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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비운의 여인 연화색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났다.
하루해가 저물 무렵이었다.
수보리는 방안에서 바랑 속에 들어있던 경전을 꺼내 한 줄 한 줄 읽어내려 갔다.
'내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자신에게 수십 번도 더 던진 질문이었다.
겉으로는 연화색이 수보리를 떠나지 못하게 했지만, 사실은 수보리가 연화색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연화색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을까?'
이 생각은 이미 수없이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그렇다, 아직은 연화색에게는 이르다.
미흡하기는 하지만 먼저 중생의 도덕률로 연화색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스님, 안에 계십니까?" 문 밖에서 연화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초저녁이었다.
수보리는 얼른 일어나 마당으로 나갔다.
그녀는 술에 잔뜩 취해 있었다.
수보리를 본 연화색이 갑자기 깔깔거렸다.
"어찌 그렇게 심각하십니까? 깊은 도에 잠기셨었나 보죠? 제가 스님의 명상을 방해하였습니까?"
"......" 수보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웬지 연화색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눈물이 그렁거렸다.
"들어가세요. 그리고 이것 좀 드셔보세요. 스님을 위해 제가 맛난 것을 사왔습니다."
연화색이 손에 들고 있던 보따리를 높이 쳐들며 말했다.
그녀는 수보리의 손을 잡아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보따리를 활짝 폈다.
그 속에서 색색의 떡과 사탕같은 주전부리가 나타났다.
그것들은 부자들이나 먹는 귀한 음식으로, 출가 전 어머니가 만들어주곤 했던 것들이었다.
연화색이 그 중 하나를 수보리의 입에 갖다 댔다.
"잡숴보세요. 스님께서 이런 것을 드셔보시기나 하셨겠어요?"
그러나 수보리는 차마 입을 벌리지 못했다.
"왜 그러십니까? 더러운 이 몸이 드리는 음식이라 그러십니까?"
이렇게 말하는 연화색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수보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 도를 닦으시는 스님이라서요? 이런 음식은 너무 감미로워 안 드시는 것입니까?"
"연화색, 그대는 스스로 더러운 몸이라 하였소.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소.
난 그대가 그 늪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오. 내가 도와주리다."
수보리의 간곡한 말에 연화색은 손에 들고 있던 떡을 사납게 내동댕이쳤다.
"스님은 제게 빚을 진 몸입니다. 그 빚만 갚으시면 언제라도 떠나시지요. 더 이상 제 생활을 간섭하지 마시고요." 연화색은 눈을 치켜뜨며 수보리를 노려보았다.
"연화색, 그대의 진심을 말하시오."
"그것이 제 진심입니다. 이 세상에 저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 몸 하나뿐이지요.
전 제 몸 하나만 의지하고 삽니다.
다른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연화색은 말 한마디 마디마다 힘을 주었다.
그만큼 자신이 믿는 바가 굳은 것같았다.
수보리는 그런 연화색이 안타까웠다.
"그렇지가 않소.
무엇이 그대의 마음을 그토록 얼음장처럼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그대 또한 기뻐할 소식이 이 세상에 나타났소."
"제가 기뻐할 소식이라니 천만금을 주고 제 몸을 사려는 사람이라도 생겼다는 말입니까?
연화색은 여전히 빈정거렸다.
"연화색, 그대의 외모같은 그런 마음을 가지시오.
사실 나 또한 출가 전에는 교만하기 짝이 없던 소인배였소.
얄팍한 학문으로 이 세상을 모두 아는 것처럼 떠들어댔소.
그러던 내가 성도를 이루신 부처님을 만났다오.
그 분은 생노병사를 초월하신 깨달은 분이셨소.
그 분의 자비로 난 출가를 하게 됐고, 가르침을 받아 수행을 하게 되었던 것이오.
그 분을 만나기 전 아무리 많은 학문을 깨쳐도 마음 한 구석이 그렇게 허전했었는데,
부처님을 만나 가르침을 얻으니 그런 마음이 사라졌소.
오로지 법열뿐이었소.
연화색, 사실 난 그대에게 중생들의 도덕을 말하려 하였소.
하지만 도덕이라는 것이 무엇이요?
당신은 오욕에 물들어서 이런 짓을 하는 것이 아니오.
그대의 눈빛으로 난 그것을 알았소.
