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08.01 발행, 천도교 개벽지 제26호 내용
빈 포도주병 두개(葡萄酒甁 二個)를 들고 경찰서(警察署)에
이것은 개성(開城)에서 본 사실(事實)입니다.
얼핏 보면 한 희극같은(滑稽)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의미(意味)에서
우리 조선청년(朝鮮 靑年)에게 대경종(大警鍾)이 아닐까 하여 공개(公開)합니다.
7월 9일 입니다. 당일(當日)은 개벽사 개성지사, 신생활사 개성지사 주최한
(開闢社 開城支社, 新生活社 開城支社 主催) 개성정구대회 결승일(開城庭球大會 決勝日) 입니다.
나는 그 지사(支社)의 청(請)에 의(依)하여 갔다기 보다 개성청년계(開城靑年界)의 체육열(軆育熱)이
너무 명성이 높아(名高) 그들을 축하(祝福)하기 위하여 마침 은율지방(殷栗地方)을 향(向)하던 차(次)
하루 시간을 내어(費) 개성(開城)에 들렀습니다.
정구대회(庭球大會)는 장쾌(壯快)하게 원만(圓滿)하게 잘 진행(經過)되었습니다.
대회(大會)가 끝나고 우승기 수여식(優勝旗 授與式)도 끝난 뒤입니다.
우승기(優勝旗)가 펄펄 날리는 송고군(松高軍)을 태운 자동차(自働車)가 개성시가(開城市街)를
통과(通過)하던 그때입니다.
나는 정구대회 위원(庭球大會 渭原)의 한사람(1人) 마상규군(馬湘圭君)의 인도(引導)로
서본정(西本町) 어떤 중화요리점(中華料理店)에서 열린(開催) 정구회 위원(庭球會委員)들
만찬모임(晩饌會)의 한 자리(1席)를 차지(次持)하게 되었습니다.
지사장 박치대군(支社長 朴致玳君)의 알선(斡旋)으로 모임(會)은 재미있게 열렸습니다.
참석인(參席人)은 17, 8인(人)인데 음식(飮食)은 그닥 번잡(煩雜)하지도 않고 그닥 간단(簡單)
하지도 않게 꼭 알맞게 준비(準備)되었습디다.
맥주(麥酒)가 여섯 병(甁)인가 여덟 병(柄)인가 되고 맥주(麥酒) 못 먹는 이가 있어서
일본 포도주(日本 葡萄酒) 두 병(甁)을 가져왔나 봅디다.
약(約) 1시간(時間)지나서 연회(宴會)는 끝났습니다.
요릿값(料理代)은 현금(現金)을 가져오지(來) 못하였으니 지사(支社)로 와서 가져가라 하고
일동( 一同)은 자리(席)에서 일어나 가게 문(店門) 밖에 나와
「개벽 신생활 개성지사(開闢 新生活 開城支社)플레이」를 3창(唱)
하고 누구는(或) 집(自家)으로 누구는(或) 지사(支社)로 각각(各) 돌아(歸)갔습니다.
나는 박군(朴君)과 같이 지사(支社)로 갔었습니다.
지사(支社)에 들린지 얼마 아니되어 요리점(料理店)으로부터 계산서(會計記)를 가지고 와서
박군(朴君)의 앞에 내놨습니다.
박씨(朴氏)는 계산서(會計記)를 자세(仔細)히 훑어 봅니다. 보더니만 얼굴에 핏발이 오르며
놀래는 듯 강(講)한 음성(音聲)으로 「이런 폭리(暴利)!」하고 다시 한번 훑어 보더니
가게주인(店主)에게 묻지 아니하고(質疑如何를 不問) 자기(自己) 손으로 계산서(會計記)를
다시 정정(訂正)합니다. 이제 그 당시(當時) 박군(朴君)의 모습(實情)을 그대로 그리면
「맥주(麥酒) 한 병(甁)에 80전(錢)? 말이 되나 60전(錢) 밖에 아니 줄 거고」 하고는
맥주(麥酒) 6병값(甁代) 4원(圓) 80전(錢)을 3원(圓) 60전(錢)으로 수정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참 훑어 보더니
「포도주(葡萄酒) 한 병(甁)에 1원(圓) 50전(錢)이야. 에이 이놈들 폭리(暴利)도 분수(分數)가 있지
에이 도적놈들- 이것은 70전(錢) 밖에<66> 아니 줄거야- 70전(錢)도 과(過)해.
