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은 강원도 남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실직국(悉直國)이었는데
102년(신라 파사왕 23)에 신라에 병합되었고, 505년(지증왕 6)에 실직주라 하였으며
경덕왕 때 삼척군으로 개칭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삼척현으로 강등 되었다가 조선 태조 때 삼척부로 승격하고
1404년 도호부가 되었으며. 1895년 (고종 32) 지금의 삼척군이 되었다.
삼척진 씨의 시조:진경(陳鏡)은 고려 태조 2]조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로 시중(侍中 3) 상서(尙書) 태보(太保) 등을 역임하고.
이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랐다.
그의 선계는 상고할 수 없으나 휘 경(鏡)의 16세손 휘 의(懿)가
1296년(충렬왕 2) 삼척군(三陟君)에 봉해진 것과
조선 초에 의주 병마사(義州兵馬使)를 역임한 휘 충귀(忠貴)의
개국 원종공신 녹권에 본관이 삼척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누대(累代)에 걸쳐 삼척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온 것으로 추측된다.
註1) 평장사:고려 때 문하부 소속의 정2품 벼슬, 내사시랑평장사,문하시랑평장사
註2) 태조 조 (서기 918~942년 까지)
註3) 시중:고려 때 수상(首相)으로 종1품인데, 금자광록대부라 한다면 종2품의 품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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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고려사 절요 인물전 > 진적 (평장사공)사적 수록▼
목종조 진적(陳頔) 1009, 1010, 1014
형부상서(刑部尙書), 참지정사(참知政事), 내사시랑(內史侍郞), 평장사(平章事)
진적(陳頔)
1009년 3月에 유윤부(柳允孚)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삼고
유방헌(柳邦憲)으로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를 삼고
강조(康兆)로 이부상서(吏部尙書) 참지정사(叅知政事)를 삼고
진적(陳頔)으로 형부상서 참지정사(刑部尙書 叅知政事)를 삼고
유진(劉瑨)과 왕동영(王同穎)으로 상서 좌우복야(尙書 左右僕射)를 삼고
최항(崔沆)과 김심언(金審言)으로 좌우산기상시(左右散騎常侍)를 삼고
채충순(蔡忠順)으로 이부시랑 좌간의대부(吏部侍郞 左諫議大夫)를 삼고
김려(金勵)로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삼고 문인위(文仁渭)로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삼았다.
庚戊 元年(1010년) 春 正月 乙丑에 上元道場을 廢하였다.
閏 2月 甲午에 燃燈會를 復舊하였다. 夏 4月 癸丑에 친히 大廟에 祀하였다.
己未에 徐崧 等에게 及第를 賜하였다.
5月 甲申에 尙書左司郞中 河拱辰과 和州防御郞中 柳宗을 遠島에 流配하였다.
拱辰이 일찍이 東女眞을 치다가 敗하매 宗이 恨을 품었더니 때마침 女眞人 95名이 來朝하려고
和州館에 이르거늘 宗이 이들을 모두 죽여버린 때문에 같이 流配되었다.
女眞이 契丹에게 呼訴하니 契丹主가 君臣에게 말하기를
「高麗 康兆는 임금을 죽였으니 大逆인지라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서 죄를 물을 것이다.」고 하였다.
秋 7月 戊寅 朔에 契丹이 給事中 梁炳과 大將軍 那律允을 보내와 前王의 연고를 물었다.
8月 정미삭(丁未 朔)에 내사시랑 평장사 진적(內史侍郞 平章事 陳頔)과
직중대상서우승(直中臺尙書右丞) 윤여(尹餘)를 계단(契丹1)에 보냈다
註 1) 계단(契丹):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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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제8권 - 세가 제8 문종 신축 15년(1061)
◈진위 고려사 사적 ▼
송나라인 동래설(東來說) -귀화인> 진위(陳渭) ?1035년 전후생
신축 15년(1061) 봄 정월 무자일(戊子日)에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계축일(癸丑일)에 이유충(異惟忠)을 형부상서로, 김화숭(金化崇)을 한림학사로,
왕무숭(王懋崇)을 호부상서 판 어사대사로,김원황을 병부상서로 각각 임명하였다.