당신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주고 싶소.
틀림없이 기뻐하리다."
수보리의 말에 연화색은 몸을 돌려 벽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수그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스님, 전 스님의 이름도 어떤 도를 믿으시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알고 싶지도 않고요.
스님께서 믿고 따르시는 분이 어떤 분인지도 궁금하지 않아요.
전 제 자신만을 믿을 뿐이예요.
그 어떤 사람도, 어떤 종교도 믿지 않아요.
사람이 하는 말을 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제 돌아가십시오. 제게 진 빚은 다 갚으셨습니다."
연화색의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수보리는 연화색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음을 알았다.
"연화색, 난 그대에게 진정 빚을 갚을 생각이라오. 내 빚은 내가 갚겠으니, 그런 후에 떠나리다."
연화색이 고개를 휙 돌렸다.
얼굴에 눈물 자국이 있었다.
"떠나세요. 내 아버지도 어머니도 당신 같은 땡중에게 걸려 신세를 망치셨어요.
하나밖에 없던 오라비도 도를 찾아 떠났고요.
살았는지 어쩐지 소식조차 없습니다.
전 도라면 신물이 납니다.
이제 아셨지요.
당신이 비구였기 때문에 이렇게 붙잡아 둔 거예요.
당신을 타락시키고 싶었어요.
의연하신 분, 믿음이 강하신 분, 창녀에게서 떠나 당신의 깨달음을 찾아 떠나세요!
당신이 제게 진 빚은 처음부터 없었으니까요!"
연화색은 미친 듯이 소리치며 수보리를 몰아내려 하였다.
수보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그녀의 어깨를 힘차게 껴안았다.
그의 가슴에서 연화색은 작은 새처럼 파닥거리다 곧 잠잠해졌다.
"알고 있었소. 처음부터 그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오."
수보리는 연화색의 어깨를 따뜻하게 다독거렸다.
연화색의 눈물로 수보리의 가사 앞자락이 젖어들어갔다.
이튿날 아침, 연화색은 여느 때와 같이 화사하게 단장을 하더니 수보리에게 말했다.
"스님, 오늘 저와 함께 저작거리에 나가보지 않으시렵니까?
혼자 이렇게 집안에만 계시는 것이 안쓰러워 그럽니다."
지난 밤과는 달리 연화색의 기분이 한결 좋아 보였다.
수보리는 그런 연화색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그러마고 허락하였다.
연화색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소풍가는 아이들처럼 연화색과 수보리는 들뜬 마음으로 집을 나가 저작거리로 향했다.
"제가 잘 가는 장신구 가게가 있습니다.
그 곳에는 온갖 금은보석이 제 주인을 기다리고 있지요.
저기 저 집은 이 거리에서 가장 값비싼 옷을 만드는 가게입니다."
시장으로 들어온 연화색은 이집 저집을 가리키며 수보리에게 하나 하나 설명하였다.
연화색과 한달여 동안 같이 지냈지만 그렇게 밝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수보리도 그런 그녀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가사를 입은 수보리와 화려하게 치장한 연화색이 나란히 걸어가자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저만치 비켜섰다.
그러고는 두 사람을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저희들끼리 수군대곤 하였다.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던 연화색이 먼저 사람들의 반응을 알아차렸다.
"스님, 사람들이 우리 두 사람을 피하고 있습니다.
스님과 창녀가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괴이하게 보이나 봅니다."
"......" 수보리는 아무 소리 없이 계속 앞만 보고 걸어갔다.
"저 자가 그 유명한 연화색과 함께 산다는 그 땡중 인가?"
"그런가 보이. 도를 닦는 비구와 몸을 파는 창녀가 한 집에 산다니 우습지 뭔가?"
"보나마나 젊은 여자들이나 후리는 외도임에 틀림없네."
수보리를 욕하는 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려왔다.
그러나 수보리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전혀 동요가 없었다.
그런저런 생각 없이 수보리를 장터로 끌고 나온 연화색은 어쩔 줄 몰라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부끄러움보다는 수보리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
그녀는 앞만 보고 걸어가는 수보리를 부지런히 뒤쫓아갔다.
"스님, 어서 돌아가시지요."
그제서야 수보리는 고개를 돌렸다.
"시장에 나온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소?" 수보리가 말했다.