사실(事實)은 50전(錢)받게-」하고는 포도주 2병 값(葡萄酒 2甁 代) 3원(圓)을 1원(圓) 40전(錢)으로
정정했습니다.
그리고 또 국수 한 그릇은 얼마 잡채(雜菜) 한 그릇은 얼마를 낱낱이 세어보며 어떤건(或)은 맞다(該當)하며
어떤 건(或)은 과(過)하다 하며 피가 나게 계산(利害)을 정정했습니다(부전지를 붙여 놓았다)
이 광경(光景)을 보는 주변(四圍)의 모든 사람들은 한편(一便) 놀라기도 하며 한편 감탄(一便 嘆服)도 하며
또(或)는 웃기도 하며 또(或) 제지(制止)도 하여 『박군(朴君)이야말로 계산(經濟)적이라느니』 『박군(朴君)
이야말로 너무 세밀(細密)하다느니』 『점잖은 사람이 그게 뭐라느니』 『어서 주어 보내고 말라느니』
여론(與論)이 분분(紛紛)합니다. 심부름 온 중국인(華人)은 눈이 멍하야 볼 뿐입니다.
이때 朴君은 책상(事務床)을 치며 일어나서 중국인(華人)을 향(向)해 매우 못마땅한 얼굴로
『너- 이놈들 폭리(暴利)도 분수(分數)가 있지 이게 뭐냐! 3배(倍) 4배(倍)를 남겨 먹어
조선(朝鮮)사람이 그렇게 무른줄 아니 40전(錢) 아니면 45전(錢)짜리를 1원(圓) 50전(錢)을 받아
에익 도적(盜賊)놈들- 자- 맥주(麥酒) 한 병(甁)에는 60전(錢)밖에게 안 주고 포도주(葡萄酒) 한 병(甁)에는
70전(錢)밖에 아니 줄 터이니 그리 알고 받아 갈테면 받아 가-』하고 단호하게(斷然) 말을 끊습니다.
중국인(華人)은 이 말을 듣고 역시 불쾌(亦是 不快)한 낯으로 『우리 몰라 우리 심부름 와서 주인(主人)이
알어 어서 내 무슨 일이 있어 우리 늘 그렇게 팔았어 비싸지 않아 어서 내! 요리(料理) 먹고 왜 돈을 아니 내어』
하며 혀꼬부랑 말을 합니다.
이리하여 한바탕( 一場) 시비(是非)가 일어납니다. 오고 가는 사람(去人 來人) 하나 둘씩 구경(求景)
삼아 모여 듭니다. 『창피(昌皮)하니 어서 주어 보내라』는 소리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에서 나옵니다.
이 소리가 들릴 때마다 박군(朴君)은 분(忿)과 열(熱)이 왈칵나서
『창피(昌皮)하니 주어보내라』 이런 소리가 어디 있소.
창피(昌皮)란 어떤 말이오 자기 개인(自己 個身)이 망(亡)하고 전 조선(全朝鮮)이 잘 못되는 줄은 모르고-
이게 무슨 소리야 폭리(暴利)도 이런 폭리(暴利)를 보고 그대로 두나 어디까지든지 나는 그대로 줄 수 없소.
심(甚)하면 법(法)에 호소(訴)할지라도-
그뿐 아니라 신문(新聞)이나 잡지(雜誌)에나 그렇지 않으면 상인대회(商人大會)를 일으키기까지 해서라도 이런
폭리(暴利)의 무리는 다시 머리를 들지(擧頭) 못하게 할 터이오. 이것을 그대로 두면 우리 개성(開城)
뿐 아니라 전 조선(全朝鮮)에 막대(莫大)한 해(害)가 되는 것이오- 내가 돈 몇원(圓)을 아낀다거나 무슨
불량(不良)한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요』하고 요리점(料理店에)서 온 중국인(華人)을 보고
『그대 마음대로 못할 터이면 주인(主人)에게 물어보고 다시 와서 받아 가라』합니다.
