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주 : 다음은 2002년도 제 4차 역사마을 정기답사, 5월 18일 광주답사에서 사용할 자료에서 5.18 광주민중항쟁 관련 부분을 인용한 것입니다. 5월 11일에 있을 "한국 현대사의 민주화운동" 토론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1. 들어가면서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한국 현대사중 가장 비극적이고 추악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신군부
의 12·12 하극상 쿠데타로부터 시작된 정권찬탈음모는 결국 80년 5월, 광주시민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갔고 곧 '제5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제5공화국의 주체들이 영원히 승리한 것은 아니며, 광주시민들이 영원히 패배한 것
도 아니었다. 광주민중항쟁은 얼마 안 돼 사실상 패배가 아닌 역사의 승리였으며, 당시 광주
에서 죽어간 생명들은 무의미한 희생이 아닌 민주주의의 영웅이었음이 증명되었다. 정부에
의해 '5·18'이 '광주사태' '폭동' '국가전복을 노린 불순한 배후세력의 조종에 의해 발생한
내란' 등으로 발표되었지만 87년 6월 항쟁을 통해 실체
가 전국민에게 조금씩 알려졌고 88년 6공 정권이 들어서
국민화합이라는 미명하에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규정되
었다. 그리고 광주청문회를 통해 '80년 5월 광주시민의
처절했던 10일간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1993
년 김영삼 대통령은 5·13담화에서 "80년 5월 광주의 유
혈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 희생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었다는 평가와 함께 "오늘의 정부
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민주정부"라고
광주민중항쟁의 정당성을 명확히 규정했다. 또한 이후 진행된 '역사 바로 세우기'는 5·18특
별법의 제정과 함께 80년 5월 광주를 무참히 짓밟은 신군부 세력에게 '역사와 법과 그리고
정의에 의한 심판'을 받게 함으로써 전국민과 광주시민에게 '과거사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
는데 커다란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2. 유신체제의 붕괴 - 10·26사건
10·26사건은 기본적으로 유신체제의 지배집단과 국민사이의 대립관계에 의해 야기된 정치
적 돌발사태였다. 유신체제는 안보라는 미명아래 언론·출판·집회·결사·사상·학문·양
심의 자유 등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인 국민의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상당부분 억압한 전형
적인 군사독재체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 특히 지식인층의 불만이 날로
고조되어온 1970년대의 사회적 분위기는 민주화로의 변혁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1978년
의 제10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집권 공화당이 패배한 것은 이러한 국민들의 열망을 잘 보여
준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 제1야당인 신민당을 탄압·와해시키는 계기를 만들
기 위한 'YH사건'과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의 국회 제명은 국
민들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
까지 1600여명이 참여한 부마항쟁은 유신체제에 치명적이었다. 6
일 후인 26일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박정희 전 대
통령이 사망한 것이다. 그러나 유신체제의 거두가 쓰러진 반면,
유신체제를 떠받치고 있던 세력들은 존속되었다. 특히 유신체제
를 떠받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고 그만큼 많은 기득권을 누
려온 정치군인집단은 유신체제의 복원을 꿈꾸고 있었다. 그 대표
적인 인물이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었다.
3. 유신체제를 복원시키려는 시도 - 12·12 쿠데타
(1) 상관이었던 정승화와 실권을 쥐었던 전두환의 갈등
10·26사건으로 계엄이 선포된 후 27일에는 합동수사본부가 설치되었고 수사본부장으로는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임명되었다. 권력의 핵심이 붕괴된 당시의 상황에서 전두환 소장
이 보안사령관직과 합동수사본부장을 겸임함으로서 정보·보안·수사 등 업무를 총괄하는
막강한 직책을 가지게 되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은 그 동안 대통령 경호실, 육군본부 지휘부, 수경사, 특
전사 등 군 요직에 있으면서 특혜를 받아 오던 "정치장교"들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군 인사
를 개편하였다. 이는 정승화 총장이 10·26이후 주장해오던 군의 정치불개입 입장을 표면상
으로는 기정사실화 하는 조치였고 그 이면에는 군의 공식지휘체계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기
위함이었다.
이 이후로 정승화 총장과 전두환 보안사령관 사이에는 향후 정치권력의 구조개편과 관련하
여 화합할 수 없는 이견이 나타났다. 정승화 총장은 "유신체제가 어떤 형태로든 변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 반면, 전두환 등 소장파 정치장교들은 유신체제의 유지를 원하고 있었
다. 정승화 총장은 유신체제에 특혜를 누렸던 '정치장교'들을 권력의 중심에서 배제하면서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회동,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동해안지구 경비사령관으로 전보·발령하
기로 했다. 그러나 이는 전두환 소장의 귀에 들어갔다. 이 때부터 전두환은 '생일집 잔치'라
는 암호명으로 불린 12·12 쿠데타를 기획했다. 우선 지방에 있던 노태우를 불러들여 정승
화 총장을 연행해야 한다고 주장해 그의 동의를 얻어낸다. 군내 소장파 정치군인들(주로 '하
나회')이 모두 합심한 상태에서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자는 음모는, 이제 시간만이 문제가 된
것이다.
(2) '생일집 잔치'는 드디어 시작되었다.
1979년 12월 12일, 오후 6시 30분경 전두환 소장을 비롯한 하나회 출신 수도권지역 부대지
휘관 등 소장파 장교 그룹은 비상계엄이 발령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부대를 벗어
나 "생일집 잔치"라는 암호명에 따라 경복궁내 수경사 30경 비단장실에 집결하여 '연행조'와
'후보계획조'까지 짠 뒤에, 저녁 6시 50분경 정승화의 집무실인 한남동 총장공관에 도착했다.
7시 15분경, 정 총장을 응접실에서 접견한 이들은 '김재규와 관련된 진술 녹음을 위해 녹음
시설이 있는 곳으로 모셔가야겠다'며 대통령 지시라고 거짓으로 강변하였다. 정 총장이 화
를 내며 '직접 대통령과 통화를 하겠다'고 부관을 부르는 순간 허삼수, 우경윤 두 대령은 응
접실로 들어오는 부관 이재천 소령과 경호장교 김인선 대위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정 총장
의 "사격중지"라는 외침과 함께 경호실 복장에 M16소총을 든 장교가 총을 쏘면서 대형유리
창을 깨뜨리고 뛰어 들어와 정 총장에게 총을 들이대었고 허삼수는 정승화 총장을 강제로
차에 실어 총장공관을 빠져 나와 곧장 서빙고 보안사 분실에 감금시켰다.
한편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무장한 보안사 대공처장 겸 합수부 수사 1국장 이학봉 중령을 대
동한 채 삼청동 총리공관에 도착, 이미 정 총장을 연행해 놓은 상황에서 최대통령에게 정
총장 연행을 재가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대통령은 국방장관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면서 재가를 거부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갔고 경복궁의 쿠데타 지휘부는 최대통령
에 대해 사실상의 연금조치를 취했다.
한편 육군본부는 지휘관들에게 부대로 복귀하라고 명령을 내렸으나 반란군 지휘부는 이를
묵살했다. 그리하여 육군본부는 정 총장의 신병을 원상회복시키고 그를 강제 연행한 세력을
응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마침 쿠데타 세력은 최 대통령에 대한 정 총장 연행 재가를 끝
내 받지 못하자, 마침내 무력대결을 통한 사태 장악만이 유일한 길이라 판단하게 되었다. 그
리하여 쿠데타 세력은 13일 새벽 1시경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육군본부를 손쉽게 장악했
으며, 3시 25분경까지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포함한 육군본부의 중요 인물들을 체포한 뒤 서
빙고 분실로 연행하여 12월 13일 새벽까지 모든 상황을 종결시켰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정치장교집단은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기반으로 쿠데타에 성공하였고 그들이 모두 반란군에 참여한
시간은 12월 12일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10시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13일 아침 이들은 군의 공식지휘계통을 장악한
이른바『신군부(新軍部)』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정
치권력을 차지하기까지 8개월이 걸렸다.
3. 신군부의 권력장악 과정
1979년 12·12쿠데타로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마침내 1980년 8월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하
고 전두환 대통령이 탄생하기까지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의 도정에 나섰다.
제일 먼저 신군부는 최규하 정부의 내각장악을 위한 세 가지 조치를 취했다. 먼저 비상계엄
령의 유지였고, 둘째 합수부의 권한강화와 활동영역의 확대였으며, 셋째는 헌법개정작업의
지연이었다. 또한 신군부는 계엄령을 지속시키는 가운데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사회심리적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국민여론을 호도하는 K-공작계획을 치밀하게 준
비, 진행시켰다.
먼저 신군부는 전두환이 1980년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함으로서 유신관료집단인 신
현확 내각 장악에 나섰다. 보안사령관 겸 계엄사 합수부장으로는 효율적이고 직접적인 영향
력 행사가 어려웠기 때문에 공석중인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함으로서 신현확 내각의 '주요각
료급'이 되어 정책방향을 통제하기 시작했고 직접적인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행사하게 되었
던 것이다.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하여 신현확 내각을 무력화시킨 것이 유신관료집단의 주도권
완전박탈 조치였다면 언론장악은 국민여론을 조작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의 장악이었다. 신
군부는 정권찬탈을 위해 1980년 2월 1일, 보안사령부내 정보처를 복원, 기구를 대폭 확대한
후 사회 각계각층에 대한 치밀한 정치공작을 전개했다. 특히 보안사의 이상재 준위가 팀장
인 '언론조종반'에 의해 1980년 3월경 작성된 'K(King의 약자)-공작계획'이 그 대표적인 예
이다. 'K-공작계획'의 목적은 신군부의 집권을 정당화하도록 여론을 조작하는데 있다. 신군
부는 '언론공작반'을 통해 "오도된 민주화 여론을 언론계를 통해 안정세로 전환한다"는 방
침에 따라 ① 보도검열단을 통한 봉사활동 ② 언론계 중진들과 개별 접촉한 후 회유공작 실
시방안을 마련하여 중앙 일간지 및 방송사 등 언론사 사장 및 간부 94명을 차례로 접촉, 회
유공작을 실시했다. 이 공작은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만이 "혼란의 확대재생산"을 막을 강력
한 세력임을 주입시키기 위함이었다.