"스님, 저 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사람들이 우리 두 사람을 손가락질하고 있습니다."
연화색이 조급하게 말했다.
"그들이 어찌 우리를 욕한다는 말이오? 나는 저들에게 손가락질 받을 짓을 하지 않았소."
"출가하신 스님께서 창녀집에 같이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저들은 스님을 비난합니다.
저 또한 도를 닦는 분을 유혹했다는 이유로 음녀가 되었습니다."
그 말에 수보리가 멈춰서더니 한동안 연화색을 바라보았다.
"연화색, 그대는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마음대로 떠들고 있는 저들의 말이 그렇게도 두렵소?"
"이미 제 몸을 버린 몸이 세상에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다만 스님께서 엉뚱하게 욕을 당하시니까 이런 말씀을드리는 것입니다."
연화색의 말에 수보리는 빙그레 웃었다.
"나 또한 저들의 말이 두렵지 않소.
저들도 언젠가는 진실을 알 날이 있을 터,
그때가 되면 저절로 모든 것이 해명될 것인데 무엇이 두렵다는 말이오?
그건 그렇고 이제 시장 구경은 할 만큼 한 것 같으니 돌아가도록 합시다."
연화색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호기심에 가득찬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거리의 중앙통을 걸어나갔다.
"연화색이 이제는 땡중을 기둥서방으로 모신 모양이로군."
"대단한 인간들이야. 이렇게 훤한 대낮에 부끄럽지도 않은가?"
두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를 활보하자 사람들은 아예 들으라는 듯 소리를 질러댔다.
자칫하면 돌멩이라도 날아올 기세였다.
아우성치는 시장을 빠져 나온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던 듯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연화색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복잡했다.
방으로 들어온 연화색이 갑자기 수보리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서 있었다.
"스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참만에 연화색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제게는 말 못할 한이 있습니다.
저의 운명이 너무 저주스럽습니다.
끔찍하고 기가 막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제 과거가 있습니다."
수보리에게서 떨어진 연화색이 방바닥에 쓰러져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 울음이 얼마나 한이 맺혔는지 수보리의 가슴까지 찢어질 듯 아팠다.
목소리가 잠길 정도로 울음을 토해낸 연화색이 마침내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수보리에게 자신의 저주스러운 과거를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연화색은 마갈타국 왕사성 출신으로, 부유한 브라만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위로 나이 차가 많은 오빠가 하나 있던 연화색은 그 뛰어난 미색과 총명함으로 가족과 이웃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가 열두 살 나던 해, 하나밖에 없는 오빠가 도를 닦기 위해 출가를 결심하였다.
평소 다정다감한 오빠를 무척이나 따랐던 연화색은 너무 슬퍼 며칠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연화색아, 나도 너와 헤어지는 것이 무엇보다 슬프단다.
하지만 내가 가는 길은 어쩌면 너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진정 깨달음을 얻는다면 반드시 너를 찾아와 네게 그 가르침을 전해주리라.
그러나 누이야, 너무 슬퍼하지 말고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기운을 차려라."
오빠는 눈물을 글썽이는 연화색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오빠의 목소리도 슬픔에 젖어 있었다.
"다정하신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가시는 길을 어찌 제가 막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떠나시니 서운하고 가슴이 아파요.
하지만 오라버니가 도를 얻으신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거예요.
오라버니 부디 성도를 이루세요."
연화색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우며 오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며칠 후 오빠는 출가를 하였다.
그 후 연화색은 한동안을 오빠에 대한 그리움으로 옷깃을 적시곤 했다.
그 뒤 삼 년이 지나 연화색이 열다섯 살 되던 봄날이었다.
"아가씨, 장자님께서 보시고자 하옵니다."
어머니와 마주앉아 자수를 놓고 있던 연화색에게 하인들이 일렀다.
"알았구나." 연화색은 어머니에게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올리고 마당으로 내려왔다.
봄이라 너른 마당에는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고 있었다.
그러나 열다섯 처녀가 된 연화색은 그 어느 꽃보다도 더 아름다웠다.
아버지는 손님방에 계셨다. "얘야, 손님께 인사를 드리거라."
누군지 알 수는 없었지만 연화색은 아버지의 말에 따라 다소곳이 절을 올렸다.
"아름다운 아가씨로군요."