2월 신유일에 임종일(任從一)을 상서 좌복야 중추사로 임명하였다.
계미일(癸未日)에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형벌을 적당하게 처리하는 문제는 정치에서 첫 자리를 차지한다.
그것이 지나치게 준엄하면 백성들이 견디지 못하고
지나치게 너그러우면 백성들이 태만하여진다.
그러므로 형벌이 공정하게 처리되면 음양(陰陽) 이치가 조화되어 기후가 순조롭고
법령이 적당하지 못하면 백성들의 원한이 쌓여서 재변(災變)이 생기는 것이다.
포악한 신하와 가혹한 아전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법이다.
나는 옛교훈을 준수하며 형벌을 신중히 하고자 하나
혹시 신하들이 포악하고 아전들이 가혹하여 형벌이 공정하지 못할까 매양 염려하노니
지금부터 형조의 관원(官員)과 이속(吏屬)들을 엄격히 선택 임명함으로써
억울한 죄수가 없도록 하라!”
3월 임진일(壬辰日)에 최순한(崔順漢)을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정층(鄭層)을 섭(攝) 공부상서(工部尙書)로 각각 임명하였다.
정유일에 지난해에 문하성에서 수직하던 날 화재가 일어났다 하여 참지정사 김현을 좌복야로,
우산기상시 최원준(崔爰俊)을 판 소부 감사(判少府監事)로 각각 강직시켰다.
기유일(己酉日)에 나계함(羅繼含) 등에게 급제를 주었다.
여름 4월 병진일에 거란 동경의 회례사 검교 공부 상서 소수사(蕭嗽思)가 우리 나라에 왔다.
갑술일에 장중영(張仲英)을 공부상서로 임명하였다.
6월 계축일에 왕이 봉은사에 갔다가 고추 국자감에 이르러 시종한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중니(仲尼-공자의 자)는 모든 군왕들의 스승이니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으랴”라고 하면서 드디어 절을 두 번 하였다.
정사일(丁巳日)에 송나라의 진사(進士) 진위(陳渭)를 비서 교서랑으로,
소정(蕭鼎), 소천(蕭遷)을 합문승지로, 섭성(葉盛)을 전전(殿前) 승지로 각각 임명하였는바
진위는 문예(文藝)에 재능이 있고 소정 등 세 사람은 음률(音律)에 정통하였다.
기묘일에 왕의 아우인 기(基)의 관직 내사령을 중서령으로 고쳐 임명하고
그 외에 일찍이 내사령을 지낸 사람들은 모두 중서로 고쳤다.
송나라인 동래설> 진위 진사공(1035년 전후출생 추정)을 여양진씨 선계로 비정한다면,
시조공의 父:아버지로도 볼 수 있다.
진총후 시조공을 1080년 전후 출생으로 추정하면 45세 정도에 늦게본 아들 일 수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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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고(陳高), 진양(陳養) 사적☞ 고려사 제12권 25쪽. ▼
[고려사 본문] 癸丑御重光殿西樓召投化宋人郎將陳養譯語陳高兪坦試閱兵手各賜物
계축어중광전서루소투화송인 낭장(진양)역어(진고)유탄시열병수각사물
고려사 본문 내용 > <<고려사>> 제12권- 세가 제12 > 예종 병술 원년(1106)
계축일에 왕이 중광전(重光殿) 서루(西樓)에 나가서 송나라 사람인 낭장 진양(陳養 1)과
통역들인 진고(陳高), 유탄(兪坦) 등을 불러서 무예를 시험해 보고 각각 물품을 주었다.
註 1)진양(陳 養)낭장공은 고려제13대 선종(宣宗) 8 (1091년)에 송나라에서 귀화 1)하였으며,
1106년의 고려사 기록을 근거로 ?1060년 전후출생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외자 이름을 쓴 가문으로 진숙(陳 淑).진관(陳 灌)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있다.