한편 신군부는 정권찬탈을 위해 1980년 2월 18일, 육군본부의 명령으로 충정부대 및 후방
주요부대에 '충정훈련'을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공수부대라는 특전부대를 중심으로 대
도시 부근 일반부대까지 실시하였는데 이들을 '충정부대'라 했다. 충정부대의 주력은 공수부
대로 4월경 진압봉(길이 45∼70㎝, 직경 5∼6㎝, 재질 물푸레나무 혹은 박달나무)을 제작, 폭
동진압 충정훈련을 집중적으로 실시했다. 충정훈련은 시위진압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공세적 진압 훈련으로써 시위대를 향해 돌격하여 와해시킨 뒤 재집결 불허와 분쇄 및 주모
자를 체포하되 기동에 유리한 경무장을 하며 반드시 진압봉을 휴대하는 것이 훈련 실시목적
이었다. 신군부는 학생운동의 주도세력을 '맹목적 저항세력'으로 규정짓고 그들을 사회로부
터 격리, 즉 투옥해야 한다고 결론지은 뒤 그래도 안될 때는 '강경한 응징조치'를 취하기로
한 것이다. 이는 광주민중항쟁에서 그 효과(?)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광주항쟁 초기 시위
확산을 방지하고 자진해산을 유도하는데 중점을 둔 경찰의 진압방식과는 달리 공수부대 지
휘관들이 병력을 돌격시켜 시위대를 무지막지하게 분산시킨 다음 재집결을 분쇄하고 주모자
를 현장에서 색출·살상하게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전술을 채택하고 훈련한데서 나온 결과였
다. 그들은 처음부터 시위대의 머리와 목 등 급소만을 겨냥하여 특수하게 제작한 진압봉을
휘두르고, 총에 꽂은 칼로 찌르기까지 했으며 그렇게 하여 붙잡힌 시위대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옷을 벗긴 다음 트럭에 짐짝처럼 던져 군부대에 수감했으며 수감상태에서도 온갖 만행
을 다하여 보복을 했다.
4. 1980년, 서울에는 봄이 찾아오는데..
(1) 1980년 봄의 학생운동
1979년 11월부터 학생회 부활논의를 시작한 전국의 대학생들은 1980년 봄의 학생회 부활운
동을 학원민주화투쟁을 거쳐 계엄해제와 유신잔당의 퇴진을 겨냥한 대대적인 정치투쟁으로
발전시켰다.
신학기 대학가는 각종 써클이 공개적으로 신입생을 모집하고 여러 가지 대자보가 등장하여
연일 신군부와 최규하 정부의 음모를 폭로하고 유신정권의 비행을 폭로·질타했다. 총학생
회 선거 열풍이 지나가자 대학은 민주화투쟁을 준비하는 거대한 기지로 변해갔다. 학생운동
은 학생회 구성작업이 마무리된 시점까지 일체의 과격한 투쟁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정치적
인 집회와 시위를 최대한 자제했다. 3월은 학생회 구성을 위한 선거운동 기간이었고 4월은
학원민주화투쟁 시기였다. 이 투쟁은 족벌사학에 대한 학생들의 시위·농성으로 시작되었으
나 학원민주화투쟁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4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병영집체훈련
문제(*편집자 주 : 학생들로 하여금 군대에 입영해 훈련을 받게 하려는 것)가 학원민주화투
쟁의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투쟁이 본격화되고 이 문제가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
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
으로 보도하게 했다. 이 공방은 조만간 다가올 신군부와 학생의 일대 격돌을 예비하는 전초
전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4월 14일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겸직 보도
가 나오자 입영훈련 거부투쟁과 맞물리면서 학생운동은 심각한 국면에 접어들었다. 5월 1일
서울대를 시작으로 학생운동의 주목표는 입영훈련 거부투쟁이 아니라 '계엄령 해제'와 '유
신잔당퇴진', '정부개헌 중단'과 '노동 3권 보장' 같은 본격적인 정치투쟁으로 옮겨갔다. 학
생운동이 단순한 학내민주화운동에서 벗어나 전국적인 정치투쟁으로 돌입했던 것이다. 5월
10일에는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이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요구'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그리고 신군부는 항간에 유포된 '5월
봉기설'에서 쿠데타의 명분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그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
해 당분간 평화적 교내 시위만 전개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5월 12일 밤 가두진출을 주장
해 온 강경파 학생들의 광화문 일대 시위로 학생운동은 전면적인 '민주화투쟁'을 위한 가두
시위로 나서게 된다.
(2) 정치권은 혼미를 거듭하고
1980년 봄의 정치권은 최규하 정부와 정치권 전체의 대립·갈등과 정치권 내부에 있어서 3
김씨 사이의 협력 및 경쟁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국민연합'으로 결집해 있던
재야민주인사들은 나름대로 독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김대중씨를 매개로 정치권의
변화와 맞물려 움직였다.
1980년 1월 9일에는 최규하 대통령을 중심으로 이원집정부제(*편집자 주 : 통치권력이 대통
령과 총리에게 이분화되어 있는 정치체제로 원칙적으로는 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 통치권을
행사하고 총리가 행정권을 행사하는 제도이다. 준대통령제, 제약된 의원내각제라고도 불리운
다.) 개헌론이 등장했다. 당시 유신헌법을 개헌하는 데 있어서 민주적인 절차가 필요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최규하 대통령을 중심으로 나오게 된 이원집정부제 개헌론은 시대적 상황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공화당·신민당·재야의 3김씨는 최규하 정부의 이원집정부제 개헌주도
노력을 견제하기 위해 국회가 개헌의 주체로 나서도록 협력관계를 구축했다. 이런 가운데
1979년 12월경부터 '친여 신당설' 소문까지 나돌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과 유정회 국회의원, 전직 장관, 김종필 총재와 불편한 관계인 TK출신 공화당 의원,
그리고 최규하 정부의 각료들까지 포함한 신당이 추진되고 있다는 것이다. 유신잔당들이 모
이게 될 당이라는 점에서, 이 때 불거져 나온 신당설은 혼미를 거듭하던 정국전망을 한층
더 어둡게 만드는 역할을 크게 하였다.
개헌주도권을 둘러싼 관료집단과의 대결국면에서 잠시 협력했던 3김씨는 개헌을 전제로 대
권을 향한 경쟁을 시작했다. 1980년 2월 28일 김대중씨가 복권되어 합법적인 정치활동의 권
리를 찾은 후 김대중, 김영삼 두 사람사이의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되었고 각자의 정치적인
실력을 겨루는 경쟁이 치열해지자 야당인 신민당은 분열의 위기에 봉착한다. 그러나 당시
양김씨(*편집자 주 : 김영삼, 김대중)는 신군부가 전횡을 휘둘러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구실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신군부가 정치에 개입할 수 없을 것으로 보고 계속해서 인내할
뿐이었다. 마침 학생들의 교내 정치투쟁이 가열되면서 5·15 총궐기설이 끈질기게 나돌자
양김씨는 기자회견을 통해 '계엄령 해제' '임시국회 소집' '정부개헌 작업의 중지' 등을 담
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움직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공화당은 임시국회
소집에 응하지 않음으로서 정치권을 갈수록 미로를 헤매게 된다. 신군부는 이 때를 놓치지
않았다. '충정부대'를 전국의 주요도시에 투입할 계획을 최종점검하며 일부 병력은 이미 점
령목표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5월 17일의 비상계엄 전국확대가 이뤄지면서 정치권까
지 여름이, 아니 겨울이 찾아온 것이다.
(3) 군 투입에 대한 두려움 - 서울역 회군
1980년대 한국정치의 향방을 결정지은 운명의 나흘간이 1980년 5
월 14일부터 시작되었다.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서울지역 27개
대학의 총학생회 대표 40여명이 모여 14일 오전부터 전면적인 가
두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고, 그 날 정오에는 서울시내 대학
생 7만여명이 일시에 교문을 박차고 나왔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유신잔당 타도하자" "언론자유 보장하라" "
정부개헌 중단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등을 외치면서. 이 가두시
위에 시민들은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유신말기의 탄압
속에서 사회운동세력은 조직적 역량을 제대로 갖출 겨를이 없었
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타오르기 시작한 가두시위투쟁의 불길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15일 오후, 서울역에는 10만에 육박하는 학생
들이 집결했다. 대구, 광주, 부산, 인천, 목포, 청주, 춘천, 천안 등
대학이 있는 거의 모든 도시가 다 마찬가지의 상황이었다.
서울역 광장에 운집한 학생들은 역 광장을 중심으로 연좌하면서 신군부와 최규하 정부에 대
한 대규모 성토대회를 벌였다. 학생들의 가두시위라는 돌발적인 사태를 접한 정치권은 황망
하고 분주한 모습을 보이며 신민당은 「비상계엄 해제 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김
종필 공화당 총재도 정부에 대해 "어떤 경우에도 물리적 방법에 의한 사태해결은 반대한다"
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각 대학 총학생회 대표들은 이른바 '서울역 회군'을 결정한
다. 그들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없는 상황에서 심야에 군과 충돌한다는 것은 현명치
않다고 판단했다. 입수된 병력이동 정보를 점검해볼 때 곧바로 군대가 투입될 가능성이 짙
었기 때문이다. 이 결정에 따라 서울역에 있던 학생들은 학교로 복귀했고 그리고 다음날 아
침, 대학가는 거짓말처럼 평온했다. 16일에는 전남대와 조선대, 광주교대 학생들이 도청 앞
광장에서 대중집회를 연 후 야간에 평화적인 횃불행진을 벌이는 등 일부 지방대학의 시위가
있었으나 토요일인 17일에는 그나마 자취를 감추었다.
학생들의 가두시위는 민주진영의 모든 세력들을 신군부와 최규하 정부의 유신부활음모 분쇄
를 위한 공세에 나서도록 고무하고 촉진시켰다. 이 때 표면상으로는 전두환의 신군부가 마
치 수세에 몰린 것처럼 보였으나 바로 그 무렵 신군부의 치밀하고도 무자비한 공세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바로 5·17!
5. 광주에서 맞는 1980년 봄. 그러나..
