿어도 좋으니 기도만 따라해도 감사하겠다고 통사정하더구만……"
"일없다."
필녀는 갑자기 통증이 엄습하는지 두 팔로 가슴을 싸안으며 신음을 했다. 순녀는 뒤쪽에서 그녀를 안고 겨드랑이와 가슴께를 힘껏 눌러 압박했다.
"난, 억울하다. 순녀야, 내가 이렇게…… 죽는 다는 건 너무도 억울해."
"아유, 언닌 왜 또 그런 말을 해."
"난, 열다섯 살 때부터…… 돈을 벌었다. 어머닌 책임감도 없고…… 무능했어. 게다가 교회에 아주 미쳐버렸잖냐. 어린 내가 한 달 내내…… 다리가 퉁퉁 붓도록 일해서…… 월급을 타오면…… 어머닌 젤 먼저 교회에다…… 십일조부터 갖다 바쳤지. 너, 생각 나냐? 니가 복막염으로…… 온 방을 데굴데굴 구를 때도 어머닌…… 교회 사람들 데려다가 기도하고…… 찬송가만 목이 터져라 불러대지 않디?."
"세상에, 내가 그걸 어떻게 잊겠어?. 그 날 언니가 날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음 난 벌써 죽고 말았겠지."
그랬다. 순녀에게 언니는 어머니였고, 아버지였다. 어머니가 초등학교를 마친 순녀를 기도원에만 데리고 다니며 중학교에 보낼 생각조차 하지 않자 필녀는 어머니와 한바탕 싸움을 하면서까지 동생을 중학교에 입학시켰다. 필녀는 동생의 학비를 대기 위해 월급이 적은 점원 일을 그만두고 시장에서 행상을 시작했다. 과일, 야채, 옷가지, 신발, 그릇…… 안 해본 장사가 없었다. 억척스레 일해서 순녀를 여학교까지 졸업시키고 나서 작은 포목 가게를 갖게 되었을 때, 필녀의 나이 스물 다섯이었다. 그녀는 동생을 결혼시킨 뒤에 자신은 정작 서른이 넘어서 가정을 이루었다. 상대는 시장에서 그릇 도매상을 하던 성실하고 야무진 남자였다. 그러나 결혼 생활 5년을 넘기지 못하고 그녀는 아이 둘이 딸린 과부가 되어버렸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난, 평생…… 뼈가 부서지게 일했다. 장사꾼은 거짓말쟁이라지만……난, 참말이지……내 자식들한테 해 될까 봐……, 남을 해롭게도 안 했고…… 속인 일도 없다. 밑천이라고는 신용…… 하나밖에 없었다. 참말로 하느님이…… 있다면, 하느님은…… 알 것이다."
필녀는 동생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언니, 알아. 언니가 말 안 해도 내가 더 잘 알지."
순녀는 언니를 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사실 어렸을 때는 자신과 다르게 성격이 급하고 괄괄한 언니가 무섭고 어려웠다. 하지만 가리사니가 생기면서부터 순녀는 오직 언니만을 의지하고 살았다.
"얘야, 날 좀…… 도와다오. 날 좀……."
"뭘, 뭘 말이우?"
"수면제에…… 소주 몇 잔 마시면…… 끝난다더라."
"세상에, 무슨 흉측한 소릴 하는 거야, 지금?"
순녀는 깜짝 놀라 휠체어 앞으로 와서 언니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아이고, 이 징그러운 통증…… 넌 모른다. 첨엔 꼭…… 구더기 떼가 살갗 밑을 파고 들어가…… 곰실거리며 기어다니는 것 같지. 그러다가…… 느닷없이 바늘 끝이…… 온 몸을 콕 콕 찔러대는 거야. 조금 지나면…… 고춧가루 물에 몸을 담근 것처럼…… 온몸이 홧홧거리다가, 날선 민날이…… 생살을 난도질한다. 아무도 몰라…… 아무도……."
"미안해, 언니. 언닌 나를 살려줬는데 난 언닐 살려줄 수가 없다니……."
