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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 비유를 통한 복음(2)
할렐루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로 복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지난 시간에 탕자 비유를 통한 복음 첫 번째는 원죄, 둘째는 죄성, 셋째는 교만, 네 번째는 고난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오늘은 다섯 번째는 ‘회개, 영접, 회복, 기쁨, 원망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5. 회개(悔改)에 대하여
죄란 헬라어로 하마르티아 ‘벗어났다, 빗나갔다’란 뜻입니다.
‘결국 모든 일은 하나님을 떠난 것’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맘대로 살았던 것이 죄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을 떠난 죄를 회개하는 것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회개란 헬라어로 메타노이아 ‘돌아오다’란 뜻인데 하나님을 떠나 살던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난 것이 죄이고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 탕자는 구원받아 아버지의 아들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구원’ 헬라어 소테리아는 안전하게,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내 삶의 처음부터 모든 것을 갑자기 거룩하고 아름답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내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았던 제가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6~19절을 읽겠습니다.
(눅 15: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눅 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눅 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눅 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탕자가 드디어 스스로 돌이킵니다. ‘내가 죄를 지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즉 육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사람들 앞에 죄를 지은 것을 인정합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특히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교만이었구나, 이게 죄구나’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도 복음이 들어가야 압니다. 알려주지 않으면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되었나?’ 억울하기만 합니다. 그런 사람 있습니다. 너무 억울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억울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결국 이런 모습이 되어 있는 겁니다. 그것을 주님께 회개할 때, 거기서부터 구원이 시작됩니다.
요한복음 16장 9절에 보면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라고 합니다. 즉 ‘죄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지 않고 떠나있는 죄를 알고 회개할 때부터 구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6. 영접(迎接)에 대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십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놀라운 은혜입니다.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나를 받아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로 살 수 있는 하나님의 특혜를 주십니다.
누가복음 15장 18~19절을 읽습니다.
(눅 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눅 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제 탕자가 어느 정도로 마음이 겸손해졌습니까?
탕자는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잘못했나 생각했습니다. 그는 재수 없게 흉년이 찾아온 환경 탓을 하거나 자신이 노력하지 않아서 죽게 되었다고 자학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붙잡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아버지를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고 아버지를 떠난 자기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아버지를 떠난 것이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서 얼마나 큰 죄를 지은 것인가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은 죄로 거지 신세가 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죄를 발견하고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나 같은 놈은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인격적인 사랑의 아버지였습니다. 자신을 보낼 때 아버지의 안타까워하시던 얼굴을 생각하였습니다.
아버지 집에는 품꾼들조차도 풍족하게 지낸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화기애애하게 지냈던 아버지 집의 분위기가 그리워졌습니다.
그는 굶어 죽느니 아버지 집에 가서 종으로라도 취업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비록 염치가 없지만 아버지를 무시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고자 결단하였습니다. 그리고 실천에 옮겼습니다. 여기서 행복이 시작된 것입니다.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후에 잠을 제대로 못 주무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버지를 떠난 후에 그런 궁핍과 죽음의 위험 가운데 놓일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았습니다. 그날부터 아버지는 대문을 열어놓고 주무셨습니다.
일을 하면서도 항상 동구 밖을 내다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버지는 떠나 버린 아들을 잊지 못하고 사랑하여 변함없이 기다렸습니다.
그날도 아버지는 동구 밖을 내다보다가 멀리서 희미하게 걸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버지는 걸음걸이만 보고도 아들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직도 거리가 먼데도 맨발로 뛰어나갔습니다.
아들이 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리니 아버지가 먼저 달려간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끌어안고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버지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아들을 영접해 주셨습니다. 그의 과거 죄를 다 용서하시고 변함없이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죽은 아들이 살아온 기쁨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나 같은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목사님, 저는 죄를 많이 지어서 안 될 것 같아요’
그때 ‘괜찮습니다’ 하면서 성경의 세 가지 예를 들어주는 겁니다.
십자가 강도- ‘강도도 구원받을 수 있어요’ ‘그래요?’ ‘사실, 저는 악하고 음란한 짓 많이 했습니다. 간음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도 용서해 주셨습니다’
또 ‘아합왕’- ‘이세벨의 남편 아합왕도 그렇게 나쁜 짓을 했습니다.
엘리야가 죽을 것이라고, 심판당할 것이라고 했는데 아합왕이 코를 쭉 빠뜨리고 회개하는 척만 했는데 하나님이 심판을 유보시켜 주셨습니다.