(1) 민족민주화성회
타 지역에 비해 산업기반이 취약했던 광주·전남지역은 당시 학생운동이 민주화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역량이었다. 당시 광주·전남지역에 있어서 학생운동의 중심적인 역량은 전남대
학생운동에 있었고 조선대학교 등에서는 학원민주화투쟁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었
다. '10·26사건'과 '12·12쿠데타'를 거치면서 전남대학내에서는 그 동안의 반민주세력 및
반민주적 요소의 청산을 위한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가 결성되
면서 총학생회구성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어 박관현(법학과 3년)이 압도적인 지지로 총학
생회장에 당선되었다. 명실공히 학생들의 대표기구인 총학생회가 학원민주화투쟁을 주도해
나가게 되면서 어용교수 퇴진 문제를 제기하는 등 주로 학교 내에서 그 동안 누적된 문제들
을 해결해 나감으로써 학생들의 내적인 단결을 고양시켜 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국적인 상황 전개에 영향을 받은
전남대 학생들은 5월초를 분기점으로 운동의 초점을
전환시키기 시작하였다. 정부의 구체제 복귀 조짐과
더불어 신군부의 정권 찬탈 음모가 소문으로 전달되면
서 이에 대응하여 학생운동은 학내민주화투쟁으로부터
민주화를 위한 정치투쟁으로 전환시켰던 것이다. 5월
6일의 '전남대학교 비상학생총회'가 5월 8일부터 14일
까지 일주일을 '민족민주화성회'기간으로 정하면서 정
치투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 5월 8일에 열
린 '민족민주화성회'에서는 전남대 총학생회와 조선대
민주투쟁위원회 공동명의로 제1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문은 5월 14일까지 '비상
계엄을 해제'할 것을 요구하고 만약 대학에 휴교령이 내린다면 온몸으로 거부할 것이며, 양
심 있는 교수들의 적극적 동참을 호소하였다.
이러는 사이 일반학생들의 정치적 열기는 날로 고양되어 가고 있었다. 이들은 교내시위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점차 경찰과 대치하기 시작했고, 5월 14일 '민족민주화성회' 마지막 날
행사에서 학생들은 예정을 하루 앞당겨 당장 가두로 진출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전남대
총학생회는 학생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5월 14일 오후부터 가두시위를 결행하기로 결정하였
다. 그날 오후 2시 총학생회의 지휘 아래 전경대의 저지를 뚫고 교문을 돌파한 전남대생 7
천여 명은 오후 3시에는 도청 앞 광장에서 집회를 강행하였다. 이날까지만 하더라도 광주시
민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신군부 세력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에 겁을 먹고 구
경만 하는 자세였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학생들이 시민들의 호응이 없다고 하여 슬쩍 활동을 접은 것과는 달리,
광주 지역 학생들의 가두시위는 다음날인 15일에도 계속되었다. (*편집자 주 : 이 때문에 공
수부대가 진주하게 된 지역은 서울 외에는 광주 밖에 없다.) 오전에 전남대에서 '제3차 민족
민주화성회'를 마친 1만여 명의 전남대 학생들과 조선대·광주교대생 1만여 명, 전남대교수,
시민 등 수만명의 인파가 도청 앞에 집결했다. 또 16일에는 광주 일원의 거의 모든 대학의
학생들과 일부 고등학생들까지 합류한 일반시민 등 5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민족민주화
성회'가 열렸으며 밤이 되자 사흘동안의 민주화성회를 마무리하는 횃불시위가 열렸다. 횃불
을 든 시위행렬이 광주시내의 중요 도로를 누비는 이 횃불시위로 14일 이후 이루어진 시민,
학생들의 민주화시위를 장엄하게 마무리하였다. 이 때 학생들은, 자신들의 의사는 충분하게
전달했다고 보고 정부의 답변을 기다린다는 의미로 17, 18일은 쉬기로 했다. 다만 정부의 답
변이 없을 경우 19일부터 다시 성토대회를 벌이기로 하고 잠시 휴식에 들어갔다. 그러나 바
로 그 순간에도 신군부가 다음날의 참상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한편 학생·시민들의 민주화시위가 연 3일째 계속된 광주지역에서는 이들 시위대와 경찰 사
이에서도 별다른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다. 학생시위에 대한 여론의 엄청난 지지 때문인지
경찰은 시위대의 주변에서 불상사가 일어나는 것을 예방하는 정도였고, 이러한 경찰들에 대
하여 학생들도 음료수 등을 전달하면서 우호적인 분위기를 가꾸어 나갔다.
(2)5·17비상계엄령 확대조치
'10·26사건'으로 야기된 지배권력의 내부적인 혼란이 신군부의 헤게모니(주도권) 장악으로
일단락되면서 이들은 자신의 권력을 제도적으로 강화하고, 영구화하는 방안에 고심하고 있
었다. 그러나 그때는 국민들이 민주화를 간절히 열망하고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권력의 표면에 나서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여기서 신군부는 무력으로 사
회운동을 굴복시키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이 전면에 등장하여 명실상부하게 권력을 장악한다
는 방향으로 나가기 시작하였다.
한편 정치권의 각 세력들도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신민당은 5월 14일
소속의원 전원의 이름으로 '비상계엄해제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여당인 공화당 조
차 적극적인 자세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로써 5월 20일경으로 예정된 임시국회에서 계엄해
제안을 양당이 공동처리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더욱이 여기에 유정회까지도 가세할 움직임
을 보이자 계엄령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있던 신군부의 위기감을 부추기고 있었다.
명분상으로나 실질상으로나 궁지에 몰린 군부는 예정대로 무력사용을 통해 위기상황의 정면
돌파를 시도하였다. 대학가의 시위가 가열된 5월 12일에는 전군에 비상이 발령되었다. 이와
더불어 전국의 공무원들에게도 비상근무령이 내려졌다.
17일 10시 국방부에서는 계엄사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열어, ①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② 각
급 학교 휴교조치 ③ 국회해산 ④ 국가보위비상대책회의의 설치 등을 대통령에게 건의하기
로 결정했다. 이러한 군의 결의를 받아들인 최규하 대통령은 17일 자정을 기해 제주도가 제
외되었던 비상계엄을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하는 전국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즉 '5·17계엄확대'는 대다수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절실한 요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
었고, '10·26' 이후의 일련의 개량적인 변화들로부터도 완전히 후퇴한 것이었다. 아무튼 계
엄확대와 더불어 발표된 '계엄포고 10호'를 통해 ①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② 대학 휴교 ③
옥내외 집회·시위 및 전·현직 국가원수 비방금지 ④ 직장이탈 및 파업 불허 ⑤ 언론 사전
검열 등의 조치를 취하는 한편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 26명을 연행하였다. 한편 경찰은 이
미 5월 17일 오후 전국학생회장단모임이 열리고 있던 이화여대를 급습하여 수십명의 학생대
표를 연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5월 17일 자정을 전후하여 전국적으로 민주인사들에 대한 예
비검속을 실행하여 수백명을 강제연행하고 있었다. 충정부대 역시 초저녁부터 작전에 들어
갔다. 신군부의 쿠데타 2단계 음모가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군과 경찰이 이미 행동을 개시한 17일 광주시내의 각 대학은 그동안의 가두시위를 중단하고
학생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한산한 분위기였다. 그날 밤 자정을 전후해서
광주의 각 대학은 계엄군에 의해 점령당했으며,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
상당수가 검거당했다.
6. 5월 18일, 광주 - 작전명, '화려한 휴가'
(1)유사시 적 후방지역 깊숙히 침투하는 부대가 광주에 왔다.
1980년 5월 17일 21시 40분, 임시국무회의가 비상계엄 확대선포안을 의결하자 신군부는 서
울, 부산, 대구, 광주 등 전국 대도시에 신속히 군대를 투입했다. 특히 서울과 광주가 신군부
의 주요한 공격 목표였다. 서울에는 1, 3, 5, 9, 11, 13공수여단이 배치되었고 광주에는 7공수
여단 33대대와 35대대가 전남대와 조선대에 배치되었다. 이들은 수개월동안 오직 '시위진압
훈련'에만 몰두해온 신군부의 정예부대로서 전투장비를 잔뜩 가지고 내려왔다.
공수부대는 유사시 적 후방지역 깊숙히 침투하여 비정규전을 수행하고 적의 비정규전을 대
비하는 특수한 부대다. 평시에는 대침투작전 및 충정작전에 대비하여 교육훈련을 실시하고
있는 공수부대는 강한 훈련과 체력단련을 통해 육군 최강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는 부대이
다. 이 공수부대는 낙하훈련 등과 정기적인 천리행군 등의 혹독한 훈련을 받고 있는데 임무
의 특수함과 이를 수행하기 위한 훈련의 어려움은 일반 보병부대와는 다르게 끈끈한 인간관
계를 형성시켜 최고의 군기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특수부대를 박정희 정권 이래 소요진
압을 위한 충정작전의 중요 수행부대로 사용하여 왔으며 1980년 5월의 광주항쟁 당시에는
공수부대가 광주에 투입되어 무력 진압하였다. 비극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2) 비극의 시작 - 5월 18일의 전남대 교문 앞 시위
계엄확대로 인한 당국의 연행을 일단 피한 전남대 총학생회 지도부는 계속 상황을 점검하면
서 상호 연락을 시도하였으나 학생지도부의 상당수는 이미 검거되었으며, 검거되지 않은 지
도부와의 연락은 두절된 상태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불과 몇 시간 뒤에 일어날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일단 몸을 피하게 된다.
광주민중항쟁의 최초의 도화선이 된 18일 아침의 전남대 교문 앞 시위는 도서관에 공부하러
나왔다가 계엄군에 의하여 제지를 당하게 된 학생들이나 '휴교령이 내리면 그 다음날 10시
에 교문 앞에 모이자'고 했던 당초의 약속을 기억하고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나왔던
학생들에 의해 완전히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전남대 정문 앞에는 완전무장한 7
공수여단 33대대(대대장 권승만 중령)가 교문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들은 휴교령이 내린 사
실을 말하면서 학생들에게 귀가하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쉽게 돌아서지 않
았고, 10시가 넘어서자 그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던 100여 명의 학생들이 정문 앞다
리에서 농성을 시작하였다. 이들의 수가 200∼300여 명으로 불어나자 자연스럽게 노래와 구
호가 나오기 시작하였고, 이에 공수부대원들은 함성을 지르며 돌격, 진압을 개시하였다. 특
수훈련을 받은 공수부대와 맨손인 학생들의 저항은 일방적인 것이었다. 진압봉으로 가차없
이 머리를 갈기는 공수부대원들에게 학생들은 부상자 십여 명을 남긴 채 쫓겨날 수밖에 없
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냥
도망치지 않았다. 뒤로 밀려
나는 와중에서도 서로 연락
을 취하면서 광주역 광장에
재집결하여 대오를 정비한
300∼400여 명의 학생들은
우선 금남로 도청 앞 광장
을 목표로 시외버스 공용터
미널을 지나서 카톨릭센터
앞까지 진출하였다. 당시 이
들이 외친 구호는 '비상계
엄 해제하라' '김대중씨 석
방하라''휴교령을 철회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계엄
군은 물러가라' 등이었다.