손님은 미소를 머금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우선 나읍에 사시는 아버지 친구이시다. 너를 한번 보고 싶으시다고 하셔서 이렇게 불렀느니라."
아버지 또래로 보이는 손님은 아주 인자한 인상이었다.
연화색은 부끄러워 살짝 얼굴을 돌렸다.
손님은 연화색이 눈치채지 못하게 이리저리 그녀를 뜯어보았다.
잠시 후 연화색은 그 방에서 나왔다.
손님은 연화색의 집에서 하루를 묵고는 다음 날 새벽 길을 떠났다.
그 일이 있은 몇달 뒤 우선나읍의 가장 유명한 브라만 가문에서 청혼이 들어왔다.
알고 보니 청혼자는 그때 그 손님의 막냇동생 이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탓에 큰형이 신부감을 물색했던 것이다.
두 집 모두 유력한 브라만에다가, 상당한 재력가이기도 해 혼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대단히 화려한 혼인식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소문이 자자했던 이 혼인식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연화색은 혼인식 내내 너무도 떨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연화색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는 사람들의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혼인식이 끝나자 연화색은 부모와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눈물을 보이지 말아라. 신랑이 보면 서운해 할 거다."
아버지가 자상하게 손수건으로 연화색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너무 먼 곳으로 시집을 보내는 것 같습니다. 언제 또 다시 만날지..."
어머니가 이렇게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오라버니는 내가 시집간다는 걸 짐작이나 하실까?'
삼년 전에 출가한 뒤 소식이 끊긴 오빠를 생각하니 연화색은 그리움에 사무쳐 눈물이 더 났다.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연화색은 아버지, 어머니에게 큰절을 올렸다.
두 분은 미소를 짓고는 있었지만 슬픔을 참기 어려운지 눈자위가 불그스레하였다.
연화색은 남편을 따라 우선 나읍으로 향했다.
신랑, 신부가 탄 화려한 수레 뒤에는 수십 마리의 코끼리가 온갖 혼수품을 등에 지고 따라왔다.
연화색의 남편은 나이 차가 많이 나서인지 자상하고 귀하게 그녀를 대했다.
그 덕분에 연화색은 부모와 헤어지고 고향을 떠난 슬픔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었다.
혼인한 이듬해 연화색은 귀여운 딸을 낳았다.
자상한 남편과 사랑스러운 딸로 연화색은 행복에 겨운 나날을 보냈다.
그런 연화색 앞에 갑자기 어머니가 찾아왔다.
"어머니!" 연화색은 너무 반가워 어머니를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오랜만이다. 넌 참으로 행복하게 보이는구나."
연화색의 얼굴을 쳐다보며 어머니가 말했다.
어머니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좀 야윈 듯하였다.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있으세요? 얼굴빛이 좋지 않으십니다."
"아니다. 먼 길을 걸어서 피곤한 모양이로구나."
어머니는 자세히 살펴보는 연화색의 시선을 피해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아버님은 어떠십니까? 건강하신지요?"
사실 연화색은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에게 더 정을 느꼈다.
어머니는 좀 차가운 성격이었다.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어머니는 약간 당황했다.
"연화색아, 오랜만에 만났는데 슬픈 소식을 전하게 되었구나.
아버님은 지난 해에 병환으로 돌아 가셨다. 네가 시집간 뒤부터 병을 앓으셨지."
어머니는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온갖 약을 다 쓰는 바람에 그 많던 재산을 다 잃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했다.
오빠는 여전히 소식이 없다고 했다.
재산도 없고 아버지마저 잃은 어머니는 혼자 살아갈 수가 없어 그렇게 연화색을 찾아온 것이라고 그간의 사정을 말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에 연화색은 그 자리에서 혼절을 하였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연화색은 겨우 슬픔을 가누고 불쌍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그동안 너무 고생을 하셨군요.
아버님 병환 때문에 얼마나 애가 타셨겠어요."
연화색은 어머니의 손을 붙들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후로 연화색은 어머니를 모시고 살게 되었다.
맛난 음식과 온갖 보약으로 몸을 추스린 어머니는 다시 예전과 같이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다.
남편도 마침 적적하던 차에 식구가 하나 더 생긴 것을 무척 좋아하였다.
