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명창을 꿈꾸는 소년 기준의 성장담이자
평생 더늠을 찾아 세상을 떠돈 노인 태평의 일대기이며
조선 후기 민중의 이야기를 담은 청소년 소설
누구보다 판소리를 사랑하지만, 재주가 없어 소리꾼이 될 수 없었던 노인 태평. 태평은 판소리의 기능뿐 아니라 의미와 철학을 하나뿐인 제자 기준에게 물려주려 한다. 하지만 기준은 민초들이 소리의 주인이라는 태평의 말에 반발하는데. 과연 기준은 소리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진정한 명창으로 거듭나게 될까?
우리 소리와 고전을 사랑하는 어린이·청소년 작가 정혜원의 장편소설 《누가 소리의 주인인가》가 현북스에서 출간되었다. 소년 기준은 무당 집안 출신으로 백정 일을 도우며 살아간다. 오른쪽 눈이 툭 튀어나와 ‘오징어 눈깔’이라 불리며 멸시받는 기준이 가진 유일한 재능은 소리. 유명한 소리꾼이 되어 천대받는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기준에게 노인 태평이 나타난다. 태평은 판소리를 속속들이 꿰고 있는 보기 드문 귀명창으로 판소리 열두 바탕 가운데 하나인 〈적벽가〉의 시초가 되는 〈화용도〉를 처음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그 사실을 모르는 기준은 태평이 어째서 판소리 중 가장 어렵고 힘든 소리인 〈화용도〉만 고집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하루빨리 태평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야겠다고만 생각한다.
소설에는 태평과 기준이 살았던 조선 후기의 시대적 상황이 풍부하게 녹아 있다. 양반, 아전, 농민, 상인, 무당 등 다양한 백성들을 통해 태평과 기준이 거쳐 온 예술 여정이 사회적 의미망 속으로 퍼져 나가는 모습도 엿볼 수 있기에 이 소설은 기준과 태평의 소리 이야기이자 당시 민중들의 애환이 담긴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자 소개
정혜원
우리 소리와 고전을 사랑하는 어린이·청소년책 작가입니다. KBS ‘흥겨운 한마당’ 제1회 귀명창 대회에서 장원을 한 뒤, 국악음반박물관 자료집성지 〈판소리 명창〉 편집장을 지냈고, ‘나라음악큰잔치’와 ‘전주세계소리축제’에서 판소리 공연을 기획·진행했습니다.
더 많은 어린이들에게 판소리를 알리기 위해 쓴 《판소리 소리판》으로 우리교육 어린이책 작가상 기획 부문 대상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역사에 뿌리내린 외국인들》로 국경을 넘는 어린이 청소년 역사책 대상, 《매 맞으러 간 아빠》로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받았고 《암행어사를 따라간 복남이》로 한국고전번역원 우리 고전 원고 공모에 당선되었습니다. 그 밖에 《무덤이 들썩들썩 귀신이 곡할 노릇》 《삼국의 아이들》 《우리 신화 여행》 《북촌 김선비 가족의 사계절 글쓰기》 《화랑 따라 구석구석 경주 여행》 《배 속 간을 어찌 내고 들인단 말이냐》 《백곡 선생과 저승도서관》 《어린 이산과 천자문의 비밀》 《딱 한마디 우리 노래》 등의 책을 썼습니다.
출판사 리뷰
기준은 무당 집안에서 태어나 천대받으며 살아간다. 기준이 신분 상승을 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재주를 살려 최고의 소리꾼이 되는 방법뿐이다. 어느 날, 판소리 명창 송흥록의 소리판이 열린다는 소문에 찾아간 곳에서 보기 드문 귀명창인 태평을 만난 기준은 대뜸 그에게 자신을 제자로 거둬 달라고 청을 하게 된다. 자신은 재주가 없어서 또랑광대도 되지 못한 사람이라며 한사코 거절하려는 태평을 기준은 설득한다.
“어르신께는 명창들에게 없는 것이 있어라우.”
갑자기 기준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게 뭔 말이다냐?”
태평의 물음에 기준은 숨도 쉬지 않고 대답했다.
“소리를 대하는 마음이지라우. 세상에 판소리를 잘하는 명창은 널렸지만 어르신만큼 진심을 다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구만요.”
(중략)
갑자기 기준이 군목질을 하더니 소리 한 토막을 뽑았다. 송흥록의 단가 〈천봉만학가〉였다.
(중략)
“얼씨구.”
태평은 저도 모르게 추임새를 했다.
