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의 2차 동학혁명과 평창의 동학전적지]
후세백작 2019.05.31 18:54
동학이란 구한말이라는 한 시대의 폐단을 직시하고 폐의 시정을 위해 용감하게 행동으로 나선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민중 혁명이다. 조선 말기에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대원군에 의해 무너지지만, 세도정치에 의한 부패망국의 조선은 이미 썩을대로 썩어 회복불능의 상태가 되었으며, 이렇게 조선이라는 한 시대의 말기적 증상으로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는 백성을 도탄에 뻐뜨리자 이를 묵과하지 않고 동학이라는 거국적 민중의 봉기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동학에서는 정치· 경제의 부정부패 타파, 민간중심(민주적) 자치행정 실행, 외세침략에 배격이 녹두장군(체구가 작아서 붙인) 전봉준에 의해 주창되었으먀, 전라도에서 시작된 1차 동학항쟁은 공주 우금치 전투의 패로 끝이난다.
하지만, 동학의 잔국적 확산속에 2차 동학봉기중에 강원도의 동학항쟁을 그 불꽃의 접전이었으며, 고부에서 시작된 동학은 홍천과 평창전투를 마지막으로 끝났다. 동학은 비록 실패하였으나 우리나라에 척양척왜와 보국안민의 기치를 들고 전국적으로 일어난 혁명이었다 그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역사적 교훈으로 길이 남겼다.
아래에 스크랩한 논문 [강원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와 동학농민군]은 강원도에서 일어나는 동학 2차 봉기의 전체를 서술하고 있는 바 그중에 고딕체로 된 부분은 평창에서의 동학 전투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 논문에서도 동학의 항전지에 비석이라도 세움을 주장하고 있듯이 평창의 후평리 전적지와 봉평의 사리평 전적지에 조그마한 공원이나 최소한역사적 위치를 알리는 비석 하나라도 있어야 함은 당연하리라 사료됩니다.
그간 평창은 레져시대에 큰것 하나를 꿈꿔왔지만 전국적인 예를 차치하고서라도 여타 인근 영월, 정선처럼 이루어 놓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아직도 거대한 꿈에만 사로잡힌것은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일전에 게진한 <평창과 영월인의 차잇점>이란 글에서 영월은 황금연휴면 여행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합니다. 초교생 학부모들이 아이를 데리고 학습광광에 나서려면 단연 영월이 최고로 꼽힙니다. 그러나 영월은 관광자원이 많아서도 아닙니다. 영월의 관광자원의 대부분은 약 30여개의 박물관의 인위적 자원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경비와 시간의 투자에 최대의 효과를 보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평창에서 큰 테마 하나를 조성한다면 몇시간은 재미있게 관광하지만 바로 돌아가야 되는 실정이다. 먹거리나 잠자리의 콘도나 펜션의 숙박시설도 재 정비해야 하며, 또한 부대적인 관광 코스가 있어서 연계가 되어야지, 이곳까지 찾아오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 하나의 관광, 레져 아이콘으로는 비 효율적이란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역사의 기록은 물론이지만 학습의 테마를 깃들이는 장으로서도 동학의 평창 전적지 두곳의 표식은 필요한 것입니다.
기실 동학의 혁명은 우리 민족사에 가장 처음으로 외치는 자주적 시민사상의 발로였는데 강원도의 전체로 춘천, 제천, 영월, 정선, 원주, 횡성, 홍천, 강릉등에서는 자기네 스스로의 동학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그 기념비도 세우고 있지만 유독 평창은 그 그림자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평창은 늦게서라도 이러한 역사의 장의 기록과 함께 자라나는 세대의 교육의 장으로서도 동학의 기념비는 세워져야 하리라고 사료됩니다.
아래에는 강원도 2차 동학의 전체 개요와 그중 고딕체는 평창의 동학혁명을 제시하고 잇으며 이 논문은 인용부에 동학학회의 동학학보의 씨리얼 넘버에서 기록하고 이는 객관화된 역사 사료이기에 이 논문 전체를 스크랩하여 강원전체와 그 부분의 평창 동학의 이해를 합니다.
****<논문 스크랩>*************************************************
[강원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와 동학농민군]
이병규*
(국문초록)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강원도지역에서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강원도지역에서는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 과정에서는 특별한 활동을 보이지 않다가 2차 봉기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강원도지역은 최제우가 1864년 처형된 후 조직을 이어받은 최시형이 근거지로 삼고 동학교단 조직을 재정비한 지역으로서 큰 의미가 있는 지역이다. 지금까지 강원도지역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에 대해 정리된 연구 성과는 거의 없는 형편이다. 또한 강원도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동학농민군들에 대한 연구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강원도 지역에서 총 13곳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 유적지가 상당수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인식과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앞으로 개선되어야 할 문제이다. 강원도 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와 관련하여 우선적으로 안내판설치가 필요하다. 여기에 체계적인 보존 관리를 위
해서는 문화재로 지정하는 작업이 진행되어야 하며 학술연구도 보다 심도 있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강원도 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을 중심으로 답사 프로그램을 개발할 필요가 있으며 강원도 동학농민혁명의 메카로서강원지역의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의 설립도 필요한 부분이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190 | 동학학보 제37호
현재까지 파악된 강원도 지역 동학농민군은 총 76명이다. 지역별로 거의 강원도 전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지역별로 보면 강릉 8명, 봉평 12명, 원주 6명, 인제 2명, 양구 1명, 정선 4명, 평창 6명, 홍천36명, 횡성 1명으로 홍천에서 가장 많은 동학농민군이 확인된다. 이는 홍천을 근거로 차기석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홍천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큰 전투를 벌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동학농민혁명 연구는 지역적 관점을 견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농민군 개개인의 활동 양상을 복원해내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주제어 : 강원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동학농민군
·논문 투고일 11월 27일 ·심사일 12월 7일 ·게재 확정일 12월 9일
1. 머리말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강원도지역에서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강원도지역에서는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 과정에서는 특별한 활동을 보이지 않다가 2차 봉기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강원도지역은 최제우가1864년 처형된 후 조직을 이어받은 최시형이 근거지로 삼고 동학교단 조직을 재정비한 지역으로서 큰 의미가 있는 지역이다. 지금까지 강원도지역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연구한 연구성과는 어느 정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지금까지 강원도 지역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다.
강원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와 동학농민군 | 1911
그러나 강원도지역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에 대해 정리된 연구 성과는 거의없는 형편이다. 또한 강원도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동학농민군들에 대한 연구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강원도지역의 동학농민혁명유적지를 살펴보고 아울러 강원도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동학농민군들의 활동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2. 강원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현황2
1) 강원지역 동학농민혁명유적지 분포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및 기념시설 현황조사-강원·경기·서울·울산·경북·대구』(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1)에 따르면 현재 강원지역에는 8개 시군에 13곳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가 파악되고 있다. 강원지역 동학농민혁명유적지33를 성격별로 구분해 보면 <표1>과 같다.
