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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깨달은 자는 말하지 않는다
혹서가 한창일 때 찾아온 녹야원에서 수보리는 어느덧 여름안거까지 마치게 되었다.
연화색을 귀의시키고 돌아갈 예정이었다가 뜻밖에 목련을 만났고,
목련이 연화색과 남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게다가 아난이 아사세왕에 의해 죽림정사에서 쫓겨나는 사태를 지켜보기도 하였다.
수보리는 일련의 이러한 사건들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특히 최초의 제자이기도 한 반을 깨우치지 못한 것은 수보리를 더욱 혼란에 빠뜨렸다.
반특의 어리석음은 수보리의 인내심을 바닥내었다.
수보리는 하찮은 법문 하나 외지 못하고 이해 못하는 그를,
불쌍하지만 이생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포기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한가닥 깨달음을 이루었다.
이 일은 수보리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동안 법문 한 구절 한 구절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하여 얼마나 애를 썼던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안절부절 못하던 자신이었다.
수보리는 반특의 깨달음을 보면서 자신이 붙잡으려 했던 것이 참으로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생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가슴만 답답해져 왔다.
수보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네가 그렇게 목말라 하는 것은 사상(四相)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로다."
문득 이런 말이 머릿속에 울려퍼졌다.
생각해보니 출가 전 수보리가 기원정사에서 붓다를 처음 만났을 때 들은 말이었다.
"일체의 중생들은 '나'라는 상(相) 때문에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붓다가 되지 못한다.
붓다가 되기 위해서는 '나'라는 상을 떼어 버려야 한다.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이 네 가지 그릇된 견해에 빠지면 중생, 네 가지 그릇된 견해를 없애면 붓다이다.
잘못에 빠지면 붓다가 바로 중생이요,
벗어나면 중생이 바로 붓다이니라.
아상이란 '나'라는 고집이다.
자신이 이 세상에 제일이라는 우월감이니라.
인상이란 자신과 남을 비교하는 데서 나오는 상이니라.
중생상이란 괴로운 것을 싫어하고 즐거운 것을 탐내는 생각이니라.
수자상은 어느 하나에 애착을 느끼고 그것들이 언제까지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상에서 벗어나야만 깨달음의 언덕에 다다를수 있을 것이니라."
붓다가 바로 옆에서 말하는 듯 이 말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수보리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굵은 눈물 줄기가 뺨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렇구나, 그동안 그 말씀을 잊었구나.
내게 내리신 최초의 설법이거늘 어찌하여 나는 그것을 잊었단 말인가.
이제껏 하릴없이 허상을 찾아 그토록 헤매었구나.
어리석고, 어리석다.' 수보리는 자신의 아둔함을 통탄했다.
'자비로우신 세존께서는 처음부터 내게 가장 적절한 법문을 내리셨거늘
난 그것을 잊고 엉뚱한 것만 찾아다녔으니,
어리석은 것은 반특이 아니라 나 수보리로구나.'
그날 밤을 자신에 대한 질책으로 꼬박 새운 수보리는 아침 일찍 목련을찾아가 작별 인사를 고하였다.
목련은 지난 밤 수보리에게 일어났던 마음의 변화를 듣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존께서 자네에게 가장 귀한 설법을 하셨구만.
그렇다네. 사상을 버린다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던가."
"그동안 저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버린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고요.
목련 존자님, 세존께서 제게 주신 말씀을 깡그리 잊고 엉뚱한 데서 진리를 찾으려 했던 저였습니다.
이렇게 어리석은 자가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수보리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수보리, 너무 자책하지 말게나. 나 또한 사상을 여의지 못했다네.
사상을 여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지.
으뜸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공(空)을 해탈한 이는 아직 없다네.
세존께서 자네에게 특별히 사상을 버리라는 설법을 하신 데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같네."
목련이 수보리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격려하였다.
순간 수보리의 머리에 문득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목련 존자께서 반특을 저에게 맡기신 것이 처음부터 이런 결과를 예견하셨기 때문은 아니신지요?"
