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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무너지는 죽림정사
십수 년 만에 만난 목련과 연화색은 비록 남매였지만 그렇다고 마냥 함께 있을 수는 없었다.
연화색은 며칠 후 예정대로 녹야원을 떠나 비구니들이 수행하고 있는 대림정사로 향했다.
가르침을 받으러 가는 길인지라 남매는 웃으며 헤어질 수 있었다.
수보리는 목련과 함께 좀더 녹야원에 머물기로 하였다.
녹야원은 외양상으로는 조용한 비구들의 도량이었지만,
사실 그 속은 엄청난 소용돌이가 들끓고 있었다.
데바를 따르는 무리들이 엄청나게 늘어나 그 수가 오백을 넘었다.
육군 비구를 중심으로 한 그들은 알게 모르게 법도에 어긋난 짓을 하고 다니는가 하면
붓다의 가르침을 편리한 대로 해석하여 전하곤 하였다.
비구들 사이에서도 이 때문에 의견이 분분하였다.
"세존께서 이 세상에서 가르침을 주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 정도이니,
만일 열반이라도 하신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이로구먼."
목련이 혀를 차며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수보리를 통해 대림정사 사건을 들은 터였다.
"세존께서는 어찌하여 데바와 그 무리들을 파문하지 않으십니까?"
수보리가 답답한 마음에 이렇게 물었다.
"데바는 행동은 어찌하였든 입으로는 도를 찾겠다,
드높은 깨달음을 이루어 성불하겠노라고 외고 다니지 않는가?
그런 그를 어떻게 파문시키시겠는가?
그 때문에 자꾸 계율만 늘어날 뿐이지." 목련의 말은 사실이었다.
데바와 육군 비구들은 계를 어길 뿐만 아니라 그것을 교묘하게 해체시켰다.
'때가 아니면 먹지 말라'는 계율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무 때나 먹었다.
그들은 '때'라는 것은 정해진 어떤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몸이 원하는 때,
배가 비었을 때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했다.
'살생을 하지 말라'는 계율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곧잘 뱀이나 메뚜기들을 잡아먹곤 했다.
다른 비구들이 그들을 나무라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세상 모든 만물은 나면 죽게 되어 있는 것이다.
짐승들을 보라. 강한 놈이 약한 놈을 잡아먹는 것이 이치 아니더냐.
만약 살아 있는 것들을 그대로 살려둔다면 이 세상은 온갖 벌레와 독충들로 우글거리고 말 것이다.
세존께서 살생을 하지 말라고 한 것은 살아있는 생명을 귀히 여기라는 뜻일 뿐,
그것을 곧이 곧 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 줄 안다.
팔뚝에 앉아 피를 빨아먹는 모기를 죽이는 것이 죄가 되겠는가?
소 잔등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는 등에를 쳐내는 것을 죄라 하겠는가?
어린 아이를 향해 달려드는 독사를 밟아 죽이는 것을 그 누가 살생이라 하겠는가?"
그들의 말은 비구계를 지키는 것이 버거운 많은 비구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면 그럴수록 비구들이 지켜야 할 계율이 엄청나게 많아졌다.
데바와 육군 비구 무리들은 어느날부터 인가 따로 대중을 모아 설법을 펴기 시작했다.
붓다를 만나기 힘든 대중들은 붓다의 사촌형이라는 데바의 설법이라도 듣기를 원했고,
데바는 그들이 원하는 시간이나 장소라면 그것이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달려가 그들에게 설법을 폈다.
대중들의 마음은 차츰 데바에게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데바의 설법은 쉬웠으며, 그가 말하는 계율들은 붓다가 가르친 것들보다 훨씬 지키기가 쉬웠기 때문이었다.
데바는 대중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세존의 형제이신 데바 존자여,
깨달음을 얻으려면 우리 재가신도들도 세존께서 말씀하신 계율을 꼭 지켜야 하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데바는 날카롭게 생긴 그의 두 눈을 가늘게 찢으며 빙그레 웃었다.
"세존의 말씀은 우리 생활 속에서 쉽게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 계율이 너무나 어려워서 출가를 한 비구들만 지킬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딸 수 없는 곳에 달린 과일과 무엇이 다를 바 있겠습니까?
