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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옷을 벗고 다니는 여인
하늘이 무척이나 파랬다.
몸이 구름처럼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수보리는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아보았다.
바로 앞에 보이는 산은 녹음이 짙었다.
그러고 보니 그 산에는 나무마다 잘 익은 과일들이 탐스럽게 달려 있었다.
수보리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갑자기 갈증이 났던 것이다.
'저 과일을 먹으면 갈증이 가실 수 있을 텐데.'
생각만으로도 입안 가득히 침이 고였다.
수보리는 그 쪽 산으로 가려고 발을 들었다.
웬일인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발을 꼭 붙잡고 놓지 않는 것 같았다.
수보리는 발 밑을 내려다보았다.
어찌된 일인가.
수보리는 빙판 위에 서 있었다.
발이 빙판에 꼭 붙어버린 것이다.
바람이 불었다.
칼날에 베이는 것처럼 살갗이 쓰라렸다.
'저 산으로 가야 할 텐데 어찌해야 좋을까.'
수보리는 발을 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마치 빙판이 손으로 잡아당기는 것처럼 발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수보리는 계속 빙판과 씨름했다.
얼마나 힘을 들였는지 수보리의 몸에서 땀이 났다.
빙판에서 발을 떼어내기 위해 발버둥치던 수보리는 문득 머리를 들어 저쪽 산을 바라보았다.
산에서는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 수보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
거기에는 꿈에도 그리던 목련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수보리는 그의 이름을 목청껏 불렀다.
그러나 소리가 되어 나오질 않았다.
사람들이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 붓다가 있었다.
붓다의 얼굴을 본 수보리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거룩하신 세존시여, 저를 이 얼음산에서 구해주시옵소서......
저는 지금 마라에 휩싸여 혼을 빼앗겼나이다.'
눈 앞이 어른어른했다.
수보리는 그 모습을 잡기 위해 간신히 눈을 떴다.
눈꺼풀이 천근인 양 무거웠다.
희미한 불빛 아래 노인의 주름진 얼굴이 보였다.
"이제 정신이 좀 드시옵니까?"
노인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수보리에게 식량 보따리를 주었던 그 노인이었다.
"한 달 만에 깨어나셨사옵니다. 몸이 많이 상하셨지요."
아! 그랬었구나.
그때 세존을 목놓아 부르고는 그만이었지......
"얼음산을 오른 지 보름이 되어도 내려오지 않으시길래 사람들과 함께 찾으러 갔었습니다.
눈 속에 파묻혀 온몸이 동상에 걸리셨더군요.
다행히 이제라도 발견되었으니 망정이지 큰일날 뻔하셨습니다."
노인은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이게 다 무언가. 내 진정 고행을 한 것인가.' 수보리는 눈을 감았다.
녹야원에서 만났던 고행사를 생각했다.
그때 수보리는 고행사가 그 많은 고행을 통해서도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것을 고행을 위한 고행을 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런데 바로 자신이 그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진정한 고행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나'라는 의식을 잊어버려야 하며, 또 잊었다는 생각조차도 잊어야 했다.
그러나 수보리는 의식을 놓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잊었다는 생각까지 잊지는 못했던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고행은 했지만 고행 자체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이것을 드셔보십시오."
밖으로 나갔던 노인이 미음을 쑤어왔다.
노인은 수저로 미음을 떠 수보리에게 내밀었다.
수보리는 수저를 들 만한 힘도 없었다.
"고맙습니다."
수보리는 사양치 않고 미음을 받아 먹었다.
먹을 것이 들어가자 뱃속이 와글거렸다.
너무 오랫동안 비워 두었던 속이라 놀란 모양이었다.
"대단한 분이시군요. 어찌 그런 고행을 생각하셨사옵니까?"
천천히 미음을 받아먹는 수보리를 바라보던 노인이 물었다.
"부끄럽습니다.
결국 이렇게 노인장께 폐만 끼치게 되었군요.
저는 고행의 참다운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육신을 망가뜨리는 결과만 되었으니,
만일 그대로 목숨이 끊어졌다면 그 죄과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노인장께서 이 생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생명을 건져주셨으니 다시 한번 감사드릴뿐입니다."
수보리는 진심으로 노인에게 감사를 드렸다.
그로부터 석달 후 혼자서도 몸을 추스릴 정도가 되자 수보리는 노인의 집을 나섰다.
노인은 떠나가는 수보리를 아쉬워하며 깨달음을 성취하면 꼭 가르침을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세존은 고행을 마친 다음 수자티 소녀가 주는 우유를 마시고 정진한 끝에 깨달으셨다.
나는 이 노인의 지극한 공양을 받았으니, 반드시 깨달음을 이루어 그 은혜에 답하리라."
설산을 내려가는 수보리의 마음은 착잡했지만, 한편으로는 새 생명을 얻은 기쁨도 있었다.
생명이 있다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수보리는 붓다를 만날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홀로 수행을 하기에는 공부가 부족한 것 같았다.
우기가 끝난 지도 벌써 여러 달이 되었다.
아직까지 붓다가 죽림정사에 머물고 있을 리는 없었다.
제자들을 이끌고 어디론가 떠났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수보리는 일단 죽림정사로 가 볼 예정이었다.
그곳에 가면 붓다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수보리는 죽림정사가 있는 동남쪽으로 길을 잡았다 날이 어두워졌다.
마침 가까이에 마을이 있기에 내일 아침에는 그곳에서 탁발을 하기로 하고 근처 바위틈에서 밤을 지샜다.
