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불과하지만
김병호
밤이 긴 여름이 있지
집은 비어있고 베란다에 갇힌
새의 날갯짓은 수행에 가깝고
쾅쾅쾅
당신에게 말할 수 없는 큰일이 있는데
아는지 모르는지, 괜찮아 하고 물어오는 안부는
처음 만났던 날의 플레어스커트 같지
수면 양말을 싣고 텔레비전을 보다
옥상의 걷지 않은 빨래가 생각났지
여름은 호주머니가 많아서
마음 바깥의 것들을 접어, 꾹꾹 눌러 넣기 수월한데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갈 데 없는 밤이 되었지
멀어서 무사한 안부처럼
열고 닫을 수 없는 통유리 저편
마음이 다했는지
여름이 멈췄네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여름이지
(손진은 시인)
혼자 여름을 견디어 내는 화자의 마음을 표현한 재미있는 구절이 많네요. 특히 "베란다에 갇힌/새의 날개짓은 수행에 가깝고" "여름은 호주머니가 많아서/마음 바깥의 것들을 접어, 꾹꾹 눌러 넣기 수월한데" 그래요. '여름에 불과하지만'이라는 제목은 겨울 긴밤을 혼자 견디는 것 못지 않게 어느 사람에겐, 여름도 "열고 닫을 수 없는 통유리" 저 편을 응시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는 시로 읽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