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월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
(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
失了愛情痛苦
(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글/ 피천득 (1910~ 2007)
일 년 중 가장 푸르름이 빛나는 밝고 맑고 순결한 5월을
琴兒 피천득 선생의 아름다운 글과 함께 시작합니다.
피천득 선생은 1910년 5월 29일,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홍천이며,
호는 금아(琴兒)이다. 부친은 구한말 군부주사(軍部主事)를 지낸 관료 출신으로 가죽신을 팔아
큰돈을 벌어 서울 종각에서 종로5가 땅까지, 강남에서는 양재동 땅에 이르기까지 소유한 유명한 부호였다.
그의 호인 ‘금아(琴兒)’는 ‘거문고를 타고 노는 때 묻지 않은 아이’라는 뜻으로,
서화(書畵)와 음악에 능했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춘원 이광수가 붙여준 호이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도중 1926년 중국 상하이로 유학을 떠나 1929년부터 상하이
후장대학(滬江大學, 호강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이후 1937년 졸업 때까지 국내를 여러 번 오가며
많은 문인, 독립운동가들과 친분을 쌓았고 1930년 <신동아>에 시 ‘서정소곡’을 발표하며 등단하게 된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귀국. 미국계 석유회사 스탠다드 오일의 직원으로 근무하였다가 서울에서 교원생활을 하며
영문학 연구와 시 창작에 매진하던 중 1945년 경성대학 예과 교수로 취임하게 된다. 이후 서울대학교에서
영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1954년엔 미국 국무성의 초청으로 하버드 대학교에서 약 1년간
영문학 연구를 하기도 했다. 강원도 춘천시의 성심여자대학교에 출강하기도 했다.
생전에 술과 담배를 멀리했기 때문에 97세까지 장수한 듯하다.
송파구 롯데월드 민속박물관 입구에 ‘피천득기념관’이 개관되었다.
제27회 울산미술대전 서예·문인화 부문 대상
최진연 作 ‘피천득의 오월’. 울산미술협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