아침이 되어 수보리는 그 날의 탁발을 하기 위해 마을로 들어갔다.
그렇게 이른 아침도 아니건만 문들이 모두 꼭꼭 닫혀 있었다.
아침 탁발은 붓다를 따르는 비구들뿐만 아니라 브라만교를 믿는 이들에게도 전통적인 관습이었다.
탁발승에게 공양하는 것은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의미보다는 도를 닦는 높은 이에게 정성을 표시함으로써 공덕을 쌓는다는 의미가 더 컸다.
때문에 탁발승은 어디서나 존경과 환영을 받았다.
'이상한 마을이군.'
수보리는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리면서까지 탁발할 정도로 숫기가 있지는 않았다.
하릴없이 마을을 두 바퀴째 돌고 있을 무렵이었다.
수보리가 방금 지나온 골목에서 사람들이 한 무리 나타났다.
무심히 그들을 쳐다보던 수보리는 너무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
장성한 남자들이 알몸으로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말로만 듣던 나형외도(裸形外道)였다.
고행사가 말했던,
의(衣)를 끊기 위해 아예 벌거벗고 수행을 한다는 무리들.
나형외도들은 손에 발우를 들고 이집저집 기웃거렸다.
문을 마구 두드리기도 했지만 아무도 열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제서야 수보리는 이 마을 사람들이 문을 굳게 닫고 있는 이유를 알았다.
나형외도들은 도를 닦는다는 명분 아래 온갖 삿된 짓을 일삼고 다녔던 것이다.
그들이 점점 가까이 오자 수보리는 근처의 나무 뒤로 얼른 몸을 숨겼다.
그들과 대면해 보았자 좋을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탁발이라고 나왔는데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자 이들은 온갖 욕을 다 퍼부었다.
"도를 모르는 것들, 지옥에나 떨어져라!"
"우리들을 이렇게 능멸하다니, 마귀가 들리리라!"
고요한 마을에 그들의 목소리만이 요란하게 메아리 쳤다.
불한당 같은 나형외도들을 바라보는 수보리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안 되겠다. 이러다간 오늘 아침도 굶게 생겼어. 네 년이 구걸을 해보거라!"
그들 가운데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소리쳤다.
그러자 그들 무리 속에서 뜻밖에도 한 여인이 나타났다.
수보리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여인 또한 거의 벌거벗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여인의 얼굴은 볼 수가 없었지만 자태가 제법 고왔다.
"내 말이 안 들리느냐? 멍청한 년! 저 집으로 가서 문을 두드려 봐!"
우두머리가 여인의 팔을 와락 낚아채더니 어떤 집 대문으로 몸을 밀어 뜨렸다.
여인의 갸날픈 몸이 대문에 부딪쳤다.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쳐!" 우두머리가 눈을 부라리며 냅다 고함을 질렀다.
잠시 후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여인이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먹을 것을 구하러 왔습니다." 가느다란 목소리가 마구 떨렸다.
"어찌 그 모양이냐! 우리의 도를 잊었단 말이냐?" 한 녀석이 뛰쳐나오더니 여인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여인이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래도 허사였다.
여인을 일으켜 세운 그는 다시 옆 집으로 여인을 내몰았다.
나형외도들은 여인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탁발을 하려 했지만 어느 집도 문을 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수보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를 구한다는 이들이 오히려 힘없는 여인을 괴롭히다니......
'여인이 그들과 한 통속으로는 보이지 않던데....'
이런 생각이 들자 수보리는 그대로 떠날 수가 없었다.
만일 생각대로 여인이 그들 손에 잡혀서 억지로 지금과 같은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것이라면 여인을 그들에게서 구해야 했다.
수보리는 나형외도들의 뒤를 쫓았다.
한참을 뛰어가자 멀리 그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산으로 올라가는 모양이었다.
수보리는 눈치 채이지 않게 그 뒤를 따라갔다.
거처로 들어간 그들은 전날 마련해 두었던 것인지 여러 가지 열매와 나물,
나무뿌리와 껍질 따위를 씹으며 배를 채웠다.
그러더니 한바탕 시끄럽게 기도를 하였다.
숲속이었는데도 한낮이 되자 태양빛이 뜨거웠다.
그들은 여기 저기 나뒹군 채 잠을 자기 시작했다.
'저들은 저렇게 도를 구한다는 말인가?'
외도들의 그런 모습들이 기가 막히고 우습기도 했다.
수보리는 여인을 찾아보았다.
여인은 보이지 않았다.
숲속을 뒤지던 수보리는 마침내 계곡의 너른 바위에 앉아 있는 여인을 발견하였다.
나형외도 패거리의 우두머리가 잠들어 있었다.
그의 어깨를 주무르던 여인은 그가 깊이 잠들자 외도의 머리에서 살그머니 무릎을 빼내었다.
우두머리는 이빨을 한번 갈더니만 고개를 옆으로 떨구었다.
바위에서 내려온 여인은 계곡 쪽으로 걸어갔다.
여인은 계곡물에 손을 담근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비록 행색은 엉망이었지만,
자세히 보니 고아한 아름다움과 품위가 흘러내렸다.
알몸으로 지냈으련 만 여전히 살색도 곱고, 몸매 또한 잘 다듬은 듯 황홀하도록 아름다웠다.
그 자태가 여염집 여인 같지는 않았다.
'어쩌다 저런 여인이 외도에게 걸려들어 온갖 능욕을 당하고 있는 걸까?'
수보리는 여인에게 다가갈 방법을 생각했다.