한우근,「 동학농민군의 봉기와 전투-강원·황해도의 경우-」,『 한국사론』 4, 서울대 국사학과,1978
박준성,「 1894년 강원도 농민군의 활동과 반농민군의 대응」,『 동학농민혁명의 지역적전개와 사
회변동』, 새길, 1995
박맹수,「 강원도의 비밀포교지에 관한 연구」,『 춘천문화』 10, 1995
정은경,「 1894년 황해도·강원도지역의 농민전쟁」,『 1894년 농민전쟁 연구』 4, 역사비평사,1995
엄찬호,「 강원도 동학의 전래와 농민항쟁」,『 강원문화사연구』 2, 강원대학교 사학회
원영환,「 강원도 지방의 동학과 동학혁명」,『 강원문화사연구』 5, 강원향토문화연구회, 2000
이기원,「 강원지역 동학농민운동의 연구」,『 강원사학』 15·16, 강원대학교 사학회, 2000
강대덕,「 원주지역 동학농민운동의 조직과 활동」,『 강원문화사연구』 14, 강원향토문화연구회,
엄찬호,「 차기석계 동학농민혁명군의 활동과 이후 동향」,『 강원사학』 24·25, 강원대학교 사학회
2 강원도 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분포와 현황은『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및 기념시설 현황조사-서울,경기,강원, 경북, 경남』, 2010을 참조하였음
3 강원지역에는 동학농민혁명 이전 동학 포교와 관련된 유적지가 있는데 원영환,「 강원도 지방의동학과 동학혁명」,『 강원문화사연구』 5, 2000에 따르면 최제우 은신지(정선군 남면 문두곡) 92 | 동학학보 제37호
<표1> 강원지역 동학농민혁명유적지 성격별 분포
유적지 성격 유적지명 전투지
정선 녹도 전적지, 평창 사리평 전적지, 평창 후평 전적지, 홍천 장야평 전적지,홍천 풍암리 전적지
점령·주둔지 강릉관아터, 고성왕곡마을
기포·집결지 홍천 물걸리 동창
처형지·피체지 강릉여중 농민군처형지, 원주 송골 최시형 피체지
동학 관련 영월 직동 최시형 은신지, 인제 갑둔리 김현수집터
기타 강릉선교장
<표2> 강원지역 시군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분포
시군별 유적지 강릉(3) 강릉관아터, 강릉선교장, 강릉여중 농민군처형지
고성(1) 왕곡마을
영월(1) 직동 전적지
원주(1) 송골 최시형 피체지
인제(1) 갑둔리 김현수집터
정선(1) 녹도 전적지
평창(1) 사리평 전적지, 후평리 전적지
홍천(3) 물걸리 동창, 장야평 전적지, 풍암리 전적지
2) 강원도 동학민혁명 유적지 현황
⑴ 강릉관아터
강릉관아터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농민군이 점령하고 폐정개혁을 실시했던 강릉관아[임영관(臨瀛館)]가 있던 곳으로, 지정사유가 동학농민혁명은 아니우 은신지(영월군 중동면 화원리), 최시형 은신석굴(영월군 중동면 직동 두리봉아래), 최시형 기도
처(유인상집터, 정선군 남면 낙동리 무은담), 최시형 기도처(정선군 고한읍 고안리 적조암터), 최제우 장자 최세정 옥사터(현 양양군청) 등이 있다.
강원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와 동학농민군 | 193
강릉관아지만 국보 51호로 지정되어 있는 <객사문> 주변에 당시 관아였던 <임영관>과 부속건물이 복원되어 있다. 위치는 강원도 강릉시 용강동 58-1 이다.
강원도지역 동학농민군은 1894년 9월 4일 강릉관아를 점령하였다. 당시강릉부사는 자리를 비운 상태였기 때문에 관아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관아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9월 5일 이들은 “삼정(三政)의 폐단을 개혁하고, 보국안민 한다”는 방문을 내걸었으며, 관아와 주막에 나누어 숙식하면서 민간의 송사(訟事)를 처리하였고, 요호부민들로부터 전답문서를 탈취하기도 했다.
이 서배들은 각 촌의 부잣집들로부터 돈과 곡식을 거두어 농민군에게 바쳤다. 농민군을 지휘한 사람은 평창의 전좌수 이치택, 지관 권모(權某), 진사 박재회, 영월 나(羅) 교장(敎長), 삼척 황 찰방(察訪), 정선 여량역의 지왈길(池曰吉), 강릉 대화면의 김상오(金相五)·공계정(孔啓正)·김순길(金順吉)·손영팔(孫永八) 등이었다. 이들은 다음날 영동 일대의 최대 지주이자 대표적인 사족가문이었던 강릉부 정동면 배다리[船橋]의 전 승지(承旨) 이회원(李會源)의 집을 습격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9월 7일 읍리(邑吏) 정시중(鄭始中)과 최희민(崔凞民) 등은 도사 최윤정(都事 崔允鼎)과 함께 농민군을 공격할 계획을 은밀히 세우는 한편 선교장에도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회원은 곧바로 농민군들이 점심과 저녁거리 쓸 백미 100석과 돈 300냥을 보내 농민군을 안심시키는 한편 각 마을로 사람을 보내 반농민군을 결집시켰다. 점막들과 관아 건물에 나누어 숙식하고 있던 농민군은 비가 몹시 많이 오는 날 밤 8시경 도사 최윤정이 지휘하는8개 읍의 대소민인 4~5천명의 기습을 받고 강릉관아에서 퇴각하지 않을 수없었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들은 20여 명이 현장에서 전사하는 등 많은 희생자를 내었으며, 총 7자루, 창 157자루, 말 3필 등을 빼앗긴 채 대관령을 넘어 평창으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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⑵ 강릉선교장
강릉선교장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강릉관아를 점령한 동학농민군을 공격하기 위해 강릉 민보군을 지휘했던 이회원의 집으로 현재는 동학농민혁명과 관계없이 조선시대 양반 가옥(1703년 건립)의전형으로 평가되어 1965년 중요민속자 료로 지정·보존되어 있다. 위치는강원도 강릉시 운정동 431이다.
동학농민군이 공격한다는 사실은 알게 된 강릉선교장의 주인 이회원은민보군을 막후에서 결집하고 지휘하여 동학농민군의 공격을 대응하였다.
전 승지 이회원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9월 26일 강릉부사에 제수되었고 10월 22일에는 관동소모사(關東召募使)를 겸임하면서 평창 정선 홍천 지역의 농민군 진압에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⑶ 강릉여중 농민군처형지
현재 강릉여중이 위치한 곳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홍천의 대접주 차기석과 여량 접주 이중집 등 강원지역 동학농민군들이 처형된 장소이다. 주소는 강원도강릉시 용강동 47-8, 52-1이다.「 임영토비소록(臨瀛討匪小錄)」『(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 12)에 “사대(射臺) 앞에 교장(敎場)을 열어 두 놈의 목을 베고, 여량의 괴적인 이중집(李仲集) 등 7명을 포살하였다”는 기록에서 강릉여중이 강원지역동학농민군 처형지임을 알 수 있다.