註 1)여양진씨 족보기록> 송나라에서 우윤벼슬에 있던 진수(陳 琇)라는 분이 동래하였다고 전하는데
혹시, 陳養- 낭장공의 송나라에서 귀화를 > 陳琇- 송나라에서 동래(東來)로 혼동하여 誤記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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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양(陳養) 사적 ▼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자료
癸卯五月十四日
胎室近處禁耕
▬慶尙監司狀 啓臣巡到金烏山城見其形勝險阻無比
聞距城二十里星州地境有一閑廣之地爲邑居自古入
(陳養)藪而距邑十五里是如爲白臥乎所以風水之說虛拋沃土
事極無據爲山城設屯事分付爲白有如乎追聞則丙申
年間因淑敬公主房設庄邑民呈書道臣轉聞該曹回
啓禁設宮庄爲白有在果自 胎室至藪隔一大麓麓外又隔
一坪有田有畓是白去等別爲胎室禁耕養藪之說州民
之欲禁宮庄而州官見欺奸民爲白有置今爲關防設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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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본문 내용 > <<고려사>> 제12권- 세가 제12 > 예종 병술 원년(1106)
계축일에 왕이 중광전(重光殿) 서루(西樓)에 나가서
송나라 사람인 낭장 진양(陳養)과 통역들인 진고(陳高), 유탄(兪坦) 등을 불러서
무예를 시험해 보고 각각 물품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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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척(陳倜 ▼
고려사 제29권(卷二十九) 11쪽.
[본문] 陳倜侍史文應于海島罷殿中侍史李承休以將軍金鎰爲侍丞郎將禹天錫爲
(진척)시사문응우해도파전중시사이승휴이장군김일위시승랑장우천석위
雜端佐郞閔萱爲侍史前廣州判官李仁挺祗侯閔漬爲殿中侍史
잡단좌랑민훤위시사전광주판관이인정지후민지위전중시사
고려사 본문 내용 > <<고려사>> 제29권 - 세가 제29 >충렬왕 2 >충렬왕 경진 6년(1280)
을묘일에 감찰사에서 왕에게 진언하여 당시의 정사에 대하여 논박하였더니
왕이 크게 성을내어 숭문관에서 시사(侍史) 심양을 문초하고 잡단 진척(陳倜)과
시사 문응(文應)을 해도(海島)에 귀양 보냈으며 전중 시사 이승휴(李承休)를 파면시켰고
장군 김일(金鎰)을 시승(侍丞)으로 낭장 우천석을 잡단으로
좌랑(佐郞) 민훤(閔萱)을 시사(侍史)로 前 광주(廣州) 판관 이인정(李仁挺)을 지후(祗侯)로
민지(閔漬)를 전중 시사(殿中侍史)로 각각 임명하였다.
첫댓글 이런 여양진씨이전의 진씨인물들 자료를 다 찾아내시다니 대단한 노력이십니다.전 진양을 진수로 잘못 표기한거이면 좋겠네요.그런데,신라고승 부설의 속성이 진씨,고려쵸 충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진선부자,나주진씨 시조 진영략장군등등 이분들 자료도 찾아봐야 될거 같읍니다.
암튼,진씨가 중국에선 가장 흔한 성씨중 하나라서,귀화한 분들이 수없이 많을듯 싶읍니다.
전 사실 오래전부터,삼척진씨 시조 진경이분이 진씨선계중국편에 나오는 진경 이분이 아닌가 생각했읍니다.
중국편 진경과는 동명이인으로 보여집니다. 귀화설-송나라인 陳守는 귀화하지 않았으며, 陳養이 귀화하였습니다. 淸州帥 파진찬 陳瑄,宣長 형제는 일단 후손이 없는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유는 역모를 했기 때문이죠. 나주진씨 진영략 장군은 역사적으로 고증할 수 없고, 나주진씨 시조는 여양진씨 4세 陳溫 예빈경공이며, 貫祖는 예빈경공의 아드님이신 5세 陳就 양주목사공이십니다. 어느분이 시조공의 선계인지...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고려개국초 창부령:陳原, 삼척진씨 시조:陳鏡 개국공신:陳評이 있습니다. 고려조 역사에 기록된 진씨들은 대부분 외자 이름(諱)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송나라인 陳琇선계설이, 陳養 선계설이었다면....
