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적 폭력과 비폭력 저항
-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
1열왕 21,1-16; 마태 5,38-42 /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2024.6.17.
우리는 어제 연중 제11주일의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시작될 수 있고, 그 과정은 또 어뗘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마침은 하느님의 뜻과 섭리에 따라서 반드시 실현되고야 만다는 이치를 들었습니다. 이 이치를 현대인들이 알아 듣기 쉽게 풀이한 20세기 예언자가 성 요한 23세 교황이고, 그 메시지가 바로 회칙 ‘지상의 평화’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4년 간에 걸친 장기간의 회기 끝에 치열한 토론을 거쳐 맨 마지막으로 공표한 사목헌장 안에 이 회칙의 뼈대가 담겨 있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그 뼈대의 핵심은 인간의 자유와 양심은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지상에 평화가 실현되고 하느님 나라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겨자씨처럼 시작되어야 할 하느님 나라가 그 출발점과 배경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하느님 나라의 가치와 전혀 상반되는 폭력과 죄악임을 일깨워줍니다. 이는 마치 어둠과 혼돈 속에서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과정과 흡사합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의 시작과 실현 과정과 마침은 하느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는 한처음의 섭리를 되풀이합니다. 그리고 악을 발판으로 삼아 선을 이룩하심으로써 세상의 역사를 완성하시는 종말의 섭리가 서서히 앞당겨 실현되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들으신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는 기원전 8세기 경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애초에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어진 공정한 질서가 어떻게 왜곡되어 갔는지를 보여줍니다. 바로 왕권에 의해서였습니다. 이는 당시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구약의 희년법이 얼마나 유명무실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로서, 공정한 질서의 핵심은 하느님께서 모든 땅과 재화의 주인이시고 백성은 자기 노동으로 노력한 결과만을 결실로 가져야 하며 땅과 재화에서 소외된 이들에게는 그 결실을 자비로이 나누어 주는 경제 질서와 이를 정치적으로 공정하게 보장하는 정의로운 권력에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인간을 위한 경제 질서요 정치 질서였던 것입니다.
나봇이 경작하던 포도원은 조상들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였고, 그 기원은 여호수아 시절에 열두 지파가 토지를 분배 받던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처럼 오래된 안식일 계명과 안식년 규정에서 발전된 희년법의 규정은 토지 분배 시점 이후에 여러 가지 개인적 사정이나 노력 여하에 따라서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저당을 잡히기도 할 수는 있으나, 안식년을 일곱 번 맞이한 그 이듬해에는 모조리 원상복구를 해서 토지의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규정이었습니다. 토지는 사람이 소유할 수 없고 관리만 할 수 있을 뿐이며 토지의 소유권은 오로지 땅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소유라는, 오늘날보다도 더 선진적인 토지 공유 사상의 표현이 바로 이 희년법 규정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다행히 나봇의 집안에서는 물려받은 포도원 토지를 저당 잡힐 필요도 없었고 팔아 치울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에 나봇은 그저 성실하게 포도원을 경작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포도원이 하필 왕궁 옆에 있었기로 아합 왕이 자기 정원으로 쓰고 싶은 욕심이 나서 팔라고 했지만 나봇은 조상들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이 토지를 함부로 팔 수도 없었으려니와, 설사 판다고 해도 희년법 정신과 규정을 지키는 이스라엘 동포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거래라면 희년이 닥쳤을 때 되돌려 받을 수라도 있지만, 이방인 출신 왕비 이제벨에 의해 놀아나던 아합 왕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거절한 나봇을 이제벨이 악한 꾀를 내서 결국 죽여버리고 나서 그 땅을 빼앗아 차지해 버렸습니다. 이 포도원 강탈과 살인 사건은 이방 민족들의 우상숭배 사상과 풍조가 왜 위험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며, 또한 이집트 탈출 시에 계시된 하느님의 존재와 법이 얼마나 무시되고 있는지를 똑똑히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아합 임금은 자신이 마치 하느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했으며, 이제벨 왕비는 아합을 죄악에 빠뜨리는 사탄의 노릇을 톡톡히 해 냈습니다. 창세기가 전해 주는 창조 설화의 원죄 이야기가 고스란히 반복된 것입니다.
이것이 어디 나봇 혼자서만 당한 일이었겠습니까? 왕국이 분열되고 다시 멸망하기까지 줄곧 지속된 타락상이었고, 이스라엘 역사 전반에서 만연된 악행이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 시대에는 이민족 로마의 지배까지 받게 되는 상황이 되어 버렸으니, 로마의 수직 폭력 아래에서 별별 수평 폭력에 해당되는 갑질들이 백성 사이에서 벌어졌을 뿐만 아니라, 특히 로마군 병사들에 의해서는 다반사로 저질러지고 있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어쩌다 마주친 로마 병사로부터 무례한 요구를 받아도 순순히 들어주지 않으면 뺨을 맞기 일쑤였고 속옷 같은 극히 개인적인 사유물까지도 아무렇지도 않게 빼앗기기도 했으며, 장비와 물건을 날라야 하는 로마 병사들에게 잘못 걸리면 천 걸음씩 징발당하기도 다반사였습니다. 군중 속에 끼어서 구경하던 키레네의 시몬이 기진맥진하시던 예수님의 십자가를 재수 없게 짊어져야 했던 사정이 여기서 기인한 것입니다.