그러나 이들 초기 시위대는
아직 소수였으며, 진압경찰
에 대항하지 못하고 쫓겨다
니는 정도였다.
(3) '화려한 휴가'에는 시위와 진압, 그리고 피만 있을 뿐..
공수부대는 아직은 광주시민에게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18일 오후까지의 학생시위는 초
보적인 수준이었고 경찰력만으로도 충분히 진압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7공수여단은 주둔지
였던 대학교내를 나와 오후 1시경 수창초등학교에 집결하였다. 이어 오후 2시경 수창초등학
교 부근에는 학생 60여명이 "계엄해제"구호를 외치며 공수부대와 마주보고 있는 상황이었
다. 대오를 정비한 공수부대는 순식간에 '돌격 앞으로'라는 명령과 함께 무자비한 강제해산
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오후 4시경 7공수는 도청방향으로 전진하면서 금남로 및 카톨릭센타,
충장로 등을 중심으로 강력한 시위진압을 실시하였다. 이들은 시위진압을 개시하자마자 시
위가담여부와 상관없이 도로주변에 있는 젊은 사람이면 남녀를 불문하고 무조건 쫓아가서
곤봉으로 때리고 구타하였다. 또한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기색이 보이면 여럿이 몰려들어 무
차별로 때리고 짓밟았다. 그리고는 쓰러진 사람들을 질질 끌고 가 트럭에 실었다. 이것은 상
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시위진압이 아니었다. 오후 5시쯤에는 청산학원 근처에서 처참한
살상극이 벌어졌다. 공수부대가 진입한 곳은 단 30분도 못되어 거리가 조용해졌으며 길 바
닥에는 군데군데 핏물이 흥건히 고였다.
이날 계엄군은 전국의 모든 주요도시에 진주하였다. 그러나 계엄확대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학생시위를 감행했던 곳은 오직 광주 뿐이었다. 사실 학생운동 지도부의 지도력이 마비된
상태에 있기는 광주나 다른 지역이나 마찬가지였다. 휴교령이 내릴 경우의 학생들의 행동지
침도 전국적으로 공통적이었다. 이미 18일 오후부터 학생시위를 통해 '김대중의 체포와 전
두환의 쿠데타' 소식에 접한 시민들은 충격 속에서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김대중이라
는 동향 출신 정치인의 핍박과 수난을 자신들의 그것과 동일시 해 온 광주시민들은 그의 투
옥을 민주화에 대한 그들의 열망과 기대가 무참하게 좌절된 것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시민
들은 시위학생들에 대해 야만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공수부대에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하면
서도 이같은 유혈극에 너무도 겁에 질려 항의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7공수부대원들의 행동반경은 금남로 등 시내중심부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들은 도주하는 학
생과 청년들을 뒤쫓아 시내 곳곳을 누비면서 민가에까지 들어가 젊은 남자들을 보이는 대로
끌어내어 무자비하게 두들겨 팬 후, 옷을 벗기고, 포박하여 연행해 갔다. 단지 소수의 학생
들만이 두려움에 떨면서도 서로 격려해가며 7공수병력의 추격을 피해 이리저리 쫓겨다니면
서 "비상계엄 해제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을 뿐이다. 오후 5시 15분
경 전남도청 옆 노동청 앞에 약 500∼600명정도가 모여 시위를 벌였지만 공수부대가 강력히
돌진하자 곧바로 해산된다. 오후 7시경 계림동 광주고 부근에 수백명의 청년, 학생들이 나타
나 공수부대에 맞섰지만 역부족이긴 마찬가지였다. 밤 8시 15분경 금남로 카톨릭센터 앞에
학생, 시민 약 600여명이 대오를 형성하고 공수부대와 투석전을 벌였지만 단 10분만에 해산
당하고 만다,
5월 18일의 시위는 이것이 전부였다. 상무대에 있는 전남·북 계엄분소는 오후 6시 '계엄공
고 제4호'를 발표하여 자정부터 새벽4시까지였던 통금시간을 밤 9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
지로 연장하는 조치를 취한다. 그리고 밤 11시 20분경에는 계엄군 1개 지대와 경찰 1개 분
대씩을 묶어 광주시내 36개 주요지점에 전투경찰과 합동으로 배치시킨 뒤 삼엄한 경계를 폈
다.
5월 18일의 7여단 33대대와 35대대 시위진압 행위는 광주시민을 상대로 한 학살극이라 불러
야 할 만큼 무자비하고 광폭했다. 그들은 진압봉을 주로 사용했고 부분적으로는 대검을 진
압무기로 사용했다. 2군사령부의 「계엄상황일지」에 의하면 5월 18일 하루 연행자가 대학
생 114명, 전문대생 35명, 고교생 6명, 재수생 66명, 일반시민 184명 등 405명이나 되었는데
이중 68명이 두부외상, 타박상, 자상(대검사용에 의한 부상) 등을 입었고 12명은 중태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연행자와 부상자는 이보다 훨씬 많다고 전해진다.
7. 5월 19일, 광주 - 시민들이 대부분이 된 시위대. 그러나..
(1) 광주 현지 상황과는 무관하게 진행된 11공수여단 병력증파
신군부는 7공수여단이 광주시내 도청주변 시위진압 출동이전인 5월 18일 오후 2∼3시경 광
주에 11공수여단을 광주에 증파하기로 결정한다.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5월 18일 점심직후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김재명 소장이 "광주사태가 악화될 조짐이 있어 3특전여단을 증파하
기로 결정했다"고 알려주자 이를 11공수여단으로 교체할 것을 전언, 11공수여단이 광주에
증파된 것이다. 정호용 사령관은 11공수여단의 광주증
파 이유가 "7공수여단의 2개 대대가 소요진압작전을
못하고 고전을 치르는 상황"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7공수여단의 광주시위진압 출동시간은 그런 결
정보다 2∼3시간 뒤인 오후 3시 50분에서 4시 사이였
다. 따라서 이날의 11공수여단 병력증파 결정은 광주
현지 상황의 실제상황이나 현지 지휘관의 의사와는 무
관하게 내려진 것이다. 결국 신군부가 광주에 군대를
보낸 것은 시위를 진압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무자비
한 학살로 반대 목소리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이
야기가 될 것이다.
5월 18일 오후 3시부로 광주 출동명령을 받은 11공수
여단은 오후 4시30분경 K-57(성남비행장)에서 C-123
수송기 5대에 탑승, 광주로 이동하여 오후 6시 30분경
광주 조선대에 도착하였으며 잔여부대 병력은 다음날
5월 19일 밤1시50분경, 조선대에 도착하였다.
(2) 공포의 금남로
공포와 불안으로 하루를 보낸 다음날인 19일 광주지역은 대학을 제외한 초·중·고등학교는
정상수업을 계속했고, 관공서나 기업체, 공장 등은 대체로 정상근무를 하였지만 일손을 거의
놓고 18일의 공수부대 만행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시내 중심가의 상가들은 대부분
철시한 상태였으며, 이른 새벽부터 군인과 경찰들이 시내 전지역에 걸쳐서 삼엄한 경비를
서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고, 금남로는 일체의 차량이 통행할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서 시민들은 그냥 이렇게 있을 것이 아니라 시내로 나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
는지 살펴보자며 몇 명씩 짝을 지어 금남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오전 10시경 금남로에 모
여든 군중은 2,000∼3,000명으로 불어났으며, 자연스럽게 군경의 저지선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이미 학생들은 별로 없었고, 일반 시민들이 대부분이었다. 10시 40분부터 경찰
과 공수부대는 최루탄을 쏘며 적극적인 해산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제의 잔인한 진
압에 분노하고 있던 시민들은 그냥 쫓겨가지 않고 야유를 보내고 돌을 던지며 항의했다.
군경과 시민의 충돌이 시작된 지 30분 정도 지나서 군용 트럭 30여 대에 분승한 공수부대가
도청 앞과 광남로 사거리에 진출하여 시위군중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19일 새벽 4시경 모든
이동을 마친 11공수여단 병력 1,140여명이 시위진압에 나선 것이다. 11시 30분경 다시 공수
부대의 시위진압이 시작되면서 어제와 마찬가지로 잔인한 살육전이 전개되었다. 그들은 남
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항의하던 할아버지와 아주머니, 도망가던 여학생, 버스기사, 무등고
시학원에서 공부하던 어린 학원생들 그 모두가 그들의 진압대상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은 3∼
4명이 한 조가 되어 시위현장 주변의 건물이나 집들을 샅샅이 뒤졌으며, 그 안에서 젊은 사
람이 발견되면 무작정 두들겨팬 뒤 연행하였
다. 붙잡힌 시민들은 팬티만 남기고 발가벗겨
진채 군 트럭에 실려갔다. 당시 광주지역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그들의 작전명칭이 그러했
듯 '화려한 휴가'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이
러한 폭력은 시내 중심가에 한정된 것만이 아
니라 시가지 전역에 걸쳐서 자행되고 있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한 만행이 백주대
로에서 자행된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19일 오후로 접어들면서 시위
의 양상은 수세에서 공세로 바뀌는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시위의 중심세력이 대학생
에서 시민대중으로 서서히 바뀌고 있었는데
바로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시위진압행위를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었던 시민들이 시위
대열에 합세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이날
낮부터 광주 시내 종합병원과 개인병원에는
부상자들이 줄을 이어 입원하기 시작했다. 계
엄군의 트럭에 실려가지 않고 중상을 당한
채 달아났거나 주위의 도움으로 계엄군의 무
자비한 손길을 벗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중경상을 입은 많은 부상자와 죽어가는 사람 수에 비해 광주 시내 병원시설로는 이들을 모
두 수용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날도 정부측에서
는 광주에서의 사태와 관련하여 아무런 입장표명도 하지 않았다. 또한 각종 보도매체들도
계엄당국의 철저한 통제 속에서 광주의 상황과 관련된 보도를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19일
밤, 시위를 마치고 해산한 광주시민들은 공수부대의 만행에 대한 저주와 분노의 일념으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대대적인 민중항쟁의 조건이 조성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
고 그 항쟁은 신군부 스스로 자초한 또는 의도적으로 야기한 것이다.
