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충청도 훌륭한 인물들의 고향 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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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0. 21:54조회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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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인물들의 고향 홍성
결성현은 1914년에 홍성군으로 편입되었다. 이곳에 들렀던 조선 전기의 문신 이안우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나그네 길 어언 3월도 중순, 난립한 산봉우리 앞의 석보를 찾았다. 울타리 가의 복사꽃은 비 맞아 더욱 아름답고, 교외의 빈터엔 꽃다운 풀들이 연기처럼 덮여 있네. 해는 수많은 섬 밖으로 잠기고, 새는 끊어진 구름 속으로 날아 없어진다. 백 년간 흉하고 망한 이 성에 올라보고, 개연한 한숨을 절로 지었다.
또한, 김백영은 “외로운 성에는 일월도 한가한데, 창망한 바다는 운연으로 막혔구나”라고 하였는데 그가 왔을 무렵 결성읍성에는 여섯 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첨은 그의 시에서 “풍진 일어 일찍이 싸움하던 땅에, 성보 쌓아 다시 인가의 연기 오른다. 수자리의 저 피리는 성루 위에서 부는데, 고기잡이하던 배는 언덕 가에 버려두었구나”라고 노래한 바 있다.
이 일대의 고을은 모두 오서산 북쪽에 있다. 예부터 까마귀와 까치가 많아서 오서산(烏棲山)이라 불렸던 산의 정상에 서면 서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곳에서 이 땅에 빼어난 자취를 남긴 인물들이 많이 태어났다.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라는 말로 널리 알려진 고려 말의 장군이자 정치가였던 최영, 사육신으로 널리 알려진 성삼문이 홍북면 노은리에서 태어났고, 고려 말의 고승 보우가 홍성에서 태어났다. 또한 청산리전투로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김좌진이 1889년 갈산면 행산리에서 태어났으며, 시인 한용운은 1879년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오서산에서 본 홍성 일대
예부터 까마귀와 까치가 많아서 오서산이라 불렸던 산의 정상에 서면 서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어느 해던가, 육당 최남선과 만해 한용운이 파고다 공원에서 마주쳤다. 최남선이 한용운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만해, 오랜만이올시다.” 그러자 한용운은 “당신은 누구시오?” 하고 쌀쌀맞게 되물었다. “나 육당이올시다” 하자 한용운이 “육당이 누구시던가?” 하고 물었다. 최남선이 “나, 육당 최남선이오. 그새 잊으셨습니까?”라고 하자, 그 말을 들은 한용운은 “내가 아는 육당은 벌써 죽어서 장례를 치른 지 오래올시다” 하며 표표히 지나갔다. 이렇듯 불의에 타협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자신이 정한 원칙을 고수해 나갔던 사람이 시인이자 승려이며 독립운동가였던 만해 한용운이다.
1879년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난 한용운은 6살에 마을의 서당에서 한문 교육을 받았다. 한용운은 어려서부터 한번 본 것을 잊어버리지 않아서 천재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본명은 정옥, 아명은 유천, 법명을 용운, 법호를 만해라고 한다. 한용운이 15살이 되던 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고, 그때 그의 아버지와 형이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여 죽고 말았다.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했던 한용운은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가 4~5년 동안 머물면서 불경과 서양의 여러 사상을 공부한 후 백담사에서 불문에 들었다.
한용운 생가
시인 한용운은 1879년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이곳 생가는 1991년부터 주변지역이 정비ㆍ복원되어 사적화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이 한창이던 1894년 여름, 그의 나이 열여섯에 부모님과 아내에게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집을 떠났던 상황이 「시베리아 거쳐 서울로」라는 그의 수필에 남아 있다.
노자도 지닌 것이 없었다. 그래도 내 마음은 태연하기만 했다. 서울 가는 길, 방향도 몰랐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가리켜 주겠거니 하고 퍽 태연하였다.
그러나 해는 기울고, 발에서는 노독(路毒)이 나고, 배는 고파 오장이 주리어 차마 촌보(寸步)도 더 옮겨 디딜 수 없기에 길가에 있는 어떤 주막집에 들어가 팔베개를 베고 하룻밤을 지내노라니, 그제야 이번 걸음이 무모하였구나 하는 생각이 났다.
서울로 가던 길에 어떤 사람에게서 설악산 백담사에 법력 높은 도사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강원도로 발길을 옮겼다. 하지만 백담사에서 도사는 만나지 못하고 오세암에서 머물며 불목하니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양계초(梁啓超)를 읽던 중에 세계 일주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만해는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그 때 그가 세운 계획이 「북 대륙의 하룻밤」이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그 길로 경성에 와서 보니 기대하던 세계의 지리와 사정에 다하여 대강이라도 체험담을 들을 곳이 없었다. 나의 교제가 넓지 못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되었겠지만 실로 세계적 체험을 지닌 사람이 적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지도와 문자 상으로 본 것을 기초 삼아서 진로를 스스로 결정하였다. 가까운 러시아로 먼저 가서 중구라파(中歐羅巴)를 거쳐 미국으로 가기로 하였으므로 원산에 가서 배를 타고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곧바로 실천에 옮겼으나 그의 꿈은 해삼위에 도착하며 깨어지고 말았고, 고은 시인은 『한용운 평전』에서 다음과 같은 애석한 글을 남겼다.
만약 이 여행의 첫걸음이 이런 좌절로 끝나지 않고, 그의 모험심대로 시베리아 횡단이 실현되고, 중구, 서구를 지나서 대서양을 횡단, 미주로 건너갈 수 있었다면 그의 운명은 전혀 다른 표현으로 확대되었을 것이다. 그의 여행은 그 여행에서 반드시 돌아온다는 보장이 확정되어 있지 않은 탐구의 기행이었다.
