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시
-그리움의 집, 시조 경험의 공동체
홍성란
외로우니까 집을 짓고 외로우니까 꿈을 꾼다
꿈 깨어 그리움의 집에 사람을 가둔다
하나도,
억울할 것 없는 물시계 가고 있다
-「물시계」: 『바람 불어 그리운 날』(2005), 시선집 『명자꽃』(2009)
외로워서 시를 쓰고, 외로워서 시집을 내고 풀잎 같은 이들이 이렇게 모여 살고 있다. 하나도 억울할 것 없지 않은가. 이렇게 고맙게도 한자리에 모여 따뜻한 눈길 나누고 있지 않은가. 억울한 마음들, 풀잎 같은 마음들이 모여 서로 등 두드리며 안부를 나누고 있지 않은가. 모두가 고맙다. 쑥스럽게 작은 목소리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모인 것도 기쁜데 또 하나 기쁜 소식. 지난 12월, 뉴욕의 하인즈 인수 펜클(Heinz Insu Fenkl) 교수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미국의 ‘유명한 월간문학 저널 『ASYMPTOTE』 1월 한국특별호’에 「낙뢰」, 「먼 길」, 「물시계」, 「따뜻한 슬픔」의 영문번역 시조와 육성 시낭송 파일을 올리고 싶다는 제안이 왔다. 기꺼이 수락했고 웹사이트 『ASYMPTOTE』에 탑재할 육성 시낭송 파일도 보냈다. 나도 모르게 추진된 이 일은 한국의 시조가 미국의 유명한 문학 저널에 소개되었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이렇게 시조는 세계 속의 문학으로 확장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 시인으로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내가 ‘나의 삶, 나의 시’에 대해 말하자니 낯간지럽다. 지난해 『월간문학』 12월호에 ‘나의 등단 이야기’ 원고청탁을 받아 「등단이라는 시작(始作)」을 썼으니 거기서 한 이야기를 좀 해본다. 참 무서운 게, 세상에 내놓은 글은 누가 언제 어디서 읽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먼 데 사람들이 글을 읽고 잘 읽었다, 가깝게 느껴진다, 만나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런 건 글 쓰는 이에게 마약이다. 「등단이라는 시작」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나는 내가 시인인 줄 몰랐다는 이야기. 나의 첫 작품은, 부여의 코흘리개가 가난한 부모님을 따라 상경해서 초등학교 3학년 때 쓴 동시 「보리」라는 이야기. 담임 이화자 선생님은 보리 이삭을 바탕에 크게 그리시고, 땀 흘리며 수확하는 농부를 구릿빛 청동인으로 묘사한 나의 동시를 써서, 시화 액자를 만들어 복도에 걸어주셨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리고는 외로워서 시를 썼다는 이야기. 결혼과 함께 오륙도가 내려다보이는 동삼동 패총 부근에서, 을숙도 가까운 하단동에서, 공비가 출몰했다는 다대포에서 한 5년을 살았으니 객지의 외로움과 그리움을 글로 표현했고 그런 글들은 라디오방송 전파를 탔다. 서울로 돌아와 중앙일보 독자투고란을 만났고, 서벌 선생님, 김제현 교수님은 나의 시조를 번번이 뽑아주셨으니 소액환 오천 원은 쏠쏠한 재미요 자랑이었다. 1988년에 고배를 한번 마시고 1989년 10월, 경복궁 근정전에서 열린 중앙시조백일장에 장원급제하면서 세상의 모든 길은 시조로 통하게 되었다. 늘 목마른 공부도 이때부터 다시 시작했다. 경주마처럼 좌우편을 가린 안경을 쓰고 달렸다. 친구도 없고 취미도 없는 시조 벌레, 달팽이처럼 살았다. 지금 남은 것은 책더미와 읽는 버릇, 쓰는 버릇, 걷기와 명상뿐인 것 같다. 이 자양(滋養)은 모두 예술가의집 화요살롱 유심시조아카데미에 바쳐질 것이다.
나는 『매혹』을 내면서 버리기 위해 모았다고 했다. 어제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지금 ‘이 순간’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이라는 영원(永遠)이 내면에서 고요히 빛나고 있다. 이 의식의 빛에 닿는 지금 ‘이 순간’이 기쁘다. 『매혹』에 올린 사진은 2016년, 한국 문단의 큰 어른들을 모시고 떠난 유럽 여행에서 남편이 찍어준 사진이다. 콘서트에 올린 사진은 2013년, 프랑스 테르트르 광장 어느 카페에서 딸이 찍어준 사진이다. 이제 사진 찍고 싶지 않다. 「바람의 머리카락」처럼 날아가 버린 내 많은 머리카락이 그리운 시절이 되었다.