우두머리가 바로 옆에서 잠자고 있었기 때문에 소리를 내어서는 안 되었다.
저들에게 잡히면 여인을 구하기는커녕 자신 또한 틀림없이 봉변을 당할 게 뻔했다.
수보리는 생각 끝에 조그만 돌 하나를 집어 계곡 쪽으로 던졌다.
여인이 있는 쪽으로 던지려 했던 게 빗나가 외려 우두머리가 자는 바위로 떨어졌다.
다행히 우두머리는 깊이 잠들었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수보리는 조심스럽게 계곡 아래로 내려갔다.
크고 작은 돌들이 발에 툭툭 채였다.
"보십시오."
수보리가 작은 소리로 여인을 불렀다.
그러나 여인은 듣지 못했는지 내내 물 속만 바라볼 뿐이었다.
"여기 좀 보십시오."
수보리가 다시 한번 여인을 불렀다.
그제서야 여인은 놀란 눈으로 수보리 쪽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달려 있었다.
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누구시온지?"
여인은 얼른 두 손으로 벗은 몸을 감쌌다.
두려움과 놀라움이 얼굴에 가득했다.
"지나가던 비구입니다. 곤경에 처하신 것 같아 도움을 드리러 왔습니다."
이 말에 여인은 안심한 듯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누추하기는 하나 우선 이것을 입으십시오."
수보리가 바랑에서 옷을 꺼냈다.
조각천을 이은 가사였다.
"어느 쪽으로 가야 좋을까요?"
여인이 가사를 입자 수보리가 물었다.
아무래도 이 곳 지리는 여인이 더 잘 알 것 같아서였다.
여인은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빠져나갈 수 없을 거예요. 이들 무리들이 이 산 곳곳에 숨어 있거든요."
여인의 얼굴에 절망이 가득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힘을 내십시오. 어찌 이런 능욕을 더 이상 참을 수 있겠습니까?"
수보리는 여인을 부축하며 계곡을 따라 올라갔다.
나형외도의 우두머리는 여전히 잠에 흠뻑 빠져 있었다.
두 사람은 계곡에서 벗어나 가파른 벼랑을 따라 산 아래로 내려갔다.
얼마나 허겁지겁 뛰었는지 두 팔과 다리가 가시나무에 찔려 피가 흘렀다.
두 사람은 상처를 돌볼 틈도 없이 산 아래로만 뛰어내렸다.
그러나 낮이 지나 저녁 노을이 물들었는데도 두 사람은 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길을 잘못 든 게 아닐까요?"
여인이 불안한 눈으로 수보리를 쳐다보았다.
불안하기는 수보리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내려가도 여전히 산 속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내려가기만 했으니 곧 마을이 나올 겁니다."
수보리는 여인을 안심시켰다.
두 사람은 다시 힘을 내어 걸음을 내딛었다.
"키- 키-." 갑자기 눈 앞에서 공작 한 마리가 날개짓을 하더니 하늘로 푸드득 뛰어올랐다.
인기척에 놀란 모양이었다.
숲 건너편으로 사라진 공작을 보며 여인이 안도하는 한숨을 쉬었다.
여인도 수보리도 크게 놀랐던 것이다.
잠시 걸음을 멈췄던 수보리와 여인이 다시 길을 가려 할 때였다.
숲속에서 불쑥 사람이 나타났다.
"악!"
난데없이 사람이 나타나자 여인은 얼굴을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다시 나형외도에게 걸려들었다는 절망적인 비명이었다.
그러나 눈 앞에 우뚝 선 사내는 행색은 비록 거렁뱅이었으나 나형외도는 아니었다.
"갈 길이 바쁜 사람입니다. 잠시 길을 비켜주시지요."
수보리가 사내에게 정중히 말했다.
"전 저 여인을 만나러 온 사람입니다."
뜻밖에도 사내가 이렇게 말했다.
여인은 얼굴을 가린 채 몹시 떨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 저 여인을 만나러 온 사람입니다."
수보리의 물음에 사내가 다시 한번 분명하게 말했다.
여인도 이 말을 들었는지 눈을 가렸던 손을 풀고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초라하기 짝이없는 사내를 쳐다보았다.
"아니?" 사내와 눈이 마주친 여인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발다라, 나요."
"아, 당신은....."
여인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사내가 얼른 여인을 끌어안았다.
여인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깨달음을 얻으셨사옵니까?"
정신을 차린 여인의 첫마디였다.
그 와중에서도 여인은 그렇게 물었다.
"깨달음을 얻지는 못했지만, 성도하신 분을 만났소."
사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잘 되셨군요."
여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서 당신을 데리러 온 거요. 당신도 그 분을 만나 뵈어야 하지 않겠소?"
사내의 말에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도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사내와 여인의 만남에 수보리는 저만치 물러서 있었다.
발다라라는 여인은 맨 몸에 수보리가 준 조각천 가사를 걸친 채였고,
사내는 그보다도 못한 누더기 가사를 입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바싹 야위어 뼈마디만 남은 몰골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모습은 고결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어찌하여 그대는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
여인의 모습에서 그간의 고통을 읽은 사내가 연민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을 기다렸어요.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오시지 않더군요.
너무도 답답하고 안타까워 제가 직접 수행에 나섰습니다.
제 나름대로 도를 찾기 위해...... 그러다가 이들에게 붙잡혔습니다."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제 탓이옵니다. 나쁜 도에 이끌린 죄과라고 생각했어요."
사내를 만난 여인의 얼굴에 기쁨이 넘쳤다.