수보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목련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가 않아. 자네가 스스로 깨달은 바라네.
아니 세존께서 자네를 깨달음으로 인도해 주신 거겠지.
자네는 나와는 또 다른 깨달음을 얻을 것일세."
수보리는 다정하게 자신의 어깨를 토닥거리는 목련에게서 오래고 따스한 정을 느꼈다.
수보리는 천천히 일어나서 목련에게 작별의 절을 올렸다.
"그래, 떠나게나.
나도 자네를 따라 곧바로 떠나고 싶지만 이곳에서 마무리지을 일이 남아 있어 잠시 더 머물러야겠네."
"무슨 일이신지?"
여름안거의 마지막 날인 7월 15일 우란분절에 목련은 붓다의 가르침대로 부처님들과 대덕스님들께 지극한 공양을 올려 지옥계에서 고통 당하던 어머니를 구한 바 있었다. 마침내 목련의 원이 풀어졌던 것이었다.
이 날 다른 비구들도 목련을 따라 공양을 올려 선대의 부모와 현세 부모의 복락을 기원하였다.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수보리는 목련에게 해결해야 할 일이 또 남아있다는 것이 궁금했다.
"자네도 아다시피 세존께서도 이제 많이 늙으셨다네."
목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즈음 붓다는 간혹 병마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그동안에는 가까이 있던 비구들이 번갈아 세존의 시중을 들어주곤 하였지.
그러나 이제 세존의 건강이 예전과 같지 않아 시자(侍者)를 선정해 세존 곁에서 항상 모시도록 해야 할 것같네."
"옳으신 말씀입니다." 수보리가 목련의 말에 긍정을 표시했다.
"그럼 어느 분을 시자로 선정하실 생각이온지요?"
"글쎄, 나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지 않는가.
내일 대법당에서 세존을 모시고 모든 비구들과 함께 그 문제를 결정할 예정이라네.
그런 다음에야 이번 녹야원의 여름안거가 끝날 것이네."
붓다의 시자가 된다는 것은 무척이나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수보리는 누가 붓다를 그림자처럼 모실 수 있는 자리에 오를지 궁금하였다.
수보리는 이 일로 인해 떠날 날짜를 하루 뒤로 밀었다.
이튿날 대법당에서는 그 해 여름안거의 해제와 함께 붓다의 시자를 선정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제일 앞줄에 앉아 있던 아야교진여가 자리에서 일어나 붓다 앞으로 나아갔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 출가하시기 전부터 모셨던 신하였고,
출가 후 성도를 이루시기 전까지 함께 고행을 했던 벗이기도 하옵니다.
또한 세존께서 성불하셔서 이곳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설법하셨을 때 최초로 제자가 되었던 다섯 비구 중 한 사람이기도 하옵니다.
수많은 제자들이 이 자리에 있지만 저만큼 세존과 오랜 세월을 함께 해 온 이는 없을 줄 아옵니다.
이런 연유로 저는 시자가 되어 더욱 가까이 세존을 모시고 싶사옵니다.
부디 허락하여 주소서."
붓다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아야교진여의 뒷모습이 무척 갸날펐다.
그는 붓다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그런 그가 시자가 되겠다고 나서자 한편에서는 붓다에 대한 그의 끝없는 공경심에 탄복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의 나이를 감안해 현실적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붓다 역시 다른 비구들과 같은 생각이었다.
"그대의 뜻이 너무도 갸륵하도다.
하지만 아야교진여여,
그대의 마음이 고맙기는 하지만 나이 많은 장로가 나의 시자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도다.
시자란 항상 내 곁에서 크고 작은 시중을 들어야 하는데 어찌 힘이 들지 않으리?
그러니 그대는 나의 오랜 벗으로 남아 있는 것이 좋을 듯하다."
아야교진여가 붓다의 말에 감읍하여 제자리로 물러갔다.
이때 목련이 앞으로 나섰다.
"세존이시여, 제가 적당한 인물을 한 사람 추천하겠사옵니다.