그다음. 더 악한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왕’ ‘몰렉에게 제사 지내고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 지나게 하고 온갖 우상 숭배하고 나라를 망쳤는데도 회개하니까 하나님이 기도 응답해 주시고 받아주시고 도와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저런 악한 사람도 구원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죄인도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음으로 회개하고 영접하면 하나님의 우리를 주님이 영접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7. 회복(回復)
일곱 번째는 ‘회복에 대하여’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면 영적 신분과 영적 질서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복음에 대하여 헷갈리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도덕적으로 완전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신분을 변화시켜 주시고 그다음, 신분에 맞는 삶으로 점진적으로 성화시켜 가는 것이 복음입니다. 주님은 먼저 영적인 신분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누가복음 15장 21~22절을 읽겠습니다.
(눅 15: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눅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탕자는 자신이 하나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죄악 된 자신은 이제 아들의 자격이 없으니 품꾼으로 채용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품꾼으로 채용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겨서 아들로서 권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고 동네 사람들을 초청하고 악단과 덴서까지 동원해서 잔치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로 인하여 기쁨이 가득하였습니다.
아들이 금의환향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공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아들 존재 자체로 기뻐하였습니다. 죽었다가 살아온 그것으로 기쁜 것입니다.
아버지가 둘째 아들, 탕자를 받아줄 때 세 가지를 했습니다.
첫 번째 ‘옷’ 제일 좋은 옷을 입혔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두 번째, 손에 가락지 끼워줬습니다. ‘인장 반지’입니다. 성령으로 인쳐 주셨습니다. 세 번째, 발에 실을 신겨주셨습니다. 복음의 신을 신겨주셔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먼저 신분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아들에게 ‘야, 지금까지 너는 내 돈 받아 가서 그렇게 살았으니 3년 정도 지켜본 다음, 아들로 받아줄지 말지 결정할게’ 그것 아닙니다.
이제 복음이 뭔지 아시겠습니까? ‘탕자의 비유’에 놀라운 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오래 다니면서도 이 복음을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 목사님! 제가 이렇게 사는데 구원받을까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할렐루야!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 맞습니까? 아멘, 내가 예수를 영접하면 예수님이 나를 영접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먼저 주시는 겁니다. 먼저 신분을 바꿔주십니다. 여러분이 주변에 복음을 전할 때도 거짓 복음에 속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인 중 하나가 탕자에게 거짓 복음을 전합니다. ‘당신 아버지가 이래이래해서 3년 동안 잘하면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켜 준다고 하네요’라고 했으면 그놈은 아버지가 잡아서 매를 때려야 합니다. 이렇게 거짓 복음을 전하는 종들 있습니다. 그건 아닙니다.
왜 자기들이 그렇게 얘기를 합니까? 아버지가 와서 먼저 옷 입혀 주고, 가락지 끼워 주고, 신을 신겨줬습니다. 물론 종을 시켜서 했지만, 아버지가 한 겁니다. 그렇죠? 그런데 그 종이 싹 가로채서 ‘3년 후에 어떤지 한번 보고 해준다고 하네요’ 하면 가짜입니다.
그런데 이런 거짓 복음이 난무하는 것이 유튜브입니다.
유튜브에 좋은 말씀도 많고 가짜도 많습니다. 여러 사람이 거기에 빠집니다.
‘저는 그런 옷 아직 입을 수가, 그런 가락지 낄 수가, 그런 신을 신을 수가 없습니다’ 뭔 소리예요? 아버지가 입혀 주면 입으면 됩니다. 입혀 주는데도 안 입으면 안 됩니다.
우리 성도님들 중에 복음을 아직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열심히 해서 사회 봉사하는 것인가? 그것은 열매입니다. 복음은 그것이 아니라고 알려줘야 합니다.
초신자들에게는 알려줘야 합니다. 영적으로 신분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그 신분에 맞도록 점진적으로 성화시켜 주십니다. 그래도 완전할 수 없습니다.
8. 기쁨에 대하여
여덟 번째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면 하늘에서는 기쁨의 잔치가 열립니다.
누가복음 15장 22~24절을 읽습니다.
(눅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아들의 권위)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눅 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눅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정말로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잃었다가 다시 얻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기뻐서 잔치하는 겁니다. 잔치를 여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제일 좋은 살진 송아지 잡고 잔치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돼지 똥이 묻은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의 옷을 벗기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혀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히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속에 두셔서 우리의 생명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돌아가면 하나님이 그렇게 기뻐하십니다.
우리 같이 구원받은 사람은 영혼 구원하는 것이 그렇게 기쁩니다.