그 동안의 고생은 이미 다 잊은 듯하였다.
"저 분이 저를 도와주셨어요. 당신을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다 저 분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인이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을 지켜보던 수보리를 사내에게 소개했다.
"이 분은 제 남편이십니다. 지금은 출가해서 그렇지 않습니다만."
그제서야 수보리는 두 사람의 사연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출가를 한 남편과 남편의 도를 따르려는 아내......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닌가.
수보리가 사내에게 정중한 인사를 하였다.
"출가하신 비구라고 하니 반갑습니다. 저는 수보리라고 옵니다."
"아내를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가섭(Kasyapa)이라고 합니다."
가섭이라고 하는 사내는 남루한 차림이었지만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게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다.
부부가 함께 출가하였고, 아직 여인의 출가가 허용되지 않던 시절,
그의 아내 발다라는 과감하게 나형외도에 몸을 던졌던 것이었다.
그때였다.
마침내 나형외도들이 숲을 헤치고 나타났다.
여인이 사라지자 산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던 모양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본 여인의 얼굴이 새카맣게 질렸다.
수보리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네 이년! 어디로 도망가는 거냐? 이 배은망덕한 년 같으니!"
우두머리의 손에는 시퍼런 칼이 들려 있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들 중 서너 명이 수보리에게 달려들더니 눈깜짝할 사이에 온 몸을 꽁꽁 묶어버렸다.
미처 반항할 틈도 없었다.
"그만두지 못하겠느냐?" 가섭이 엄한 목소리로 그들을 꾸짖었다.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너희들의 도냐? 너희들이 진정 도를 구한다면 어서 이 여인과 저 비구를 풀어주어라."
가섭의 목소리는 조용하지만 단호했다.
가섭의 질타에 나형외도들은 잠시 움찔했다.
그의 행색은 거렁뱅이었지만 어딘지 범접 못할 위엄을 느꼈던 것이다.
"네 놈은 또 무엇이냐? 네 놈이 이 년을 도망치게 했느냐?"
우두머리는 눈에 핏발을 세우며 악을 썼다.
그러나 좀전과는 달리 기가 많이 죽어 있었다.
"너희들이 어떤 도를 믿고 따르는지는 모르지만,
정녕 복된 내세(來世)를 원한다면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라.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내세의 복을 구하는 것이니,
이렇게 악한 행위 뒤에는 반드시 지옥의 불구덩이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죽기 전에 마음껏 욕심을 부려보고 죄를 일삼아본들,
너희들의 목숨은 하루 아침의 이슬, 어찌 기나긴 내세를 두려워하지 않으랴!"
가섭의 말은 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인도 사람치고 도(道)를 구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 도(道)란 깨달음이기도 하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성불(成佛)보다는 내세에 더 나은 생을 받기 위한 구함이었다.
인도인에게, 다음 생에 저주받으리라는 말만큼 끔찍한 욕도 없었다.
그동안 그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삿되고 더럽다고 피하거나, 두렵고 위험하다고 멀리 한 사람들뿐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은근히 소외감을 느꼈고, 살아남기 위해 더 나쁜 짓을 일삼았다.
그런데 지금 그들 앞에 서 있는 가섭이란 사내가 그들을 피하지 않고 준엄하게 그들의 잘못을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급기야는 수보리를 묶었던 나형외도 한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흐느꼈다.
"당신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저희들은 나쁜 짓을 너무 많이 하였사옵니다.
지금 말씀대로 죽으면 틀림없이 지옥불에 떨어질 것이옵니다.
아아, 어찌하면 좋겠사옵니까? 저를 지옥불에서 구해 주옵소서. 두렵사옵니다."
그러자 하나둘씩 무릎을 꿇고 울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마음에 아직 선한 뿌리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나형외도의 무리들이 이런 발심(發心)을 하자 우두머리는 당황하여 어쩔 바를 몰랐다.
"그대들이 이렇게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깨달음을 얻고자 하니 기쁘기 한량 없소.
나 또한 깨달음을 얻으려는 비구일 뿐,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는 못했소.
비사리국 대림정사라는 곳으로 가면 성도를 이루신 세존을 만나실 수 있을 것이오.
그 분은 이미 성불하신 몸, 그 분에게서 진정한 깨달음을 구하시오."
이 말에 이들 외도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가섭에게 감사의 예를 올렸다.
수보리는 가섭의 넓은 도량에 감격했다.
아내를 능욕하고, 옷까지 모두 벗겨 수치스럽게 했건만,
그런 문제는 거론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회개시키는 무서운 교화력.
가섭은 나형외도들을 이끌고 대림정사로 향했다.
제자들을 잃은 우두머리만이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산을 내려온 수보리와 발다라는 때늦은 공양을 하였다.
가섭은 이미 공양을 마쳤는지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공양이 끝나자 세 사람은 그 마을을 빠져나갔다.
수보리는 가섭과 발다라가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며 걸었다.
참으로 평화롭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발다라의 물음에 가섭이 성도하신 붓다를 만났다고 했던 생각이 났다.
'그렇다면?' 갑자기 수보리의 가슴이 마구 뛰었다.
"가섭 존자께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아직 가섭의 도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수보리는 웬지 그에게 '존자'라는 호칭을 붙여야 할 것 같았다.
그 험악한 나형외도들을 일시에 굴복시킨 그가 결코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보리의 부름에 가섭이 뒤돌아섰다.
"말씀하시지요."
미소 짓는 가섭의 모습이 붓다와 닮았다고 수보리는 느꼈다.
