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지막이 근무를 나갔다가 비가 쏟아져서 일정을 취소 하고 고 홈 했어요. 에스더가 보조 기구를 차고 찍은 사진을 보내와서 급 짠해졌고 효과적인 시간 활용을 위해 우두망찰하다가 포스트모더니즘은 '보는 것(타자, 관찰자)'이고 사물을 '해석하는 관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 포스트모더니즘이 물리학과 결을 같이한다면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은 이미 페기된 율법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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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니끼 비가 오는 건 어쩌면 당연하지만 이 비를 보고 쉬는 게 낫겠다는 내 판단(해석)은 포스트모던 이스트의 촉일 수 일 수 있을까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또는 탈 근대주의는 일반적으로 모더니즘(근대주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서양의 사회, 문화, 예술의 총체적 운동을 일컫는 것 같아요. 근대주의의 핵심인 이성 중심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내포하고 있는 사상적 경향 쯤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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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데카르트)가 서양 철학을 이끌어왔다면 이제는 이성의 사각지대를 제대로 보기('보는 것') 위해 탈구조주의(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가 생겨났다고 이해했어요. 포스트모더니즘은 2차 세계대전 및 여성운동, 학생운동, 흑인 민권운동과 구조주의 이후 발생한 해체 사상의 영향을 받아 60-70년대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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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보를 보자면 니체-마르크스-프로이트-데리다-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들뢰즈-보드리아르-하이델베르크-폴리께르-슈레딩거-하이덴베르크 등으로 다원적이고 탈 이성적인 사고가 가장 큰 특징입니다. 여기서 잠깐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작(1979)'이란 말을 리오타르가 처음 쓰기 시작했지만 이미 니체(힘의 의지)-마르크스(자본론)-프로이트(무의식)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아버지라고 말하는 학자(예도)도 있는데 무조건 동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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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서 탈구조주의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영향으로, 예술계에서 탈구조주의는 사실주의(Realism)와 근대주의의 반발 작용으로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탈 근대주의가 철학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근대주의와 구조주의의 반발 작용으로 봅니다. 구조주의에 대항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그것이 포스트구조주의로 이어지면서 탈구조주의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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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포스트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는 상당히 비슷한 개념입니다. 이후 탈구조주의 철학자로 분류되는 철학자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다양한 이론들이 제시됩니다. 탈구조주의는 일률적인 것을 거부하고 다양성을 강조하였으며, 이성을 중시하며 등장한 근대주의가 추구한 정치적 해방과 철학적 사변도 하나의 이야기(거대 서사 혹은 큰 이야기)에 지나지 않음을 강조합니다. 또한, 칸트가 순수 이성이 만들어낸 산물이라 했던 '이념의 실현'을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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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계에 끼친 영향은 미술, 음악의 대중화와 미술에서 등장한 팝아트와 비디오아트, 음악에서 등장한 랩과 같은 장르의 발생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장르는 기존의 예술과는 매우 다르게 개성이 넘치고 자율적이며 다양하다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탈 근대주의와 부합한다고 볼 수 있어요. 문학에서는 장르의 벽이 느슨해지고 전지적 시점보다는 다른 시점을 채택함으로써 현실감을 증대시키고 독자의 상상력을 중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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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니체가 이야기했던 디오니소스적인 것, 마르쿠제가 이야기했던 이 억압적 문명의 시대는 과연 오는 것인지, 우리의 상상력이 아직 부족한 것인지, 자본이 우리를 소비의 노예로 만듦으로써 세상은 헉슬리의 디스토피아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염려가 21세기의 지성계를 침체에 빠뜨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혹자는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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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향유하는 많은 것들이 파편화되었고, 다극화되었으며, 동시에 인터넷은 그것들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겁니다. 이 현상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며, 돌이킬 수 없어요. 인터넷 없는 삶, 스마트폰 없는 삶을 이젠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개인의 서사가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확산되고 있으며, 기존의 문화적 코드들은 이미 한물갔으며, 레트로로 간혹 리바이벌 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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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타르가 1979년에 이 책을 쓸 때만 해도 포스트모더니즘은 서양의 것, 제국의 것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르네상스부터 근대철학을 통과해서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냉전까지 수백 년간의 세계사는 그들이 만들어왔으며,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를 주도한 건 사실입니다. 이성의 시대를 만든 것도, 이성의 실패에 슬퍼하고 절망하는 것도 그들의 몫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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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국들은 올드보이가 되었고, 이성의 대안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세계에 미치는 제국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이 여전한데 굳이 서두를 것도 없었고, 당장 급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는 동안 40년이 흐른 것입니다. 포스트모던의 조건은 애당초 나와있었지만 제국들은 스스로의 서사를 포기하지 못했을 뿐더러 여전히 그 서사에 갇혀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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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조건을 하나 더 추가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20세기의 제국이 아닐 것'. 제국의 패러다임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포스트모던의 조건은 충족되지 못할 것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질서가 필요하며, 그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에서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것 만이 기존의 체제를 부수고, 충격파를 던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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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백년간 이성의 시대를 만들고 주도했던 제국들은 자신들의 시대를 순순히 끝낼 생각이 털 끝만큼도 없고 그냥 드러누워 있을 뿐입니다. 세계를 향해 완전히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이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과 몸짓과 노랫소리는 매혹적인 것이어야 하며, 인류의 보편적 윤리를 담고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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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게으름과 진부함에 싫증이 난 사람들은 그들에게 열광할 테죠. 그들은 제국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들이며, 그들 역시 자신들이 새로운 포스트모던의 조건이 되리라고 꿈에도 생각 못 했을 것입니다. 노엄 촘스키(구조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분석적이고 실증적인 지식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으므로 무의미하다고 비판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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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계에서는 소위 '소칼 사건'으로, 1996년 물리학자 앨런 소칼이 고의로 무의미한 논문을 포스트모던 문화비평 학술지에 투고하였다가 이것이 그대로 게재, 출판되며 논란을 일으켰다고 해요. 갈릴레오의 지동설 이후 중세 신학은 박살이 났고 오늘 부는 바람조차 어제의 바람이 아니고 새로운 바람일 지니 에브리바디 변화의 주체가 되시라.
2024.7.4.thu.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