전투교육사령부가 항쟁이 끝난 직후 군의 시각에서 정리한 「광주소요사태분석-교훈집」은
광주시민이 공수부대에 맞서 죽음을 불사한 항쟁을 벌이게 되었는지 그 원인에 대해 이렇게
결론짓고 있다. "해산보다는 체포 주안으로 협공, 소요진압간 지역주민이 보는 가운데 폭동
군중과 격렬한 충돌 발생, 도피군중을 추적·체포하는 과정에서 기물파괴, 가족위협에 대하
여 시민들의 야만적 감정 폭발" "소요진압중 발생된 사상자 및 체포자의 처리 지연과 장기
간 노상방치로 주민들의 감정을 촉발" 군의 자료는 이렇게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7공수
와 11공수여단의 초기진압작전은 정당한 진압이니 과잉진압이니 하는 논쟁자체가 무의미할
정도의 명백한 학살이었다.
8. 5월 20일의 상황
(1) 31사단장의 무혈진압 명령, 계엄군의 유혈진압.
7여단과 11공수여단은 형식상 광주의 31사단에 배속되었지만 실질적 통제는 신군부의 지시
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이들 공수부대들은 군 지휘계통에서 위에 있으며, 광주 지역에 있
었던 31사단과 전교사(당시 지휘체계는 계엄사령관→2군사령관→전교사령관→31사단장 순이
었다.)에 작전상황조차 보고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정웅 31사장과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18일 저녁까지 시내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외부로부터 광주시내의 공수부대 만행
을 전해들은 정웅 31사단장은 '31사단 작전명령 제3호'를 통해 유혈진압이 아닌 무혈진압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신군부는 '군 충정작전지침 추가지시'를 통해 광주에서 '바둑판식 분할
점령'과 '시위대를 조기에 분할 타격 체포할 것' 그리고 '소요군중의 도피방지책 강구'와 더
불어 '과감한 타격'을 가하라고 더욱 강력한 시위진압명령을 내린다.
또한 신군부는 19일 오전 6시 30분경 3여단 5개대대를 다시 광주에 증파하기로 결정했다. 7
여단이 시위진압에 투입되기 전에 11여단의 광주 증파 결정이 내려진 것처럼 11여단이 광주
시내에 투입된 19일 오전 10시보다 훨씬 이전에 증파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5월 19일 밤 12
시, 청량리역에 도착한 3공수여단은 5월 20일 새벽 1시와 1시 10분에 제1 제대 및 제2제대
로 부대를 나누어 열차를 이용, 서울을 출발하여 5월 20일 아침 7시 3분과 7시 35분경 광주
역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광주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의 총원은 3,400여명으로 불어났다.
(2) 첫 발포
19일 밤부터 내리던 비는 20일 오전 9시경까지 내리
다가 그쳤다. 시민들은 이른 아침부터 비를 맞으며
변두리 지역에서부터 시내 중심가로 몰려들고 있었
다. 시내에는 여전히 공수부대가 지키고 있고, 어제
의 공수부대 만행으로 보아 오늘은 더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집에 숨어 있을 수
만은 없었던 것이다. 시위대와 공수부대의 접전은 아
직 일어나지 않았다. 공수부대는 어제와 좀 다른 데
가 있었다. 그들은 M16소총에다 대검을 착검하지도
않았고, 말씨도 공손했다. 술 냄새를 풍기거나 눈이
벌겄게 충혈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20일 오전은
이와 같은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별다른 사건 없
이 대체로 소강상태를 이루면서 지나갔다.
점심시간이 지나면서 광주시가지는 다시 팽팽한 대
치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어림잡아도 10만이 넘는 인
파가 금남로를 뒤덮었다. 이제는 시장의 상인들까지
장사를 치우고 시위에 나서기 시작했다. 시내의 도처에는 [투사회보]라는 지하유인물이 수천
매식 뿌려지고 있었다. [투사회보]는 윤상원이 중심이 된 광주지역의 사회운동 진영에서 관
제언론과 정부의 거짓된 선무방송을 이겨내기 위하여 발행한 것이었다. 오후 3시, 금남로의
시위대는 수만 명으로 불어났으며, 그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드디어 경찰의 최루탄이
터지기 시작했다. 금남로의 시위군중과 경찰 사이에 공방전이 시작되었고, 시민들은 잠시 물
러났다가 다시 몰려드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또다시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폭력과 시민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시민들의 숫자는 엄청나게 불어났으며, 그중에서 도망치거나 방관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모두들 결사적이었다. 도청 앞 광장으로 통하는 모든 도로에는 시민
들의 대열이 밀물처럼 밀어닥쳤다. 공수부대의 만행에 흥분한 택시운전사들까지 시민들의
투쟁대열에 동참할 것을 결의했다. 200여대의 자동차가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켠 채 무등경
기장을 출발하여 저녁 7시쯤 금남로에 들이닥쳤다. 이 엄청난 자동차 시위행열은 일시적 소
강상태에 빠져있던 시위군중들의 전의에 다시 새로운 불을 질렀다. 차량행렬이 금남로에 이
르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저지선 앞에서 대치중이던 군중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열광했다.
이날 저녁 도청 앞 금남로는 시위대와 계엄군의 공방전으로 지옥이 되었다. 공수부대원들은
개머리판으로 차량의 헤트라이트를 부수며 전진하였고, 닥치는대로 운전기사들을 끌어내려
두들겨팼다. 그러나 잠시 물러나던 시위대는 공용터미날에서 버스를 타고 온 또 다른 시위
대와 합류하여 계엄군을 압박하였고, 계엄군 저지선은 금남로 1가 전일빌딩 앞까지 후퇴하
였다. 7시 30분이 되면서 금남로에는 전체적인 형세로 보아 시위대가 계엄군을 포위하고, 계
속해서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도청 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시위대와 계엄군 사이에 혈전이
계속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시위대들은 시간이 지나도 흩어지지 않았으며, 밤이 깊어갈
수록 쌍방의 공방전은 고조되었다. 이윽고 MBC와 KBS방송국이 불타기 시작했다. 광주에서
자행되고 있는 공수부대의 만행을 전혀 보도하지 않고 정부의 발표만을 일방적으로 보도하
는 태도에 극도로 흥분한 시민들이 더 참지 못하고 방송국에 불을 지른 것이다. 이제 시내
곳곳에서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시위대가 형성되었고, 그 속에서 다소 경험을 가진 몇몇 지
휘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아직 무기를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주위에서 무기가
될만한 모든 것들을 이용하여 계엄군에 저항하고 있었다. 밤 11시경 광주 신역에서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신역을 지키고 있던 3공수
여단과 시위대의 공방전이 격렬해지고 시
위대가 차량을 앞세워 군의 저지선을 돌파
하려하자 일제히 발포를 하였고 시위대의
맨 앞의 시민들이 쓰러졌다. 또한 비슷한
시각에 광주세무서 앞과 조선대학교 부근
에서도 발포가 있었다. 계엄군은 바로 주
요 거점만을 장악하고 있을 뿐 항쟁이 다
른 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시외로 통하는 교통과 통신을 차단하면서
광주를 고립시키고 있었다.
9. 5월 21일, 광주 - 전남도청으로!
(1) 도청광장에 있던 공수부대에게 실탄이 지급되고
20일 자정이 지나 21일 새벽이 되어도 시민들의 항쟁
은 그칠 줄 몰랐다. 새벽 1시에 시민들은 세무서로 몰
려가 기물을 부수고 불을 질렀다. 국민들의 삶과 복지
를 위하여 쓰라는 세금이 자신들을 죽이고 두들겨팬
군대와 그들이 갖고 있던 무기를 만드는데 사용되었
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시민들은 경찰서나 기타 공공
건물을 오히려 보호하는 분위기였으므로 방송국과 세
무서 방화는 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초기에 파출소
를 공격했던 것과는 그 이유가 질적으로 달랐다. 항쟁
나흘째로 접어든 21일 아침 지난 새벽의 광주역에서
사망한 시민의 시체 2구가 시민들의 손에 들어왔다.
시민들은 손수레에 시체를 싣고 대형 태극기로 덮어
천천히 시내로 나아갔다. 시위대의 식사는 각 동네 아
주머니들이 준비하였다. 시장 주변에서는 쌀과 반찬을
모아 지나가는 시위대에게 제공하였으며, 그 외에도 각종 음료수와 부식 등이 지나가는 시
위대에게 전달되었다.
오전 10시경, 금남로를 메운 10만여명의 인파
속에는 쇠파이프나 몽둥이로 원시적인 무장
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무렵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정부 당국으로서는 처음으로 '광주
사태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의 담화문은 '광
주사태'를 '불순분자 및 간첩들의 파괴·방
화·선동'에 기인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계엄
군의 자위권을 강조함으로써 발포명령이 이
미 내렸졌음을 암시한 셈이다. 그날 오전 10
시 10분경에는 벌써 도청광장에 있던 공수부
대에 실탄이 지급되었다고 한다.