"성도하신 세존을 만나셨다는 말씀을 들은 것 같사옵니다. 그 세존이 혹시?"
세존이나 붓다란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므로, 이따금 이 말을 쓰는 수행자가 있었다.
그래서 가섭이 말하는 세존이 곧 석가모니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가섭의 대답은 놀랍게도 수보리의 스승 석가모니를 말하고 있었다.
"저 북쪽 설산 아래에서 태어나신 석가모니 세존이십니다."
석가모니 붓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수보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도 석가모니 세존께 귀의한 비구 수보리이옵니다.
세존을 따라 가비라성을 다녀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도 수보리의 말에 반색을 하였다.
"그러셨군요. 그러고 보니 이름이 기억납니다.
그러지 않아도 수보리 비구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세존께서는 지금 비사리국 대림정사에 계십니다.
그 전에는 교살라국의 도읍인 사위성에 있는 기원정사에 잠시 머무셨지요.
전 기원정사에서 잠깐 만나뵙고는 북쪽으로 가는 길입니다."
가섭은 수보리가 궁금해 했던 붓다의 그간 행방에 대하여 소상하게 전해주었다.
수보리는 가섭을 만난 기쁨에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런데 그 가사는 어찌된 것이옵니까? 출가하실 때는 흰 모단 승가리를 입으시지 않았습니까?"
곁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발다라가 가섭에게 물었다.
그제서야 가섭의 행색을 제대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발다라, 이 가사는 화려한 그 흰 비단 법의에 비할 바가 아니라오.
비록 다 해져서 방바닥이나 훔칠 만한 누더기이지만,
이 옷은 바로 거룩하신 세존께서 입으시던 가사요."
이 말을 들은 수보리는 가섭이 입은 가사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진정 붓다가 입었던 분소의(糞掃衣: 똥치는 걸레 조각을 기워 지은 옷, 또는 묘지에 흩어져 있는 시신의 옷을 주워 기운 옷)가 분명했다.
'얼마나 깨달음이 깊으신 분이기에 세존께서 입으셨던 분소의까지 건네주셨을까?'
수보리는 다시 한번 가섭을 우러러 보았다.
"발다라, 하루는 세존께서 길 옆에 서 있던 나무 아래 그대로 앉으시려 하셨다오.
어찌 거룩하신 분을 맨땅에 앉으시게 할 수 있겠소?
급히 입던 옷을 벗어 자리를 깔아드렸소.
세존께서는 비단 법의에 앉으시더니 '가섭아, 이 법의는 아주 부드럽고 훌륭하구나' 하셨소.
내가 만든 자리에 앉으신 것도 황송할 지경인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난 너무도 기뻐 그 옷을 입혀드렸다오."
가섭은 그 때 일이 생각나는지 얼굴 가득히 환한 미소를 띠었다.
세 사람은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길을 걸었다.
마을 하나를 지나고 나니 저녁 무렵이 되었다.
수보리는 가섭과 발다라를 위하여 그날 묵을 거처를 찾으러 다녔다.
마침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비어 있는 초가 한 채가 있었다.
누추하기는 했지만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이라 하룻밤 묵기에는 알맞았다.
자리를 잡은 가섭에게 발다라가 물었다.
"당신이 귀의하셨다는 석가모니 세존께서는 어떤 분이십니까?"
발다라는 가섭이 귀의했다는 붓다가 어떤 가르침을 주는지 너무도 궁금하였다.
가섭에게 도를 묻고 있는 발다라의 모습에서는 나형외도에게 모진 능욕을 당하던 애처로운 여인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가섭 또한 발다라에게 집안 일같은 사적인 이야기는 전혀 물어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도를 닦는 스승과 제자처럼, 선배와 후배처럼 그렇게 서로를 대할 뿐이었다.
"그 분은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신 분이라오.
성불하신 세존께서는, 우리들도 누구든지 깨달으면 붓다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오.
하지만 어리석은 중생들은 일상사의 번뇌에 파묻혀 미처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오."
가섭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수보리도 옆에서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일상사의 번뇌는 왜 일어나는 것이옵니까?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발다라가 물었다.
"그것은 중생들이 지혜가 없어 모든 업에 집착하기 때문이라오.
번뇌의 원인으로는 네 가지가 있는데,
사람들이 그런 번뇌에 빠져 있기 때문에 생사를 벗어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라오."
"그 네 가지란 무엇을 말함입니까?"
발다라는 낮에 있었던 일도 다 잊은 듯 눈을 빛내며 가섭에게 묻고 있었다.
마치 오래 목 마른 사람이 물을 보고 탐하듯 했다.
"첫째는 믿음이 없어서요,
둘째는 '나'에 집착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의심이 있어서이며,
넷째는 마음이 부초(浮草)처럼 늘 떠 있기 때문이오."
"제가 워낙 미련해서 존자의 말씀을 알아듣기 어려우니 자세히 말씀해 주시옵소서."
이번에는 수보리가 가섭에게 부탁했다.
세 사람 모두 밤을 잊은 듯 법담(法談)을 나누기에 여념이 없었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진리를 알지 못하고 번뇌에 얽매여서 응당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함이니 이것을 믿음이 없다고 하는 것이지요.
'나'에 집착한다는 것은 이것은 나요,
저것은 내가 아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나는 이렇게 받으며,
내가 가고 내가 머물며,
내 모양이요 내 몸이라 고집하는 것이오.
이런 것을 '나'라고 이름하여 스스로 깨달아 알지 못하니 이것을 나에 집착하는 것이라 합니다.