세월은 흐르는 게 아니라 쌓이는 것이라지
세월이 그저 물같이 흐르기만 한다면 무엇이 개구리밥 못 떠나는 우포늪 칠흑처럼 두려우랴 무엇이 희미해진 연인의 눈빛같이 그리우랴 서러움이 되거나 그리움이 되거나 바람 부는 가슴에 한 켜씩 내려앉아 혼자 아문 상처가 되고 오오 저기 저 봄날 터지는 갈래꽃 무늬가 되는 것을
슬픔도 아문 자리엔 손금 같은 길을 낸다
-「세월론(歲月論)」: 『황진이 별곡』(1998), 시선집 『명자꽃』(2009)
그렇다. 세월은 흐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쌓이는 것. 그러나 흘려보낸 것들은 돌아올 수 없다.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은 ‘과거라는 환상’이기에 버렸다. 쌓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조와 유심시조아카데미. 지금 이 자리에 계신 고마운 인연들이다. 돌이켜보면, 무슨 책무감이었는지 등단 이후 계속 공부하면서 창작과 논문 비평 작업을 버겁게 수행해 왔다. 이를 토대로 창작과 이론과 시낭송을 포괄하는 강연을 해왔다. 국내 강연과 미주와 유럽에 걸치는 낭송 강연, 화상 워크숍을 수행했다. 그 가운데 나의 화두(話頭)는 늘 ‘시인은 시로 말하라’이다. 세상 다 하는 날까지 공부하자는 것이다. 등단은 완성이 아니다. 시인의 길은 구도자의 끝없는 수행(修行)과 같다. 시집을 낼 때마다 ‘시인의 말’에서 시론(詩論) 같은 다짐을 했다. 나는 독자를 의식했다. 독자가 내 시에 공감 공명해주기를 바랐고 내 시를 즐겨 낭송해주기를 바랐다.
내가 변죽을 울리면/ 당신의 복판에 가 닿아
나와 같이 당신도 흔들리면 좋겠습니다.
-시선집 『백여덟 송이 애기메꽃』(2012)
깊고 먼 어둠에서 책상 밑의 어둠까지
은은한 꽃으로 피워 번지게 하려면
나의 제기는 얼마나 말을 버려야 할까
-『춤』(2013)
중정화평(中正和平). 절제하는 가운데 어디 치우치지 않으니 읽는 이의 마음이 맑아지고 잔잔한 기쁨이 흐르는 시. 절제와 함축으로 말을 버린 자리에 여백이 생기는 시. 여백은 독자가 쉬고, 상상하고 자신과 시인을 겹쳐보는 공간이다. 말과 말 사이 여백에 독자의 마음을 흔드는 언외언(言外言)의 감동과 여운이 숨어 있는 시. 이 ‘마흔다섯 글자의 우주’에 말하지 않고 말하는 시조의 미덕을 담아야 하지 않겠나.
『매혹』을 낸 뒤에 ‘나는 나답게’라는 다짐을 굳혔다. 지난해 2월, 초판 1쇄를 낸 뒤에 반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어리석게도 무언가를 기다리며 살았다. 기다린다는 건 미래의 일을 간섭하는 것. 오지 않은 시간, 미래를 간섭한다는 건 ‘기대’라는 망상에 붙들려 있다는 것. 과거의 일은 환상이요, 미래의 일은 상상이다.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혼자 웃는 나를 본다. 환상이나 망상에 들어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되어 기쁘다. 이렇게 되기까지, 나에게 닥친 ‘어둠’이라는 삶의 상황이 있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 할까. 그 악업(惡業)을 잇지 않기 위해 나는 결단을 내렸다. ‘어둠’이라는 인식은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삶의 상황’이다. 어둠은 지켜보는 것만으로 물리칠 수 있다. 어둠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맡김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
어둠을 지켜본다는 건 어둠을 받아들이는 일
지켜보는 것만으로 어둠은 물리칠 수 있다
아침해 솟아오르자 나는 빛이 되었다
-「방(房)」
무저항, 내맡김의 지혜를 조금 알게 되어 기쁘다. 이제 ‘내면의 평화’를 이루었다고 쓴다. 시를 쓰지 않았다면, 등단하지 않았다면 무얼 하고 있을까. 시인으로 살아 기쁘다. 이 기쁨을 세상과 나누고 싶다. 이 자리, 예술가의집 화요살롱 유심시조아카데미를 청년과 노장이 만나 지혜와 우정을 나누는 공동체로 만들고 싶다. 청년의 에너지와 청년의 검색과 업로드의 능력이 노장의 환산할 수 없는 경험 데이터와 통찰의 지혜를 만나 상승(上昇) 상생(相生)하는 공간. 청년과 장년, 등단 시인과 일반인들이 만나 우정과 지혜를 나누는 ‘시조 경험의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게 유심시조아카데미 성원들과 모든 역량을 집중하자고 다짐한다.
