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날들
큰애가 대여섯, 작은애가 두어 살쯤 되었을 때 태릉 선수촌 운동장에서 고등학교 동문 체육대회가 열렸습니다. 매해 봄가을로 열리는 대회라서 소풍 삼아 식구 모두 참가해 하루를 즐기고는 했습니다. 봄은 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날씨가 화창해 마치 공원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잘 꾸며진 선수촌 곳곳을 돌아보기도 하고 아이들과 달음박질도 했습니다. 친구들의 아이들 역시 고만고만해서 친구가 되어서 어울려 노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1986년 사우디아라비아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입니다. 그해 가을 체육대회를 마치고 동창끼리 근방의 음식점으로 가 이른 저녁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주위가 모두 ‘먹골배’로 유명한 배 과수원이었는데 과수원 여기저기 배나무 아래 좌석을 마련해 음식 장사를 겸했습니다. ‘태릉 솔밭 갈빗집’(?)인가 하는 곳이었는데 삼사십 명쯤 되는 동기가 식구들과 모여 앉았으니 참으로 장관이었습니다.
그때 주문해 먹은 음식이 돼지갈비였습니다. 1980년대 중반이었으니 아직은 돼지고기로 요리할 수 있는 음식의 종류가 그리 많지 않았고 농촌 생활에 젖었던 나는 더더구나 돼지고기라면 그저 김치찌개가 익숙한 음식일 때였습니다. 처음으로 맛본 ‘돼지주물럭’ 요리는 참으로 맛났습니다. 돼지고기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소고기라고 해도 속았을 것입니다. 지금이라면 누가 그 맛에 속겠습니까. 서울 태생인 아내도 말은 들어보았지만 먹어 보기는 처음이라며 맛있어했습니다. 그 후 장모를 모시고 그곳에 가 대접했던 기억이 납니다.
유튜브에서 탈북해 정착한 어느 청년이 삼겹살 맛을 이야기합니다. 멀겋게 끓여 돼지비계가 둥둥 뜬 국만 먹다가 삼겹살 맛을 보고는 ‘이럴 수는 없다’고 감탄하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40여 년 전 처음 맛보았던 그 음식이 문득 생각나 미소를 머금고 말았습니다. 그 훨씬 전인 중학교 3학년 때 고모부가 사준 불고기를 먹고는 놀라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그야말로 명절이거나 어른의 생신에 국으로만 맛보던 소고기를 숯 불판에 익혀 먹는다는 것은 상상 밖의 호사였습니다.
그 청년은 이제 서른이 막 넘은 듯한데 대한민국에서는 자신의 부모뻘 되는 어른들과 의식 수준이 맞는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자신이 북한에서 살 때의 문화나 생활 수준이 우리나라의 6, 70년대 수준이어서 또래보다는 부모나 그 윗세대와 말을 주고받아야 서로 통한다는 의미인 듯합니다. 그럴 것입니다. 가끔 북한 이탈 주민들의 대화를 들으면 나의 어린 시절이거나 청소년 시절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는 합니다. 문화적 정서나 생활 습관은 같은 민족이라 크게 다르지 않은데 북한에서는 우리가 이미 4, 50년 전에 지나온 과정을 이제야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 문화 발전의 차이는 업무차 인도네시아나, 월남 등 동남아 국가에 들렀던 3, 40년 전에도 느낀 바가 있습니다. 그 나라와는 문화가 달라 다만 수준의 차이를 느꼈을 뿐입니다. 선진국 국민이 우리나라를 방문했다면 느꼈을 법한 차이를 나도 그 나라에서 느낀 것입니다. 문화는 발전하는 것이어서 그들 역시 참고 노력하면 다소 늦기는 하겠지만 머지않아 더 나은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몇 해 전 인도네시아에 갔을 때 처음 방문했던 서른 해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발전에 놀랐습니다. 서른 해 전과는 사뭇 달라진 월남의 도시나 농촌의 사진 속 풍경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쭐할 것도 없고 딱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발전은 단계가 있는 것이어서 합심해 노력하기만 한다면 그야말로 ‘세월이 약’인 것입니다. 발전했다는 말을 듣거나 변한 풍경을 보면서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며 추억에 잠기는 즐거움을 맛보게 됩니다. 아직도 그렇게 산다는 북한 이야기를 들으면 안타깝기는 합니다. 빨리 그런 생활에서 벗어나 좀 더 개선된 환경에서 편안하게 살게 되기를 빌어봅니다. 그 까닭은 그런 환경에서 살아 보니 불편했던 기억 때문입니다.