깨달음에 이르는 계율은 우리 생활 속에 녹아 들어야 합니다.
계율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이 계율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까?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정 부분 수행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계율이 생활 전부를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참으로 현명하신 데바 존자여, 저희 아녀자들은 깨달음을 얻어 세존이 되기보다는,
사는 동안 이생의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그 길을 일러주십시오."
"그대의 염원은 참으로 절실하도다. 이생이라는 고통의 바다에서 헤어날 수 있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도다.
그 중에서 아녀자들이 가장 쉬이 다다를 수 있는 길은 이곳에 와서 설법을 듣고 설법을 들은 만큼 보시를 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보시의 공덕이 쌓여 네 안에 있는 괴로움과 고통의 근원을 없애주고 이생에서 좋은 날을 보게 될 것이니라."
"자비로우신 데바 존자여, 보시는 어디에 얼만큼 해야 좋겠습니까?"
"보시는 곧 천상에 쌓는 공덕이니 이곳에 쌓아도 좋고 이웃에 쌓아도 좋도다.
그러나 보시를 할 때는 아깝다는 생각을 버리고 아낌없이 내놓아야 그 마음이 천상에 올라갈 것이니라.
아깝다는 마음이 들 때, 차라리 그 보시를 중지하는 것이 옳다."
데바의 말에는 드높은 가르침을 베푸는 붓다의 가르침과는 달리 대중들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바가 있었다.
대중들은 마치 데바를 그들의 구원자나 치료사처럼 여겼다.
문제가 있거나 답답한 일이 있으면 데바에게 달려오곤 하였다.
그러자 녹야원에는 두 개의 교단이 생겨난 것 같았다.
하나는 붓다를 찾는 비구들과 비구니들의 무리요,
다른 하나는 데바와 육군비구들을 찾는 일부 비구와 많은 대중들이었다.
수보리와 목련은 데바가 대중들을 모아 놓고 설법을 펼 때조차도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가 펴는 법이 부처님의 법과 다를진대 눈밝고 귀 밝은 대중들이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부처님의 법당으로 모여들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수보리와 목련의 생각은 빗나가고 있었다.
니구루수 아래서 여는 데바의 잦은 법회는 갈수록 성황을 이루었고,
법당 안에서 여는 붓다의 집회에는 일부 비구들과 신심 깊은 대중들이 몇몇 모일 따름이었다.
날이 갈수록 붓다의 집회에 참석하는 이들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데도 불구하고 붓다는 변함이 없었다.
그저 붓다의 밑에 있는 비구들만이 눈먼 대중들의 휩쓸림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평소 같으면 빼곡이 들어찬 대중들로 바늘 하나 꽂을 틈도 없었을 대법당이 휭하니 비어 있는 가운데 붓다의 설법이 끝나가고 있었다.
"법(法)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은 계행을 실천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계행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수행의 첫 단계이다.
계행을 실천하는 이유는 자신의 본성을 꿰뚫을 수 있는 깊은 통찰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선 마음이 고요해야 한다.
마음이 혼란스러우면 물의 깊이를 들여다볼 수 없다.
잘못된 행동을 할 때마다 마음은 초조함으로 넘치게 된다.
몸으로나 정신으로 모든 악을 멀리할 때 마음은 충분히 평화로와 지고 그때서야 비로소 자기를 똑바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붓다의 낭랑한 목소리가 법당 안에 메아리 졌다.
메아리가 채 가라앉기 전에 비구 하나가 일어섰다.
"자비로우신 세존이시여, 한 가지 여쭙겠나이다.
세존께서는 계는 올바른 수행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바깥에 샘터에서 대중들을 모아놓고 설법하는 데바 비구는 계를 지키지 않고도 깨달음은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같은 일은 어찌 생각해야 옳겠습니까?"
"계를 실천하는 것은 깨달음의 길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계행의 실천 없이 깨달음의 진전을 기대할 수는 없다.
계를 지키지 않고도 여러 가지 황홀경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일시적인 쾌감은 줄지언정 결코 영속적인 것이 될 수는 없다.
계행의 실천 없이 마음은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진리를 경험할 수도 없다."