(2)도청 앞의 집단발포
21일 오후 1시 정각, 도청 건물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애국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
다. 바로 그 애국가에 때맞춰 일제히 요란한 총성이 터져 나왔다. 공수부대원들이 '엎드려
쏴' 자세로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집단발포를 시작한 것이다. 전일빌딩, 상무관, 도청, 수협
전남도지부 건물 옥상에서 저격병들이 시위대열의 선두에 있는 시민들을 겨냥하여 사격을
실시했다. 사격은 메가폰으로 '사격중지 명령'을 내릴 때까지 약 10분간 계속되었다. 이로써
광주시민들이 간절하게 품고 있던 소박한 '사태의 평화적 해결에의 기대'는 물거품처럼 사
라졌다. 금남로는 피바다를 이루었다. 시민들로 가득 찼던 거리는 적막에 빠졌고 죽은 이들
의 피와 부상자들의 신음만이 금남로를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
며 쓰러져 갔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태 앞에 시민들은 넋을 잃고 분노와 공포감으로 치
를 떨었다. 이 집단발포로 몇 명의 시민이 살상당했는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군의 발표와 1988년 이후 피해자 신고서 내용을 종합해볼 때 이곳에서 최소한 54명
이상이 숨지고 500명 이상이 총상을 입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면 도대체 이날 도청 앞 집단발포를 명령한 자는 누구인가? 광주특위 청문회에 불려나
온 공수부대 지휘관들은 ① 시위대가 먼저 발포했다 ② 실탄은 31사단 병력이 제공한 것이
다 ③ 상부로부터 발포명령은 없었으며 대대장급 이상의 현장 지휘관들도 발포명령을 하지
않았다 ④ 정당방위 차원에서 누군가가 먼저 발포를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항쟁 1년 후 육
군본부가 각 부대의 상황일지를 종합·검토하여 정리·편찬한 「소요진압과 그 교훈」에는
총과 실탄이 동시에 피탈당한 최초의 사례를 5월 21일 오후 2시 30분경 나주경찰서 삼포지
서, 영광파출소, 금성파출소, 수안파출소의 예비군 무기 피탈과 오후 3시 50분경 화순파출소
무기 피탈로 기록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1988년 12월 21일 광주특위 제21차 청문회에서 80
년 당시 광주로 투입된 11공수여단장 최웅은 "예하 대대장들이 그전-도청 앞 발포-부터 벌
써 실탄을 달라고 했지만 절대 발포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21일 아침부터 우리는 윤흥정
사령관에게 강력하게 철수를 요구했다. ………… 상황이 너무 급히 돌아가고 보니까 부하들
의 생존을 보장해주어야 하겠고, 불필요한 충돌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병력을 빼야 되겠
다, 이런 강한 의지로 한 단계 높혀서 결심권자에게 요청을 하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러
나 윤흥정 사령관은 최웅 11공수여단장의 이런 건의를 받은 사실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21일 서울에 있던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발포여부를 묻는 급전을 받았다. 정호용
은 "사태가 악화되자 발포여부를 묻는 급전이 날아와 나는 지휘계통에 있지 않았지만 절대
발포불가 명령을 내렸다"고 1988년 5월의 월간「경향」이태원 기자와의 「정호용, 광주사태
책임자 밝히다」라는 인터뷰에서 그 내용을 말한 바 있었다. 대한민국 국군의 최정예부대인
공수부대의 지휘관들이 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현지사령관에게는 발포건의를 하지 않고
지휘계통에 있지도 않은 정호용 특전사령관에게 발포여부를 묻는 급전을 보냈다는 것은 상
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도청 앞 발포 명령 책임을 부하들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명예로 아는 군인들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부하들에게 발포책임을 전가하려는 이들의 행태는 4·19당시 발포명령을 포함한
모든 책임을 지고 사형을 감수한 최인규를 떠올리게 한다. 발포명령 책임자를 밝히는 일은
광주항쟁 진상규명의 핵심적인 사항이지만 진실을 규명하기에는 그간 신군부가 구체적인 핵
심증거를 5공화국 7년 동안 모두 없애버려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3)시민군 탄생과 공수부대 철수
시민들은 무장을 서둘렀다. 계엄군의 총격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시민들도 총이 필요했다. 총
을 확보하기 위하여 시위대중 일부는 광주 근교의 화순, 나주, 영산포, 장성, 영광, 담양 등
지로 달려갔다. 화순 탄광에서는 광부들의 도움으로 다량의 다이나마이트와 뇌관이 확보되
었고, 그 외 각 지역의 지서와 예비군 무기고에서는 카빈 소총 등이 획득되었다. 획득된 무
기들은 즉시 광주시내로 반입되어 청년들에게 분배되었다. 이들 무장시위대는 광주시민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시민군'으로 불렸고, 계엄군에 맞서 싸우는 '아군'으로 간주되었다. 무장
한 시민군은 주로 광주공원에 있는 시민회관을 본부로 삼았다. 시민군들은 계엄군의 정식
발포가 시작된 지 2시간 20분 정도가 지난 21일 오후 3시 20분경부터 응사를 시작하였다.
시가전은 도청을 중심으로 전남대 의대 근방, 노동청 근방, 공원 근방, 금남로 등지에서 벌
어지고 있었다. 특수훈련을 받은 정예 공수부대와 비조직적인 시민군이 전투를 벌임에 따라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시민군들 사이에 자발적으로 전투지도부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들 지도부들은 무기를 소지한 사람들을 10여 명씩 조를 나누어 편성하였다. 이
들은 각각 조별로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광주 시내 주요지점으로 배치되었다.
무장한 시민들이 도청으로 끊임없이 압박해 들어가자 계엄군은 오후 5시 30분 총퇴각이결정
되었다. 시민군들에게 완전히 포위당한 계엄군은 길 양옆에다 M60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퇴
각하기 시작하였다. 계엄군은 도청 뒷담을 넘어 철수했으므로 철수한지 한참이 지나도록 시
민군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저녁 8시경 시민군 일부가 총을 쏘면서 도청 안
으로 뛰어들면서 드디어 시민군은 교도소를 제외한 광주시의 전지역에서 계엄군을 몰아내고
승리를 쟁취하게 되었다. 이날의 총격전으로 광주 시내의 모든 병원들은 총상환자로 만원이
었다. 버스나 소형차량들은 주로 부상자나 시체들을 병원으로 실어날랐다. 의약품이나 일손
도 태부족이었다. 의사와 간호원들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내려고 글
자 그대로 신명을 다했다. 또한 병원 앞에는 시위 대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못한 가정주
부, 아주머니, 아가씨들이 헌혈을 하기 위하여 몰려들었고, 어린이까지도 팔을 걷고 달려왔
다. 적십자병원 앞에는 인근 술집아가씨들이 '우리도 깨끗한 피를 가졌다'고 절규하며 헌혈
을 간청하고 있었다. 이날부터 전개된 새로운 사태의 하나는 항쟁이 더 이상 광주지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목포를 비롯한 전남지역 일원으로 광범위하고도 급속하게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편 이날 광주 시내에 거주하던 미국인 약 200명은 미리 송정리로 빠져나가 군
용비행기를 이용하여 서울로 피신하였으며, 송정리 공군기지에 주둔해 있던 미공군은 그곳
의 모든 비행기를 군산과 오산비행장으로 이동하였다.
5월 21일 계엄군 퇴각은 한편으로는 광주시민들의 투쟁의 결과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엄군의 전술적인 작전이기도 했다. 계엄군은 이미 '광주지역의 봉쇄-내부교란-최종진압'
이라는 단계적 작전개념을 수립하고 있었다. 한편, 시내의 모든 질서는 '시민군'에 의해 자
체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10. 5월 22일부터 25일까지의 상황
(1) 시민공동체, 광주. 평온해 보였지만..
항쟁 5일째 되는 날이 밝았다. 지난 저녁에 그토록 날뛰던 계엄군들이 물러나고 시민군들이
도청을 장악하자 시민들은 그러한 현실을 눈으로 확인하고자 도청앞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광주시민의 계엄군에 대한 초기 저항은 수세적이고 자연발생적인 것이었으며, 생존권이 위
협받는 상황에서 그에 대한 자기방어였으나, 실제로 그들의 항전이 담고 있는 역사적인 내
용은 훨씬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모두 승리감을 만끽하며 높은 시민정신
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그동안의 혼란 속에서 길거리에 흩어져 있는 잔해들을 치워내고 시
내를 깨끗이 청소하였다. 광주공원에는 지난 밤의 지역방어전투에 참가했던 '시민군'들이 모
여들어 시민군의 재편성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부터 '시민군'이 해야 할 일은 자체조
직과 병력을 통제하여 계엄군의 반격에 대비하면서 시내의 치안을 유지해야 하는 일이었다.
아침 일찍 다시 도청을 접수한 '시민군'은 우선 계엄군이 버리고 간 물건들로 어수선한 구
내를 정돈한 다음, 도청을 본부로 정하고 1층 서무과를 작전상황실로 사용했다. 상황실에서
는 차량통행증과 시내 주유소의 유류를 보급받기 위한 유류보급증, 상황실 출입증 등을 발
부하는 한편, 외곽지대에서 자체방위를 맡고 있던 시민군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그들을 지원
하기 위해 기동타격대를 편성, 출동하기도 했다.
당시 계엄군은 탱크와 장갑차를 동원하여 외부에서 광주시내로 들어오는 진입로 7개 지점을
차단, 봉쇄하고 있었으며, 시 외곽의 야산을 중심으로 매복하여 시민군이 통과하려 하면 사
격을 가하였다.
(2) 수습대책위원회 구성과 역할
한편 금남로와 도청 주변에 모여든 수많은 시민들은 도청앞에 모여 무엇인가 만족할만한 조
치가 발표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낮 12시 30분경 신부, 목사, 변호사, 교수, 정치인
등 20여명으로 [5·18 수습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어서 오후 9시경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생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유지급 인사들의 [일반수습위]는 주로 계엄사 측과의
협상활동을 했으며 [학생수습위]는 실질적인 대민업무를 맡아보게 되었다. 학생수습위는 장
례반, 홍보반, 차량통제반, 무기수거반으로 나누어 당일 계엄사에 요구한 7개항의 요구조건
을 홍보하고 무질서하게 돌아 다니는 차량을 통제했으며 엉겁결에 총을 들었다가 버린 총이
나 총을 놓고자 하는 사람들한테서 총을 받아 300여정을 수거했다. 두 수습위는 이날까지는
혼연일체가 되어 활동했으나 계엄사가 요구조건을 수락하지 않고 무장해제를 요구하는데서
부터 두 수습위 모두 강온파로 나뉘어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시민수습위의 온건파(사실상
투항파)는 축출되고 학생수습위는 24일 저녁부터 강경파(투쟁파)가 주도권을 장악했다.