짧은 단가였지만 기준은 밀고 달고 맺고 푸는 소리의 흐름을 잘 알고 있었다. 한 번 듣고 사설과 곡조를 모조리 외워서 부르다니 놀라웠다. 배워서 한 소리가 아니라 타고난 소리였다. 기준은 하늘이 내린 목, 소리 광대라면 누구나 원하는 천구성을 가졌다. - 본문 72~73쪽
기준은 태평에게 소리를 배우고, 태평은 성심을 다해 어린 제자를 돌보고 가르친다. 그러나 기준은 태평의 가르침이 영 못마땅하다. ‘소리의 주인이 누구인가?’라는 알쏭달쏭한 화두에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은 기준의 바람과는 달리, 태평은 소리의 정신과 의미를 기준에게 전해 주는 것에 더욱 몰두하기 때문이다.
“소리의 주인이 누구냐?”
농민군에 대한 설전 이후 태평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민초라는 말인 게라우?”
기준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민초뿐이겄냐? 고을 아전도 될 수 있고, 고관대작이나 임금님도 될 수 있지야. 허나 진정한 광대라면 제가 발 딛고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똑똑히 알고 소리를 해야 하느니.”
소리는 모든 이에게 똑같이 공평하지만, 광대는 제 본분을 지켜야 한다. 명창이든 또랑광대든 간에 광대는 민초의 편에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런 말을 기준에게 하고 싶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 본문 177~178쪽
기준은 태평이 〈화용도〉만을 고집하는 점이 이상했다. 어렵고 까다로운 〈화용도〉보다는 다른 판소리 열두 바탕을 두루 배워 명창으로 이름을 날리고 싶었기에 기준은 태평에게 왜 〈화용도〉만을 고집하는지 직접적으로 묻는다.
그 물음에 태평은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못한다. 득음을 하기 위해 소리를 갈고닦는 것도 중요하지만, 서슬 퍼런 송곳을 가슴에 품으라는 말을 차마 기준에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태평이 만난 명창들은 소리 속에 송곳만 감춘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창검이 번득이기도 했고, 도끼가 날을 세우고 있기도 했다. (중략) 더 이상 〈화용도〉는 영웅호걸이 지략과 용기를 뽐내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또한 무과 급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호랑이에게 외아들을 잃은 시골 아낙, 임진왜란 때 죽음을 각오하고 적을 막아 낸 연안 읍성의 백성들, 최소한의 먹을 것을 요구하다 난동을 피운 죄로 목이 달아난 훈련원의 군사들, 무거운 세금을 견디다 못해 고향을 등지고 도적이 되어 버린 전국 각지의 농민들. 태평이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화용도〉에 나오는 군사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천오백 년 전 중국 삼국시대 이야기가 아니라 엄연한 조선의 현실이었다. - 본문 194쪽
결국 기준은 태평이 자고 있는 틈을 타 곁을 떠나게 된다. “꼭 명창이 될라요.”라는 말을 남기고. 훗날 성인이 되어 임금 앞에서 소리를 한 ‘어전 광대’가 된 기준은 제자로 거두려 했던 아이의 죽음을 마주한 후에야 비로소 태평의 뜻을 이해하게 된다.
가장 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소리 광대는 보면 안 되는 세상의 비밀을 본 사람이라는 말, 판소리란 권력을 독차지한 양반들의 잔학과 탐욕을 고발하고 험난한 질곡 속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을 어루만지는 것이라는 말, 그러므로 〈화용도〉의 모든 더늠에는 이름 모를 백성들의 한과 슬픔이 녹아 있다는 말이 귓속에 알알이 들어와 박혔다. 태평에게 수없이 들었지만 철저히 부정했거나 한 귀로 흘려보냈던 말이었다. - 본문 299쪽
기준은 태평이 자신에게 남긴 제목 없는 소리책을 받아 들고 고민한다. 〈화용도〉 소리책이다. 이 책의 이름은 태평이 이름 붙인 〈화용도〉인가, 아니면 세상에 알려진 〈적벽가〉인가? 고민하다가 기준은 ‘적벽 화용’이란 글자를 서책 제목으로 적는다.
이미 세상 사람들은 〈화용도〉를 〈적벽가〉라고 불렀다. 소리책의 진짜 주인인 소리 광대들도 마찬가지였다. 기준은 무엇이라 불린들 어떠랴 싶었다. 어차피 적벽과 화용도에서 죽어 간 이름 없는 군사들의 피울음인 것을. - 본문 305쪽
판소리는 특정한 작가에 의해 어느 날 하루아침에 완성된 것이 아니다. 판소리는 이백 년 동안 소리꾼들이 한 대목씩 소리를 짜 넣어 이루어졌고, 더 넣었다고 해서 그것을 ‘더늠’이라 한다. 그 더늠에는 힘없는 백성들의 슬픔, 원망, 바람이 스며들어 있다. 소리꾼은 자신이 몸담고 살아가는 시대에 대한 깊은 고뇌와 성찰을 더늠에 담았다. 더늠은 현실에 대한 가장 날카롭고 치열한 비판이었음을 우리는 명창을 꿈꾸는 소년 기준의 성장과 함께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