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 단상 13/김삿갓]150여년 된 지팡이 옮긴글(김삿갓 계보를 알 수 있다)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흰구름 뜬 고개 너머 가는 객이 누구냐/열 두 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술 한잔에 시 한 수로 떠나가는 김삿갓/세상이 싫던가요 벼슬도 버리고/기다리는 사람없는 이 거리 저 마을로/손을 젓는 집집마다 소문을 놓고/푸대접에 껄껄대며 떠나가는 김삿갓//방랑에 지치었나 사랑에 지치었나/개나리 봇짐지고 가는 곳이 어데냐/팔도강산 타향살이 몇몇 해던가/석양지는 산마루에 잠을 자는 김삿갓> 50대 이상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방랑시인 김삿갓> 노랫말이다. 군사독재시절 어느 대통령의 애창곡이었다던가.
엊그제 불쑥 이 노래가 떠올라 흥얼거린 것은 19세기 조선팔도 떠돌이시인으로 일생을 마감한 불우한 시인‘김삿갓’(1807∼1863. 본명이 김병연이나 평생 김립(笠), 김삿갓이라 불렸다)의 죽장竹杖(대지팡이) 이야기를 들어서이다. 지난 일요일 곡성 목사동면에 사는 중요무형문화재 60호 낙죽장도장烙竹粧刀匠 한상봉 님의 공방을 방문했다. 낙죽장과 장도는 아버지 한병문(1939-2014)로부터, 그 아버지는 재종조 한기동(1873-1959)할아버지로부터, 또 그 할아버지는 인근에 사는 사돈 이교호(18??-19??) 선비로부터 비롯되어 전승되어온 전통공예인데, 낙죽장도는 대나무 지팡이칼 마디에다 글과 그림 등을 인두로 정교하게 새기는 것이고, 장도는 은장도처럼 짧은 칼을 말하는데, 가업家業이 4대째(전수 중인 아들 포함)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김삿갓은 모두 알겠지만, 삿갓을 눌러쓰고 대지팡이를 의지하며 전국을 떠돌며 한시 100여편을 남긴 시인이지 않은가. 마침 우연하게도 보름 전쯤 구례구역 근처에 있는 헌책방 ‘섬진강 책사랑방’주인이 덤으로 준 『김삿갓 시집』(황병국 옮김. 범우문고 44)을 읽고 있었다. 흔히 풍자와 해학시의 명수名手로 알려진 그의 삶과 시를 감상하며 여러 번 마음이 짠해 왔다. 옮긴이는 그를 중국의 이백李白에 필적할만한 시선詩仙으로, 인생으로는 두보杜甫만큼이나 불우한 시성詩聖으로 비유하고 있다. 한자漢字의 음音과 훈訓을 빌어서 인간의 감성을 재치있게 표출해낸 시들이 많지만, 여기에서는 ‘죽시竹詩’한 편을 감상해 보자.
차죽피죽화거죽此竹彼竹化去竹 풍타지죽낭타죽風打之竹浪打竹 반반죽죽생차죽飯飯粥粥生此竹 시시비비부피죽是是非非付彼竹 빈객접대가세죽賓客接待家勢竹 시정매매세월죽市井賣買歲月竹 만사불여오심죽萬事不如吾心竹 연연연세과연죽然然然世過然竹
풀이를 보자. <이대로 저대로 되어가는 대로/바람 치는 대로, 물결 치는 대로/밥이면 밥, 죽이면 죽 이대로 살아가며/옳은 것 옳다, 그른 것 그르다 저대로 부치세/손님 접대는 가세대로 하고/시정 매매는 시세대로 하세/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하는 것만 못하니/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살아가세>
‘대나무 죽竹’ 8개로 순식간에 읊은 죽시竹詩를 보면, 그의 천재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런 시가 태반이라니 어찌 재미가 없을손가. 반면에 동가식서가식東家食西家食 풍찬노숙風餐露宿으로 일관한 삶의 비애를 익살과 재치로 풀어낸 그가 안쓰러워지기도 한다. 고향인 강원도 영월에는 ‘김삿갓문학관’이 세워져 있어 그의 삶의 자취와 시세계를 엿볼 수 있다.