저기 앉아 있는 아난이 바로 그입니다.
아난은 이미 세존의 곁에서 온갖 궂은 일도 마다않고 심부름을 해왔사옵니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아난은 총명하고 인격이 높아 비구들이나 신도들에게도 신망을 얻고 있사옵니다.
또한 아난은 젊고 건강해 세존을 나쁜 무리들로부터 보호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런 모든 이유로 저는 아난을 시자로 선정하기를 청하옵니다."
모두들 목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난은 그동안 실제로 붓다의 시자 노릇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 그가 그제야 시자가 된다는 것이 오히려 때늦은 감이 있었다.
시자로 추천받은 아난은 자신에게 너무 과분한 일을 맡기려 한다며 완곡하게 사양했다.
그런 큰 소임을 맡기에 아난이 너무 젊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많은 장로들이 그런 아난을 설득하였고,
결국 아난은 붓다의 시자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이런 결과에 대부분의 비구들이 기뻐했다.
붓다를 아난이 곁에서 항상 보살피게 되었으니 마음이 홀가분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목련과 수보리 또한 편안한 마음으로 녹야원을 떠날 수 있었다.
"어디로 가시는지요?" 녹야원 입구까지 나란히 걸어나온 수보리가 물었다.
"정해진 곳은 없지만 다시 남쪽 지방으로 가려 하네. 수로나국은 아직 못갔거든."
"수로나국이라면 짐승들을 사냥하여 육식하는 거친 종족들이 사는 나라 아닙니까?"
"그렇지. 그렇게 살생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니 더더욱 불법을 펴야한다네."
"존자님, 스승님! 제발 그 나라만은 가지 마십시오."
"수보리여, 인연이란 닿는대로 짓는 것일세.
어찌 수행자가 인연마저 골라짓는단 말인가."
수보리는 몇 번 더 목련의 결심을 꺾으려 노력했지만 헛수고였다.
마침내 수보리는 붓다를 찾아가, 붓다가 직접 목련의 남방 포교를 막아달라고 부탁했다.
"세존이시여, 목련 존자가 수로나국에 간다면 결국 머지 않아 죽고 말 것입니다.
수로나국 사람들은 그들이 늘상 찌르고 쏘아 죽이는 한낱 짐승처럼 인명을 하찮게 여긴다 합니다."
그러자 붓다도 곧 목련을 불러들였다.
"목련이여, 그 나라 사람들이 험한 말로 그대를 욕하면 어떻게 하는가?"
"몽둥이나 돌로 치지 않은 것을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몽둥이나 돌로 치면 어떻게 하겠는가?"
"칼이나 창으로 찌르지 않을 것을 감사하겠습니다."
"칼이나 창으로 찌르면 어떻게 하겠는가?"
"목련이여, 만일 그들이 칼이나 창으로 찌르면, 정녕 그때에는 어떻게 하겠는가?"
"세존이시여, 저를 서둘러 열반시키니 고맙다고 생각하겠습니다.
다만 선업 아닌 악업을 짓게 하여 도리어 미안하다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러자 붓다는 잠시 눈을 감고 짧은 선정에 들었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결자해지(結者解之)하라." 목련이 대답했다.
"역시 포교를 하실 생각이시군요." 목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이 없이 그렇게 각자의 길로 향했다.
목련과 헤어진 수보리는 마갈타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갈타국에 들어선 수보리는 거기서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녹야원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데바가 마갈타국 죽림정사에 있었던 것이다.
아사세는 비록 죽림정사에서 비구들을 내쫓기는 했지만 마갈타국 전역에 널리 퍼진 불교를 단숨에 내칠 수는 없었다.
아사세가 죽림정사에 있는 비구들을 내쫓는 대신 민심을 무마할 그럴 듯한 종교적인 인물을 찾고 있던 중에 마침 녹야원에서 대중들을 끌어모으고 있는 데바의 소문을 듣게 되었다.
아사세는 데바의 얘기를 듣는 순간 무릎을 쳤다.