다른 것보다 그것이 제일 기쁩니다. 거기에 우리의 삶과 시간과 은사와 가치를 드리는 것입니다. 다른 게 기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기쁨이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받았는지 아닌지는 이 기쁨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구원받게 하려고 전도합니다.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 보면 안타까워합니다.
누가 구원받았다고 하면 그렇게 기쁩니다.
한 영혼이 복음을 전함 받고 구원받은 것에 기쁨이 있으면 우리도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돌아온 것을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이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9. 원망(怨望)하는 맏아들에 대하여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있습니다.(25~30)
맏아들은 지금까지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을 잘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명을 좇아서 열심히 밭에 가서 일을 하였습니다. 그날도 열심히 일을 하고 집에 들어오니 집에는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아버지가 동생이 돌아와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맏이들은 화가 났습니다. 비교의식도 생겼습니다. 자신은 열심히 일을 했는데 아버지는 염소 새끼 하나 주지 않았습니다. 둘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맏이들의 원망하는 말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맏이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31~32).
(눅 15: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눅 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버지가 맏아들과 항상 함께 있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맏아들에게도 재산을 상속하여 주셨습니다. 아버지 것은 다 맏아들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첫째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아들은 송아지뿐 아니라 암소도 잡아먹어도 됩니다.
한 마리뿐 아니라 여러 마리를 잡아먹어도 됩니다.
그런데 맏아들은 아버지 집에 있으면서 은혜를 누릴 줄을 몰랐습니다.
아버지 곁에서 풍요롭게 살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인 줄 몰랐습니다.
동생이 그렇게 죄를 짓고 고통하고 있을 때 자신은 아버지 집에서 풍요롭고 자유롭게 사는 것이 행복인 줄을 몰랐습니다. 그는 복음을 몰랐습니다.
아버지와의 인격적인 관계성이 없이 일만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철없는 동생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은 무엇입니까?
무슨 일을 열심히 하면서 불평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복음을 아는 자는 예수님을 통해서 주신 십자가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십니다.
성령님 안에서 성령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화를 누리며 그분이 주시는 힘으로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예배에 참석하며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립니다.
예수님 안에서 행복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리고 형제자매를 사랑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그런 사람이 신앙생활 잘하는 사람입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은 집을 떠난 탕자도 사랑하십니다.
그를 사랑하여 기다리고 돌아오면 송아지를 잡고 잔치하며 아들로 대우하십니다.
그리고 집에 있는 자에게는 아버지의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주시고 사랑하여 주십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끝으로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와 사랑’입니다. 위로 하나님 사랑, 옆으로 이웃사랑, 영혼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짜 복음으로 거듭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볼 때 주님의 마음과 사랑으로 보기 때문에 감사가 있고 영혼의 구원을 기뻐합니다.
그 사람이 잘났고 못났고, 잘하고 못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영혼에 가치를 두고 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돌아온 그 자체로 축복해 주고 또 아직 돌아오지 않은 영혼들은 긍휼히 여겨주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제대로 복음이 들어간 사람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 나는 쟤가 마음에 안 들어!’ 하다가도 그 사람을 전도 대상자로 보면 ‘아, 내가 이러면 안 된다. 내가 이러면 복음이 막힌다.’라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잘 안 해주는 사람에게도 ‘나도 똑같이 미워해야지’ 하면 안 됩니다.
형에게 진짜 복음이 있었다면 ‘너, 너무 고생했다. 형이 네가 너~~무 보고 싶었다. 아버지도 형도 너를 위해 눈물로 기도했다. 이것은 형이 아끼던 새 옷이다. 네가 입어라’
동생에게 이렇게 했을 것입니다. 이런 관계의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탕자처럼 방황할 때도 하나님은 마음 졸이시며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소망 없는 이 세상 길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탕자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무거운 짐 짊어지고 비틀거리며 쓰러지고 넘어져도 아버지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모든 것을 다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제 눈물로 회개하고 돌아와 주님 품에 안기어 구원의 기쁨과 안식을 풍성히 누리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영혼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둘째 아들일 수도 있고, 우리가 첫째 아들일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우리가 주님께 회개하고 돌아가고 우리 주변의 영혼들을 품고 기도하며 그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삶 살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특별히 우리 새군산 교회 성도 가정 가운데 아직도 주님께 돌아와야 할 첫째 아들, 둘째 아들 많습니다. 그들을 구원하여 주시고 2024년이 다 가기 전에 그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데 저희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찬양 141장 / 멀고 험한 이 세상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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