이번에는 수보리가 일어나서 물었다.
"거룩하신 세존이시여, 비구들 중의 몇몇 무리들은 세존께서 지키라고 정해주신 여러 계를 제멋대로 해석하여 대중들에게 설함으로써 세존의 뜻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한 마리의 벌레가 순식간에 불어나서 니구루수 잎을 갉아먹듯이,
잘못된 법이 순식간에 비구들과 대중들 사이에 퍼지고 있습니다.
저희 비구들은 그저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을 따름입니다."
붓다가 얼굴 전체에 엷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수보리야, 바르지 않은 것은 결국 바르지 않음으로 돌아가게 되나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삶이 하도 고단하여 대중들은 당장 듣기 좋은 말에 마음을 빼앗기기는 할 터이지만,
그것이 진정 삶의 고단함을 덜어주지 못하는 바에야 그들은 분명 다른 샘터를 찾아 떠날 것이다.
지금은 비록 대중들의 눈이 가리워 있을지라도 그들은 분명 스스로 마르지 않는 샘물을 찾아 오게 될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그토록 승단의 계율을 어지럽히는 데바 비구를 어찌하여 내치지 않으십니까?"
"그의 마음은 지금 어리석음과 미망에 쌓여 있도다.
지금 데바 비구를 벌하는 것은 옳지 않도다.
그가 자신의 미망을 스스로 깨닫는 날이 바로 그때이니라.
데바 비구야말로 심지가 약한 비구들이나 흔들리기 쉬운 중생들에게 더 없이 좋은 가르침이 되느니라.
그의 존재는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니 그를 나무라지 말라.
악이 있어야 선이 드러나고, 그로 하여 불법이 빛나리라."
멀리 샘터에서 대중들의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의 얼굴은 맑은 하늘처럼 구름 한 점 없었다.
그리하여 붓다를 따르는 비구들은 전보다 더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수행에 몰두하였다.
계율을 세우는 일은 주로 우바리가 맡았다.
가비라성 왕자들의 이발사로 수드라 신분이었던 우바리는 출가 후 누구 못지 않게 열심히 수행한 끝에 붓다의 제자 가운데에서도 상석을 차지했다.
특히 우바리는 교단의 계율을 잘 지키고, 계율을 해석하는 데 있어 독보적인 존재였다.
비구들 사이에 계율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누구든지 우바리를 찾아와 해석을 구하고 시비를 가렸다.
새로 만들어지는 계율이 대부분 데바와 그 무리들의 비뚤어진 행동 때문이라,
데바와 그를 따르는 육군 비구들은 우바리를 원수처럼 생각했다.
"넌 내 머리를 깎던 하찮은 수드라였다.
그런 네가 나를 제도하고 계율로써 다스리려 하다니!"
데바는 우바리를 왕궁에서와 똑같이 대했다.
우바리는 그 동안 몇번이고 불법을 설명하며 그의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우바리는 악다구니를 쓰는 데바를 그냥 못 본 척 지나갔다.
불법에 대해 논쟁을 하거나, 좋은 말로 설득하기에는 데바는 도(道)와 너무 먼곳에 있었다.
우바리는 단지 데바나 그 무리들이 붓다가 세운 계율을 얼마나 잘 지키고 있는지 걱정할 뿐이었다.
데바와 육군 비구들은 우바리와 계율을 싸잡아 비난했다.
"저 수드라 출신 우바리가 도에 대해 뭘 알기나 하겠소?
그저 앵무새처럼 세존이 세워놓은 계율만 달달 외울 뿐이지.
사람들은 그런 그를 무슨 대단한 존재처럼 떠받들고 있지만,
실상 그는 계율이라는 잣대 하나만으로 이 세상 모든 현상을 재려는 어리석은 자라오.
계율이 있고 나서 깨달음이 있었던 게 아니라,
세존이 깨달으신 뒤에 계율이 생긴 것이오.
세존도, 수행 시절에 이같이 숨막힐 것 같은 계율을 지켰더라면 깨닫지 못했을 것이오."
데바는 수보리 앞에서 우바리를 그렇게 말했다.
"데바 비구, 계율이라는 것이 무엇이오?