한국은 시조의 종주국(宗主國)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시조를 모르기도 하고 백안시(白眼視)하기도 한다. 이는 시조에 대한 오해와 질시에서 비롯한다. 이를 불식시키고 함께 즐길 수 있는 장(場)을 마련하기로 한다. 이야기를 좀 더 확대하면, 아직도 시조가 ‘세 글자 네 글자 맞추어 쓰는 3 · 4조의 정형시’라는 인식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는 시조 입문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학계의 논의이거나 시인들의 담론이거나 이 음수율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야기들을 어렵지 않게 만난다. 시조 율격론의 진전은 식민사관이 지배하던 시대의 음수율에서 1970년대의 음보율로, 음보율에서 음량률(성기옥, 『한국시가율격의이론』, 1986)로 나아가 음량률을 바탕으로 종장 첫마디의 3음절 정형(음수율)과 둘째 마디의 ‘변형 율격’을 수렴하는 혼합율격(김학성, 『현대시조의 이론과 비평』, 2015)으로 귀결되었다. 성기옥 교수와 김학성 교수는 우리말이 첨가어라는 언어구조를 가진다는 데서 율격론의 난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얻었다. 결론적으로 김학성 교수의 시조 율격론은 ‘음수율과 음량률의 혼합율격’이라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로써 시조의 율격론은 재론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혼합율격이라는 시조 율격론 도출의 근거는 1728년 김천택이라는 당대 최고의 가객이 엮은 가집(歌集) 『청구영언(靑丘永言)』에 바탕을 둔다. 이 가집에 실린 구체적인 고시조 텍스트에서 시조의 형식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3장 6구 12마디의 단시조와 말수가 한두 마디 늘어난 엇시조, 말수가 상당히 늘어난 엮음의 미학을 보여주는 사설시조(만횡청류)를 확인할 수 있다.
『청구영언』에는 전통적으로 우리말을 자연스럽게 구사하며 노래해 온 시조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고시조는 노랫말을 자유롭게 구사해온 노래(가곡창 · 시조창)였다. 네 마디씩 3장(章) 6구(句)로 이루어진 3장시. 4음 4보격 3장시. 이 구조는 마디와 마디(音步에 해당함)가 합하여 동기(句에 해당함)를 이루고 동기와 동기가 합하여 작은악절(章에 해당함) 하나를 이루는 악보의 구조와 같다. 시조에서 마디 하나의 음절 수는 4음격인데 마디의 음절 수가 각기 다른 것은, 음길이가 각기 다른 음표와 쉼표가 모여 마디 하나의 음량을 채우는 이치와 같다. 음악의 음표는 시조의 음절에 해당하고, 쉼표는 소리 나지 않는 음의 길이로만 측정되는 장음(長音)이나 묵음상태의 정음(停音)에 해당한다. 한 마디의 음량은 4음격인데, 음표로 채우지 못한 음량은 크기가 각기 다른 쉼표들이 채우는 악보와 같다. 어쩌다 나는 이 율격론을 바탕으로 꽤 많은 논문과 작품론을 써왔다. 게으른 탓에 논문집도 평론집도 내지 않았지만, 뜻하지 않은 율격론자가 되었다.
시조는 전통적으로 노랫말을 자유롭게 구사해온 노래시다. 글자 수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시시비비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나는 이를 『청구영언』의 실증적 자료를 가지고 이야기해왔다. 만횡청류(蔓橫淸流)는 익살과 해학이 넘치는 ‘한국어 미학의 보물창고’다. 국제PEN과 세계한글작가대회 등 여러 판에서 신명 나게 춤춘 것처럼 예술가의집 화요살롱에서 시조 미학의 흥겨운 한바탕을 풀어놓기로 한다. ‘그리움의 집, 시조 경험의 공동체’ 예술가의집 화요살롱에서 유심시조아카데미 성원과 함께 우정과 지혜를 세상에 나누기로 한다.
-『매혹』문학콘서트
2023년 1월 13일
예술가의집 다목적홀
-『문학저널』(202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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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내가 생각했던 일들이 그대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조금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일들이 아주 없었던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를 내가 지울 수도 있고 누군가 나를 지워버릴 수도 있습니다.
지워지고 잊히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세상살이, 인생이란 그런 것입니다.
늘 변하고 변하는 것.
변한다는 일은 가끔 변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해서 또 다행입니다.
하루하루가 공부입니다.
새로 알게 되는 일들이 우리의 키를 크게 합니다.
결론은 '모든 끝은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 앞에는 새로운 출발이 있습니다.
건강하고 행복하고 풍족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이 순간, 순간을 살아가기에 우리는 영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