연화색은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우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연화색은 이웃에 사는 브라만 부인의 생일 초대를 받아 다른 부인들과 정담을 나누며 저녁까지 즐겁게 지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후가 되자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다.
연화색은 두통 때문에 더 이상 그 집에 머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부인들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은 너무도 조용했다.
어린 딸도 유모의 품에서 잠이 든 모양이었다.
연화색은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아 별채로 향했다.
우거진 수풀 한켠에 자리한 별채는 남편이 연화색을 위해 마련해 준 것이었다.
그런데 별채의 침대방 앞에 다가간 연화색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아...아..." 무슨 신음소리 같기도 한 그것은... 연화색의 머리카락이 쭈삣 섰다.
교성(嬌聲)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감싸고 돌았다.
연화색은 한달음에 방 앞으로 내달아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악!"
연화색도 안에 있던 남녀도 너무 놀라 비명을 질렀다.
연화색의 침대 위에는 어머니와 남편이 알몸으로 엉켜 있었다.
"이럴 수가! 안돼! 안돼!" 연화색은 소리를 지르며 별채를 뛰쳐나왔다.
그리고 무작정 뛰었다.
뛰다가 힘들면 걷고, 또 터벅터벅 걷다가 그 끔찍한 광경이 떠오르면 다시 뛰었다.
얼마나 갔을까.
이제 눈물도 말랐는지 나오지 않았다.
마른 침만 입안에 돌 뿐이었다.
집을 뛰쳐나온 연화색은 산 속에 들어가 이름 모를 풀과 나무뿌리로 연명하기도 하고,
뜨거운 모래사장에 누워 이글거리는 태양을 하염없이 쳐다보기도 하였다.
연화색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산발을 한 채 맨발로 헤매고 다니는 그녀를 미친 여자라고 손가락질하였다.
어떤 사내는 그녀를 으슥한 곳으로 끌고가 욕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연화색은 아무런 말도,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다.
마치 넋이 빠진 사람처럼. 몇 년을 그렇게 거리를 헤매던 연화색은 조금씩 과거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멀리 바라내국까지 건너가 조그만 가게에서 일하던 그녀는 그곳에서 우연히 한 남자를 알게 되었다.
연화색의 미모에 반한 그 남자는 상처한 홀아비로 높은 직급의 전사(戰士)였다.
그의 끈질긴 구애에 연화색은 그와 함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로 결심하였다.
다시 행복한 나날이 연화색에게 돌아왔다.
연화색은 자신에게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에 남편에게 너무도 감사했다.
남편은 그녀를 보석 다루듯 소중하게 사랑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전사인 남편은 왕의 명령으로 곧잘 이웃 나라를 들락거렸다.
이웃 나라에 갔다 올 때마다 남편은 연화색을 위하여 갖가지 장신구며 옷가지를 사오곤 했다.
그런데 그즈음 들어 남편이 한번 밖으로 나가면 수개월 동안 돌아오지 않는 일이 잦았다.
별 생각 없이 남편을 떠나 보내고,
또 마중하던 연화색은 그런 일이 수 차례 반복되자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여보, 제게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당신의 마음에 변화가 생기신 거죠?"
연화색이 몇 달만에 돌아온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은 잠시 침묵하더니 진실을 고백했다.
"당신을 속일 생각은 없었소.
말할 기회를 엿보던 참이었다오.
당신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이웃 나라에 여자가 있소이다."
이 말에 연화색의 가슴은 무너져 내리는 듯 아팠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부인을 여럿 두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떤 여인인지는 모르지만 이 집에서 함께 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당신도, 그 여인도, 또 저도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연화색이 이렇게 말하자 남편은 고마워 하면서도 미안해 했다.
그렇게 해서 연화색은 남편의 연인과 함께 살게 되었다.
남편을 따라온 여인은 나이 어린 아리따운 소녀였다.
다행히도 마음씨까지 착해 연화색은 오히려 남편보다 그 소녀를 더 사랑했다.
소녀도 연화색을 어머니처럼 따랐다.
남편 또한 이런 두 여인을 모두 사랑하며 행복해 했다.
세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고 아끼며 평안한 나날을 보냈다.
남편이 국왕의 명에 따라 이웃나라를 방문하던 중이었다.
그 동안 연화색은 소녀와 함께 한 방에서 기거했다.