거룩하신 세존께서 우리 비구들이나 재가신도들을 위해 정해놓은 법률 아니겠소?
무릇 속세의 대중들도 국법이니 도덕률이니 하여 미풍양속을 위하여 법을 지키거늘,
도를 닦는 우리 비구들이 어찌 계율을 무시할 수 있겠소이까?
계율을 왜 만들었겠소.
깨달음을 구하는 비구들이 올바르지 않은 길로 비켜나가지 않도록,
삿된 생각이 들지 않도록 자비로우신 세존께서 세워놓으신 이정표 아니겠소?
그러니 계율이란 우리 비구들의 스승이라오.
계율을 잘 지키는 일이 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지름길이오.
계율이 곧 길입니다.
그러니 나나 그대나 출가할 때 이백오십 비구계를 지키겠노라고 맹서한 것 아니겠소?"
수보리의 말에 데바는 입을 다물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양미간을 모으던 데바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든지 수보리에게 지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수보리 비구가 아마도 나와 우바리를 빗대어 말한 것 같은데, 만약 그렇다면 우바리에 대해 잘못 안 것이오.
우바리는 과거 자신을 무시하던 이들에 대해 원망을 가지고 있소.
알다시피 그는 수드라 아니었소? 우바리는 그 원망을 계율로써 갚을 작정이라오.
특히 지난 시절 가비라성의 왕자들에게는 정도가 더 심하다오.
세존이나 몇몇 비구들은 그런 우바리를 계율을 잘 지키는 이라며 칭찬이 대단하지만
그 속셈은 사실 딴 데 있다오."
데바의 말에 수보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우바리를 몰아부치다니...
"그동안 데바 비구는 우바리 비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 모양이오.
그러나 생각이 지나치면 진실을 간과하기 쉬운 법. 내 보기엔 데바 비구의 생각이 도에 넘친 것 같소이다.
계율을 잘 지키는 우바리 비구를 비난할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소.
그는 칭찬받아 마땅한 행동을 했을 뿐이오.
데바 비구, 이제 솔직해 봅시다.
사실 지금까지 새로 정해진 계율은 누구 때문이오?
모두 그대와 그대를 따르는 비구들의 언행 덕분이 아니겠소?
계율은 마땅히 지켜야 할 일이지만 그 수가 많을 필요는 없소.
그러니 청컨대 더 이상 계율을 늘리는 일은 없도록 해주시오."
수보리의 말에 얼굴색이 변한 데바는 눈을 치뜨더니 방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데바가 앉았던 빈 자리를 바라보는 수보리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월의 햇빛이 따사로운 오후였다.
녹야원의 초목들도 햇볕 속에서 쉬고 있는 조용한 시간이었다.
그때 저만치서 녹야원 입구로 걸어 들어오는 한 걸인이 있었다.
어디가 다쳤는지 절뚝거리며 힘겹게 걸어오는 그를 보며 수보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막 명상에 들었지만 우선 아픈 사람을 구하고 봐야 할 것이었다.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던 수보리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아난이었다.
가사가 찢어지고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나타난 아난을 부축하며 수보리가 물었다.
"이럴 수가...이럴 수가..."
수보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죽림정사에서 녹야원까지는 멀고 먼 거리였다.
갠지스강을 건너 대평원을 십여 일 동안 걸어야 했다.
아난은 몹시 지쳤는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절을 버리고 이렇게 엉망이 되어 나타난 것만으로도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수보리는 일단 아난이 기운을 차린 다음 붓다를 만나도록 할 생각이었다.
그런 상태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틀을 쉬고 난 아난이 조금 기운을 차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수보리가 미음 그릇을 비운 아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사세왕이 드디어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죽림정사를 감시하고 있던 군사들을 보셨지요?
지난 달 그믐날 수백의 군사들이 몰려오더니 죽림정사를 포위하고 잠자던 비구들을 내쫓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소몰이를 하듯 우리들을 내몰았지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아난의 말에 수보리가 눈을 감았다.
상상만으로도 그 상황에 비구들이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을지 짐작이 갔다.
