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의 아버지 육종관은 개성이 강한 사람이었다. 둘째 딸이 미래의 대통령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한 뒤로는 사위를 만나주지 않았고 사위가 대 통령이 된 뒤에도 그 고집을 꺾지 않고 1965년에 72세로 죽었다. 1893년에 충북 옥천군 능월리(옥천군 릉월리)에서 대지주 육용필의 자식 5남매중 막 내로 태어난 육종관은 형들이 출향하여 출세하자, 자신은 고향에 남아 집 안의 재산을 관리했다. 그의 큰형 육종윤은 승정원 부승지를 지낸 뒤 개화 파 활동을 하다가 김옥균과 함께 갑신정변에 참여했다. 쿠데타 기도가 실 패한 뒤 하와이를 거쳐서 일본으로 망명하여 나리타 교쿠준이란 이름으로 살다가 죽었다. 둘째 형(육종면)은 도쿄에서 상선학교를 졸업한 뒤 선장이 되었다. 그 뒤 법률을 공부하여 판-검사를 거친 뒤 변호사가 되었다. 셋째 형은 일찍 죽었고 누이는 송씨 집안으로 시집갔다.
육종관은 열여섯 살에 두 살 아래인 경주이씨 집안의 이경령을 아내 로 맞아들였다. 육종관은 미곡도매상, 금광, 인삼가공업을 해서 번 돈으로 교동의 '삼정승집'이라 불리던 고가를 사서대궐 같은 저택으로 증축했다. 뒷뜰 역할을 하는 과수원을 합치면 8천 평, 순수한 대지가 3천 평이나 되 는 집이었다. 해자 같은 도랑, 솟을 대문, 그 안에 잘 지은 조선식 건물군. 대문에서 마주 보이는 사랑채는 원님이 일을 보던 동헌처럼 꾸몄다. 큰 대 청마루 옆에는 심부름꾼의 방도 있었다. 전화기를 둔 전화방과 사진현상용 암실도 냈다. 사랑채 왼쪽의 아래채에는 여러 명의 소실들이 살았다.연못, 안채, 행랑, 그 뒤로 연당사랑. 이 사랑방에서는 2개 분대규모의, 소실들 의 아이들이 모여서 공부를 했다. 사랑과 안채를 잇는 회랑은 일종의 마루 복도로서 단아한 지붕을 얹어 정취를 더했다. 사랑 뒤에는 별당과 뒤채.사 과나무 배나무 밤나무 은행나무 감나무가 울창한 후원에는 사당과 정자도 있었다. 이 건물군을 구경한 시인 박목월은 '조선 상류계급의 건축을 대표 하는 비원의 연경당과 맞먹는건물'이라고 평했다. 저택을 둘러싼 담은 세 로 1백m, 가로 50m나 되었다.
육종관은 이 대저택을 자신의 왕국처럼 다스렸다. 사위가 대통령이 된 뒤에도 그는 자신을 굽히지 않고 박정희를 사위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견지했는데 이런 오기는 아무의 간섭도 받지 않고 이 성채를 지켜온 관록 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1925년 11월 29일에 태어난 육영수는 큰 언니 육인순과는 열한 살, 오 빠 육인수와는 일곱 살, 막내 동생 육예수와는 네 살 터울이었다. 이 긴터 울 사이에 육종관은 다섯 명의 소실들 사이에서 18명을 생산해 모두 22명 의 자녀를 두었다. 한 해에 복수의 소실들이 자녀를 나은 적도 있었다. 육 종관은 일찍 죽은 자녀들을 제외한 18명을 모두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키고 평균 이상으로 교육했다. 여자는 고교, 남자는 대학까지 보냈다. 육종관은 소실관리의 실권은 본처 이경령에게 주었다.
소실들은 이경령을 "어머니"라고 부르며 어렵게 대하여야 했다. 이경 령도 관대한 태도를 견지하여 소실들을 잘 다루었다고 한다.이 왕국에서는 여자들끼리의 싸움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또 들리지 않아야 했다. 겉으로는 대범한 이경령이었지만 속으로는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이경령은 시누이 (남편의 누나) 육재완을 자주 찾아가 남편의 축첩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을 털어놓곤 했다.