의심이 있다 함은 일체를 의심하고,
다만 한 가지에 얽매여 마치 진흙덩이처럼 요지부동이 되는 것이니 이것을 의심이라 합니다.
정함이 없다고 함은 옳은 것도 그렇고 옳지 않은 것도 그렇다 하며,
마음이나 뜻이나 깨달음이나 생각하는 일체의 모든 업이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것이니
이것을 정함이 없다고 합니다.
이런 마음과 이런 뜻 때문에 번뇌의 바다에 빠져 윤회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가섭이 번뇌의 원인에 대해 장쾌한 설명을 하였다.
"그러면 해탈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옵니까?"
발다라가 물었다.
벌써 희붐하게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사선(四禪)에 들어야 한다오.
그러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하는데, 먼저 집을 버리고 출가를 해야 하오.
그러고는 비구의 의식에 따라 탁발을 해야 하고, 큰 서원을 내어 계행을 닦아야 하오.
탐욕과 노여움, 무지를 멀리 하고 탐욕으로 얻는 쾌락을 싫어하고
모든 마음의 작용을 다스려서 악덕을 떨쳐버린 다음에야 선정(禪定)에 들 수 있는 것이라오."
"그 다음은 어찌 되옵니까?"
발다라가 다시 물었다.
가섭은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해탈을 설하는 붓다의 설화를 수보리와 발다라에게 천천히 들려주기 시작했다.
일찍이 며칠간, 제자 몇 사람에게만 설한 적이 있는 화엄경의 일부분 이야기였다.
동자는 취한 걸음으로 흔들흔들 안개 속을 향해 걸어갔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안개는 더욱 짙어졌다.
강이 흐르는 소리도 점점 크게 들려왔다.
"아아, 어디로 흐르는 강이길래..."
동자는 길을 떠나온 후 처음으로 발걸음을 주저했다.
강물 소리는 차츰 달라지고 있었다.
강이 흐르는 소리가 아니었다.
"아, 폭포 소리..."
그것은 아득한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폭포 소리였다.
낮은 듯하면서도 높게 밀려오는 이상한 소리였다.
까마득한 폭포 줄기가 피워 올리는 짙은 안개는 땅 속까지 스며들어 온통 새하얗게 깔려 있었다.
동자는 술에서 깨어나 조심스럽게 길을 더듬어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두려움은 더 깊어지기만 했다.
이제까지 걸어온 길은 아무리 험난했어도 눈에 보이긴 했었다.
그러한 길들을 동자는 용기와 믿음으로 얼마든지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닥친 길은 보이기는커녕 어느 때보다도 큰 위험이 되어 벼랑 아래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동자는 용기와 믿음이 더 이상 아무 힘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슬퍼하면서 땅바닥에 엎드려 오로지 손과 발로 길을 더듬어갔다.
폭포 소리는 더 크게 들려왔다.
"차라리 모습을 나타내.
아무리 무서운 형상을 하더라도 난 겁내지 않을 거란 말이야. 어서 나와."
동자는 계속 소리를 질러댔다.
아무리 소리쳐도 두려움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마치 땅을 갈라놓은 듯한 굉음이 땅바닥을 흔들며 지나가곤 했다.
땅바닥이 떨고 있었다. 폭포의 울림이 땅 속까지 배어든 탓이었다.
동자의 몸도 폭포 소리에 따라 파르르 떨렸다.
동자는 이윽고 울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해. 어떻게 하란 말이야. 난 나를 지킬 수가 없어. 해운 할아버지. 난 무서워. 나를 지켜낼 수가 없어."
동자는 소리쳐 울었다.
그러나 동자의 절규는 동자의 입 안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폭포 소리가 동자의 울음까지 틀어막은 것이었다.
동자는 해운이 말해 주었던 대로 제 이름을 불러보기도 했다.
"그래. 이럴 땐 내 이름을 부르는 거야.
그러면 그곳에 내가 틀림없이 있을 거라고 해운이 말했어.
난 내 존재를 지켜야 해.
내가 여기 있다면,
있을 때까지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도담, 도담, 도담..."
동자는 제 이름을 수없이 불렀다.
그러나 그것으로 두려움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나를 지킨다는 게 이렇게도 어려울까?"
동자는 존재의 한계에 부딪치고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난 정말 나인가?
난 혹시 누구의 나가 아닐까?
내 안에 내가 또 있을까?
그럼 나는 뭐라지?
난 뭐야?
아마도 해운은 이 같은 생각을 하다가 바다를 떠나왔을 거야.
그러나 여긴 떠날 수도 없어."
동자는 그런 생각을 끊임없이 해보았다.
그러나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제 이름을 부르면 부를수록 두려움은 더 커지기만 했다.
'나' 를 보호하려고 발버둥을 칠수록 그 '나'는 더욱 무의미해지기만 했고,
두려움은 더욱더 조여 왔다.
그때 동자는 강요 받은 두려움에서 다른 생각을 해내었다.
"그렇지, 그래. 나를 잊어야 해.
우선은 나를 잊어야 해.
이 안개와 폭포, 아득한 벼랑이 나와 함께 하나가 되는 거야.
나를 버리고 우리가 되는 거야.
우리는 두렵지 않아.
자기가 자기를 욕하거나 때리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에게 겁을 주지 않는 거야."
동자는 그렇게라도 두려움을 잊으려고 애를 썼다.
그렇지만 벼랑과 폭포와 안개는 그렇게 쉽사리 동자를 '우리'로 반기지 않았다.