도처에서 악이 판을 치는 이런 기막힌 상황에서 산상설교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악인에 대항하여 맞서는 지혜를 일러주십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의 속국으로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억울하게 인권을 침해받거나 징발 징용을 당하는 일이 흔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식민통치라는 부당하고 불의한 정치적 악을 용인하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 거대한 정치적 악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 안에서도 힘을 조금이라도 더 가진 자와 약한 자 사이에 일상적으로 악이 저질러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거대악이야말로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으로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적극적인 저항방법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오른뺨을 맞는 것은 왼뺨을 맞는 것보다 더 모욕적이고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오른손잡이여서, 누군가의 왼뺨을 때리자면 상대편 악인이 손바닥으로가 아니라 손등으로 뺨을 때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뜻밖에도 다른 뼘마저 돌려 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면 겉옷까지 내주라고 하시는가 하면, 로마 군인이 느닷없이 길 가는 행인을 붙잡아 자기네 장비를 들고 천 걸음을 가라고 징용을 하면 차라리 이천 걸음을 가주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악인의 악행이 기뻐서가 아닙니다. 그 악에 악한 방식으로 대응하면 똑같이 악인이 되고 말기 때문에 아예 그 악을 악으로 드러냄으로써 결국 선으로 바꾸기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폭력이 제도화되고 구조화되어 버린 극단적 사회악 상황에서 나온 잠정 윤리요 폭력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버리라는 고육지책입니다. 도저히 일상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윤리 규범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에는 불행하게도 이 극단적인 사회악 상황이 끝도 없이 되풀이되어 왔습니다.
역사상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폭력 포기의 가르침을 말 그대로 실천한 인물이 20세기 인도의 간디입니다. 그는 당시 인구 2억 명이 넘는 인도를 부당하게 식민통치하던 2만의 영국 군인들에게, 또한 힌두교도가 대부분인 인도인을 총칼로 억누르던 영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산상설교의 폭력포기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실천함으로써, 처음에는 인도 민중의 억울한 희생을 자초했으나 결국 영국인들의 지성과 양심을 찔러서 영국 군대를 철수시키고 조국의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지성과 양심이 찔렸던 사람들은 영국인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서방세계의 모든 지성과 양심이 그리스도인들이었던 자신들보다 더 복음적인 간디와 인도인들의 비폭력저항에 가책을 느껴서 정신적으로 항복했습니다.
이런 인도 간디의 모범을 뒤따른 사람이 미국의 흑인목사 마틴 루터 킹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백인들이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사냥해 온 흑인을 조상으로 둔 그들의 후예들을 단지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만으로 차별하는 사회악에 저항하여 흑인민권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 실천방식이란 버스를 이용하는 데 있어서도 흑인과 백인을 차별하는 데 항의하기 위하여 구태여 백인 전용 버스를 탄다든지, 공원의 흑백 구별 좌석을 부인하고 백인용 좌석에 앉는다든지 하는 비폭력저항운동이었습니다.
간디와 루터 킹이 모두 극렬분자의 총에 암살당했지만, 그들의 호소는 적중해서 사회적 차별은 제거되었습니다. 제도적 폭력을 용인해 온 인류의 문명사회는 비폭력 저항으로 폭력을 용인하지 않았던 이런 의인들의 희생 위에 한 걸음씩 진보해 온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기원전 8세기 경에 일어났던 아합의 포도원 강탈 사건은 오늘날에도 자본주의적으로 변형되어 숱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무수한 나봇들이 억울하게 자신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권리를 훼손당하고 있습니다. 법률과 정책이 아직도 가진 자들에게 유리하게 정해지고 집행되는 매우 오래되고 고질적인 관습 탓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오늘날의 세상은, 악에 물들기를 거부하고 겨자씨처럼 작지만 의로운 시작을 감행하는 간디와 루터 킹 같은 의인들을 필요로 합니다. 제도적 폭력이 구조화되어 버린 사회악의 현실이 여전히 사회적 약자들을 괴롭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예언자요 거룩한 인물로 추앙받는 요한 23세 교황이 일깨워준 바대로,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 안에 양심의 법을 새겨 주셨고 이 양심이라는 나침밤이 지시하는 대로 자유를 올바로 행사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자유와 양심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세상은 약육강식의 법칙만이 지배하는 무법천지가 되고 맙니다. 악에 물들기보다 선을 행하는 의인이라야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