"아니다. 넌 날…… 살릴 수 있어. 수면제 한 줌에…… 소주 한 병이면 날……."
"몰라, 난 그런 말 몰라. 제발, 언니, 그런 생각일랑 꿈에도 하지 말아요."
순녀는 말은 그렇게 했어도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외국 의사를 생각했다. 말기암 환자들을 안락사 시켜준다는 백인 의사였다. 그때 순녀는 그 외국 의사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했다. 고통스럽게 살 바엔 차라리 편하게 죽도록 도와주는 것이 백 번 옳다고 믿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언니가 그런 경우를 당한 지금, 순녀는 마구 혼란스러웠다.
"이게 어디…… 산 목숨이냐? 아이고오……."
필녀는 통증이 시작되는지 가슴을 감싸안고 몸을 웅크렸다. 순녀는 서둘러 병실로 돌아왔다. 바둑알은 임종실로 옮겨가고 없었다. 그녀의 침대가 놓여 있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봉사자들은 바나나 노파를 둘러싸고 앉아 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필녀는 그네들의 성가 소리가 듣그러운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초저녁부터 복도를 오가는 분주한 발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간호사가 병실에 올 때마다 필녀는 바둑알의 상태를 물었다. 저녁에 면회 온 큰아들조차 건성으로 맞았다. 밤늦게 복도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차츰 크게 들려왔다. 바깥 동정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필녀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갔구나. 불쌍한 여편네……. 남편이 의사면 뭘 하누."
그 날 밤, 필녀는 수면제 주사를 두 차례나 맞고서도 밤새도록 뒤치락거렸다. 덩달아 순녀도 새벽녘에야 겨우 눈을 붙였다.
어디선가 단말마의 비명이 들렸다. 어느 새 창 밖이 환했다. 순녀는 벌떡 일어나서 침대 위부터 살폈다. 필녀가 없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가까이에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침대 아래를 보니 언니가 병실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순녀는 입이 떡 벌어졌다.
"언니! 왜 그래?"
순녀는 달려가 언니를 부축했다.
"운동을…… 안 하니깐…… 다리가…… 굳잖냐. 후유."
필녀는 숨이 차서 띄엄띄엄 말하며 텅 비어 있는 바둑알의 침대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바나나 노파를 돌아보며 목쉰 소리로 말했다.
"이보우. 만날…… 그럭허구 있음…… 오그라들어. 이리 내려와…… 운동을 해야지."
바나나 노파가 멀뚱한 눈으로 필녀를 바라보았다. 필녀는 보아란듯이 침대 다리를 붙잡고 일어서려고 용을 썼다. 하지만 엉덩이를 조금 들썩이다가 도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앉은 자세를 조금만 움직여도 더욱 기승을 부리는 통증 때문에 혼자서는 꼼짝하지 못하던 언니가 어떻게 혼자서 침대에서 내려왔는지 순녀는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다…… 똥 때문이다. 이 빌어먹을 놈의…… 똥이 안 나와서…… 내가…… 이런다."
필녀는 환자복을 헤치고 항문에 붙여놓은 비닐 주머니를 뜯어버렸다. 링거 호스에 피가 역류했다. 간호사가 달려와 주삿바늘을 뽑아 발등에 옮겨 꽂고 넓적한 테이프로 단단히 고정시켰다. 필녀는 한바탕 뜸베질로 맥이 풀렸는지 연신 신음을 토했다.
아침 회진 시간에 주치의를 보자마자 필녀는 가슴과 등의 통증이 갈수록 심해진다고 호소했다. 주치의는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더니 방사선 치료를 받아보라고 권했다.
"박사님! 그러면 똥이 나올까요?"
필녀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할머니, 우선 통증을 좀 덜어드릴 수 있을까 해서요."
주치의는 인공항문 주변을 이리저리 눌러보다가 필녀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나갔다. 순녀는 주치의를 쫓아가 물었다.
"저 몸에다 어떻게 방사선을 쬐란 말입니까?"
"환자가 통증을 호소하는데 이젠 방법이 없어요. 모르핀을 더 이상 과다 투약할 수도 없구요. 사실 저 상태에서 생명을 연장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통증 완화가 최우선 아니겠습니까?"