동자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런 생각을 해 보았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동자는 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동자는 울었다.
울음 소리가 폭포 소리보다 더 커져 라고 울었다.
그러나 폭포가 동자의 울음 소리를 계속 짓눌러서 동자도 제 울음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동자가 끝없이 절망하고 있을 때 동자의 손 끝에 돌계단이 잡혔다.
그 계단은 한 단 한 단 밑으로 향해 놓여 있었다.
동자는 돌계단을 짚으면서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다.
동자는 더 이상 두려움을 이겨낼 방법이 없어지자 그 계단을 세면서 내려갔다.
"하나. 둘. 셋..." 동자는 셈을 하면서 폭포 소리를 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별별 두려움이 가지가지 형상으로 동자의 셈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안 돼. 정확히 헤아려야 해. 열둘. 열셋. 열넷..."
동자의 셈과 두려운 생각이 서로 밀고 당기면서 씨름했지만,
동자는 용케도 셈을 계속 이어갔다.
그래서 동자는 백을 헤아리고, 천을 헤아렸다.
만까지도 틀리지 않고 헤아렸다.
그러나 '일만 이천오백서른둘' 하고 셈을 하는 순간 동자는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기절해 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어느 때, 쓰러져 있는 동자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그는 동자를 일으켜 앉히고, 어깨를 흔들었다.
한참만 에야 동자는 의식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누군가 옆에서 서성이고 있음을 느꼈다.
"누구야?"
"해탈 존자."
"아, 해탈 존자? 해운 할아버지가 말했어. 존자를 찾아가라고 해서 오는 길이었어.
그런데 너무 무서워서 그만 정신을 잃었나 봐."
"네겐 너무 큰 시련이었다.
그래도 견디어 내다니... 너는 그 일로 큰 힘을 얻게 될 것이다."
"해탈 존자여, 난 앞을 볼 수 없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앞이 깜깜해서 존자의 모습도 볼 수가 없어."
"안다. 이곳은 지하 바다이다. 너는 비강이 폭포수로 떨어지는 벼랑을 타고 내려온 거야.
바깥 세계에선 끝이 보이지 않던 강이 여기로 떨어져 지하 바다를 이룬다.
강물은 낙하를 시작한 뒤 삼천 호흡 만에 지하 바다로 떨어진단다.
그 동안 공중에서 계속 떨어지기만 하는 거지.
강물 하나하나도 그런 모험을 하는데, 동자 네가 못할 수야 없지 않겠느냐?"
"그런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까 답답해."
"여기는 지하라서 빛이 없다. 그러나 나는 네 얼굴을 똑똑히 바라볼 수 있다.
폭포가 떨어지는 장관도 다 보인다.
안개가 이는 모습이 매우 아름답구나.
하지만 여기는 어둠뿐이다.
그러나 어둠이 어둠이 아니란 걸 너는 곧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떻게? 난 빨리 지하 바다를 보고 싶어."
"너 안의 너 아닌 것을 차례차례 잊는 거다."
"그건 해운 할아버지한테서 들었어. 해운 할아버지는 잊는다는 건 외로운 거라고 말했어."
"안다. 그렇지만 네가 아닌 것들을 잊는다는 건 외롭지 않을 거야.
가령 네 열매 주머니 같은 것 말이다. 그걸 던져 버려라."
동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허리에 늘 달고 있던 열매 주머니를 풀었다.
속에는 아직도 열매가 여러 개 들어 있었다.
동자는 열매 주머니를 땅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하지만 슬퍼지는 걸. 난 오랫동안 이 주머니를 달고 다녔어."
"그건 네 따뜻한 정이 깃들어 있을 뿐 네가 아니다.
너는 네가 아닌 것을 자꾸 버려라.
너는 네 옷을 벗어 던질 수 있겠느냐?"
"열매 주머니도 버렸는데 뭐."
"너무 슬퍼하지 말아라. 아직도 너는 남아 있지 않느냐? 이제는 네 발을 잊어 보렴."
"안돼. 안돼! 발만은 안 돼."
"그래도 아직 너는 있지 않느냐? 발이 없어진다고 너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란다.
이제 너의 발은 없어진 거다."
동자는 울음을 터뜨렸다.
"싫다니까. 난 내 발을 버리지 않을 거야."
"발은 네 발이지 너는 아니다. 어서 버려라. 너 아닌 것은 아무것도 남겨 두지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영영 눈이 보이지 않게 된다.
너만이 지하 바다를 볼 수 있는데, 너 아닌 것들이 가리고 있는 거란다.
너의 손, 너의 눈, 너의 입을 모두 잊어버려라.
너 하나만 남을 때까지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존에 애착을 갖지만 그것은 자존이 아니라 그 사람과 그 사람의 것이 함께 하는 공동체를 보호하려는 것일 뿐이다.
정말 자기를 지킨다는 건 세계와 나를 분명히 구분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나 너는 네가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면서 너를 고집하려고 한다.
고집하려거든 네가 누구인지 바르게 알고 나서 고집하려무나.
사람들은 이따금 그의 과거며 미래까지도 자기인 줄 착각한다.
그래서 과거를 즐기고, 미래를 꿈꾸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더할 수 없이 이기적인 듯하면서도 결코 이기적이지 못하다.
누가 싸움을 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싸움은 그를 위한 것일까,
그의 명예나 헛된 너울을 위한 것일까?
자신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다투지 않는다.
사랑도, 미움도 갖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승화된 강렬한 사랑과 미움으로 변하게 된다.