어렸을 적에는 마을 근처에 미군이 주둔하던 부대가 있어서 그들이 먹는 음식과 주전부리를 맛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 것을 장에 가서 마음 놓고 사 먹게 될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고 미군들이 주던 껌이며 초콜릿을 이 핑계 저 핑계로 안 먹게 될 줄은 더더욱 짐작조차 못 했습니다. 그 탈북 청년은 십 년 전 일을 이야기하지만, 그 역시 내가 젊었을 때처럼 그런 문화가 존재하는 곳이 있는지는 물론 자신이 장차 그런 문명의 수혜자가 된다는 것을 아예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나와 문화적으로 같은 시대를 살았다고 해도 그만이어서 내가 하는 옛날이야기도 제 이야기인 양 잘 알아들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빈곤으로부터 풍요로 변한 그의 일상이 아니라 상상조차 하지 못 한 세상으로의 안착이 그를 놀라게 합니다.
그러고 보니 처음 사우디아라비아 주재원으로 발령이 나 임지에 도착해서 처음 가보았던 세이프웨이(Safeway)라는 ‘신비의 장터’가 생각납니다. 그 장터는 소위 말하는 ‘마트’였고 그곳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물건으로 가득했습니다. 당시 애연가였던 나는 수십 가지나 되는 담배를 골고루 사다 놓고 입맛에 맞는 담배를 고르려고 노력하기도 했고, 수십 종류의 비누 중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LUX 비누’를 감춰 두고 혼자 쓰던 고모가 부러웠던 나는 그 비누를 상자째 사다 놓기도 했습니다. 그것을 다 소비하느라 들였던 시간과 지루함이라니! 이런 무지-텔레비전은 소니, 시계는 롤렉스나 오메가, 자동차는 일제 크라운, 오디오는 마란츠가 최고라는 나만의 상식이 모두 깨지고 말았습니다.
다른 이야기지만 그때 나는 아이들을 가능하면 일찍이 외국으로 다니게 하겠다고 다짐했는데 그 까닭은 우물 안 개구리인 자신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소위 말하는 미군 부대 House boy 노릇을 하며 얻어온 ‘땅콩 크림’을-지금은 마트에 가면 지천입니다-숨겨두었다가 동생들 몰래 따듯한 밥에 한 숟갈 퍼넣어 비벼주고는 하셨습니다. 용도에 맞지 않는 쓰임이었지만 그 ‘사랑의 맛’을 잊지 못합니다.
동생들에게는 장손만이 누리는 ‘미안하고 염치없는’ 특혜였습니다. 훗날 IMF 사태가 나자 다 망해 먹고 고향에 내려와 동생들과 대화하던 중에 누군가가 “형님은 글쎄 아무것도 몰라요”라며 면박을 주는 통에 ‘반성의 식은땀’을 흘렸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고생 한 번 안 하고 자란 형은 우리의 고단했던 삶을 알기나 하느냐는 힐책이었습니다. 지금은 다행히 당시에 입었던 특혜에(?) 속죄를 거듭한 까닭에 형 대접을 제법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지나고 나니 아름다운 날들이었습니다. 누구나 그만의 추억과 그 추억에 얽힌 이야기는 있는 법입니다. 누구에게는 즐거움이 되기도 하고 아름다운 추억이 되기도 했지만, 다른 이에게는 쓰디쓴 추억이 되기도 합니다. 마치 50여 년 전 나의 이야기를 하듯 하는 그 청년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지난 추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릅니다. 비록 무명 바지에 고무신을 신고 자랐어도 그보다 더 좋은 옷과 신발을 여태껏 보지 못했습니다. 추억은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생전에 초등학교 2학년 때 홍역을 앓아누운 나를 업고 학교에 가셨던 이야기를 하시며 즐거워하셨습니다. 내가 그렇게 가벼웠었나?
어떻게 그 시절을 지냈건 괴롭거나 어렵다고 느꼈던 적은 없었습니다. 아니죠. 있었는지 없었는지조차도 다 잊고 말았습니다. 다 자라고 나니 그런 일들은 모두 아름다운 일로 변했습니다. 그 청년도 북한에서의 일을 벌써 즐겁게 이야기합니다. 아직은 추억의 아름다움을 깨닫지 못해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만, 어려웠던 과거는 추한 과거와는 다른 것이어서 머지않아 미소를 지으며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아름다운 날들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