"그야말로 내가 찾던 인물이다!
그는 정식으로 석가모니 부처의 승단에 출가한 비구이면서 그의 사촌 형제가 아니더냐.
그러면서도 부처와 반대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니 그 아니 안성맞춤이더냐."
붓다에 버금가는 교단을 세우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던 데바에게도 아사세 왕의 불교 탄압이나 죽림정사의 공백은 절호의 기회일 수 밖에 없었다.
데바는 아사세의 제의를 받자마자 육군 비구들을 데리고 녹야원을 떠났다.
데바는 아사세를 도와 죽림정사를 장악하고 새로운 법을 펴기 시작했다.
그는 아사세왕을 위해 복을 빌어주고 신도들의 복을 빌어 주었다.
데바는 위정자와 대중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마갈타국의 중심부는 비록 아사세와 데바의 손 아래 있었지만 선왕 대부터 불교의 중심지였던 왕사성은 여전히 불교가 성한 곳이었다.
항하를 건너자 저멀리 영추산이 눈에 들어왔다.
수보리는 그 산에서 수행을 할 생각이었다.
영추산 초입에 들어서자 산꼭대기까지 놓인 하얀 돌계단이 보였다.
빈바사라왕이 붓다를 위해 만든 계단이었다.
붓다가 영추산에서 자주 설법을 했기 때문이었다.
돌계단을 바라보는 수보리의 마음이 다시 착잡해졌다.
비극적인 종말을 맞은 빈바사라왕과 원한에 사무쳐 날뛰는 아사세왕이 머리에 떠올라서였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 뜻밖에도 꽤 널찍한 공간이 있었다.
키가 큰 나무 아래 상석이 있는 걸 보니 그 자리에 앉아 붓다가 대중들을 위해 설법을 한 모양이었다.
수보리는 상석이 있는 나무를 지나 작은 굴 속으로 들어갔다.
굴 안은 아주 협소했지만 수보리가 머물렀던 그 어떤 곳보다 안락했다.
수보리는 어깨에 짊어졌던 바랑을 풀어 한쪽에 치워버렸다.
당분간 바랑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런 다음 수보리는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마음에 고요가 밀려들었다.
평정한 마음으로 수보리는 '네 가지 허상을버리라'는 붓다의 가르침으로 깊이 들어갔다.
무릇 모든 상(相)이 다 허망한 것이니라. 만약 모든 상이 상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는 것이니라.
드높은 깨달음도 일정한 법이 없는 것이며 여래의 가르침도 또한 일정한 법이 없는 것으로서 본래가 모두 공이요,
붓다와 중생이 하나이니 얻을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느니라.
수보리가 영추산에서 공(空) 삼매에 든지 수 년이 지났다.
수보리는 마침내 자기 자신을 잊었다.
자신이 생각한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도 잊었다.
그를 둘러싼 일체가 공(空)일 뿐이었다.
그의 몸은 오랜 선정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않던 그의 몸에서 세포가 하나하나씩 살아나고 있었다.
숨구멍이 터지면서 양 미간이 열리는 듯하였다.
그러나 수보리의 깨달음의 자리에는 오도송(悟道頌)도 없었다.
깨달은 자에겐 깨달았다는 말조차도 필요치 않았다.
수보리는 비록 공해탈을 이루었지만 영추산을 내려오지 않았다.
이따금 영추산 어귀에 있는 마을로 탁발을 하러 내려가기는 했지만 붓다를 만나러 가거나 사원을 찾는 일은 하지 않았다.
솜에 물이 잦아들 듯 수보리가 공해탈을 이루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공해탈이 무엇인지 궁금한 사람들이 영추산으로 수보리를 만나러 올라오곤 하였다.
한번은 학식이 높은 브라만 한 사람이 영추산을 찾아왔다.
불교에 대한 브라만의 관심과 견제는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수보리, 부처의 제자인 당신이 공(空) 사상을 깨우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당신은 이 세상 모든 것이 공하다고 한다는데 그것이 과연 무슨 뜻이오?