"몸을 다친 비구들은 없고요?"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다른 비구들은 대부분 갠지스강을 건너 비사리국의 대림정사에 머물거나 혹은 교살라국 기원정사로 떠났습니다. 전 아무래도 세존께서 이 사태를 아셔야 할 것 같아 이곳으로 왔지요."
아난이 마른 입술을 축이며 말을 이었다.
"아사세는 인륜을 저버리더니, 드디어는 천륜마저 잊었습니다.
도를 닦는 비구를 무력으로 내치다니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귀들이나 하는 짓이지... 수보리 비구, 어서 나를 세존께 인도해 주십시오."
아난은 그답지 않게 몹시 흥분했다.
수보리는 아난과 함께 붓다에게 나아갔다.
붓다도 이 소식을 어렴풋이 들은 듯 아난을 보는 표정이 어두웠다.
아난은 붓다에게 죽림정사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고하였다.
"세존이시여,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사옵니까?
죽림정사는 선왕인 빈바사라왕이 세존의 성도 후 처음으로 지어 바친 소중한 절이옵니다.
그런 절을 어떻게 아들인 아사세가 무자비하게 빼앗을 수 있다는 말이옵니까?"
아난의 말에 붓다는 한숨을 쉬었다.
"아난아, 네 말이 옳다. 아사세는 진정한 보시에 대해 알지 못하여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로다.
진정한 보시도 자신이 주었다는 사실조차 잊어야 하는 것이어늘,
아사세는 자신이 보시한 것도 아닌 것을 빼앗았으니 그 업이 후세에 얼마나 이어질지 두렵기 그지없구나."
붓다는 상처투성이가 된 아난의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아난아, 망가진 너의 얼굴을 보니 내 마음이 아프구나.
하지만 불법을 위하여 고통을 받았으니 그 복덕은 클 것이로다.
내, 너희들에게 지난 세의 나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니 잘 들어두거라.
붓다가 전생에 인욕선인(忍慾仙人)이 되어 산중에서 제자 오백 명과 함께 수행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가리왕이라는 악생무도(惡生無道)한 자가 신하들과 수많은 궁녀들을 이끌고 그 산으로 사냥을 왔었다.
가리왕이 사냥을 하다 고단하여 잠시 눈을 붙이던 사이 궁녀들은 꽃을 찾아 산 속을 이리저리 다녔다.
그때 궁녀들은 나무 밑에서 도를 닦고 있는 인욕선인을 발견하고 기이한 마음이 생겨 그리로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선인에게 꽃을 바치고 도를 설법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선인은 여인들을 위하여 기꺼이 설법하였다.
한편 잠에서 깬 가리왕은 곁에 있던 궁녀들이 보이지 않자 화를 벌컥 내며 신하들을 시켜 그 여인들을 찾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도 또한 궁녀들을 찾아 다녔다.
오랫동안 산 속을 헤매던 가리왕은 마침내 나무 밑에서 선인의 설법을 듣고는 감격하여 절을 하는 궁녀들을 발견하였다.
그 모습을 본 가리왕은 너무도 화가 났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다른 사람에게 절을 하고 찬탄을 하느냐?"
"대왕이시여, 이 분은 인욕선인으로 저희에게 놀라운 법문을 설 해주셨나이다.
저희는 법열에 몸이 하늘을 날 것 같사와 이렇게 감사의 예를 올리고 있사옵니다."
궁녀들이 환희에 찬 얼굴을 하며 가리왕에게 말했다.
이 말을 들은 가리왕은 몹시 불쾌했다.
"너희들의 죄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고도 크도다.
어서 이 산 속을 떠나 왕궁으로 물러가거라."
그러나 가리왕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궁녀들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왕이 인욕선인을 가리키며 소리질렀다.
"너는 어찌하여 나의 궁녀들을 탐내고 희롱하려 드느냐?"
"나는 저 여인들을 탐낸 적이 없소이다."
선인이 은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말에 가리왕은 더욱 흥분했다.
"그러면 무슨 연유로 호젓한 산 속에서 홀로 앉아 있는 것이냐?"
"나는 이곳에서 인욕 수행을 하고 있을 뿐이오."
선인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거짓을 고하고 있으렷다! 거짓을 고한 네 죄가 한량없구나.