중국인(華人)은 시비(是非)하다 못해 할 수 없이 빈손(空手)으로 돌아가 가게주인(店主)에게 사실(事實)을
말하게 되었습니다.<67>
가게주인(店主)에게 말하니 어디 들을 리(理)가 있습니까.
즉각 가계 계산(卽刻 店의 會計)대로 받아오라고 엄명(嚴命)이 내린 듯합니다.
10분(分)이 못되어 전(前)에 왔던 그 중국인(華人)이 헐떡거리며 개벽지사(開闢支社)로 달려오더니만
아주 성(性)난 말로 『무슨 일이 있어서 어서 내요 남의 요리(料理) 먹고- 주인이 말이 아니 들어 어서 내
어서 어서』하고 험(險)하게 날뜁니다. 박(朴)은 그래도 꼼짝도 아니합니다. 사람들은 하나 둘씩 더 모입니다.
무슨 큰일이나 난 듯합니다. 사실(事實)은 큰 싸움입니다.
양국(兩國)의 경제전(經濟戰)은 이것이야말로 가장 밑이요 뿌리인가 합니다.
한참 논쟁(論爭)을 하다가 이번은 박군(朴君)이 친(親)히 요리점(料理店)으로 가 따져서 바로잡기(質正)로
되었습니다. 박(朴)과 그 중국인(華人)은 같이 요리점(料理店)으로 갔습니다. 그 뒷 사실(事實)은
잠깐(暫間) 몰랐습니다.
지사원 임계호군(支社員 林啓鎬君)과 같이 남문거리(南門巨里)로 선죽교(善竹橋)로 동부시가(東部市街)로
두루 돌아 근 두 시간(時間)이나 지난 뒤 지사(支社)로 왔는데 박(朴)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에 박(朴)은 왔습니다. 박(朴)은 허허 웃으며 『실례(失禮)했습니다. 어디 어디 구경(求景)하셨어요』하고
요리점(料理店)에 갔던 이야기를 한바탕 통설(痛說)합니다.
『가니까 이놈들이 한(限) 10여명(餘名) 모였었지요. 남의 요리(料理)를 먹고 왜 돈을 아니 내겠다고 시비(是非)
를 하느냐 하며 자기(自己)네 계산(會計)대로 내라고 야단이었지요. 그래서 그의 폭리(暴利)를 일일(一一)이
설명(說明)하고 따라서 너의 중국(中國)사람이 구미인(歐美人)에게 배척(排斥)을 받음도 이러한 점(點)에
전부 있거(專在)니와 너희가 우리 개성(開城)와서는 감(敢)히 못한다고 야단을 쳤지요.
그리고 상당(相當)히 여론(輿論)을 일으키어 開城에서 부지를 못하게 축출(逐出)이라도 할만한 자신(自信)과
권리(權利)가 있다고 아주 무섭게 야단을 쳤지요. 그러니까 그들은 비는 말로
『여보 박(朴)장괘듸 왜 이러시오 왜 이러시오』하고 얼렁하면서 그냥 넘기려 합디다.
그리고 개성시내 일반요리점(開城市內 一般 料理店)이 통용(通用)하는 정가(定價)이며 또 그만큼 안받으면
가게(店)에 손해(損害)라는 등 별 해괴(等 別 駭怪)한 말이 많습디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아까 사 먹고 남은 그 포도주병(葡萄酒甁) 두개(個)를 내라하여 그것을 받아 가지고
일본상점(日本商店)에 가서 이런 병(甁)에 넣은 포도주(葡萄酒) 한 병(甁)에 얼마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첫말은 50전(錢)이라고 하더니 다시 최저가(最低價)로 얼마면 파느냐 물으니까 47전(錢)이면 판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으니까 분(忿)과 열(熱)이 어떻케나 오르는지 줄달음으로 요리점(料理店)을 또 갔습니다.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자- 일본(日本)사람은 47전(錢)에 판다고 한다. 너희는 몇<68> 배(倍)의 폭리(暴利)를 먹느냐.