아마도 제정 러시아가 혁명 소비에트로 바뀌어 질 때까지 모스크바에 체류하였더라면 그는 조선 공산주의 지도자가 되었을 것이고, 그가 파리에 있었다면 아주 세계적인 근대철학을 갖추었을 것이다. 또한 그가 미국에 건너갔다면 이승만 이상의 국부적(國父的) 독립운동가가 되어서 극동의 한 정치지도자로서 성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가정이 없는 것’이라서 만해의 세계 일주는 좌절되었고, 그의 좌절은 민족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었다. 여러 해에 걸친 방황을 끝내고 『조선불교유신론』과 『불교대전』 등을 펴낸 한용운은 1919년 3ㆍ1운동과 민족 대표 33명 중 하나로 독립선언서에 ‘최후의 1인까지 쾌히 우리의 의사를 발표하라’라는 단호한 결의를 밝힌 공약 삼장을 덧붙였다.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아 옥중에서 갖은 고초를 겪었지만 굴복하지 않고 『조선 독립의 서』를 집필하여 상해로 보냈다.
감옥에서 나온 한용운은 강연 및 여러 활동을 하면서 1926년에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시집 『님의 침묵』을 펴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시 문학사상 가장 넓고 높으며 깊은 인간성을 표현한 진실한 시’라는 호평을 받은 「님의 침묵」과 「알 수 없어요」 등의 빼어난 시를 남긴 한용운에 얽힌 일화들이 몇 가지 있다.
1911년 불교계의 통제 권한을 조선총독부가 갖도록 하는 조선사찰령이 발표되면서 조선 불교는 어용화의 길을 걷게 된다. 태고사 대법당에서 주지 대회의가 열리고, 그 자리에 강연자로 초대받은 한용운은 전국에서 모인 승려들에게 물었다.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물음에 누구 하나 대답하지 않자,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은 똥입니다. 그런데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번에도 승려들이 얼어붙은 듯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내가 알기론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은 송장 썩는 것입니다. 똥 옆에서는 음식을 먹을 수 있어도 송장 썩는 옆에서는 차마 음식이 입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용운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그곳에 모인 승려들은 무언가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자리를 털고 일어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을 때 “송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고 한용운이 다시 물었다. 그 물음에 승려들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고, 그때 한용운이 상을 주먹으로 두들기며 뇌성벽력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그것은 바로 여기 앉아 있는 31본산 주지 네 놈들이다.” 그렇게 말한 한용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법당을 나가버렸다. 일제의 어용화 정책을 수용하는 대가로 수많은 재산을 챙긴 주지들이 한용운에게 꼼짝없이 당한 것이다.
그 후 한용운은 불교관계 항일 비밀결사단체인 만당(卍黨)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44년 69세에 세상을 마감하였다. 일찍이 『임꺽정』을 지은 벽초 홍명희가 “조선의 7천 승려를 다 합해도 만해 한 사람은 당해내지 못한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한용운은 우리 민족의 선각자였고 뛰어난 시인이었다.
한편, 결성의 만해 생가와 멀지 않은 곳에서 태어난 인물로, 청산리전투로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김좌진이 있다. 그는 1889년 갈산면 상촌리에서 태어났다.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란 그는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공부보다는 전쟁놀이와 말 타기를 즐겼다. 15세가 되던 1904년에 대대로 내려오던 노복 30여 명을 모아놓고 그들의 종 문서를 불태운 뒤 농사를 지어 먹고살 만한 논밭을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1905년 서울로 올라온 김좌진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고, 1907년 고향에 돌아와서 호명학교를 세운 다음 가산을 정리하여 학교 운영에 충당하게 하고 90여 칸에 이르는 자기 집을 학교 건물로 쓰라고 내놓았다.
홍성에 대한협회와 기호흥학회의 지부를 결성하여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한 그는 한성신보 이사를 거쳐 안창호, 이갑 등과 서북학회를 세우고 오성학교를 설립하였다. 군자금을 전달했던 족질 김종근을 찾아간 것이 화근이 되어 2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1916년에는 광복단에 가담하였고, 1918년 만주로 건너가서 대종교에 입교하였으며, 3ㆍ1독립선언의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38명의 민족지도자와 함께 서명하였다.
또한 대한정의단의 사령관을 맡았던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권고를 받아들여 북로군정서로 개창한 다음 무장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독립군 편성에 주력하였다. 왕청현 십리평에 사관연성소를 설치한 그는 스스로 소장이 되어 엄격한 훈련을 시키는 한편, 무기 입수에 심혈을 기울였다. 1920년 10월 일본군 대부대가 독립군 대토벌을 위해 만주로 출범하자 그의 독립군도 장백산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만나 전투를 전개하였다. 3일간 계속된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3천여 명을 사살하여 우리 독립운동사상 길이 남을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김좌진은 그 뒤로도 많은 활동을 벌이다가 1930년 1월 24일 산시역 앞 자택 200미터 거리에 있는 정미소에서 공산주의자인 박상실의 총탄에 맞아 순국한다.
만해기념관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 내에 개관하였다. 『조선불교유신론』과 『불교대전』 원전을 비롯해, 『세계지리』, 『영환지략』, 『음빙실문집』 등의 책과 시집 『님의 침묵』 초간본ㆍ각종 판본 등이 전시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훌륭한 인물들의 고향 홍성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5 : 충청도, 2012. 10. 5., 신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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