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들이 먹어 치우고 새들이 쪼아 먹을 것이다
- 하느님 심판의 공정성에 대한 조화 감각과 균형 감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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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열왕 21,17-29; 마태 5,43-48 /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2024.6.18
이번 연중 제11주간의 말씀의 주제는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하느님께서 공정하게 집행하시는 심판에 대한 조화로움과 균형에 대한 감각을 주제로 강론하겠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나봇의 포도원을 아합이 빼앗은 죄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엘리야를 시켜 심판하시는 대목을 들었습니다.
복음에서는 이웃이든 원수든지 간에 하느님께서는 공정하게 심판하신다는 대목을 들었습니다. 선과 악에 대해서 산술적으로 똑같이 대하신다는 것은 공정함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는 악에 대한 편중함입니다. 선에 대해 상을 주시고 악에 대해 벌을 주시되, 악을 저지르거나 이에 물들어 죄를 저지른 이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의 처사가 공정하신 것입니다. 이 공정함을 본받는 것이 선악에 대한 조화로움과 균형에 대한 감각입니다.
인간의 자유와 양심은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균형을 맞추어야 합니다. 만일 자유가 양심을 거슬러서 행사될 경우에 조화는 깨지고 균형은 무너져서 죄악이 저질러집니다. 지상의 평화는 위협받고 하느님 나라는 가로 막힙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아합이 빼앗은 행위는 명백히 부조화와 불균형의 죄악이었습니다. 왕권을 남용하여 희년법을 어겨서 하느님의 법에 도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악인도 불의한 이도 선함과 의로움에로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뜻일 뿐입니다. 악인에게 비치는 햇빛이나 불의한 이에게 내리는 비가 그들이 저지른 악과 불의에 대한 용서가 아닙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공정한 자비입니다. 이것이 선악에 대한 조화와 균형의 감각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을 섬기는 사랑을 드러내야 합니다. 하지만 원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의 공정한 자비를 본받는 행위여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 원수를 이웃처럼 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사형시킨 빌라도나, 이를 추진한 사두가이들이나, 이를 교사한 바리사이들에 대해 용서하시긴 하셨어도,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이 저지르는 죄악이 무엇인지도 몰라서 용서하신 것이지 그들의 악행을 용인하신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하시려는 구원 사업을 가로 막으려던 그 악인들 앞에서 보란 듯이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셨으나 결코 그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으시고 당신의 제자들이나 막달레나 같이 믿는 이들에게만 발현하셨던 것이 그 공정한 자비로움의 실체입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에서 초대교회의 공동생활을 이룩할 수 있을 만큼 성령을 내려 주시고, 혁명당원들이 로마군을 상대로 일으킨 이스라엘 독립전쟁의 결과로 도성과 성전이 파괴되고 유다인들이 백만 명 이상 학살되던 참극 후에 초대교회를 소아시아로 옮기게 하시어 로마제국 전체를 상대로 복음화시키셨습니다.
이같은 역사적 사실이 바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고 가르치신 뜻을 드러냅니다. 유다인들은 아직도 여전히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있지만 극소수의 유다인 그리스도인들 – 대부분 성서학자인 이들을 ‘메시아닉 쥬’(Messiahnic Jews)라고 부릅니다 – 은 동족의 질시 속에서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합니다. 로마인들을 정치적 조상으로 또 그리스인들을 정신적 조상으로 모시고 있는 현재 유럽의 백인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완전함 그리고 공정함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가 역사적으로 나타난 실체입니다. 박해자였던 원수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근세 이후 유럽 백인 그리스도교 문명이 세계 역사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을 때 복음적으로 선교 활동을 벌이지 못한 실책은 두고 두고 아쉬움을 남깁니다. 세계적으로 높은 평판을 얻는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저서 ‘총, 균, 쇠’의 탁월한 분석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카 대륙에 살던 원주민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학살과 아프리카 대륙에 살던 원주민을 사냥하여 노예로 팔아 버린 노예 무역이나, 이에 저항하기는커녕 편승하여 선교 활동을 벌이던 유럽 교회 –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을 개종시킨 가톨릭이나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북아메리카 대륙을 그리스도교 신세계로 개척한 개신교나 마찬가지입니다 – 의 제국주의 선교는 역사적 대과오였습니다. 그리고 이 노선은 19세기와 20세기 중엽까지 지속되었고, 아시아 선교도 오늘날 아시아 대륙의 종교 현황이 보여주는 바처럼 엄청난 시행착오를 자초했습니다. 하느님의 공정함이나 완전하심을 본받기는커녕 불공정하고 불완전한 선교였습니다.