아버지, -조부에 해당합니다.
그건,진수-진양이 부자지간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제가 폰이라서 한문이 안되는데,문맥상으로는 귀화하지 않은 진수분과 부자지간이라는 말씀같으신데,헤깔리는군요.
陳守-陳養이 父子之間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대종회에서 말하는 시조공 선계-陳琇說은 동래시기와 년대가 맞지를 않고,
시조공 선계-陳養설이었다면 역사적으로 검토해 볼만하고,
동래시기를 토대로 년대를 추정하면,
아버지-조부항렬에 해당된다는 뜻입니다
숨어살았다.후손 총후 비로소 입사하여 이부문.즉,동래조에서 시조까지 한대이상이 더 계시다는것으로 해석가능하잖아요?
근데,조정에 귀화하면,대체적으로 벼슬을 받는데,왜 숨어사셨
냐 하는 부분과,시조님이 벼슬을 했으면,2세조께서 병졸에서 시작할수가 없는데,도대체 영문을 모르겠읍니다.진 숙이분이 중간에 탄핵을 받아 면직된 시기가 있는데,이때 병졸이었다면,
그나마 납득이 조금될것 같읍니다
시조공 사적자체가 앞뒤가 맞지를 않습니다. 이자겸의 난을 토평하여 여양군이란 군호를 받았다하지만 사서에 기록이 없어 정체성 정립에 큰 모순점이 되지요. 지적하신 '공신의 아드님' 2세조-진준 선조는 고려사 진준편에 行伍-병졸에서 공을세워 여러번 승진 참지정사,판병부사에 올랐다."라고 적고있습니다. 음서제가 있으므로 공신의 자제라면 군역을 면제받을 수 있고 또한 바로 出仕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러하지 못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고려사 역시 조선초에 집필되었습니다. 문제가 되는 행오라는 표현이 집필자 사견이었을 가능성 또한 없지 않습니다. 무관 말직에서 시작하여 군최고위직까지 오른 인물
을 그렇게 표현했을 수 도 있지 않을까요? 고려의 역사는 조선이 개국되면서 상당부분 훼절되었다고 보여집니다. 나라의 역사가 그러한데 백성의 씨족사가 제대로 전해진다는것은 기대하기 어렵겠지요. 이 시점에서 어느것이 옳은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선조의 사적이 미흡하면 차선책으로 학자를 모시고 상대사를 연구하여 사적을 재구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전)연세대학교 교수 양권승 박사를 모시고 여양진씨 상대사를 연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양진씨 대종회에선 선조의 역사를 부정한다고 우리를 매도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 입니다.
그런데,귀화설이 사실이라면,고려사-진준편에 왜 진준은 귀화인의 후손이다 이런 내용이 없는것일까요? 당췌 이해가 되질 않읍니다.시조이후의 인물중에서 대동보에 없는 진씨들은 이름이 잘못 전해졌거나,북쪽에 살아서 등재가 안되었다고 생각해 볼수도 있읍니다.진씨대동보도 조선중후기에 와서야 비로소 만들어졌고,진홍주이분의 서문에 보면,분명히 남쪽에 사는 종인들이 통문하여 이대목이 나옵니다.즉,처음 대동보에 북쪽에 사셨던 진씨종인들은 빠졌읍니다.당시,교통도 안좋았고,전국의 진씨들을 전부 실는다는건 불가능했겠지요.글고,각 가문마다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귀화설이라거나 고려때의 벼슬을 조작했을
가능성이있음.
진준은 전에 티비드라마-무인시대에 보니,정중부정권의 실세라고 적혀있더군요.근데,전 2세조이하 3세조 모두 무인에 병부상서면,충분히 경대승.이의민등같이 무신정권의 실권을 장악할 정도는 되지않았나 싶은데,뜻이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물론,실권을 잡았다면,나중에 누군가에게 멸족에 가까이 되었을지도 모르니,어찌보면 다행이지만요.