건강한 사람도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 힘들다고 하는데, 지금의 언니에게 방사선 치료를 권하는 것은 생명을 빨리 단축시켜준다는 뜻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순녀는 문득 외국의 안락사 의사가 생각났다. 방사선 치료를 받으려면 가족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순녀가 조카들에게 알리겠다고 하자 필녀는 버럭 역정을 냈다. 일하고 있는 자식들에게 신경 쓰게 할 일이 뭐 있냐며 순녀에게 빨리 사인을 하라고 재촉했다. 깨알 같이 작은 글자들이 적힌 종이를 받아든 순녀의 마음이 천만 근 쇠붙이에 눌린 듯 고통스러웠다. 눈앞에 안락사 의사가 어른거렸다. 그는 빨리 서명을 해서 언니를 고통에서 구해주라고 그녀를 다그쳤다. 그러자 아침저녁으로 병실을 찾아와 기도를 해주는 수녀가 나타나 안락사 의사를 질타했다. 그들 사이에서 순녀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안락사 의사가 펜을 잡고 있는 순녀의 손을 서명란 위로 잡아끌며 속삭였다. 저들은 몰라요, 말기암 환자의 고통을. 이름 석 자를 쓰는 순녀의 손이 겉잡을 수 없이 떨렸다. 통증이 줄어든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필녀는 방사선 치료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치료가 끝나고 병실로 돌아오자 그녀는 축 늘어져버렸다. 오후 내내 신음 소리만 내며 누워 있다가 저녁에 작은 아들이 왔을 때에야 겨우 눈을 떴다. 그리고 애써 괜찮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기 내 가방 좀 꺼내다오."
필녀는 작은 아들을 쫓듯이 보내버린 뒤에 침대머리에 있는 사물함을 가리켰다. 순녀는 사물함에서 갈색 손가방을 꺼냈다. 필녀는 지퍼를 열고 물끄러미 가방 안을 들여다보더니 화장용 손거울을 꺼냈다. 거울 손잡이를 쥔 손이 수전증 환자처럼 떨렸다. 거울을 가까스로 얼굴 앞으로 들어 올렸다. 거울을 들여다보던 눈이 질끈 감겼다. 이내 거울이 힘없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옷치장 못지 않게 화장에도 유난스러울 만큼 공을 들였던 그녀로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황폐한 얼굴을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을 터였다.
필녀는 한참 동안 눈을 감은 채 일그러진 표정을 풀지 않았다. 이윽고 체념의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뜬 그녀는 가방에서 화장품을 꺼내 침대 위에 죽 늘어놓았다. 모두 값비싼 외국산 화장품들이었다. 그녀는 크림 용기에서 손가락 끝으로 크림을 듬뿍 덜어내 이마와 양 볼과 코와 턱에 차례로 바르기 시작했다. 크림을 펴서 바르는 손의 움직임에 따라 얼굴 가죽이 사방으로 밀렸다. 눈을 감은 채 파운데이션 크림을 펴 바른 얼굴을 콤팩트로 꾹꾹 눌러댔다. 떨리는 손 탓에 눈썹은 비뚤비뚤하고 핑크색 루주는 입술 선을 함부로 벗어났다. 노란 모자와 짙은 화장에도 불구하고 형광등 불빛에 드러난 얼굴은 고스란히 말기암환자였다. 순녀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미……쳤……어, 미……쳤……어!"
바나나를 입에 물고 있던 바나나 노파가 느닷없이 필녀를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그래, 내가…… 미쳤지? 내가…… 미친년이야."
필녀는 화장품을 모두 가방에 넣어 순녀에게 주었다.