(3) 5월 23일, 광주
시민들이 광주시 전역을 장악한지 이틀째인 23일, 시 외곽지역에서는 간헐적으로 총성이 들
려왔지만, 아직 시내는 승리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분위기였다. 시민들은 이날도 자발적
으로 길거리를 청소했으며, 시장 주변 길가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길가에 솥을 걸고 밥을 지
었으며, 밤새워 경계근무를 하던 시민군들에게 앞다투어 식사를 제공했다. 이날부터는 상가
들도 띄엄띄엄 문을 열기 시작했다. 오전 10시경 모여든 시민들로 도청앞 광장은 거의 5만
여 명의 인파가 운집해 있었다. 도청앞 광장 맞은편 상무관에는 시체를 담은 관들이 가지런
히 놓여 있었고, 관이 부족하여 아직 입관하지 못한 시체들도 무명 천에 덮여 있었다. 입구
에는 분향대가 설치되어 향이 피워졌고, 수많은 시민들이 줄을 지어 분향하고 있었다. 한편
지난 밤에 구성된 학생 수습대책위원회는 일반시민 수습대책위원들이 모두 귀가한 상태에서
밤을 새워 대민질서, 홍보, 장례, 무기회수 문제 등을 토의했다. 이들은 다른 여러가지 문제
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지만, 무기반납 문제는 팽팽한 대립을 보였다. 무기를 일부
반납하여 그것을 조건으로 시민요구사항을 협상하자는 문제를 놓고 두 세력사이에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4) 수습위의 내부갈등
수습대책위원회 내부에서의 갈등, 시민군과 수습대책위원회의 갈등, 이렇게 상이한 의견들이
끝내 화해할 수 없는 길로 들어선 것은 항쟁 6일째인 5월 24일이었다. 오후 1시경 도청 상
황실에서 열린 '학생수습위'에서는 김종배, 허규정 등의 강경한 주장이 관철되어 다음과 같
은 요구사항이 결의되었다. 첫째, 금번 광주사태에 대하여 일부 불순분자들과 폭도들의 난동
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현재의 광주항쟁은 전시민의 의지였으므로 폭도로 규정한 점을 해명,
사과하라. 둘째, 이번 사태로 사망한 사람들의 장례식을 시민장으로 하라. 셋째, 5·18 사태
로 구속된 학생, 시민 전원을 석방하라. 넷째, 금번 사태로 인한 피해보상을 전시민이 납득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시행하라.
이로써 학생수습위는 강경파(투쟁파)가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온건파(협상파)가 한걸
음 물러섰으며 무기를 무조건 반납하자는 시민수습위의 온건파(투항파)는 이미 전날 축출을
당했다. 당시 시민수습위에는 시민들의 신망을 전혀 받지 못하는 인사들이 끼여 있었고 그
들의 태도는 종잡을 수 없었다. (*편집자 주 : 학생수습위의 온건파는 협상파였으나, 시민수
습위의 온건파는 투항파였다. 이 점에서 시민수습위가 시민들의 신망을 받지 못했던 것이
다.) 학생수습위의 위원장이던 김창길(전남대 농대 4년)은 당시 전남·북계엄분소 김기석 부
소장의 양식에 일말의 기대를 걸고 협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었다. 김창길은 시민수
습위원들과 동행하여 학생대표로서 김기석 부소장과 담판한 적이 있으며 김부소장의 고뇌에
찬 태도에 신뢰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날도 각국 외신기자들의 취재는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시민들은 사실보도를 전혀 하
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내기자들의 취재는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지만, 사실보도를 하는 외
신기자들에게는 협조해주어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따라서 국내기자의 도청 출입은 상당한
통제를 받았지만, 외신기자들의 취재영역은 훨씬 자유스럽게 개방되었다. 23일 이후 광주 시
내는 수습대책위원회 내부의 의견대립으로 지도력이 흔들린데다가 정보요원들이 잠입하여
교란작전을 편 관계로 커다란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25일 아침 8시에는 독
침사건까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도청 안에 간첩이 침투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지만,
후일 이 사건은 정보당국의 교란작전이었다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5) 광주시민 자발적 질서회복, 공동체 실현.
'수습위'내에서의 갈등이 커져 가는 것과는 달리, 시민들은 어느 정도 질서를 회복해 가고
있었다. 시장과 상점들이 문을 열기 시작했고, 사회복지단체에 대한 식량공급이나 전기, 수
도 등은 관련공무원들의 지원으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해결되고 있었다. 병원들은 한때 항
쟁기간 동안에 발생한 수많은 부상자들 때문에 혈액이 부족하여 곤란을 겪기도 했지만,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시민들의 헌혈로 혈액원마다 피가 남아돌 지경이었다. 치안유지력이 매
우 약화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은행이나 신용금고 같은 금융기관에 대한 사고는 단 한 건
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금은방 등 일반 상점에서도 별다른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에 발생한 범죄율이 오히려 평상시보다 훨씬 낮았다. '수습위'나 시민군들이 필요한 돈
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성금으로 해결되었으며, 300∼400여명에 이르는 시민군과 항쟁지도부
의 식사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지어다 준 밥으로 해결되었다. 그 수는 줄었지만 시민군도
지도부의 의견대립과는 관계없이 대부분이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시민들의 도덕성과 자치능력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전날에 이어 25일에 이르자 '수습위'의 온건파는 그날밤 모두 도청을 빠져나가고 저
녁 10시 드디어 최후까지 투쟁하기를 결의한 항쟁지도부가 탄생하였다. 새로운 지도부는 학
생수습위의 일부 투쟁파와 청년운동권, 그리고 그동안의 무장투쟁 국면에서 전면으로 부상
한 기층민중 출신으로 구성되었다. 새로운 지도부는 무기반납을 중단하고 투쟁의 조직적 지
도를 위하여 역할을 분담했으며, 도청 내부의 행정체계를 잡고 민중생활의 정상화를 도모하
려고 했다. 그들의 전략은 '일면투쟁, 일면협상'이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자위대를 편성할
계획을 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계엄군이 총공격해오면 도청 무기고에 있는 다이나마이
트를 폭파하겠다는 위협적인 협상조건을 계획하였다(이들은 그때까지 그 다이나마이트의 뇌
관이 제거된 사실을 알지 못했다). 또한 대치상황이 장기화될 것에 대비하여 모든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정상화시키기 위한 여러가지 사항도 검토되었다. 물론 그들은 어쩔 수 없는 한
계를 보이긴 했지만.
11. 신군부의 광주 무력진압, '상무 충정작전'
(1) 도청 앞은 공포의 도가니
5월 26일 새벽 5시, 농성동에서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소식이
시민군이 탈취했던 계엄군의 무전기를 통해 도청 상황실에 보고되었다. 전 시민군에 비상령
이 하달되었으며, 일반 수습위원들중 이성학 장로, 김성룡 신부 등 일부는 농성동으로 달려
가 도로 위에 드러눕기도 했다. 계엄군의 탱크는 시민군의 바리케이트를 깔아뭉개 버리고
1Km 쯤 밀고 들어와 한국전력 앞길에 진을 쳤다. 26일 밤 도청 안에서는 계엄군의 진입이
임박한 것을 예상하고 일부 사람들이 도청을 빠져 나갔다. 항쟁지도부도 빠져나가는 사람들
을 만류하지 않았다. 지도부는 이미 궐기대회에서 사회자를 통해 최후까지 싸울 수 있는 사
람만 남아달라는 말을 전한 바 있었다. 이렇게 해서 YMCA에 모여 도청 항쟁지도부에 합류
한 사람들이 150여 명이 되었다. 이중 80여 명은 총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었고, 60여
명은 고등학생 및 군 경험이 없는 청년들이었으며, 여학생도 10여 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2) 충정작전 5단계 - 상무충정작전
군의 자료에 의하면 충정작전은 5단계로 나누어지는데 1단계(5. 17 이전)는 경찰력에 의한
데모 진압작전, 2단계(5. 18∼5. 21)는 계엄군에 의한 데모 해산 및 진압작전, 3단계(5. 22∼
5. 23)는 도로차단 및 광주 봉쇄작전, 4단계(5. 24∼5. 26)는 선무활동 및 상무충정작전 준비,
5단계(5. 27)는 상무충정작전의 실시로 진행되었다. 5월 21일 상오의 대책회의에서 공수부대
를 외곽으로 재배치하고 "5월 23일 이후 폭도소탕작전 실시"를 결정한 신군부는 광주시민의
저항을 최종적으로 분쇄하기 위한 채비를 서둘렀고 충정작전 5단계인 '상무충정작전'을 통
해 광주시민의 저항을 말살하기로 결정한다. 특히 '상무충정작전'에서 도청진압작전에 3공수
여단 11대대의 1개 지역대를 특공대로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이들을 수류탄으로 중무장 시켰
다.
12. 5월 27일 도청, 새벽의 마지막 불꽃
(1) 도청진압작전
공수부대의 특공조는 26일 오후 6시에 도청의 항쟁지도부를 '소탕'하기 위한 예행연습을 완
료했다. 이들은 밤 11시경 이동을 시작, 27일 새벽 1시 30분을 전후하여 조선대 뒷산에 집
결, 작전계획을 최종 점검한 후 3시와 3시 30분경에 각기 도청, YWCA, 전일빌딩, 관광호텔
등 목표지점을 향해 은밀히 침투해 들어갔다.
(2) 도청의 마지막 항전
공수부대의 특공조는 26일 오후 6시에 도청의 항쟁지도부를 '소탕'하기 위한 예행연습을 완
료한 후 도청을 기습타격할 임무를 맡은 3공수여단(여단장 최세창 준장) 11대대(대대장 임
수원 중령) 제1지역대(지역대장 편종식 대위)는 M16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을 하였다. 3공
수는 물론 7, 11공수여단 병력까지 얼룩무늬 제복대신 일반보병 전투복을 입고 방탄조끼를
착용했다. 20사단 역시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작전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도청진압 특공
조는 27일 밤 1시 30분을 전후하여 조선대학교 뒷산에 집결하여 작전계획을 최종 점검한 뒤
각기 목표지점을 향해 은밀히 침투해 들어갔고 다른 공수대의 지역대들도 시내 주요지점을
향해 골목길을 타고 침투하기 시작했다. 또한 광주시 외곽에 봉쇄선을 펴고 있던 20사단은
새벽 3시 30분까지 사단의 전병력이 중심가를 포위한 공격개시선으로 이동하여 포위망을 압
축하였다.
항쟁지도부는 26일 밤, 죽음을 불사하고 남아서 싸우기로 한 시민들과 기존의 시민군들을
모아 전투조를 편성하였고 궐기대회가 끝난 후 YMCA에 남은 150여명을 기존의 시민군들
과 섞어 도청을 중심으로 YMCA, YWCA, 계림초등학교, 전일빌딩 등의 주요지점에 배치했
다. 계엄군은 작전이 시작되기 직전 광주시와 전남 일원 사이의 전화를 두절시켰고 곧이어
시내전화선도 모두 차단해버렸다. 전화가 끊어지기 전 시민들의 제보로 계엄군의 진입이 시
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항쟁지도부는
도청에 비상령을 내렸고 조용히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홍보부에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결정했다. 박영순과 이경
희가 홍보차량에 올라 새벽 3시까지 광주
시내 전지역을 돌면서 목이 터져라 가두
방송을 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
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
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
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
입니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요……." 그녀들
의 애절한 부르짖음은 그후 오랫동안 광
주시민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기억 속에
남아있게 된다.