일본(日本)사람은 너희에게 이윤(利)을 남겨 먹고 너희는 우리에게 이처럼 폭리(暴利)를 취(取)하고-
그래 조선(朝鮮)사람은 다- 말라 죽으라는 심뽀냐(心術)
자- 포도주(葡萄酒) 한 병(甁)에 1원(圓) 이상(以上)을 남겨 먹으니 100병(甁)이면 100원이상(圓以上)
1,000병(甁)이면 1,000원 이상(圓 以上)이니 1년(年) 치고 한 집에서 최저(最低)로 1,000병(甁)을 판다하면
개성(開城)에도 너희 요리점(料理店)이 7,8개(個) 되니 적어도 8,000원(圓)은 순 폭리(純 暴利)로 가져 가서
전 조선(全朝鮮)을 통틀어 약(約) 200개 군 소재지(個 郡 所在地)만 잡아도 1군(郡) 평균(平均)
8개소(個所)는 될 터이니 1군(郡)에서 8,000원(圓)이면 200군(郡)만 하여도 16만원(萬圓)이 아니냐-
그래 우리는 1년(年)에 포도주 값(葡萄酒 代)으로만 너희에게 16만여원(萬餘圓)을 그대로 바치란 말이냐.
너희가 요리영업(料理營業)을 그대로 하는가 못하는가를 내 눈으로 볼 것이니 그리 알라 하고 그래도
분(忿)이 아니 식어 빈 포도주 병(葡萄酒 甁) 두개(個)를 양손(兩手)에 갈라 들고 경찰서(警察署)
로 달려 갔습니다. 모든 순사(巡査)들은 부랑자(浮浪者) 아니면 취한(醉漢)으로 생각합니다.
픽픽 웃는 자(者)도 있습디다. 그러나 나는 당당(堂堂)히 할 일이라고 자신(自信)하고 체면(軆面)보지
않고 전후(前後) 사실(事實)을 수석경부(首席警部)에게 말하였습니다. (마침 서장(署長)은 부재(不在)
자- 이 경부(警部)의 말하는 소리 좀 들어보오 『잔(盃) 술은 그렇게도 파는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 화(火)가 벌컥나서 그래 그대는 병(甁)과 잔(杯)의 분별(分別)도 모르느냐고 강경(强硬)히 야단을
첬습니다. 말에 부족(不足)이 되니까 할 수 없는 듯이 각 요리점(各 料理店)에 주의(注意)를 시키겠다고
합디다. 이리하여 서(署)에서 근(近) 30분(分)이나 싸우고 다시 요리점(料理店)에 들러 장래(將來)를
징계(懲戒)하고 대금(代金)은 자기(自己)네 처음 요구(要求)대로 다- 주고 왔습니다.
오려할 때 경찰서(警察署)에서 전화(電話)가 옵디다. 모두 눈이 둥글해집디다. 하하 별(別)
웃기는(滑稽)일을 겪었소』
박군(朴君)은 조금 침묵(沈默)하고 있더니
『어쨌든 우리 조선청년(朝鮮靑年)은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심장(心臟)도 없어요. 남이 팔을 떼어 가는지
다리를 떼어 가는지 내장을 긁어 먹는지 도무지 몰라요. 시골 서울 할 것 없이-
어쨌든 조선청년(朝鮮靑年)은 요리점(料理店)이나 외인(外人)의 상점(商店)에 갈 때 자기 자신(自己 自身)을
전당포에 맡겨놓은 물건(典當物)로 인정(認定)하고 가니까요』하며 일대 탄식(一大 嘆息)을 발(發)합니다.
이야기는 그만 쓰겠습니다. 개성인사(開城人士)가 영악하다는 것은 일반(一般)이다.- 알거니와
과연 개성(果然 開城)사람이란 무섭소이다.
박치대군(朴致玳君)의 쾌거(快擧)를 칭찬(贊)함보다 개성인사(開城人士)를 칭찬(贊)할수 밖에 없습니다.
조선(朝鮮)의 방방곡곡(方方谷谷) 어느 곳에 중국인(華人)의 요리(料理) 중국인(華人)의 상인(商人)이
없습니까. 그들의 폭리(暴利)가 다- 이(此)와 비슷(比等)할 것이니 이것을 잠잠히(恬然) 모른다하면
그야말로 자진(自盡)할 밖에 다른 방도(他途)가 없습니다.