네가 진실을 말할 때까지 내 너를 단죄하리라."
가리왕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더니 순식간에 선인의 팔을 잘랐다.
팔에서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선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래도 사실을 말하지 않겠느냐?" 가리왕이 소리를 질렀다.
"난 그대에게 거짓을 말한 적이 없소이다." 선인이 아무렇지도 않다는듯이 대답했다.
"팔이 잘려나갔는데도 아프지 않느냐?"
"조금도 아프지 않소이다." 이 말에 가리왕은 더욱 약이 올랐다.
가리왕은 보란 듯이 나머지 팔을 잘랐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선인은 그대로 가부좌를 튼 채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도 화가 난 가리왕은 이번에는 선인의 두 다리를 쳤다.
"이래도 아프지 않느냐?"
"아프지 않소이다."
"성이 나거나 원통하지도 않다는 말이냐?"
"내 이미 있지를 않거늘 누가 성을 내며 무엇이 원통하겠소?"
선인이 또렷하게 대답했다.
가리왕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됐다.
그는 더 이상 분을 못 참겠다는 듯 칼을 하늘 높이 올리더니 선인의 목을 잘랐다.
그러자 목에서 핏덩어리가 쏟아졌다.
가리왕은 그것도 부족한지 선인의 뼈 마디마디를 토막 내고 살점 하나 하나를 벗겨내었다.
이때 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돌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바윗덩이 만한 돌비가 가리왕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나무 밑으로 이리저리 돌비를 피하던 가리왕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바윗덩이에 맞아 크게 몸을 다치고 말았다.
가리왕이 몸을 다치자 사지가 찢겨나가고 뼈마디가 잘려나갔던 선인의 몸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너는 여자 때문에 내 몸을 이토록 토막 내었도다.
내가 내세에 불도를 성취하면 지혜의 날카로운 칼날로 너의 극악한 그 마음를 끊어버리겠노라."
선인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가리왕에게 조용히 말했다.
"아난아, 이것이 바로 인욕이니라.
인욕 바라밀을 행하라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이다.
네가 아사세에게 받은 고통에 대해 원한과 원망을 갖지 않는 것이 인욕행을 행하는 것이니라."
붓다의 말에 아난은 고개숙여 그 뜻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데바 형님이 보이질 않는군요."
붓다의 방을 나오며 아난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글쎄요, 저도 한 달째 데바 비구와 육군 비구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붓다가 설법을 할 때 즈음이면 어김없이 녹야원 샘터에서 많은 비구와 중생들을 모아놓고 경쟁적으로 설법을 하던 데바는 벌써 한 달째 그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그가 사라짐과 동시에 그를 따르던 수많은 비구와 중생들도 같이 사라졌음은 물론이었다.
데바와 육군 비구가 어느날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진 것이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디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을지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수보리의 대답에 아난이 근심 어린 얼굴이 되었다.
"혹시 이번 일에 데바 형님이 관여된 것은 아닌지 걱정됩니다.
형님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실지...
수보리 비구, 전 잠시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답니다.
출가를 하고 나면 세속의 번민이 다 사라지리라고 믿었었는데..."
아난이 슬픈 얼굴로 수보리를 쳐다보았다.
수보리는 그 심정을 헤아리고도 남았다.
그는 아난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여 주었다.
나이는 수보리 보다 한참이나 아래지만 깨달음의 깊이나 불법을 따르는 그의 수행 자세는 나이 많은 으뜸 제자 못지 않았다.
게다가 인정이 많고 누구에게든 친절하여 동료 비구들은 물론 신도들에게도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런 아난에게 형 데바의 존재란 너무도 힘겨운 시련이었다.
아난을 이해하는 수보리는 그런 모습이 항상 안타까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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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곧 부처님 오신날이 다가오고, 요즘 절간마다 호화롭게 색칠한 등들이 많이 보이는 시기 입니다.
해서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얘기 수보리 존자를 만나 空에 대한 깊은 얘기들을 다시한번 기억하고자
혼자 읽기에는 너무 아까워 올리게되었음을 그리고 많은 분들이 읽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南無 大慈大悲 求苦難 觀世音菩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