강원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와 동학농민군 | 195
⑷ 고성 왕곡마을
고성 왕곡마을은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이 1889년 2월부터 3개월 간 왕곡 김하도의 집에 은신해 있었으며,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 당시 고성지역에서 일어난 농민군이 주둔하면서 전열을 다진 곳으로, 1997년 6월 천도교중앙총부와 동학민족통일회 고성지부, 고성문화원등이 지역 인사들과 함께 최시형의 인내천 사상과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위치는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 1리(왕곡마을) 322-3 이다.
왕곡리에 동학이 전파된 것은 1887년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김명숙을 중심으로 함희연·함희용·함영인·김응숙 등이 주축이 되어 활동하였다.
1889년에 들어 관의 추적이 더욱 심해지자 최시형은 1889년 7월 충청도 괴산의 신양동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10월에 들어 서인주가 체포되는 등 관의 추적이 닥쳐오자 음성을 거쳐 강원도 인제에 있는 김연호의 집으로 갔다. 그러나 역시 포졸이 추적하는 기미가 보이자, 간성 왕곡(旺谷)에 있는 김하도(金河圖)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최시형은 관의 추적이 조금 덜해지자 이
듬해 1월 인제의 김연호 가(家)로 갈 때까지 약 3개월 간 이곳에 은신해 있으며 동학을 포교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고 9월에는 북접 교단에서도 총기포령을내리자 양양·거진 지역에서까지 농민군이 봉기하였으며, 이 지역 농민군은 이 마을 함일순의 집에서 10여일 간 머물렀다. 관의 추격이 있자 농민군들은 가지고 있던 돈 등을 함일순의 집 오줌통에 숨겨두고 후일 찾으러 오겠다고 하였으나,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함씨 일가는 이 돈을 요긴
고성 왕곡마을과 기념비 196 | 동학학보 제37호 하게 썼으며, 그 빚을 갚기 위해 1997년 이곳에 동학사적기념비가 건립될 당시 150여평의 부지를 제공했다.
⑸ 영월 직동 최시형 은신처
이곳은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이 이필제 난(亂) 직후인 1871년 10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관의 눈을 피해 은신해 있던 곳으로 1996년 6월 천도교 서울교구 여성회에서 이곳에 얽힌 동학관련 사실을 알리기 위해 <천도교 사적지>기념비를 세웠으며 2006년 10월 중수하였다. 위치는 강원도 영월군 중동면 직동리 497-5이다.
⑹ 원주 송골 최시형 피체지
이곳은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 체포된 곳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이후 최시형은 관의 눈을 피해 강원도 인제·홍천, 경기도 여주 등을 거쳐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 송골마을로 피신하였다. 이곳에서 최시형은 1898년 4월 체포되었고 같은 해 6월 처형되었다. 현재 마을 앞에 최시형피체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에는 “모든 이웃의 벗 최보따리선생님을 기리며” 영월 최시형 은신처 기념비 최시형 피체지 강원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와 동학농민군 | 197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최시형은 송골마을의 원진녀의 집에서 체포되었는데, 2008년 빈 터만 남아 있던 이곳에 원진녀 가옥을 복원하였다.
피체지 기념비는1990년 4월에 세워졌으며, 원진녀 가옥에 대한 설명을 담은 기념비는 1990년 11월 <치악고미술동우회>에서 세워두었다. 위치는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 342-8 이다.
⑺ 인제 갑둔리 김현수 집터
이곳은 1880년 해월 최시형이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을 최초로 간행한 김현수의 집터로 위치는 강원도 인제군 남면 갑둔리 769번지이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와「 대선생사적」 등의 기록에 따르면 이필제란 이후 강원도와 충북 일대의 산간지방으로 다니며 포교활동을 하던 최시형은 동학 경전을 간행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때까지 동학교단에는 경전이 간행된 적이 없으며, 암송을 통해 전파되어 왔다. 최시형은 1880년 5월 9일 강시원(姜時元)·전시황(全時晄) 등과 함께 강원도 인제군 갑둔리의 교도 김현수(金顯洙)의 집으로 가서 간행소를 설치하였다. 도청(都廳)은 최시형, 감역(監役)은 강시원과 전시황이 맡는 등 직임을 분담하였고, 경비는 상주의 윤하성(尹夏成)을 비롯하여 정선·인제·청송의 교도들이 조달하였다. 판각작업은5월 11일부터 시작되어 6월 14일에 마쳤으며, 6월 15일에는 치성제(致誠祭)를 올렸다. 이때 간행된『 동경대전』은 100여 권이었으며, 각처로 분포되었 최시형 피체기념비인제 갑둔리 김현수 집 터 198 | 동학학보 제37호다.
그러나 이때 간행된『 동경대전』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현재 알려진 경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883년 충청도 목천 구내리 김은경의 집에서 발간된 계미본(癸未本)이다. 한편 최시형은 다음해 8월에 충청도 단양군 남면 천동의 교도 여규덕(呂圭德)의 집에서 또 다른 경전인『 용담유사』 수백 권을 처음으로 간행하였다.
⑻ 정선 녹도 전적지
이곳은 동학농민혁명 당시인 1894년 11월 6일 정선에 모여 있던 농민군이 일본군과 강원 감영병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위치는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봉양리 60-5이다.
1894년 10월 20일경이 되자 수천 명으로 불어난 영월·평창·제천·청풍지역의 농민군 수천 명이 정선과 평창으로 몰려들었다.「동비토론」에 따르면 이 때 정선읍에 3천명, 평창·후평에1천명의 농민군이 모여 있었다. 정선 군수는 도주하였으며, 농민군들은 이방의 머리를 베고, 9월 8일 강릉에서 공격당한 일을 복수하기 위해 다시 강릉으로 쳐들어할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이 무렵 정선 지역의 농민군을 이끈것은 청풍의 성두환(成斗煥)과 유도원(劉道元)이었다. 또 같은 무렵 정선 여량에서도 지왈길·이중집(李仲集) 등이 농민군을 결집하고 이웃한 강릉부 임계(臨溪) 지역의 부자들을 잡아들여 재물을 빼앗아 군량에 사용하였다.
정선·평창지역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강릉에서는 10월 22일 전 중군이진석이 이끄는 관군과 민보군을 보냈고, 11월 1일에는 감영에서 감영중군과 관군을 내려 보냈으며, 11월 3일에는 감영토포사가 인솔하는 관군과 이정선 녹도 전적지 강원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와 동학농민군 | 199
이시모리(石森) 대위가 인솔하는 일본군 2개 중대가 평창 운교참(云交站)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11월 5일 평창 후평리의 농민군을 진압한 다음 정선으로 향하였다. 11월 6일 강릉 민보군 중군 이진석이 이끄는 부대는 여량으로 쳐들어가 10여 명을 죽이고 접사(接司) 이중집 등 5명을 체포하여 이 가운데 이중집·임순철(林順哲)·김윤언(金允彦) 등 3명은 강릉으로 압송되었다가, 11월22일 포살되었다.