그만큼 그녀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밤이 되어 나란히 자리에 누운 연화색이 그녀에게 물었다.
"마누사의 고향은 어디지?" 마누사는 소녀의 이름이었다.
"어렸을 때 떠나왔기 때문에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언젠가 유모가 언뜻 항하가 시작되는 쪽이라는 말을 했던 것 같아요."
연화색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은?"
"마님, 저는 불행한 아이예요.
사실 저의 아버지는 브라만이셨고 상당한 부자이셨답니다.
그런데 부끄럽습니다만,
아버지에게 딴 여자가 생겼어요.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집을 나가셨고,
그 이후로 소식을 듣지 못했어요.
아버지는 그 여자의 간교로 재산을 모두 잃고 마셨지요.
전 집안이 풍비박산 날 무렵 유모의 손에 이끌려 위기를 모면했어요."
마누사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연화색은 그녀를 가슴에 꼭 껴안고 다독거렸다.
"정말 불쌍한 아이로구나. 네 나이가 열다섯이지?"
"예, 그렇습니다."
"네 나이 때 난 시집을 갔었는데... 어쩌면?"
다음 말을 하려는 순간 연화색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쩌면 이 아이의 과거가 자신과 그렇게 비슷하다는 말인가.
연화색은 소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과 닮은 데가 많은 것 같았다.
밖에 나가면 자매나 모녀지간 같다는 말을 듣곤 했는데...
연화색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두려웠다.
"마누사야, 네가 기억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떠했느냐?
그리고 그 딴 여자란 누구였느냐?"
연화색은 두려움을 참고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마님, 부모의 치부(恥部)를 이야기를 하는 것이 괴롭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같이 따스하게 대해주시는 마님이시니 말씀 드리겠어요.
유모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제 어머니는 참으로 아름다우신 분이었답니다.
마님처럼 말 이예요.
그런데 어느 날 외할머니가 찾아오셨고,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갑자기 집을 나가셨답니다.
그 뒤 외할머니는 마치 자신이 안주인이 된 것처럼 눌러앉아 창고 열쇠며 온갖 패물을 독차지하셨답니다.
그런데..."
"아악!" 갑자기 연화색이 새파래지며 비명을 질렀다.
마누사가 놀란 듯 연화색의 어깨를 껴안았다.
연화색이 그녀의 손을 내팽개쳤다.
"마님, 왜 그러십니까?"
마누사는 얼굴을 감싸 쥐며 어쩔 바를 몰라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연화색은 고개를 마구 내저으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마누사가 사람을 부르러 밖으로 뛰어나갔다.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던 연화색이 벌떡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십 몇년 전처럼 또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더 이상 갈 만한 곳도 없었다.
연화색은 몇날 며칠을 자신의 저주스러운 운명을 한하며 울부짖다 거리의 여자가 되었다.
이야기를 마친 연화색이 또 다시 울기 시작했다.
수보리도 그녀를 위로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가슴이 멍한 채 앉아 있었다.
"남편이 어머니와 함께 하는 모습을 본 제가 다음에는 딸과 한 남자를 섬기게 되다니... 그렇습니다.
제게는 삶이라는 것이 저주스러울 뿐입니다.
어떻게 두 번씩이나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할 수 있을까요?
스님께서는 윤회를 믿으시지요?
제가 과거세에 어떤 나쁜 짓을 저질렀길래 그런 고통을 당하나요?
내세에는 얼마나 큰 괴로움이 절 기다리고 있을까요?"
수보리를 바라보는 연화색의 얼굴은 화장이 지워진 채 온통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연화색, 그대의 고통이 너무도 컸구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이란 누구나 생노병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오.
그러나 그대의 괴로움은 그대의 말처럼 생 자체를 부정할 만큼 힘든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소.
내 그대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오.
이제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삶을 뛰어 넘어 더 이상 고통 받지 않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 아닌가 싶소.
연화색, 다시는 삶을 받고 싶지 않다고 하지 않았소?
그대의 말이 옳구료. 삶과 죽음을 떠나는 것이 바로 해탈이오.
그대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정 필요한 것 같소."
"그 부처님을 어디 가면 만날 수 있나요? 제게 그 분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이튿날 새벽, 연화색은 수보리를 따라 어두운 초막을 나섰다.
출가는 삶과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연화색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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