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산마을 풍경 산책
김홍래
내가 가끔 가는 산마을은 월악산 국립공원 언제리인데, 멀리 '중앙고속도로'가 보이고 아주 낮게 자동차 소리가 아스라이 들리기도 한다. 남쪽으로는 소백산이 티끌 하나도 걸림이 없이 손에 잡힐 듯 눈에 들어온다. 뒤편으로는 야트막한 야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더 위쪽에는 제법 험준한 바위산이다. 북쪽으로는 錦繡처럼 아름답다는 금수산이 웅대한 모습으로 서 있고 그 아래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저수지가 있다. 저수지 바로 위에는 우리 집안 先山이다. 저수지 아래쪽에는 개울이 이어지는데 개울가로 취락이 발달해 있다. 이곳에서 아래로 20여 분 걸어가면 남한강 상류다.
벼가 무르익고 있다. 하늘은 건들바람에 말갛게 벗겨져 얄푸르다. 콩이나 수수, 조 같은 곡식들도 실하게 영글어 가고 있다. 갈바람에 출렁이는 덜퍽스런 곡식들의 황금물결이 그 어떤 풍경에도 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이맘때 쯤 고추밭에는 붉게 익은 고추가 주렁주렁 열려있어야 하는데, 올해는 긴 장마로 고추무름병이 들어 붉은 고추가 거의 없고 짓무르고 시든 고추만 더러 달려있다. 일 년 내 땀 흘려 농사를 지은 농부들은 얼마나 허망하고 속이 쓰릴까? 안타까운 마음에 고추밭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는다. 들깨밭에는 깻잎이 제법 누렇게 익어 간다. 이제 곧 ’가을 깻잎‘을 따서 맛있는 장아찌를 담글 것이다. 산 아래에 밤나무는 긴 장마에도 꿋꿋이 버티더니 여느 해 못지않은 풍성한 밤송이를 매달았다. 툭툭 알밤이 떨어진다. 윤기가 나는 튼실한 것이 먹음직스럽다. 갈맷빛 수풀들은 시나브로 누렇게 물들어 가고 있다. 곧 물감을 뿌려 놓은 듯한 멋진 산골 단풍의 향연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끔 텃새들이 무리 지어 날아간다. 먹을 것이 지천으로 널려 있어 마냥 행복하다는 몸짓인 듯하다. 산마을을 산책하는데 어디선가 강쇠바람이 내 몸을 휘감고 달아난다. 폐부는 물론 머릿속까지 짜릿하도록 맑아진다. 가을 하늘은 푸르고 맑아서 멀리까지 조망할 수 있다. 걸으면 육체적인 건강에도 좋지만, 정서적으로도 훨씬 안정되고 풍요로워진다. 나는 이따금 산마을을 산책하는데 이 순간이 너무도 즐겁고 행복하다. 마음이 한없이 한가롭고 편안해져서다. 가슴 한구석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묵은 욕심의 찌꺼기까지도 내려놓을 수 있어 참말로 마음에 걸림이 없다. 푸근한 가을의 서정이 너무 좋다. 이런 서정은 그리운 사람을 불러내기에 충분하다. 산마을에서 나누는 그리운 사람과의 대화는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 그늘에 오래된 정자만큼이나 정겹다.
산촌의 풍경은 언제 보아도 좋다.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어떤 풍경보다도 순수하고 질박해서 좋다. 산골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모습들은 사람들에게 잔잔하고 담박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전혀 꾸밈이 없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산마을의 아름다운 모습 중에서 야생화를 빼놓을 순 없다. 특히 들국화와 구절초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군락을 이루어 피는 경우가 많은데 정초하고 수수한 아름다움이 있다. 주변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야생화도 많다. 들꽃들을 만나는 나의 마음은 어느새 참나무 새순처럼 순박해진다. 산촌길을 거닐라치면 해맑은 공기가 너무 상큼하다. 이따금 불어오는 산들바람은 나의 온몸과 영혼까지도 말끔히 씻어준다. 몸과 마음이 날아갈듯 가든하다. 산마을 길은 사계절이 아름답다. 봄 길은 아늑하고 안온하며 부드러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여름 길은 진한 녹색이 주는 시원함과 중성의 안정감이 있고, 특히 가을 길은 넉넉하고 풍성하며 어느 계절보다 서정적이고 낭만이 있다. 겨울 길은 한가롭고 여유롭지만 조금은 애틋함이 서려 있다. 산마을은 언제 걸어도 싫증 나지 않고 여유를 주며 절로 마음이 그윽해진다. 군데군데 빈집들이 눈에 띈다. 빈집 위로 풀 넝쿨이 뒤덮인 경우도 간혹 본다. 낡은 가옥은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고 여기저기 쳐진 거미줄에는 날벌레들이 위태롭게 걸려 있다. 사람의 흔적이 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 쓸쓸함이 배어 나온다. 오래전 사람이 살 적에는 시끌벅적했을 것인데……. 요즘에는 시골에도 노박이로 사는 사람이 별로 없다. 옛 추억들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간다. 지금이 산마을 풍경을 산책하기에 딱 좋은 때다. 가을이가 끝나고 추워지면 호젓하고 한적한 맛은 있겠지만 고적하고 텅 빈 들판을 바라보면 공허함이 더해 애잔함 마저 불러온다.
첫댓글 정말 자연을 꾸밈 없이 보여주는 산마을 풍경입니다.
바로 무상심이겠지요.
얄푸르다. 덜퍽스런, 갈맷빛, 강쇠바람, 질박한, 담박한, 가든한, 노박이 등
우리말이 무척 정겹습니다. 산마을 풍경처럼~~
엄동설한입니다.
건승하시기 바랍니다.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합니다.
월악산 등산했던 기억과 월악산의 풍경도 떠오르네요.
잘 읽었습니다.
올들어 가장 추운 날씨입니다.
건강한 겨울 나시기 바랍니다.
허술한 글을 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계절 여유를 주는 산마을 풍경이군요.
오랜만에 군더더기 없는 수필을 보게 되어 마음이 상쾌합니다.
이제부터 혹한의 추위가 계속 되고 있습니다.
편안하고 따뜻한 겨울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산마을풍경님과 같이 한 가을 들판 산책 상쾌하고 즐거웠습니다.
사계절 내내 특유의 아름다움으로 물든 시골 풍경이 그림처럼 떠오릅니다.
화원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새해에도 간강하시고 소망하시는 일 모두 이루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