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시민의날(2/21)
2024.대구시민주간(21~28일)
♡대구찬가♡
https://m.cafe.daum.net/jinwooh/FDba/5195?svc=cafeapp
1. 목적
국채보상운동 기념일(2월 21일)마다 개최하는 '대구시민의 날' 기념식은 자랑스러운 대구정신을 확산·계승 하고, 대구의 미래 50년 번영을 위한 비전을 시민에게 알려 공감대를 형성하고 의지를 다지고자 여는 것이다.
2. 기념식
* 일시:21일 오후 2시
* 장소:대구오페라하우스
* 참석기관: 단체장·시민 등 500여 명
3. 주요행사
* 대구무형유산 날뫼북춤을 시작으로 오프닝 공연, 기념사·축사, 제47회 자랑스러운 시민상 시상, 달빛철도 (대구~광주)퍼포먼스, 참가자 합창
* 28일에는 두류공원 2·28민주운동기념탑 참배로 시작해 문화예술회관 팔공홀에서 국가보훈부 주관으로 2·28민주운동 국가기념식을 거행할 예정이다.
♡ 대구시민의 노래 ♡
https://youtu.be/ve0EKXjlIO0?si=HZxrU8uqV9ebSBYl
♡ 1절
팔공산 줄기마다 힘이 맺히고
낙동강 굽이 돌아 보담아 주는
질펀한 백 리 벌은 이름난 복지
그 복판 터를 열어 이룩한 도읍
우리는 명예로운 대구의 시민
들어라 드높으게 희망의 불꽃
지세도 아름답고 역사도 길어
인심이 순후하고 물화도 많다
끝없이 뻗어나간 양양한 모습
삼남의 제일 웅도 나라의 심장
우리는 명예로운 대구의 시민
돌려라 우렁차게 건설의 바퀴
♡ 2절
세계에 자랑하던 신라의 문화
온전히 이어 받은 우리의 향토
그 문화 새로 한 번 빛이 날 때에
정녕코 온누리가 찬란하리라
우리는 명예로운 대구의 시민
솟아라 치솟아라 이상의 날개
♡ 대구시민헌장 ♡
우리들은 신라 문화의 유구한 전통의 계승자이며, 인계자로서 성스러운 이상과 명예로운 의무에 사는 대구시민이다.
인간의 가치로움과 평등의 이름 아래 모이고 일하며, 우리들 스스로가 마련한 우리들의 법률을 지키고 행할 것이며,
정다운 가정을 이룩하여 이웃을 사랑하고 내 고장의 풀 한 포기, 돌 하나에도 서로가 이해로써 아끼고 가꾸어, 우리 모두의 것으로 책임을 다할 것이며,
보다 밝고 의젓한 시민으로서 귀여운 우리의 아들 딸들에 물려 줄 크고 알찬 새 도시의 창조자이자 임자임을 자부한다.
■ 국채보상운동
♤담배를 끊고 돈을 모아 나라의 빚을 갚다♤
1. 의의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은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에 제공한 차관 1,300만엔을 국민들이 상환을 주도한 운동이다. 1907년 2월 21일 경상북도 대구에서 서상돈, 김광제, 윤필오 등에 의해 처음 시작되어 대중들의 크나큰 호응을 바탕으로 전국으로 발빠르게 번져나갔다. 여러모로 약 90년
후(1997년~1998년경) 외환위기 당시 일어난 금모으기 운동과 닮은 점이 많다.
2. 과정
당시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대구 광문사에서 시작되게 되었다. 1907년 1월 29일 오전 경상북도 내 사람들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출판사인 광문사에서 특별회의가 열렸다. 이 날 회의의 주요 안건은 대구광문사의 문회를 대동광문회로 개칭하는 문제였다. 그런데 회의가 끝난 직후, 부사장 서상돈은 다음과 같이 건의서를 하나 제출하였다.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서상돈 徐相敦♡
*본관: 대구 서씨
*출생 : 1850년 11월 10일
경상도 김산군 군내면 마좌산리 마잠
(現 경상북도 김천시 지좌동 마잠마을)
*사망: 1913년 6월 30일 (향년 62세)
경상북도 대구군 서상면 계산동
(現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서상돈고택)
*부모: 아버지 서철순, 어머니 김아가다
*자녀아들: 서병옥, 서병조, 서병주, 서병민
*종교:가톨릭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묘소: 대구광역시 수성구 범물동 천주교공동묘원
*인물소개 및 상훈
조선과 대한제국의 민족 운동가, 사업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3. 서상돈 모금 건의서
우리나라의 국채가 현재 1,300만 원인데, 정부의 국고금으로는 갚을 수 없는 형편이라, 국채를 갚지 못하면 장차 토지라도 주어야 할 형편이다. 우리 2천만 동포가 담배를 끊고 그 대금으로 매월 1명당 20전씩 모은다면, 3개월 만에 국채를 다 갚을 수 있을 것이다.