세상의 모든 사물은 분명 존재하고 있소. 여기 내가 있고 수보리 당신도 있지 않소?"
브라만은 진지한 자세로 수보리에게 공 사상에 대해 물었다.
"장자께서는 저기 산 아래 집 한 채가 있는 것이 보이시지요?"
수보리가 산 마루턱에 있는 오두막 한 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보입니다." "저 집을 무엇으로 지었을까요?"
브라만은 수보리의 말이 너무 엉뚱하다 싶었지만 달리 묻지 않고 질문에 대답하였다.
"나무와 돌과 흙으로 지었구료. 지붕은 짚으로 엮었구만."
브라만이 오두막을 눈여겨 보며 이렇게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러면 나무와 돌과 흙과 짚을 따로따로 떼어놓으면 집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들을 모두 흩어놓으면 집이 없어지게 되지요."
브라만의 대답에 수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것이 공의 이치입니다.
나무와 돌과 흙은 한데 모아 쌓으면 집이 되지만 따로 흩어놓으면 집이란 존재치 않습니다.
우리 눈에는 집이 있는 것같지만 실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가 모두 이와 같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지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온이란 물질(色)과 의식(識),인식(想), 감각(受), 의지(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본질적으로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고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흐르는 강물에 강이라고 이름을 붙이지만, 그것은 영원히 그 자리에 있는 물이 아닙니다.
그 자리를 끊임없이 다른 물이 채우고 있을 따름이지요.
이와 같이 인간도 고정되고 변함없는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육체, 의식, 감각, 인식, 의지 작용은 지금 이 순간에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 오온이란 인연에 따라 생겨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데,
이 인연을 초월한 것이 바로 공입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空思想에 대해 얘기하고 있지만 나의 말 또한 공(空)합니다.
나의 말은 공의 겉모습만을 얘기할 뿐입니다.
진정 空을 알고 싶으면 스스로 空 三昧에 들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수보리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브라만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감복하였다.
"수보리 존자여, 존자는 참으로 공의 이치를 깨달으신 분이옵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비같은 말씀입니다.
저도 空思想을 깨닫기 위해 수행을 하겠습니다."
브라만은 다시 한번 수보리에게 예를 표한 다음 산을 내려갔다.
수보리는 영추산에서 홀로 수행을 하며 붓다의 법을 실천했다.
그러나 산 아래 사람들은 그런 수보리를 비웃어대기도 했다.
산에서 홀로 수행을 하거나 이따금 하산하여 설법하는 것 외에는 세상 일에 도무지관심을 보이지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수보리가 붓다에게서 버림받은 비구라 아무런 직책도 맡지 못한다고 수군거렸다.
사실 수보리보다 못한 비구들도 이미 절 하나를 맡아 관리하거나,
제자를 거느린 높은 스승이 되었다.
하지만 수보리는 따르는 시자 하나없이 온갖 궂은 일을 손수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낡은 누더기 가사를 꿰매고 있는데 신도 한 사람이 찾아왔다.
이마에 주름살이 가득한 노인이었다.
그는 들고 있던 보따리를 풀어 수보리 앞에 내놓았다.
새 옷감과 먹음직스러운 과일이 수보리의 눈에 들어왔다.
"스님, 이것을 스님께 공양하오니 거두어주십시오." 노인이 말했다.
"고맙습니다. 이것을 들고 예까지 오시느라 연로하신 분께서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수보리는 노인에게 葉茶를 내놓았다.
葉茶 또한 신도들이 보시한 것이었다.
"스님, 도가 높으신 분께서 어찌 이런 것을 손수 내오십니까?
그리고 그것은 다 무엇입니까? 누더기 가사를 꿰매고 계시다니..."
노인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사람들이 뭐라 하건 그것은 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입니다."
수보리가 고요한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스님께서 이렇게 홀로 영추산에 계신 것은 모두 세존의 미움을 받아서랍니다.
어떤 사람은 스님께서 너무 어리석어 세존께서 아무 일도 맡기지 않으신다고 말하더군요."