전기축보 수보책임자들을 살펴보면 전남지역(수보청소재지?)에 연고를둔, "예빈경계 정자공파,참의공파,목사공파 후손이며, 매호공후손인 진홍주님은 서문을 썼습니다. 교통수단,통신등 열악한 환경속에서 여양진씨의 최초족보가 만들어 지게됩니다. 지적하신데로 이북은 남한의 최남단 전남까지 오가기도 힘들었을 뿐만아니라 연락조차 하기 어려운 당시를 추정한다면 수보에 참여한다는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후 후기축보, 을축보, 기유보, 갑인보까지의 내용을 보면 누보된 후손이 보를 재록하면서 계속입보를 하게됩니다. 6.25동란으로 남북이 분단되면서 북한에 거주하는 후손은 자연스럽게 누보되게되지요.
2세조이하 3세조 모두 무인이라고 하는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3세조:진광순은 문과에 장원급제한 기록이 고려사에 실려전하며, 진광수 병부상서공의 사적은 동문선에 기록되었는데 사료를 살펴보면 내직인 낭중(정5품)문관직에 계시다가 안서(현 황해도 해주)대도호부사로 나가시어 선정을 베푼기록이 동문선 서하집에 실려있습니다. 5子로 계대된 진광현도 樞密副使로 전하는데 문신으로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5형제중에 3분이 문신인데, "2~3세조 모두가 무신으로 정리된 지금까지의 여양진씨 씨족사에, "이런내용들이 본 필자가 동의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중간에 입보한 경우는 북쪽에 살았던 진씨들이거나,누락된 종인들.진씨로 편입된 경우(이 경우는 진씨가 조선에서는 한미했으니,크게 해당사항이 없다고 개인적으론 생각듭니다만)즉,6.25이전부터 북쪽의 진씨들은 누락되었고,이들이 처음이후의 족보에 다 입보했다고 생각되지는 않읍니다.일부만 입보되었겠지요.
남쪽 역시 누보된 후손이 있었을테고... 북쪽은 상대적으로 정도가 심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구한말과 일제치하에서 저녁 끓일 걱정을 해야할때 수단금마저도 큰 부담이었을것입니다. 정미, 임신보를 살펴보면 절손되었거나 입보하였다해도 휘자만 전해지는 계대가 부지기수이며, "북한/남한에 거주하는 일가들중에 단금을 내지못하여 선계를 밝히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수 있었을것이란 추측이 듭니다. 조선의 수도는 한양(서울)이었고 전기축보를 비롯해서 6.25 이전의 5大譜 역시 남쪽에서 족보를 편수했으니, 북한은 지리적으로도 불리했을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생활의 형편도 남한보다는 궁핍했을것이고요.
동감입니다.
임신보 수보할 당시에도 수단금을 입금치못해 입보를 하지못한 분들도 있고
특히 무인보가 폐보로 인하여 이북쪽에 거주한분중 일부가 임신보에 누보가 된것으로 압니다.
여양진씨 대동(임신)보 의 사적과 계대는, 대수술을 해야합니다.
부분적이지만 오류가 너무 심합니다.
사적과 계대를 다시 정리하여 정체성을 확립하는일이 시급하며,
또한 한글세대도 읽을 수 있는 국.한문 혼용의 족보가 절실한데,
대종회는 관심이 없는것같아 안타까울 뿐입니다.
잘 보고 갑니다
대종회는 기대 하기는 어렵고
진씨인물 자료 발취한 글을 읽어니 귀하에 노고에 감사드리며
충분한 자료가 집계되면 바로잡을 것은 바로잡아야
다녀가셨군요. 댓글 감사합니다.
공부할 게 너무너무 많습니다. 저 또한 대종회보다 더 자료가 많은 게 너무 좋습니다.
그렇습니다. 지난 10여 년간 선조님에 대한 역사의 편린을 주어뫃으며 많은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아부지 여양진씨의 역사를위해
늘 공부하시고 낮과밤도 부족해
새벽을지나 아침까지 끊임없이
연구하시는 모습에 늘존경스럽습니다.
이제는 책보시고 글쓰시는 일보다
건강을 생각하시길 간절히 바라며...
ㅡ광주수완지구아빠딸올림ㅡ
우리큰딸이 다녀갔네^^ 염려해주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