일본군과 감영군은 곧장 정선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녹도전투는 바로 이때 정선의 농민군과 일본군 및 감영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였던 것으로 보인다. 녹도 전투의 상세한 상황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많은 수의 농민군이 전사하였고, 체포된 농민군들은 녹도 둔치의 소나무 숲에서 처형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200 | 동학학보 제37호
평창 사리평 전적지
10월 26일 이들이 봉평에 도착하자 이미 봉평에 살던 강위서(姜渭瑞)가 민보군을 모집하고 농민군을 공격하여 윤태열 등 13명을 체포해두고 있었다. 중군 이진석은 이 가운데 봉평에서 체포되었던 윤태열과 이창문(李昌文)·김대영(金大永)·김희열(金喜烈)·용하경(龍河京)·오순영(吳順永)·이화규(李和奎) 등 7명을 포살하였다. 11월 2일에도 농민군을 추격하여 정창해(鄭昌海)를 총을 쏘아 죽였고, 안영보(安永甫)와 김순복(金順卜) 2명을 체포하였다. 이에 대해 홍천의 차기석이 봉평을 쳐들어가 도륙을 내려한다는 소문이 돌자 관군과 민보군은 이에 대한 대책에 부심하게 된다.
그러나 평창과 정선 등지의 농민군 진압이 시급해지자 관에서는 홍천 농민군에 대한 공격은 강위서 등에게 맡기고 이진석이 이끌던 군병은 대화로 가서 감영의 중군이 이끌고 온 관군과 합친 후 11월 3일에 도착한 일본군과 합세하여 11월 5일 평창 후평동에서 농민군을 진압하고 다음 날 정선으로 가서 정선읍내와 여량 등지의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봉평에 남은 민보군 지휘자인 포수대장 강위서는 11월 6일경 신배령을 넘어 홍천 내면으로 들어갔다가 차기석 부대의 기습을 받고 봉평으로 패주하였다. 11월 10일경 다시 홍천으로 넘어가서 양양에서 온 이석범(李錫範), 홍천 유생 허경(許埛)이 이끄는 민보군 등과 함께 내면 일대에서 차기석이 이끌던 농민군을 진압한 후 11월 중순 경 다시 봉평으로 돌아와 흥정(興亭)리
등지의 농민군을 공격하여 임정호(林正浩) 등 38명의 농민군을 포살하고 100여 명을 체포하였다
봉평면 무이리에 살던 이광섭옹(1990년 당시 72세)이 그의 조부(이명화, 1864년생)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사리평 전투는 창동 북쪽 회령봉과 흥정산 일대에 주둔해 있던 농민군 600여 명과 창동 쪽에 병력을 집결해 있던 관군및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였다고 하였다. 전투 상황에 대해서도 일본군 강원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와 동학농민군 | 201
이 총을 쏘자 화승총 2자루 밖에 없던 농민군들이 놀라 구목령을 너머 홍천서석 방면과 횡성의 태기산 쪽으로 도주한 것으로 기억하였다. 그러나 관군이나 일본군, 민보군이 남긴 자료에는 사리평 전투에 대한 언급이 없다. 정황상 사리평 전투는 이진석이 이끄는 강릉의 민보군이 도착하기 전 강위서가 지휘하던 포군과 봉평의 농민군 사이에 벌어진 격전인 것으로 보인다.
⑽ 평창 후평리 전적지
이곳은 동학농민혁명 당시인 1894년 11월 평창지역 농민군과 일본군 및 관군·민보군의 연합군 사이에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위치는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후평리 일대이다.
정선· 평창지역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11월 1일 감영에서는 감영중군을 내려 보냈으며, 11월 3일에는 감영토포사가 이끄는 관군과 이시모리(石森) 대위가 인솔하는 일본군 2개 중대가 평창 운교참(云交站)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11월 5일 양양의 소모사 종사관 유학 이석범이 이끄는 민보군 등과 합세하여 평창 후평리의 농민군 진압에 나섰다. 관군측의 추산에 따르면 당시 후평리에 결집해 있던 농민군의 수는 1만 여 명에 달하였다. 일본군과 관군·민보군의 공격을 받은 농민군은 100여 명이 전사하고 접주 이문보(李文甫) 등 5명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후 평창의 농민군은 성두환이 정선으로 후퇴하는 등 평창·정선일대와 삼척지역으로 후퇴하여 12월까지도 활동을 계속하였으나, 후평리 전투 이후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갔다.
평창 후평리 전적지 202 | 동학학보 제37호
⑾ 홍천 물걸리 동창
이곳은 차기석 휘하의 동학농민군이 9월말 봉기한 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곳으로 위치는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591, 594-3, 595번지 일대이다.
이곳은 차기석 휘하의 동학농민군이 9월말 봉기한 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곳으로 위치는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59 1991년에는 기미만세공원이 조성되었으며,1996년 4월 3일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에서 국가보훈처의 후원을 받아 세운이 기념비의 내용 가운데 이곳이 홍천지역 동학농민군이 집결했던 곳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⑿ 홍천 장평리 전적지 및 사인순 묘
이곳은 1894년 10월 21일 홍천 지역 동학농민군이 경기 지평의 맹영재가 끌고 온 민보군과 격전을 치른 곳으로 30여 명의 농민군이 전사한 곳이며 위치는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산 145-1(전투지), 683(사인순 묘) 이다. 홍천지역에서는 9월 들어 경기도 지평의 농민군 지도자 고석주(高錫柱)· 이희일(李熙一)·신창희(申昌熙) 등이 수백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들어와 접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당시 경기도 지평에서 민보군을 일으켜 농민군 진압에 앞장서고 있던 경기도 지평현의 전 감역(監役) 맹영재(孟英在)가 이끄는 100여 명의 포군에 의해 지도자들이 체포됨으로써 각지로 흩어지고 말았다.
홍천의 농민군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것은 다른 강원지역과 마찬가지로홍천 물걸리 동창 기미만세공원 북접 교단의 기포령이 떨어진 다음인 1894년 9월 말경부터였다. 9월말 경 홍천군 내면에서는 강릉·양양·원주·횡성·홍천 등 5개 읍의 접주로 불렸던 차기석(車箕錫)과 접주(接主) 박종백(朴鍾伯)이 1,000여 명의 농민군을 결집하여 봉기하였다. 이들은 동학 교단이 있는 보은으로 가려했으나, 맹영재의 민보군에 막혀 홍천으로 되돌아왔다. 10월 13일 밤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로 들어동창(東倉)을 불태운 후, 강릉 쪽으로 이동하여 운지(雲地)에 머물면서 세력을키워나갔다.
차기석이 지휘하는 홍천 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이를 진압하러 나선 것도 맹영재였다. 맹영재는 앞서 홍천의 농민군을 진압한 공로로 지평현감을 제수 받았고 경기지역 소모관(召募官)을 겸임하고 있었다. 차기석이 이끄는 농민군과 맹영재의 민보군이 첫 전투를 벌인 것은 10월 21일 홍천 장야평이었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사인순(史仁淳) 등 30여 명의 희생자를 내
고 솔치재를 넘어 서석으로 후퇴하였다.