요한 23세에 이어 성인 반열에 오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에서 이러한 역사적 성찰을 바탕으로 이제 새로이 시작하자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1. 교회에 위임된 구세주 그리스도의 사명(Redemptoris Missio)은 아직 완수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스도 강생 제2천년기를 마감하며 인류에 대한 총체적인 전망에서 보면, 이 사명은 여전히 시작 단계에 머물러 있고, 따라서 우리는 이 사명 수행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을 선포하도록 재촉하십니다.
2. 교회사에서 보면 선교 열의는 언제나 교회 활력의 표지였으며, 반대로 선교 열의의 감퇴는 신앙 위기의 표지였습니다. … 이 문헌의 목적은 신앙과 그리스도인 생활의 내적 쇄신입니다. 선교 활동은 교회를 새롭게 하고, 신앙과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강화시켜 주며, 새로운 열정과 새로운 자극을 줍니다. 신앙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질 때 견고해집니다. 교회가 보편적 사명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백성들의 새로운 복음화를 고무하고 뒷받침해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복음 선교의 절박성을 더욱 강력히 선포하고자 합니다. 선교야말로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음에도 궁극적인 실재나 존재 자체의 의미를 잃은 듯해 보이는 현대 세계의 모든 개인과 온 인류에게 교회가 해 줄 수 있는 첫째가는 봉사이기 때문입니다. … 이 문헌은 또한 다른 이유와 목적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헌을 원하는 많은 요청에 부응하고, 만민 선교 활동에 관한 여러 의혹과 불투명성을 없애며, 훌륭한 남녀 선교사들과 그들을 돕는 사람들의 노력을 지원해 주고, 선교 소명을 장려하며, 신학자들이 선교 활동의 다양한 측면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설명하도록 격려하고, 개별 교회들 특히 신생 교회들이 선교사들을 파견하고 영입하도록 장려함으로써 선교 활동에 새로운 자극을 주고, 선교 활동 대상국들의 비그리스도인들과 특히 국가 권위들에게 선교 활동의 유일한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계시함으로써 인간에게 봉사하는 것임을 보증하려는 것입니다.
3. 모든 민족들이여, 그리스도께 문을 활짝 여십시오! … 그리스도를 모르고 교회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의 수는 지속적으로 늘고 있으며, 사실상 공의회 폐막 이후 거의 두 배나 늘었습니다. 성부께서 이 막대한 수의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당신 아드님을 보내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 교회의 선교가 절실함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 현대는 교회에 새로운 선교 기회를 제공합니다. 우리는 억압적인 이념들과 정치 체제들이 붕괴하고, 커뮤니케이션의 발달로 국경이 열리고 세계가 더욱 하나가 되어 가며, 예수님께서 당신 생애를 통하여 구현하신 복음의 가치들(평화, 정의, 형제애,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 등)이 민족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혼이 없는 경제적 기술적 발달이 오히려 하느님과 인간과 생명의 의미에 대한 진리를 추구하도록 하는 상황을 목격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복음의 씨를 뿌릴 준비가 더욱 완전히 되어 있는 인류의 지평을 교회 앞에 열어 주십니다. 저는 새로운 복음화와 만민 선교에 교회의 모든 역량을 쏟을 시기가 왔다고 느낍니다. 그 어떤 그리스도교 신자도, 그 어떤 교회 기관도 그리스도를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할 이 지상 과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교우 여러분!
아합과 이제벨이 기원전 8세기 북이스라엘 왕국의 왕과 왕비로서 나봇을 살해하고 그의 포도원을 강탈한 죄악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은 엘리야를 통하여 이렇게 예언되었습니다: “주님이 말한다. 살인을 하고 땅마저 차지하려느냐?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개들이 아합의 피를 핥을 것이다. 또 개들이 이즈르엘 들판에서 이제벨을 뜯어 먹을 것이다.”(1열왕 21,19.23)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의 공정함과 완전함에 대한 조화로움과 균형에 대한 감각으로 선교 활동에 대한 역사의식과 사명의식을 갖추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선교 사명에 대한 요한 바오로 2세의 촉구 메시지는 선교 활동에서 드러난 역사적 시행착오를 교훈 삼아서 바야흐로 예수님께서 하셨던 선교, 즉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는 조화 감각과 균형 감각의 발로입니다. 그리고 이 조화와 균형 감각에 따르자면, 역사적 시행착오의 당사자이고 아직도 좀처럼 신앙이 활성화되지 못한 유럽보다는 아직도 가능성이 무한대로 열려 있는 아시아에서 ‘예수의 선교’를 본격적으로 해야 한다는 촉구 메시지입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