상황실에는 시시각
각 계엄군의 진입
현황이 보고되어
들어오고 있었다.
새벽 4시가 지나면
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도청의
시민군은 도청 전
면과 측면에 2∼3
명씩 1개조로 담장
을 따라 배치되었
고 도청안에는 1층
부터 3층까지 유리
창 옆에서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단 특공조는 4개
조로 나뉘어 도청
을 포위했다. 도청
뒷담을 뛰어 넘어온 특공조는 4개조로 나뉘어 도청을 포위했다. 도청 뒷담을 뛰어 넘어온
특공조가 맹렬히 총을 쏘아대자 곧이어 사방에서 총탄이 쏟아졌다. 특공조는 도청 내부로
돌격하여 각 방의 문을 걷어차면서 닥치는대로 총을 쏘았고 도청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을 이
루었다. 총소리와 비명이 난무한 가운데 인기척이 나는 곳에 무조건 총격을 가했다. 그야말
로 '폭도소탕작전', 바로 그것이었다. 동이 터오기 사작하는 오전 5시 10분경 YMCA,
YWCA, 계림초등학교, 전일빌딩, 관관호텔 등이 이미 계엄군에 의해 완전히 진압당했고 도
청을 마지막으로 최후의 항전은 끝났다. 완전히 소탕했음을 확인한 3공수 특공조는 20사단
에게 도청을 인계한후 광주비행장으로 돌아갔다. 항쟁의 피로 물든 아침이 밝아 왔다. 생존
자는 '총기 소지자' '특수폭도' 등으로 분류되어 군부대로 이송되었다. 계엄군은 작전을 개
시한지 약 1시간 30분만에 모든 것을 마무리짓고 항쟁을 진압하였다. 그리고 '80년 5월 광
주민중의 무장투쟁도 열흘간에 걸친 역사의 막을 내렸다.
13. 전남 지역에서의 항쟁 확산
5월 21일의 도청앞 집단 발포를 계기로 항쟁은 광주시내를 벗어나 전남 일원으로 순식간에
번져 나갔다. 광주민중항쟁 당시 광주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항쟁의 불길이 광주 이외의 지
역인 화순, 나주, 함평, 영암, 강진, 무안, 해남, 목포 등지로 번져간 것이다. 21일 오전, 아세
아 자동차공장과 각종 차고에서 차량이 시위군중에게 대거 획득된 것을 계기로 지금까지는
광주 시내에만 국한되어 고립적으로 진행되었던 민중항쟁이 전남 도내 각 지방으로 들불처
럼 퍼져나간 것이다. 최초 시위대는 보다 전국적인 항쟁의 확산을 목적으로 전주·서울 방
면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들의 의도는 우선 항쟁이 전남 이외 지역으로 확산될 것
을 두려워 한 계엄군이 호남고속도로와 철도를 철저히 봉쇄한 결과 주로 전남 도내 서남부
에 있는 각 시, 군으로 진출하였다.
광주항쟁이 확산되는 경로를 살펴보면 한 가지 특징적인 점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항쟁
이 발발한 지역이 주로 광주 이남 서남해안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물론 전
남지역과 다른 여타 지역을 분리하여 전남을 고립시키려는 신군부와 계엄군의 전략·전술에
도 원인이 있지만 전남에서 항쟁이 발발한 대부분의 지역이 광주에서 버스를 타고 간 시위
대에 동조하여 항쟁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또한 전남일원의 경찰력 대부분이 광주에 투입되
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인근 도시의 경비가 취약했다. 각 지역의 민중들은 그 전에 광주에
서 계엄군에 의하여 처참한 학살이 자행됐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지만, 감정적인 분노에 머무
르다가 광주에서 온 시위대에 의하여 그 분노가 실천적인 저항으로 폭발한 것이다.
14. 광주민중항쟁 학살의 배후, 미국
(1) 광주항쟁 당시 미국의 공식 입장
5월 22일 미 국방성 대변인 토머스 로스는 "존 위컴 주한 유엔군 및 한·미연합사령관은 그
의 작전지휘권 아래 있는 일부 한국군을 군중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한국정부의
요청을 받고 이에 동의했다"며 "지금까지 북한군이 한국의 현 상황을 이용하려 한다는 움직
임이나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동아일보 1980년 5월 22일 강인섭 워싱턴 특파
원 보도) 또 이날 미 국무성 대변인 호딩 카터는 광주사태에 대한 성명을 다음과 같이 발표
하였다. "미국은 한국의 남쪽에 위치한 광주의 소요사태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표하며 이
사태와 관련된 모든 당사자에게 최대한 자제와 대화를 통해서 평화적인 사태수습방안을 모
색하도록 촉구하는 바이다. 불안상태가 계속되어 폭력사태가 가열된다면 외부세력이 위험한
오판을 할 위험성이 있다. 미국정부는 현재의 한국사태를 이용하려는 어떠한 외부의 기도에
대해서도 한·미상호방위조약 의무에 의거, 강력히 대처할 것임을 재강조하는 바이다"(동아
일보, 1980년 5월22일 보도, *편집자 주 : 바로 이 발언에 문제가 있다. 광주민중항쟁에 북한
이 개입했을 가능성에 대해서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는 광주민중항쟁이 북한의 사주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보았다.) 이날 오후, 백악관
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 고위정책조정위원회(PRC)는 오끼나와에 있는 조기경보기 2대
와 필리핀 수빅만에 정박중인 코럴시 항공모함을 한국 근해에 출동시키기로 결정한다.
(2)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권 이양
이같은 미국의 일련의 움직임은 무엇을 의미하고 미국은 과연 신군부의 광주무력진압에 어
떤 입장과 역할을 담당했는지는 1980년 5월 16일의 20사단 작전통제권 이양과 관련해서 파
악할 수 있다. 1980년 5월 16일, 육군참모총장 이희성은 존.A.위컴 한·미연합사령관에게 "
소요사태 악화에 따라 수도권 질서유지를 위하여 20사단 작전통제권 이양을 요청"하자 한·
미연합사령관은 요청전문을 접수했음을 확인한 후 "귀하의 요청을 승인한다(Your request
is approved)"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신군부가 20일에는 20사단을 원래의 목적이 아
닌 '광주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광주로 보내도 되겠느냐'며 한·미연합사에 '부대이동에 관
한 문의'를 하였다. 이에 위컴은 '워싱턴에 있는 상관들과 협의한 후 동의(agreed)'한 것이
다.
또한 미 행정부는 한·미연합사가 광주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33사단 1개 대대의 작전
통제권을 해제해 준 사례가 있다. 5월 23일, 육군참모총장은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소요사
태 확대에 대비, 광주지역 질서유지를 위해 5월 23일 12:00부로 33사단 1개 대대의 작전통제
권 이양을 요청하는 부대사용 협조문"을 보냈다.(육군본부, 육군참고자료지-작전명령 및 지
시의 육본 작상전 제0-232호 인용) 그러자 연합사령관은 즉각 "승인"한다는 전문을 합참의
장과 육군참모총장에게 보냈다. 이에 따라 33사단 101연대 제2대대는 23일 12시25분에 성남
비행장에서 광주투입작전 대기상태에 들어갔으나 실제 광주에는 투입되지는 않았다.
미국행정부가 남침의 징후가 전혀 없었는데도 '광주사태가 더 격화될 경우 남침할 수도 있
다'는 식의 경고를 계속한 것은 일반 국민이 광주항쟁을 불안하게 생각하도록 분위기를 조
성함으로써 광주를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고 무력진압을 정당화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따
라서 미국은 12·12쿠데타이후 신군부를 직·간접으로 지원·옹호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
는 것이다.
15. 광주민중항쟁의 부활
광주의 거리는 평정을 회복했으나 그것으로 항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최초로 보여준 것
은 항쟁의 와중에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항쟁 이듬해에 [5·18의거
유가족회]를 발족시키면서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 및 당국에 대한 유가족들의 건의 및 요
구창구를 일원화하기로'결의했다. 이어서 1982년 6월 13일에는 항쟁 때 부상을 입은 사람들
이 1차 발기인 모임을 갖게 되었고, 결국 그해 8월 1일에는 광주 무진교회에서 18명의 회원
이 모인 가운데 [5·18부상자 무등산 친목회](후에 '5·18광주의거 부상자회'로 개칭)를 발
족시키고 있다. 이렇게 해서 한 해가 지날 때마다 여러 개의 [5·18 유관단체]가 발족되었
다. 이들은 '80년 이후 해마다 5월이 되면 그날의 항쟁을 되새기는 행사를 주도하면서 새로
운 사회운동 세력으로 떠올랐다. 한편 광주 5월항쟁을 계승하려는 시민·학생들의 몸부림도
그치지 않았다. 최초의 저항은 항쟁이 진압된 지 3일째인 5월 30일 서강대 학생 김의기가
광주사태의 진상을 고발하는 글을 뿌리면서 서울기독교 회관에서 투신한 것이었다. 이후 광
주사태의 진상을 알리고자 하는 노력이 전국 도처에서 계속되었다. 또한 항쟁 당시 신군부
를 직·간접으로 도와주었던 미국에 대한 저항은 '80년 12월에 일어난 광주미문화원 방화사
건으로 그 첫 봉화가 올랐다. 이후 반미운동은 계속 확산되어 '82년 3월의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85년 5월의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 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제5공화국의 폭압정치도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투쟁인 '87년 6월항쟁에 의해 심각한
위기를 맞았고 결국 '6·29선언'을 통해 전국민의 민주화요구를 수용하기에 이른다. '88년
13대 여소야대의 정국상황속에서 '5공청산을 위한 5공비리 특위와 함께 광주청문회'가 개최
되어 '80년 5월 광주항쟁의 실상이 전국민 앞에 낱낱이 공개되었다. 이후에도 사회 각계각
층의 민주화투쟁과 노력에 의해 '80년 당시 국민이 그토록 염원하던 민주화를 후퇴시키고
현정을 유린한 신군부세력이 문민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에 의한 사법적 심판을 받게 됨으
로써 비로소 광주민중항쟁의 정당성과 명예가 회복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