사인순의 후손인 사영환(1940년생, 서석면 어론 1리 21번지)에 따르면 사인순의 시신은 현재 그의 묘소 바로 오른편의 골짜기에서 수습되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맹영재의 민보군과 홍천 농민군 간의 전투는 현재 사인순 묘소와 사인순의 시신이 수습된 골짜기 인근에서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인순 묘. 강원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와 동학농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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⒀ 홍천 풍암리 전적지
이곳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강원도지역에서 가장 큰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차기석이 이끄는 강원도 농민군은 1894년 10월 21일 맹영재가 이끄는 민보군을 맞아 홍천 장야평에서 전투를 벌여 패한 뒤 후퇴하여 홍천 서석 풍암리 일대 구릉 위해 진을 쳤다. 10월 22일 추해온 맹영재의 민보군과 이곳 풍암리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수백명의 농민군이 전사하였다. 전사한 농민군의 피가 질펀하여 그곳을 걸어가면 “자작자작” 소리가 난다 하여 자작고개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1977년 홍천 지역 주민들이 뜻을 모아 전적지 일대를 정비하고 「동학혁명군위령탑」을 건립하였다. 이곳은 현재 강원도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위치는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 505-11번지이다.
홍천 장야평 전투지 204 | 동학학보 제37호
3. 강원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활용방안
1) 안내 표지판 설치
현재 강원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에는 거의 대부분에 안내표지판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유적지가 유적지로서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그곳이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안내판이나 표지석을 통해 그곳이 의미 있는 장소임을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강원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이 중요하더라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우선적으로 가시적인 효과를 얻기위해서는 안내표지판과 표지석 설치 작업이 필요하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강원지역에 많은 동학농민혁명유적지가 있다. 이들 유적지의 중요도를정하고 순서에 따라 하루 빨리 안내표지판을 설치해야한다.
홍천 풍암리 위령탑. 홍천 자작고개 손화중 도소 안내판
강원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와 동학농민군 | 205
안내표지판 사업은 그렇게 많은 예산이 소요되지 않는다. 적은 예산으로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강원도를 비롯한 강원지역 지자체가 이 점을 고려한다면 우선적으로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17은 전북 고창의 손화중도소 안내판이다. 이곳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고창군에서 이곳이 손화중대접주의 도소가 있었던 곳임을 표시하는 안내판을 설치해 놓았다. 이로 인해 많은 답사객들과 연구자들이 이곳이 손화중대접주의 도소임으로 알고 찾아온다.
2) 문화재 지정
유적지가 체계적으로 보존 관리되기 위해서는 문화재지정이 필수적이다.
문화재지정이 되어야만 중앙정부나 지방정부가 문화재를 보존 관리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다. 현재 동학농민혁명 관련하여 강원지역에서 문화재 지정은 매우 빈약한 상태이다. 문화재는 문화재청(중앙정부)이 지정하는 사적, 광역단체에서 지정하는 유형문화재, 기초단체에서 지정하는 향토유적등이 있다. 국가 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현실적으로 지정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절차가 필요하다. 그러나 기초단체에서 지정하는 향토유적은 이보다는 수월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기초단체의 의지에 달려있다.
206 | 동학학보 제37호
<표 4) 강원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와 문화재지정 현황
번호 유적/기념시설명 주소지 시군별 지정문화재 현황
1 강릉여중 강원도 강릉시 용강동 47-8, 52-1 강릉시
2 강릉관아/객사 강원도 강릉시 용강동 58-1 강릉시국보 제51호(강릉임영관삼문)(1962.12.20)
3 선교장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 431 강릉시중요민속문화재 제5호(1967.04.20)
4 고성 왕곡마을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1리(왕곡마을) 고성군 중요민속문화재 제235호(2000.01.07)
5 직동 천도교 사적지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1리(왕곡마을) 영월군
6원주 송골 최시형 피체지.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 342-8 원주시
7 김현수 집 터 강원도 인제군 남면 갑둔리 769 인제군
8 녹도 전투지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봉양리 60-5 정선군
9 사리평 전투지.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원길리 767-1, 767-2, 773, 774 일대 평창군
10 후평리 전투지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후평리 일대 평창군
11 물걸리 동창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591, 594-3, 595홍천군
12 풍암리 전투지.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 505-11, 505-12 홍천군
강원도기념물 제25호(홍천풍암리동학혁명군전적지)(1977.11.28)
13장평리 전적지/사인순 묘.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산 145-1(전투지),83(사인순 묘) 홍천군
강원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사유로 하여 문화재로 지정된 경우 풍암리 전적지가 유일하다. 문화재로 지정된 경우는 그 사유가 동학농민혁명이 아니다. 강원지역에서 문화재지정이 필요한 유적지는 경전간행지인 김현수집터와 최시형피체지이다. 여기에 풍암리전투지는 현재 강원도기념물이지만향후 국가 사적으로 승격될 필요가 있다. 그 밖의 유적지는 강원도 문화재나 기초단체에서 향토유적으로 지정하여 관리해야만 할 것이다. 기초지자체의 향토유적이라도 지정되어야 이에 대해 예산을 투여하여 관리할 근거를 갖기 때문에 이러한 작업들은 조속히 진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강원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와 동학농민군 | 207
<표 5> 동학농민혁명 관련 문화재 지정 현황
국가지정문화재 : 6건
시·도지정문화재 : 9건
시·군 향토문화유적 : 3건
등록문화재 : 1건
전봉준고택(사적 293호, 1981.11.28.)
황토현전적지(사적 295호, 1981.12.10.)
우금치전적지(사적 387호, 1994.3.17.)
황룡전적지(사적 406호, 1998.6.10.)
백산성(사적 제409호, 1998.9.17.)
석대들전적지(사적 498호, 2009.5.11.)
만석보터(전북기념물 제33호, 1976.4.2.)
홍천풍암리 전적지(강원도기념물 제25호, 1977.11.28.)
손병희선생유허지(충북기념물 제30호, 1979.9.29.)
금성토평비(전남문화재자료 제175호, 1990.2)
하동 고성산성전투지(경남기념물 제142호, 1994.7.4.)
수운최제우 유허지(울산기념물 제12호, 1997.10.9.)
상주 동학교당(경북민속자료 제120호, 1999.12.30)
말목장터와 감나무(전북기념물 제110호, 2001.4.27)
고부관아터(전북기념물 제122호, 2005.6.3.)
최시형선생묘(여주군향토유적 제8호, 1986.4)
송장배미(공주시향토문화유적기념물 제4호, 1997.6.5.)
문바위골(옥천군 향토유적 2009-2호, 2010.1.21.)
의암 손병희선생 묘역(등록문화재 제515호, 2012.10.19.)
3) 학술연구 심화
강원지역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학술연구의 심화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까지 간헐적으로 강원지역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그리고 주변이라는 측면에서 연구가 이루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이제 강원이라는 지역적 관점에서 좀더 심도 있는 연구가 이루어져 한다. 그렇게 해야만 보다 분명한 강원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상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강원지역에 관계된 다양한 자료들을 종합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
1차 봉기에 있었던 각 지역의 자발적 활동양상, 그리고 2차 봉기 과정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강원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 동학 천도교와 관련된 내용 등은 아직도 새롭게 정립해야 될 과제이다.