자- 전 조선(全朝鮮)의 청년형제(靑年兄弟)여 다른(別)<69> 방침(方針)이 없겠습니까.
나는 박치대군(朴致玳君)을 매우(極) 따르고 싶습니다.
불매동맹(非買同盟)은 험(險)한 말이니까 아직 그만두고 각자(各自)스스로가 발길의 방향(方向)을 실핌이
어떨까요?
첫댓글 일제강점기때 중국인이 각지에서 상권을 형성하고
조선인과도 감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평양에선 중국인 상가가 불에 타는 일도 있었구요
이런 방식으로 돈을 모아 지방에 돈있는 사람은 일본인, 다음에
조선인이 아니라 중국인들이었죠!
재미있는 일화입니다.
세월이 흘러 흘러
이보生의 태생지가 충청도 중소도시였는데 번화한 중심거리는 중국인들의 상점과 식당이
거의 차지하고 있었지요.
중국요리집이 두군데 있었는데 도내에서도 이름난 명소였습니다.
그 때는 폭리라는 건 있을수 없고 돈값만큼 맛있는 음식을 제공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도 때때로 생각나는 맛있던 추억의 '장궤집'인데 거의 사라져 아쉽기도 합니다.
이 얘기는 1920년대 초반에 중국인이 전국에 있었고
폭리를 취했다는 얘기입니다!
충북 충남에 관한 실태조사도 본 바 농촌은 다
적막강산이며
일본인 다음으로 잘사는게 중국인인데
어이 없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이면 무조껀 싫다 하나
화교가 자본을 축적하는 걸 막았으니 감히 식민지때
처럼 횡포를 부리지 못했겠지요
IMF 때 요구한게 국내자본시장 개방인데
그로 인한 막심한 피해는 젊은 세대는 모르는 경우가
많고 화교나 중국인에게 자본시장 개방으로 지금
중국자본이 들어와 있고 참정권까지 주니 다 자기 이익에
몰두하며 선전하는데 순진한 경우 입장이 비슷한줄
아니 겪지 못한 소치라 앞으로 중국이 점차 예전처럼
동아시아 패권을 쥐려하고 미국과 대치하니
우리민족끼리 해보자 가 나오나
실상은 자본이 문제라
@guounwi
자칭 사회주의자인 사람도 미국을 배척하면서도
누군가 다 쫓아버리자 하니 정색을 하며
한국경제를 망가뜨리려 하면 두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만 써도 버티지 못한다고 합니다!
(경제학 전공)
그러니 말한 이가 한마디도 못하고 어찌 해야 하냐고
하되 묵묵부답입니다
어찌 하오리까!
북한이 미국제재로 저리됐다해도 개발한게 핵무기
인데 쓰면 자멸입니다!
남한에 이익이 있어 미국이 주둔한게 사실임을
몰라서가 아니라 한국경제가 세계 몇위고
군사력이 얼만데 하나 모르는 소리인가 합니다!
남북한 비대칭 전력이 있는데
핵무기, 화생방무기,특수부대병력입니다!
장사정포야 전진배치 하였으니 충청도까지 날아가고
전에 보니 백령도 3.3제곱미터당 몇발이 떨어지게
해놨습니다!
@guounwi
평화야 다 원하는것이지만 그거야
북한체제가 끝나도 뒤에 중국이 있어요!
비밀도 아니고 정예사단이 만주에 있습니다!
우리가 북진하기전 들어옵니다
이 한반도가 사강이 노리는 곳이고
놓칠수 없는 곳입니다!
힘있는 나라가 들어옵니다!
패권주의는 일본제국주의때 겪어봤고
이제 중국이 미국과 패권을 겨루고 있지만
득보다 실이많아 직접 대결하지 않습니다
대만을 놓고 격돌하면 이젠 짱개의
인해전술은 안통합니다(한국전쟁때까지는
통했지요)핵무기 개발했고 항공모함도
있죠!
그래도 아직 못미칩니다!
그래서 내부적으로 무너지게 하는 방법을
쓰고 있죠!
북한은 지금 김일성 영도체제 유지를 최우선
합니다!
민족얘기도 하지만 그건 체제유지 다음이지요!
아주 복잡합니다
그런데 매우 쉽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