"걔가 말을 이렇게 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그 집 아이가 나 에게 이렇게 대한답니다." 이경령은 육재완의 자녀들이 명절 때 자신에게 절한 뒤 소실들에게도 절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육영수는 남몰래 눈물 을 흘려야 했던 어머니를 붙들고 "제가 크면 어머니를 편하게 모실게요"라 고 위로하곤 했다. 이 모녀가 박정희가 나타났을 때 대담하게 육종관에 대 한 '반란'을 감행한 데는 그동안 쌓였던 불만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소 실들 가운데 신원이 확인되는 사람은 옥천마마(2남 출산),큰 개성마마(3남 1녀 출산), 작은 개성마마(1남1녀), 남촌마마(1녀), 서울마마(1남)이다.남 촌마마는 일본여성. 육종관의 일본어 가정교사로 들어왔다가 소실로 들어 앉았다. 일본명이 노무라였던 그녀는 소실들 가운데 가장 부지런하고 이경 령을 깎듯이 모셨다.
이경령도 남촌마마를 아껴주었다. 남촌마마가 없으면 이경령의 일상생 활이 불편할 정도였다. 육종관은 다른 소실들에게는 집을 한 채씩 마련해 주었으나 남촌댁은 자립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던지 이경령과 같은 지붕 아 래서 살도록 했다. 두 개성마마는 자매가 함께 소실로 들어온 경우이다.나 중에 육종관은 큰 개성댁을 서울 사직동으로 보내 살도록 했다. 이집은 육 종관의 여러 자녀들이 서울에 유학할 때 기거하는 거점이 되었다. 육영수 도 배화여고를 다닐 때 이 집에서 살면서 마음고생을 적지 않게 했다.
이 다섯 소실들은 육종관과 적어도 2∼3년간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고 그밖에도 많은 여인들이 스쳐 지나갔다. 육종관은 진정으로 한 여자를 사 랑하거나 눈이 멀지 않는 이였다. 육종관은 자신의 축첩생활에 대해서 부 끄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가세를 상징하는 자랑거리로 생각했던 것같다. 육종관은 마음에 드는 물건이나 여자가 나타나면 비록 단기간이지만 유달 리집착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육종관은 돈도 많았지만 사람의 심리를 꿰뚫어보고 다룰 줄 아는 안목과 화술을 갖고 있었다. 그가 여자들의 마 음을 사려고 할 때 약점이 하나 있었다. 그는 악필이었다. 1930년대초 책 상만한 타이프라이터가 등장하자 그는 이것을 구입하여 밤새워 연서를 찍 어내곤 했다. 한 글자를 찍고 다음 글자를 찍을 때까지 시간이많이 걸리 는 이 기계가 '덜커덩, 덜커덩'소리를 낼 때면 이경령과 소실들은 "아이 구, 저 양반 또 바람 났나벼"라고 한숨 섞인 웃음을 짓곤 했다.
육종관은 돈을 끔찍이 아꼈다. 육영수를 불러들여 함께 지폐를 다리 미질하여 빳빳할 때까지 폈다. 이 지폐들을 깔고 그 위에 요를 펴고 자기 도 했다. 이렇게 해야 돈이 얇아지고 질기게 된다는 것이었다. 물건값을 지불할 때 그는 단 세 장의 지폐를 꺼내주더라도 세 번은 세어야 했다. 돈을 위 아래로 돌려 쥐어가면서 세는 것은 혹시 한 장이 접혀 있지나 않 을까 해서였다. 평소 그는 돈을 빨리 세는 사람을 건방지다고 가장 싫어 했고 다음은 군인이었다. 군복 상의등판을 다림질하여 줄을 세운 때문이 었다. 입고 있으면 주름이 펴지는데 왜 애써 주름을 만드는지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