4) 강원동학농민혁명기념관 설립 운영 설립이 필요하다. 전북지역에는 2004년 건립된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있다. 전라남도 장흥에는 국비 130억을 들여 기념관이 거의 공사를 완료하여 2015년 개관하였다. 전북에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있고, 전남에는 기념관이 건립되었는데, 강원지역에는 이러한 시설이 존재하고 있지 않다. 동학농민혁명사에서 강원지역은 전북이나 전남에 못지않게 큰 흐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반드시 강원지역 동학농민혁명을 설명해주는 강원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건립되어야 한다. 가능한 빠른 시일 안에 강원동학농민 혁명기념관이 건립되기를 기대해본다.
강원지역 동학농민혁명을 전시하고 연구하는 강원동학농민혁명기념관208 | 동학학보 제37호
5) 답사 프로그램 개발
강원지역에서는 홍천이나 인제, 정선 등의 지역에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하여 중요한 유적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이러한 강원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대상으로 하는 답사 프로그램 개발이 시급하다. 주변에 관계있는 유적지를 포함하여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답사 프로그램을 만들고 이를 홍보하여 많은 사람들이 강원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답사를 하도록 유도해야한다.
4. 강원도 동학농민군 현황
4‘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동학특별법’)이 2004년 3월 5일 제정되었다. 동학특별법에 따라 정부기구로서 국무총리를
4 강원도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백서』, 2009의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위원장으로 하는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이하‘심의위원회’)가 2004년 9월 구성되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유족들에 대한 명예회복이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유족들의 신청을 받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결정된 경우가 498명, 유족이 10,563명이었으며, 심의위원회가 직권으로 조사하여 등록한 참여자가 3,146명이었다. 이에 따라 심의위원회가 등록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3,644명에 달하였다. 이러한 성과를 내고 심의위원회는 2009년 12월 활동을 종료하였다. 따라서 현재 공식적으로 확인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총 3,644명인 것이다.
이는『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백서』(2009)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를 시도별로 보면 서울경기 90명(2%), 충청도 1,103명(30%), 전라도 2043명(56%), 경상도 204명(6%), 강원도 76명(2%), 황해도 111명(3%)로 전라도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 충청도 그리고 경상도, 황해도, 강원도에서도 많은 동학농민군이 확인되었다. 이는 표 6)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강원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와 동학농민군 | 209
<표 6> 도별 동학농민군 참여자 현황
서울경기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미상 합계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강원도지역에서도 많은 동학농민군들이 활동을 전개하였다.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백서』(2009)에 따르면 강원지역에서는 총 76명의 동학농민군이 확인된다. 이중에서 8명은 유족이 확인되지만 68명은 유족이 확인되지 않는다. 지역별로 보면 강릉 8명,봉평 12명, 원주 6명, 인제 2명, 양구 1명, 정선 4명, 평창 6명, 홍천 36명, 횡성 1명으로 홍천에서 가장 많은 동학농민군이 확인된다. 이는 홍천을 근거로 차기석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홍천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큰 전투를벌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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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7> 강원지역 군현별 동학농민군 참여자 현황 강릉 봉평 양구 원주 인제 정선 평창 홍천 횡성 합계 8 12 1 6 2 4 6 36 1 76
5. 강원도 동학농민군 활동
○ 사인순(史仁淳)
사인순은 1871년 12월 25일 홍천 장야평 근처에서 태어났다. 사인순은 동학농민혁명 이전부터 집안을 돌보지 않고 동학을 전파하러 열성을 다하였다고 한다. 그는 차기석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으로 25살의 젊은 나이에 참여하였다. 사인순은 장야평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가족들은 그의 시신을 수습한 장소에 무덤을 만들었다. 이 무덤은 현재에도 남아있어 120여년 전의 생생한 상황을 우리에게 알려둔다. 가족들에 전해오는 내용에 따르면 사인순은 동학난때 바우골에 엎드려 있는 사인순을 관군 및 일본군이 총으로 쏘고불태웠으며 오그라진 시신을 가족들이 그 자리에 묻었다는 것이다. 생으로 1894년 10월 19일 홍천 장야촌 전투에 동학농민군으로 참여하였다가 10월21일 총에 맞아 전사하였다.
○ 엄하영(嚴河永)
엄하영은 1894년 10월 홍천 서석지역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10월 24일 전사하였다. 엄하영은 형 엄우영과 동생 엄세영이 전투에 참여하여 전사하자 곧바로 동학농민군에 합류하여 홍천 서석전투에서 참전하였다가 10월 24일 전사하였다.
○ 김진협(金鎭協)
김진협은 부친 김우원과 사촌 김진구와 함께 1894년 10월 홍천 서석면 풍암리 동학농민군으로 참여하였으며 서석전투 중 사망하였다.
○ 최도열(崔道烈)
최도열은 1870년생으로 1894년 10월 홍천 서석면 풍암리 동학농민군으로 참여하였으며 서석전투 중 사망하였다. 최도열은 25세의 젊은 나이에 전투에 참여하여 전사하였다..212 | 동학학보 제37호
○ 김진구(金鎭九)
김진구는 1863년생으로 1894년 10월 홍천 서석면 풍암리 동학농민군으로 참여하였으며 서석전투 중 사망하였다.
○ 김우원(金右遠)
김우원은 1829년생으로 장남 김진협, 조카 김진구와 함께 1894년 10월 홍천 서석면 풍암리 동학농민군으로 참여하였으며 서석전투 중 사망하였다.
○ 김현서(金顯瑞)
김현서는 1850년 2월 11일생으로 1894년 10월 홍천 서석면 풍암리 동학농민군으로 참여하였으며 서석전투 중 사망하였다. 강원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와 동학농민군 | 213
○ 이중항(李重亢)
이중항은 1873년 4월 6일생으로 강원도 양구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이중항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초가을에 양구를 출발하여 청주까지 가서 싸우다가 겨울이 끝날 무렵에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해월 최시형이 양구에 피신해 와서 있을 때 3개월 정도 이중항과 유흥조 등의 집에 거처를 정하고 생활했다고 하며 최시형의 부인이 양구 지역에 있었다고 한다.
○ 김대열(金大烈)
김대열은 동학농민군 지도자로 강원도 홍천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11월 30일(음 11.4) 전사하였다.『( 天道敎百年略史』)
○ 김치운(金致雲)
김치운은 1894년 10월 전봉준의 동학농민혁명 제2차 봉기시 강원도 인제에서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참여하였다.
○ 임순화(林淳化)
214 | 동학학보 제37호
임순화는 1894년 10월 강원도 원주에서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에 참여하였다.
○ 신택우(申澤雨)
신택우는 접주로서 1894년 강원도 원주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8년 1월 경기도 음죽에서 체포된 뒤 서울로 압송되어 고문을 받았다.