"하하하..." 노인의 말을 들은 수보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스님은 이런 말을 듣고도 화가 나지 않으십니까?"
노인은 화가 나 못 견디겠다는 듯 가슴을 쾅쾅 쳤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무엇이 화가 납니까?"
수보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스님을 깔보고 바보로 여기는데 어찌 그렇게 태연하십니까?"
노인은 그런 수보리가 너무 답답한 모양이었다.
"노인장께서 저를 위해 그렇게 마음을 써주시니 진정 고맙습니다.
하지만 사람들과 그런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논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논쟁이란 시시비비를 가려 판가름을 내자는 것인데 이는 수행자의 도리에 어긋납니다.
옳고 그름을 가려 내가 이기고 네가 졌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수행자란, 아니 불법을 아는 사람들은 그래서는 아니 됩니다.
나와 너라는 대립감을 없애야 합니다.
이러한 대립감이 없어지면 무엇에 얽매이지 않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지요.
그렇게 되면 행동은 절로 선(善)에 다다르고, 마침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게된답니다."
수보리의 말에 노인이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노인이 수보리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였다.
"스님, 어리석은 제가 감히 스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떠들어댔사옵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스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불법에 더욱 정진하겠나이다."
수보리의 말에 감동된 노인이 고개 숙여 감사의 예를 올렸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수보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따금 그를 손가락질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수보리의 마음에 단 한 줄기의 파장도 일으키지 못했다.
수보리의 일과는 새벽에 일어나서 선정 삼매에 드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날도 수보리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선정 삼매에 들었다.
그러나 선정 삼매에 든지 얼마 되지 않아 수보리는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그 기운이 하도 따뜻하고 친밀한 것이라 수보리는 불현듯 눈을 떴다.
희붐하게 밝아오는 새벽 하늘을 뒤로 하고 그곳에 아난이 서 있었다.
그것은 분명 아난이었다.
너무도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얼싸안고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수보리는 마치 친형제를 만난 것같았다.
붓다의 시자로 붓다를 모시고 있던 아난은 붓다의 근황과 교단 사정을 수보리에게 들려주었다.
대림정사에서 수행에 정진하던 연화색이 숙명통을 얻었다는 소식도 전해주었다.
"연화색 비구니가 숙명통을 얻었다니 무엇보다 기쁘군요.
이 소식을 목련 존자께서 들으시면 얼마나 반가워 하실까요."
연화색의 소식은 수보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그녀의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보리 존자의 공 해탈 소식을 듣고 세존께서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릅니다."
아난은 이렇게 말하며 존경스러운 눈으로 수보리를 바라보았다.
"모두 다 세존의 가르침 덕분이지요.
저의 미욱함을 세존께서 진작 아시고 적정한 가르침을 주셨건만 전 그걸 잊고 헛세월을 보냈답니다."
수보리는 아난의 청으로 공 사상에 대한 설법을 해주었다.
수보리의 설법을 들은 아난의 눈가에 물기가 스몄다.
"헌데 세존의 곁에서 수발을 들어야 할 아난 비구께서 어찌 홀로 이곳까지 오시게 되었는지요?"
"세존께서는 지금 도리천(도利天)에 계십니다.
그곳에서 돌아가신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하여 설법을 하고 계시지요.
도리천으로 가신 지가 벌써 한 달이 되었습니다.
석달을 기약하고 가셨으니 다음 다음 달 보름날에 내려오시겠지요."
"석달 동안이나요?"
"그렇습니다. 현세에서 세존의 설법을 듣지 못한 가엾은 중생을 위하여 자비심을 내신 거지요."
아난의 설명에 수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존께서 이렇게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시니 허전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만나뵙지 못한 수보리 존자를 이렇게 찾은 것입니다.
또 공에 대한 설법도 듣고 싶었습니다."
사흘 동안 영추산에 머물던 아난은 수보리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다.
"세존께서 하루라도 빨리 이곳 사바세계로 내려오시기를 비구들 모두 학수고대하고 있지요.