"인제 나한테는……. 너 써라. 늙을수록…… 좋은 화장품을…… 써야……."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필녀는 팔로 가슴을 감싼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순녀는 비상벨을 눌러 간호사를 불렀다. 모르핀 주사를 맞은 필녀는 모처럼 몸을 반듯이 펴고 누웠다. 가부끼 배우처럼 짙게 화장 한 그녀의 얼굴은 마치 죽음의 탈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에 필녀는 황홀경에 빠졌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신세한탄을 늘어놓고 울다가 갑자기 깔깔거리고 웃어댔다. 죽어라 하고 벗지 않던 노란 모자를 벗어 던져버리고 민둥머리를 마냥 쓰다듬기도 했다. 수치심뿐만 아니라 그토록 못 견뎌 하던 통증조차 전혀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놀라서 달려온 자식들마저 알아보지 못했다. 흥분 상태는 꼬박 하루 동안 계속되었다. 필녀는 잠 한 숨 자지 않고 버텼다. 백혈구 수가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다고 했다. 큰며느리는 시어머니가 대세를 받을 기회를 놓쳐버렸다고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순녀의 생각은 달랐다. 평생 신앙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았고, 본인이 끝까지 원치 않았던 일을 자식들의 뜻대로 하는 것은 언니를 욕되게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열풍 같은 속풀이 굿이 끝나자 필녀는 마침내 혼수상태에 빠져 임종실로 옮겨졌다.
필녀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입을 반쯤 벌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리 흔들고 자극을 주어도 허공을 응시한 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순녀는 필사적으로 언니의 온몸을 주물렀다. 때로는 언니가 빨리 숨을 거두는 것이 고통으로부터 해방이 되는 거라고 생각 했지만 막상 세상을 뜬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세상이 텅 비어버린 듯한 공허감에 휩싸여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서류에 서명만 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후회를 했지만 현실은 돌이킬 수 없었다. 이틀이 지나도록 도무지 눈을 감지 않고 가쁜 숨만 몰아쉬는 필녀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었다. 순녀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담당 의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언젠가 방송에서 본 외국 의사 이야기를 하면서, 그 의사처럼 안락사를 시켜주지는 못할망정 모르핀을 다량 주사해서 언니가 빨리 숨을 거두도록 도와달라고 매달렸다.
"그러지 않아도 될 겁니다. 오늘밤이 고비가 될 거 같습니다."
의사는 심상한 어조로 말하고 장례식 준비를 하도록 일렀다. 병실로 돌아온 순녀는 언니의 허리 밑으로 손을 밀어 넣어 보았다. 그토록 가볍던 몸이 바위처럼 옴쭉도 하지 않았다.
"준비를 해야겠다."
순녀는 조카들에게 임종 채비를 시키고 병원을 나섰다.
한 달여 동안 비워둔 필녀의 아파트에서는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순녀는 방마다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시켰다. 필녀는 자식들과 함께 살면 서로가 불편하다며 두 아들을 결혼시키고 나서 줄곧 이 작은 아파트에서 혼자 살았다. 포목상 주인답게 옷사치를 꽤나 하던 그녀의 안방 옷장 속에는 세탁소의 비닐 커버를 씌운 옷들이 빼곡이 걸려 있었다. 순녀는 미색 아사 한복을 골랐다. 속옷을 찾으려고 옷장 서랍을 열자 숨이 막히도록 고운 연분홍색 실크 한복이 들어 있었다. 몇 해 전 윤달에 지어둔 수의였다. 겉감은 실크였지만 안감은 결이 고운 최고급 안동포를 썼다. 그때 필녀는 똑같이 두 벌을 지어 순녀에게도 한 벌을 주었다. 순녀는 와락 수의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옷갈피에서 비닐 봉지 하나가 툭 떨어졌다. 봉지 안에 든 것을 꺼내보았다. 두 홉들이 소주 한 병과 하얀 약병이었다. 순녀는 소주병과 약병을 가슴에 꼭 껴안았다. 이제 다시는 이 집에서 언니와 함께 밥을 먹을 수도 없고, 잠을 잘 수도 없고, 주현미나 현철의 노래를 따라 부를 수도 없고, 동전 따먹기 화투를 치며 시간을 죽일 수도 없을 터였다. 그녀는 그 동안 쌓이고 쌓인 서러움을 꺼이꺼이 울음으로 토해냈다.