그땐 이미 사랑과 미움의 의미가 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자 한다면 사랑의 대상을 분명히 알고 난 다음에 사랑을 해야 한다.
자기를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이 그의 버릇이며 취미, 지위, 희망 같은 자기 아닌 것을 사랑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못한다.
사랑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집착일 뿐이다."
"그럼 사랑하는 마음은 어디로 가는 거야?"
"그러한 사랑은 주는 것이 아니라 빼앗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네가 빼앗긴 것들을 도로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찾는 게 누구인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작 주인은 아무 것도 모르는데 도둑들끼리 서로 물건을 차지하려고 다투는 꼴이 되고 만다.
자, 너는 너의 것들을, 네가 아닌 것들을 버리려무나.
버릴 때는 슬프고 허전해도 나중에 네가 준 정들을 찾아내면 슬프지도 허전하지도 않게 된다."
동자는 마음 속으로 도담 하나만을 생각하면서 몸의 곳곳과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털어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도담이라는 이름을 잊어버려라."
동자는 존자가 지시하는 대로 했다.
동자는 마치 존자의 최면에 걸린 것처럼 잠자코 존자의 말을 따랐다.
"너라는 생각도 버려라. 버렸다는 것도 버려야 한다."
"존자여, 그건 잘 안돼. 버렸다는 걸 버리면, 또 나중에 버렸다는 걸 버려야 하므로 끝이 없어."
"알고 있다. 너는 지금 잘못 잊고 있구나.
잊으려거든 완전히 잊어라. 잊었다는 기억이 자꾸만 도로 선다면 그건 잊은 것이 아니다.
네가 열매 주머니를 버렸다면 너는 그 열매 주머니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도록 잊어야 한다.
사랑한다는 생각을 갖는 것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슬퍼한다는 생각을 갖는 것도 진정으로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즐거워하는 것이지 그가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자아를 찾는 이는 냉정하게 보이나 그 냉정은 참으로 차가운 냉정이라서 뜨거운 사랑인 것이다."
"존자여, 이제 다 되었어."
"나도 잊어라. 그리고, 네가 스스로 뚜렷하게 나타날 때까지 그렇게 앉아 있어라."
해탈 존자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동자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지하 바다는 침묵했다.
아무 것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아무 것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래서 지하 바다라는 것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그냥 깜깜했다.
정말 깜깜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시간은 더더구나 느낄 수 없었다.
얼마인지도 모를 어느 순간부터 동자는 눈앞이 뿌옇게 밝아 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점점 뚜렷해졌다.
지하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 폭포가 웅장한 모습으로 비강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해탈 존자도 바닷가를 천천히 거닐고 있었다.
"존자여, 눈앞이 보이기 시작했어."
존자가 다가와 동자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옷을 다시 걸쳐 주고, 열매 주머니를 동자의 허리춤에 달아 주었다.
"어떠냐? 너를 찾았는데도 슬픔이 남아 있느냐?"
"아니야. 슬프지 않아. 깨달음의 바다로 갈지,
나를 지키며 남아 있을지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어."
"그렇구 말구. 강은 바다로 돌아가고, 바다는 강으로 돌아간다.
강은 바다요,
바다는 강이다.
물방울이 '나'를 주장하지 않음은 물방울 자체가 강이며,
바다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를 확실히 깨닫고 있으면 바다여도 바다가 아니며,
바다가 아니어도 바다인 것이다.
'나'를 깨달은 자는 '나' 아닌 것과 쉽게 친해져서 '남'이 되기도 하고, '우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가 분명하여 섞이지도 않고, 갈라지지도 않는 것이다. '나'는 깨끗하고 맑아서 개성도 특징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다른 '나'와 다르지 않고,
'우리'가 되어도 큰 '나'일 뿐이다.
언제나 '나'인 것이다.
곧 너는 나이고,
나는 너이며,
나와 너는 둘이 아닌 우리이며,
우리는 또 다른 '우리'와 섞여도 항상 우리이다.
깨달은 바다,
각해(覺海)가 되어도 언제나 우리는 바다이며,
바다는 우리이고,
나는 바다이며,
바다는 나인 것이다."
동자는 해탈 존자가 이미 도담 동자이며,
도담 동자가 해탈 존자 라는 걸 한 터럭의 의심도 없이 알고 있었다.
이윽고 해탈 존자는 동자에게 이별을 알렸다.
"동자여, 동쪽 계단을 통해 지하 바다를 벗어나면 네가 처음 건너왔던 사막이 나타날 것이다.
처음으로 돌아가라."
동자는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지하 바다를 떠날 수 있었다.
높은 계단에서 내려다보이는 지하 바다는 하나의 물방울이었다.
동자는 어느새 지하 바닷가를 거닐면서 멀리 동쪽 계단을 오르고 있는 존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동자는 동쪽 계단을 오르면서 지하 바닷가를 거닐고 있는 존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한 두 동자를 보기도 하고, 두 존자를 보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해탈이라는 법이오."
해탈에 이르는 가섭의 긴 설법이 끝났는데도 발다라와 수보리는 감격에서 깨어나질 못했다.
"처음으로 들어보는 너무나 가슴 벅찬 진리의 말씀이옵니다.
석가모니 세존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니 과연 우리 어리석은 중생들을 구제할 만하옵니다."
발다라가 감격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가섭은 수보리와 발다라를 위하여 몇 가지 법문을 더 설하였다.
동이 터오고 있었다.
가섭은 해뜨는 쪽을 향해 가부좌를 틀고 앉아 홀로 명상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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