4. 모금의 시작
건의서를 낭독하자, 참석했던 회원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로 찬성하게 되었다. 회원들은 이 자리에서 의기투합하여 즉시 모금할 것을 결의하고, 각 도마다 이러한 취지를 알려 전국적인 모금운동으로 전개해 나갈 것을 제안했다. 광문사 사장이던 김광제는 당장 실천에 옮기기로 하고, 자신의 담뱃대와 담배쌈지를 버리고 3개월분의 담배 값에 해당하는 50전과 추가로 10전을 보태 60전을 출연하였다. 서상돈도 그 자리에서 800원을 출연하게 되었는데, 당시 쌀 한 말의 가격이 약 1원 80전 정도였으니, 서상돈이 출연한 800원은 쌀 약 450말 정도에 해당되는 거금이었다. 다른 참석자들도 이에 호응하여 의연금을 출연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도 무려 2천원이 모금되었다.
5. 전국으로의 확산
대구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곧 전국민의 호응을 받아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을사조약의 늑결로 잠재되어 있던 민족적 항거 의식이 국채보상이라는 공동의 목표가 형성됨에 따라 한꺼번에 분출된 것이다.
1907년 2월 22일 대한자강회원 김성희, 광학서포 사장 김상만, 중앙서림 사장 주한영 등이 국채보상기성회를 조직하는 등 서울에도 여러 단체가 조직되어 의연금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서병염과 윤흥섭 등은 국채보상중앙의무사를 조직하고 의연금 납부처로 황성신문사를 정하였다. 황성신문에서는 1907년 2월 25일 '斷煙報國債(단연보국채)'라는 논설을 발표하여 이 운동에 전국민이 참여하여 국채를 갚을 것을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전국 3백여 고을에 반드시 대구에서만 이런 남자들이 나올 것이 아니요. 동포 2천만명에 반드시 서씨 등 몇 사람만이 이런 뜻과 기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믿는다. 이 기운이 한번 움직임에 따라 온 나라가 향응하여 장차 5종의 민족으로 모두를 우리 大韓人(대한인)을 숭배하여 20세기 오늘의 세계에서 대한민국의 聲價(성가)가 온 지구상에 환하게 비칠 것이다.
≪황성신문≫, 1907년 2월 25일, 斷煙報國債
6. 모금 통합기구
1907년 4월에는 국채보상운동을 지도, 총괄하기 위한 통합기구로 대한매일신보사 내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소장; 한규설, 부소장: 김종한, 검사원: 양기탁)와 대한자강회 사무소에 국채보상연합회의소(의장: 이준, 부의장: 김광제, 위원장: 윤효정)를 설치하였다. 두 단체의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의연금의 수합과 국민 지도라는 역할분담이 이루어졌다.
7. 결론
국채보상운동은 암울한 상태의 한민족에게 국권회복이라는 목표의식을 분명히 해준 점에서 애국계몽운동의 대표적인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전국민은 국채상환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의연금을 자발적으로 냈다. 그리고 그러한 의연금 납부 행위는 국민의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로 여겼다. 의연금을 납부하면서 국민들은 애국심을 고조시켜갔으며, 단일의 집합체로 결속되어 가면서 민족적 공동체 의식을 강화시켜 나갔다. 국채보상운동은 남녀노소와 신분, 지역을 떠난 일반 대중의 광범위한 참여를 이끌어냈다. 특히 그동안 차별을 받았던 여성층이나 승려, 기생과 같은 이들이 적극 동참하였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가 있다. 이들은 민족을 구하는 일에 남녀와 신분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면서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대중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국가이념에 철저하였다 이들은 국토가 있어야 국민이 있고, 국가가 있어야 국민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국가의 위기는 국민의 위기임을 자각하도록 하였으며, 국민 개개인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를 위해 국가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수많은 대중들은 자신들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국가의식을 크게 신장시켰으며, 동시에 민족공동체 의식을 깨우치게 되었다.
8.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유네스코 등재
대구시와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는 2015년 8월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약 2,500여종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할 것을 문화재청에 신청했고, 문화재청이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 대상으로 선정되어 2017년 10월 31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정식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