○ 김화보(金化甫)
김화보는 강원도 원주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0월 관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 김상오(金相五)
김상오(異名 : 尙五)는 접장으로서 1894년 9월 4일 영월, 평창, 정선의 동학
농민군과 합세하여 강릉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東匪討論』, 1895『,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398~400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 137~140쪽)
○ 공계정(孔啓正)
공계정은 1894년 9월 4일 영월, 평창, 정선의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여 강릉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東匪討論』, 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398~400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137~140쪽)
○ 전순길(全順吉)
전순길은 1894년 9월 4일 영월, 평창, 정선의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여 강릉
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 東匪討論』, 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
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398~400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
137~140쪽)
○ 손영팔(孫永八)
강원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와 동학농민군 | 215
손영팔은 1894년 9월 4일 영월, 평창, 정선의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여 강릉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 東匪討論』, 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398~400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
究所, 1996, 137~140쪽)
○ 박재회(朴載會)
박재회는 1894년 9월 4일 강릉, 영월, 정선의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여 강릉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 東匪討論』, 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398~400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137~140쪽)
○ 이치택(李致澤)
이치택은 1894년 9월 4일 강릉, 영월, 정선의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여 강릉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東匪討論』, 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398~400쪽 『;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137~140쪽)
○ 차기석(車箕錫)
차기석은 접주로서 1894년 10월~11월 강원도 홍천·강릉·봉평 등지에서 활동하였고 1894년 11월 12일 강원도 홍천 내면 원당리(元棠里)에서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1894년 11월 22일 처형되었다.『( 東匪討論』, 1895『,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402~404쪽, 441~443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 143~145쪽, 202~206쪽)
○ 지왈길(池曰吉)
지왈길은 동학농민군 지도자로서 1894년 9월 4일 강릉, 영월, 평창의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여 강릉부 관아를 점령하였고 1894년 11월 23일 정선의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이틀 뒤에 처형되었다. 『( 東匪討論』, 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398~400쪽 『;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 137~140쪽)216 | 동학학보 제37호
○ 박종백(朴鍾伯)
박종백은 접주로서 1894년 10월 동학농민군 지도자 차기석과 함께 강원도 강릉에서 활동하였다.
○ 윤태열(尹泰烈)
윤태열은 동학농민군 지도자로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10월 26일 강원도 봉평에서 강위서가 이끄는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 이창문(李昌文)
이창문은 동학농민군 지도자 윤태열 등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0월 26일 강원도 봉평에서 강위서가 이끄는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 김대영(金大永)
김대영은 동학농민군 지도자 윤태열 등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0월 26일 강원도 봉평에서 강위서가 이끄는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강원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와 동학농민군 | 217
○ 김희열(金喜烈)
김희열은 동학농민군 지도자 윤태열 등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0월 26일 강원도 봉평에서 강위서가 이끄는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 東匪討論』,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402~404쪽, 441~443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1996, 143~145쪽, 202~206쪽)
○ 용하경(龍河京)
용하경은 동학농민군 지도자 윤태열 등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0월 26일 강원도 봉평에서 강위서가 이끄는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 東匪討論』,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402~404쪽, 441~443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1996, 143~145쪽, 202~206쪽)
○ 오순영(吳順永)
오순영은 동학농민군 지도자 윤태열 등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0월 26일 강원도 봉평에서 강위서가 이끄는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 東匪討論』,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402~404쪽, 441~443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1996, 143~145쪽, 202~206쪽)
○ 이화규(李和奎)
이화규는 동학농민군 지도자 윤태열 등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0월 26일 강원도 봉평에서 강위서가 이끄는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 東匪討論』,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402~404쪽, 441~443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1996, 143~145쪽, 202~206쪽)
218 | 동학학보 제37호
○ 정창해(鄭昌海)
정창해(異名 : 丁昌海)는 동학농민군 지도자 윤태열 등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0월 하순경 강원도 봉평에서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東匪討論』, 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404~405쪽, 441~443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1996, 145~147쪽, 202~206쪽)
○ 안영보(安永甫)
안영보는 동생 안영달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0월 하순경 강원도 봉평에서 민보군에게 체포되었다.『( 東匪討論』, 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404~405쪽, 441~443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 145~147쪽, 202~206쪽)
○ 안영달(安永達)
안영달은 형 안영보와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0월 하순경 강원도 봉평에서 민보군에게 체포되었다. 『( 東匪討論』, 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404~405쪽, 441~443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 145~147쪽, 202~206쪽)
○ 김순복(金順卜)
김순복은 아들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0월 하순경 강원도 봉평에서 민보군에게 체포되었다.『( 東匪討論』, 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404~405쪽, 441~443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 145~147쪽, 202~206쪽)
○ 유도원(劉道元)
유도원은 동학농민군 지도자로서 1894년 11월경 강원도 정선에서 활동하강원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와 동학농민군 | 219
였다.『( 東匪討論』, 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429~430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 184쪽)
○ 이문보(李文甫)
이문보는 접주로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1월 5일 평창, 후평 등지에서 관군, 일본군과 전투 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東匪討論』,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430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 185쪽)
○ 오덕현(吳德玄)
오덕현은 성찰로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1월 12일 강원도 홍천 내면 원당리에서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東匪討論』, 1895,『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435쪽, 436쪽,443~446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東學農民戰爭百周年紀念事業推進委員會, 史芸硏究所, 1996, 193~194쪽, 194~195쪽, 206~211쪽)
○ 박석원(朴碩元)
박석원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집강으로 활동하다가 1894년 11월 12일 강원도 홍천 내면 원당리에서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지덕화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집강으로 활동하다가 1894년 11월 12일 강원도 홍천 내면 원당리에서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 오덕보(吳德甫)
오덕보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1894년 8월 강원도 평창에서 활동하였다. 『( 東匪討論』, 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438~439쪽, 439~440쪽, 448~449쪽, 450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 199쪽, 199~200쪽, 214~215쪽, 216~217쪽)
○ 이중집(李仲集)
이중집은 접사로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1월 6일 강원도 정선 여량에서 이진석이 이끄는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東匪討論』, 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441~446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 202~211쪽)
○ 위승국(魏承國)
위승국은 접주로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1월 11일 강원도 홍천 내면 자운동에서 강위서가 이끄는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 심성숙(沈成淑)
심성숙은 접사로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1월 11일 강원도 홍천 내면 자운동에서 강위서와 허경이 이끄는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 권성오(權成五)
권성오는 동학농민군 지도자로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11월 13일 강원도 홍천 내면 청두리에서 이석범이 이끄는 민보군에게 체강원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와 동학농민군 | 221포되어 총살되었다
○ 김치실(金致實)
김치실은 접주로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1월 14일 강원도 홍천에서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 박학조(朴學祚)
박학조는 접사로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1월 14일 강원도 홍천에서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11월 22일 처형되었다.