순녀가 병실로 돌아왔을 때 필녀는 잠깐 정신이 돌아온 듯 눈을 깜박이며 주위를 살폈다.
"언니, 뭐 하고 싶은 말 있어? 여기 자식들 다 있어요."
"어머니!"
자식들이 필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일제히 어머니를 불러댔다.
"어머니, 저예요. 절 알아보시겠어요? 어머니!"
큰아들이 필녀의 손을 붙잡고 안타깝게 어머니를 불렀다.
필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계속 눈을 슴벅였다.
"언니, 뭐라고 말 좀 해봐요. 한 마디라도……."
순녀가 필녀의 귀에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때였다. 필녀가 힘겹게 왼손을 들어올리더니 아랫배를 가리켰다. 인공항문이 있는 곳이었다. 순녀가 이불을 들어올리자 악취가 코를 찔렀다. 햇볕 쨍쨍한 여름날 쓰레기통에서 썩어 가는 야채 찌꺼기와 생선 내장 냄새보다 더한 악취였다. 그토록 굳게 닫혀 있던 항문에서 시커먼 오물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순녀는 누군가 옆에서 건네준 수건으로 오물을 닦아냈다. 항문 주위를 누르자 오물이 콸콸 솟구쳐 나왔다. 순녀는 수건을 치워버리고 두 손으로 오물을 받아냈다.
"아이고, 시원해라. 우리 언니 인제 살겠네. 오죽하면 칼로 배 좀 째보자더니…… 이제사 터지네. 아이고, 시원해."
순녀는 항문 주위를 누르고 쓸어 내리며 오물을 나오는 대로 받아냈다. 두 손은 물론 옷소매까지 시커먼 오물로 범벅이 되었지만 더럽다는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언니가 그토록 원하던 통변이라는 생각을 하자 오물이 세상에 없는 귀중한 물건처럼 생각되었다. 오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자 임산부처럼 부풀어 있던 필녀의 배는 쪼글쪼글한 노인의 배로 돌아왔다. 순녀는 따뜻한 물에 비누를 풀어 언니의 몸을 구석구석 정성껏 씻었다. 특히 언니의 한 맺힌 인공항문을 닦고 또 닦았다. 그리고 그곳에 언니가 즐겨 쓰던 향수를 뿌렸다.
"언니, 개운하지? 인제 살겠지?"
순녀는 언니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필녀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순녀의 손을 꼭 잡았다. 동생을 바라보는 필녀의 눈빛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평온해 보였다. 잠시 후 필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공중에 잠깐 멈추어 있던 손이 이마를 짚고 나더니 가슴 한 복판으로, 양쪽 어깨로 옮겨갔다.
"어머니가, 세상에, 우리 어머니가 성호를 그으셨어요. 성호를……"
큰며느리가 감격에 겨워 함께 성호를 그으며 흐느껴 울었다. 문득 수녀에게 역정을 내던 필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여기서 똥만 펑펑 쏟아져 나오면 내가 믿는다니까! 그러나 한편 순녀는 언니가 긋는 성호가 꼭 종교적 의미를 뜻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원하던 통변, 바로 그것이 언니에게는 구원이 아니었을까. 순녀는 언니의 손을 꼭 쥐었다. 필녀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눈자위로 한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자식들은 애절하게 울었지만 숨을 거둔 필녀의 얼굴에는 평화로운 미소가 번져 있었다. 순녀는 가위로 언니의 환자복을 잘라 벗기고 깨끗한 속옷과 미색 아사 한복으로 갈아 입혔다. 필녀의 몸에서 미처 식지 않은 온기가 손끝에 느껴질 때마다 순녀는 깜짝깜짝 놀라 언니의 코와 입에 귀를 바짝 대보곤 했다. 밝은 백열등 불빛 아래 미색 치마 저고리를 입고 노란 모자를 쓴 채 누워 있는 필녀는 봄나들이라도 나서는 사람처럼 화사했다. 간호사가 하얀 천으로 필녀의 몸을 덮었다.
영안실로 실려 가는 필녀의 머리 위에 노오란 개나리꽃 한 무더기가 활짝 피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