그 김삿갓이 지리산을 거쳐 전남 화순 동복으로 가는 도중에 곡성의 목사동면의 훈장이자 낙죽장도의 장인인 이교호씨에게 대나무 지팡이 수리를 맡겼다한다. 그런데 화순 동복에서 57세로 객사하는 바람에 수리를 맡긴 ‘김삿갓 지팡이(대나무 마디 속에 칼이 들어있는 호신용)’는 영영 주인을 잃은 채 <이교호 → 한기동 → 한병문 → 한상봉>씨 가문으로 내려오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곡성 기차마을 전시관에서 일반인들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는 ‘김삿갓 지팡이’이야기를 듣고, 실제로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조만간 가서 직접 볼 생각이지만, 그 지팡이를 보면 ‘아, 저 지팡이 하나를 의지하여 전국을 걸어다녔구나, 얼마나 많은 회한을 가슴에 안고 살았을까? 마지막에는 체념을 넘어 달관의 경지에 이르러 영원한 자유인이 되었으리. 과연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이런 오만 가지 생각들이 가슴에 교차할 것같다.
이 오래된 시집에는 김삿갓의 후손이야기가 실려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그의 아들 익균은 양주에서 훈장을 하며 두 아들을 두었다. 장남 택진은 부친이 일찍 죽고 가세가 빈곤하자 나무를 팔아 동생 영진을 서당에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영진은 15세때 건봉사에서 승려가 되었는데, 서울의 절에 있을 때 알게 된 궁중나인이 황제에게 그를 천거, 고종은 그가 김삿갓의 손자임을 알고 대궐에서 일하게 했고, 홍천군수와 경흥부윤을 역임했다고 한다. 그의 아들 경한은 ‘나라가 망했으니 벼슬할 생각 말고 사업을 하라’는 부친의 말에 따라 양평에서 양조장, 재목상, 묘목사업을 하여 크게 번창해 양평군 일대에서 유지가 되었는데, 보릿고개 때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많은 양곡을 희사, 송덕비까지 세워져 있다고 한다. 4년간 초대 도의원도 지냈으나 말년엔 신병으로 1977년 숨졌으며 그의 아들(김삿갓이 증조부)인 석동이 양평군 청운면에 살고 있다고 한다. 어찌 됐건 이렇게 흐르는 것이 역사歷史이다.
책 이름은 기억나지 않은데, 친일문학가 김용제씨가 쓴 ‘김삿갓 일대기’를 청소년시절 아주 재미나게 읽었는데, 그중 지금도 생각나는 지독한 욕설시 한 편을 이 새벽 적어본다. 흐흐. 한번 웃자는 의미이다. 어느 서당에 하루쯤 유숙하렸는데, 푸대접을 받은 모양이다. ‘에라이-’하며 ‘욕시辱詩’를 즉석에서 지어 벽에 붙이고 갔다는 거다.
서당내조지書堂乃早知 방중개본물房中皆尊物 생도제미십生徒諸未十 선생내불알先生來不謁
내 일찍이 서당인 줄은 알았지만 방안에는 모두 귀한 분들뿐이네 학생은 다해야 열 명도 안되는데 훈장은 와서 인사조차 않는구나
|
첫댓글 선천부사 김익순의 손자 병연(박경주)은 장원급제하지만, 할아버지가 홍경래(김승호) 난 때 항복한 것 때문에 벼슬을 얻지 못한다. 이에 좌절한 그는 가족들을 떠나 삿갓 쓰고 죽장 짚고 방랑생활을 한다. 그는 퇴폐하여 가는 세상을 개탄하고 조소하는, 기발한 싯귀를 가는 곳마다 남기는데, 그의 글은 풍자와 해학으로 가득차있다. 그러던 중 노담(김동원)을 만나, 그 고을의 풍류를 읊는 선비들이 모이는 가매(황정순)의 집 가가당에 정착하여 서당을 낸다. 그는 가매의 딸 가련(박옥란)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나 가련이 홍경래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번민에 쌓인다. 또 한명의 여인 향아(이영옥)는 억만과 혼인한 사이지만 삿갓에게 관심이 있다. 김삿갓은 향아와 연인이 되지만, 억만의 향아에 대한 사랑을 알게 되어 그곳을 떠난다. 가련은 김삿갓을 향한 사랑에 여승이 되고 김삿갓은 길 위에서 생을 마감한다
[출처] 명국환 - 방랑시인 김삿갓 (노래&영화)|작성자 곡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