○ 손응선(孫應先)
손응선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1월 14일 강원도 홍천에서 민보군에게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 임정호(林正浩)
임정호는 동학농민군 지도자로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1월 강원도 봉평에서 강위서가 이끄는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東匪討論』, 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441~446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 202~211쪽)
○ 권수청(權守淸)222 | 동학학보 제37호
권수청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1월 13일 강원도 홍천내면 청두리에서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 김성화(金成化)
김성화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1월 14일 강원도 홍천에서 민보군에게 체포되었다.『( 東匪討論』, 1895
○ 박군오(朴君五)
박군오는 접사로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1월 11일 강원도 홍천 내면 자운동에서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 임순철(林順哲)
임순철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1월 6월 강원도 정선 여량에서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東匪討論』, 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443~446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 206~211쪽)
○ 김윤언(金允彦)
김윤언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1월 6월 강원도 정선 여량에서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 김흥조(金興祚)
김흥조는 강원도 홍천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1894년 11월 호송되는 도중 내면의 김기봉과 정만석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 손장업(孫長業)
손장업은 강원도 홍천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1월~12월경 관군에게 체포되었으나 형을 받고 문초를 당한후 풀려났다.
○ 이관구(李寬九)
이관구는 강원도 홍천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1월~12월경 관군에게 체포되었으나 형을 받고 문초를 당한후 풀려났다.
○ 오주실(吳周實)
오주실은 강원도 홍천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1월~12월경 관군에게 체포되었으나 형을 받고 문초를 당한후 풀려났다
○ 이동익(李東益)
이동익은 강원도 홍천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1월~12월경 관군에게 체포되어 12월에 처형되었다.
○ 고준성(高俊成)
고준성은 강원도 홍천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1월~12월경 관군에게 체포되어 옥사에 갇혔다.
○ 박재호(朴在浩)
박재호는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진사였으나 강원도 평창으로 이거한 뒤1894년 동학농민군 지도자가 되어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으는 활동을 하였다. 『( 臨瀛討匪小錄』, 이회원, 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475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 249쪽)
○ 조원중(趙元中)
조원중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동학농민군 윤태열 등과 함께 군사를모으고 군량, 군물을 마련하는 활동을 하였다. 『( 臨瀛討匪小錄』, 이회원, 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482쪽『; 東學農民戰
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 256쪽)
○ 정운심(鄭雲心)
정운심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윤태열 등과 함께 군사를 모으고 군량, 군물을 마련하였고 1894년 11월 6일 강원도 홍천 내면에서 동학농민군지도자 차기석과 함께 강위서가 이끄는 민보군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臨瀛討匪小錄』, 이회원, 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482쪽, 487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 256쪽, 621쪽)
○ 고석주(高錫柱)
고석주는 강원도 홍천에서 동학농민군 지도자로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강원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와 동학농민군 | 225하였다가 1894년 9월 민보군 맹영재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東學史』(오지영, 1940; 아세아문화사, 1979, 151쪽)
○ 신창희(申昌熙)
신창희는 강원도 홍천에서 동학농민군 지도자로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9월 민보군 맹영재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啓草存案』,1894『,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7, 史芸硏究所, 1996, 43~45쪽)
○ 이희일(李熙一)
이희일은 강원도 홍천에서 동학농민군 지도자로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9월 민보군 맹영재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啓草存案』,1894『,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7, 史芸硏究所, 1996, 43~45쪽)
○ 윤면호(尹免鎬)
윤면호는 1894년 10월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시 강원도 횡성에서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참여하였다.
○ 이규하(李圭夏)
이규하는 동학농민군 지도자로서 1894년 강원도 원주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5년 4월 충청도 충주에서 체포되었다. 『( 司法稟報』1(1894~1897), 亞細亞文化社, 1988, 38쪽)
○ 박규협(朴圭夾)
박규협은 1894년 강원도 평창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司法稟報』5(1899~1900), 亞細亞文化社, 1988, 447~448쪽)
○ 이원팔(李元八)226 | 동학학보 제37호
이원팔(異名 : 關東)은 1894년 6월 강원도 평창에서 동학에 입교하여 관동대접주(關東大接主)로서 같은 해 8월 충청도 보은에서 최시형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900년 전라도에서 체포되어 같은 해 4월 처형되었
다.『( 司法稟報』5(1899~1900), 亞細亞文化社, 1988, 447~448쪽)
○ 김계원(金桂元)
김계원(異名 : 啓元)은 1879년 3월 강원도 인제에서 동학도로서 활동한 뒤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1895년 4월 10일 ‘장일백(杖一百) 유삼천리(流三千里)’의 처벌을 받았다.
○ 김창수(金昌守)
김창수는 강원도 홍천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1월~12월경 관군에게 체포되었으나 형을 받고 문초를 당한 후 풀려났다.
○ 손병흠(孫秉欽)
손병흠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2월 최시형과 함께 강원도 홍천으로 피신하였다.
○ 김성칠(金星七)
김성칠은 성찰(省察)로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2월 7일체포되어 처형되었다
○ 이화경(李和卿)
이화경은 1894년 10월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시 강원도 원주에서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참여하였다.
○ 임순호(林淳灝) 강원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와 동학농민군 | 227
임순호는 1894년 10월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시 강원도 원주에서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참여한 뒤 1898년 3월 경기도 여주에서 체포되어 풀려났다가 서울에서 체포되었다.
오창섭은 동학농민군 지도자로서 1894년 10월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시원도 홍천, 충청도 충주에서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참여하였다.
○ 심상현(沈相賢)
심상현은 동학농민군 지도자로서 1894년 10월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시강원도 홍천, 충청도 충주에서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참여하였다.
6. 맺음말
이상에서 강원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현황과 활용방안 그리고 강원도 동학농민군의 현황과 활동내용을 살펴보았다. 강원도 지역에서 총 13곳의동학농민혁명 유적지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 유적지가 상당수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인식과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앞으로 개선되어야 할문제이다.
강원도 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와 관련하여 우선적으로 안내판설치가 필요하다. 여기에 체계적인 보존 관리를 위해서는 문화재로 지정하는 작업이 진행되어야 하며 학술연구도 보다 심도 있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강원도 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을 중심으로 답사 프로그램을개발할 필요가 있으며 강원도 동학농민혁명의 메카로서 강원동학농민혁명기념관의 설립도 필요한 부분이다.
228 | 동학학보 제37호
현재까지 파악된 강원도 지역 동학농민군은 총 76명이다. 지역별로 거의강원도 전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지역별로 보면 강릉 8명, 봉평 12명, 원주 6명, 인제 2명, 양구 1명, 정선 4명, 평창 6명,
홍천 36명, 횡성 1명으로 홍천에서 가장 많은 동학농민군이 확인된다. 이는홍천을 근거로 차기석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홍천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큰 전투를 벌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동학농민혁명 연구는 지역적 관점을 견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한다고 생각된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농민군 개개인의 활동 양상을 복원해내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앞으로 연구는 여기에 집중되는 연구가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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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 동학학보 제37호
강원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와 동학농민군 |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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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참고자료)
성두환
(1845~1895)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활약한 지도자로 충청도 청풍 (現 제천시 청풍면 ) 송계리 출신. 1893년 청풍 대접주로 동학에 가담하여 1894년 7월 충청도 단양·제천을 대표하는 동학집강에 임명되어 수많은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같은해 8월에는 탐관오리를 처벌하는 등 폐정개혁 활동을 벌였고 우금치 전투 이후 강원도 지역에서 영월과 평창의 농민군과 연합해 10월 15일 정선을 점령하고 평창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