세존께서는 기약하신 날 승가시국으로 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세존께서 오시기로 한 날 불법을 따르는 모든 이들이 마중을 나갈 것입니다.
수보리 존자께서도 그때 세존을 만나뵙도록 하시지요."
수보리는 아난에게 그러겠노라고 대답하였다.
아난은 아쉬운 얼굴로 영추산을 내려갔다.
해가 지고 달이 뜨기를 수십번 거듭하더니 붓다가 도리천을 떠나 사바 세계로 내려오겠다고 한 날이 되었다.
붓다는 항하 유역에 있는 작은 나라인 승가시국에 내려오신다고 하였다.
아난의 말대로 불법을 따르는 모든 비구와 신도들이 붓다를 마중하기 위하여 구름처럼 떼를 지어 승가시국으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이 붓다에게 보시할 향이나 꽃을 한 아름 들고 붓다를 만나기 위해 부지런히 길을 나서고 있었다.
영추산 바위굴에서 낡은 가사를 꿰매고 있던 수보리의 눈에도 그런 광경이 들어왔다.
수보리는 들고 있던 바느질감을 내려놓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 또한 세존을 마중 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아난에게도 약속한 바였다.
'아니야. 세존의 참 모습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신(法身)이 아니던가.
저기 수많은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마중나가는 세존은 육신을 가진 색신(色身)임을 어찌 잊었다는 말인가.
세존의 법신 또한 공한 것이어서 갈 것도 없고, 올 것도 없으며, 지금 나와 함께 계시거늘 굳이 세존의 색신을 맞으러 갈 필요가 있겠는가?'
생각이 거기에 미친 수보리는 내려놓았던 바늘을 들고 다시 가사를 꿰매기 시작하였다.
한편 수많은 비구들과 신도들은 마치 잔칫날처럼 성장을 하고 붓다를 만나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들은 서로 먼저 붓다를 만나려고 아우성이었다.
신통을 증득한 이는 그것을 이용해 하늘을 날기도 하고 구름을 타기도 하며 승가시국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붓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붓다 앞에 제일 먼저 나아가 경배를 한 이는 남자가 아닌 가냘프게 생긴 여자 비구였다.
바로 연화색이었다.
자신이 제일 먼저 붓다 앞에 다다랐음을 안 연화색은 기쁨에 넘쳐 붓다에게 예를 올렸다.
"거룩하신 세존이시여, 이 연화색이 제일 먼저 세존을 만나뵙고 예배를 올리옵니다."
붓다는 잔잔한 미소로써 연화색의 예를 받았다.
"착하구나, 연화색아. 그러나 제일 먼저 나를 마중한 이는 네가 아니로구나."
이 말에 연화색과 다른 비구들은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여전히 연화색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세존이시여, 연화색 비구니보다 먼저 세존을 만나뵌 이는 과연 누구옵니까?"
비구 한 사람이 나서서 물었다.
"너희는 미처 알지 못할 것이로다. 나를 제일 먼저 마중한 이는 수보리이니라."
"세존이시여 수보리 비구는 지금 영추산 바위굴에서 수행 중이옵니다.
이 자리에 와 있지도 아니하옵니다."
붓다의 말에 비구들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렇다. 하지만 수보리는 영추산 바위굴에서 이미 나를 마중하였도다.
그는 모든 법이 공하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그래서 수보리는 내 육신을 마중한다는 것 또한 헛되다는 것을 알았느니라.
그는 나의 육신을 마중하기 전에 이미 나의 참모습인 법신을 마중하였으니 가장 먼저 나를 찾은 이가 아니겠느냐?"
붓다의 설명에 비로소 비구들은 머리 숙여 그 뜻을 받아들였다.
마침내 수보리의 깨달음이 붓다의 인가를 받는 순간이었다.
이 같은 붓다의 인가로 인해 수보리는 더욱 비구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수보리는 붓다의 인가에도 비구들의 존경에도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다.
오로지 드높은 깨달음의 실천을 향해 나아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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