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퍼슨 vs 해밀턴
양대 정당의 탄생(1793년)
그때 세계는
1795년 : 제3차 폴란드 분할(분할 완료)
1796년 : 청, 백련교도의 난 발발(~1805년)
초대 워싱턴 행정부에는 성격과 정치적 성향이 서로 극단적인 두 명의 인사가 포진하고 있었다. 국무장관 토머스 제퍼슨과 재무장관 제임스 해밀턴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여러 면에서 서로 매우 다른 사람들었고 사이도 그리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싱턴이 이들을 나란히 기용한 데에는 우선 인사 문제에서부터 공평무사의 원칙을 지킴으로써 갓 출범한 정부의 안정에 도움을 주자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둘은 취임하자마자 사사건건 대립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전국의 주요 정치계 인사들이 이 둘을 정점으로 각기 파당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미국 양당정치의 기원이 된다.
해밀턴과 제퍼슨은 우선 성격부터가 판이한 사람들이었다. 해밀턴은 《연방주의자 논집》 집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진작부터 열렬한 연방주의자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귀족주의자였고 민주주의에 대해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즉 무지한 대중에게 국가를 맡겨놓을 수는 없으며, 오히려 이들이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지 않도록 이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가 강력한 힘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는 반연방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지방분권주의나 인민의 권리 따위는 모두에게 해로운 무정부 상태와 동의어로 여겼다. 해밀턴은 강력한 귀족주의적 전통에 의해 질서와 안정이 유지되는 영국을 이상적인 국가의 모델로 삼았다.
이에 비해 제퍼슨은 열렬한 민주주의 주창자이고 반연방주의자였다. 새 헌법이 국가권력의 강화에만 목적을 둔 나머지 인민의 정당한 권리를 무시하고 있다는 그의 강력한 주장으로 새 헌법에 권리장전(The Bill of Rights)이 추가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정부가 강해지면 강해지는 만큼 인민의 권리는 작아지며, 이것을 막기 위해 인민이 국가의 일에 적극 관여하여 정부를 감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은 기본적으로 그들 스스로에 맡기고 정부는 질서유지 등 극히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여기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해밀턴과 달리 제퍼슨은 영국 사회와 정치를 비도덕적인 체제, 즉 소수의 귀족과 부자들이 국가를 틀어쥐고 다수의 인민을 억압하는 체제로 간주했다.
제퍼슨과 해밀턴의 대립은 우선 해밀턴이 추진한 일련의 경제계획안을 두고 벌어졌다. 제퍼슨은 해밀턴의 경제개혁안들이 명분은 그럴듯하지만 실제로는 가난한 농부와 노동자들의 주머니를 털어 부자들의 주머니를 채워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것은 그리 틀린 생각이 아니었다. 해밀턴은 국가를 운영하는 데 있어 가난한 대중보다는 부유한 소수의 협력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으며, 그의 경제개혁안 역시 주로 북부의 부유한 상인들과 금융업자들의 이익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연방중앙은행 설립안이 의회에 제출되었을 때 남부 출신 국회의원들의 대부분이 반대한 반면, 북부 출신 의원들은 압도적으로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법안은 근소한 차이로 국회를 통과했고, 남부의 불만은 극도로 고조되었다. 제퍼슨은 이때 "남부의 불만은 폭발 직전이다. 이것이 언제 터질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토로했는데 결국 이는 50년 후 벌어질 남북전쟁에 대한 예언이 되었다.
미국 양대 정당의 대부가 된 해밀턴(왼쪽)과 제퍼슨.
이들을 구심점으로 하여 미국의 정계가 뚜렷이 양분되어 전자는 연방파, 후자는 공화민주주의파가 되었다.
이들의 사이가 더욱 결정적으로 벌어진 것은 때마침 터진 프랑스혁명 때문이었다. 워싱턴의 대통령 취임 직후 프랑스에서는 시민혁명이 일어나 구체제가 몰락하고 새로운 시민정부가 들어섰다. 혁명의 여파가 자국에까지 미칠 것을 우려한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여기에 무력으로 개입할 조짐이 보이면서 유럽에서는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았다. 여기서 미국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모르는 척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프랑스는 독립전쟁 때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미국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영국과의 전쟁을 앞두고 프랑스가 미국에 보답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이제 갓 출범한 정부의 입장으로 볼 때 프랑스편에 가담하여 영국과 다시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미국은 1788년 프랑스와 맺은 조약은 당시 프랑스 국왕과 맺은 것으로, 국왕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지금 미국은 이를 준수할 의무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중립을 선언했다.
미국의 중립 정책은 해밀턴이 주도했다. 그러나 말이 중립이지 사실은 다분히 영국에 우호적인 중립이었다. 이것은 당시 미국의 경제를 위해서는 영국과의 교역이 필수적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프랑스혁명에 대한 해밀턴의 혐오 때문이었다. 귀족주의자 해밀턴의 눈으로 볼 때 프랑스 시민혁명은 자유와 평등을 위한 인류의 고귀한 투쟁이라기보다는 질서를 파괴하는 대중의 폭동, 부자들의 재산을 강탈하려는 거지들의 폭력에 불과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연방주의자들이 해밀턴의 이런 생각에 동조했다.
민주주의자 제퍼슨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프랑스혁명은 미국 독립전쟁의 고귀한 정신을 이어받은 것으로 압제와 왕정을 타파하려는 시민의 거룩한 투쟁이었다. 그는 미국이 프랑스 국민의 고귀한 투쟁을 지원하고 혁명을 분쇄하려는 유럽의 구체제 국가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신정부의 초대 미국 대사인 '시민' 주네(Citizen Genet)가 미국 전역에서 자코뱅 클럽을 조직하고 프랑스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자원대와 돈을 모을 때 제퍼슨은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반연방주의의 입장에 섰던 많은 사람들이 그에 동조했다.
결국 국내문제에서 비롯된 해밀턴과 제퍼슨의 대립은 프랑스혁명을 둘러싼 외교 문제에 이르러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1793년을 즈음해서는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미국의 정계가 두 파로 뚜렷이 나뉘었다. 해밀턴 주위에는 주로 북부 출신의 연방론자들, 제퍼슨 주위에는 남부 출신의 반연방론자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연방파', '공화민주파'라고 불렀으며, 다른 파의 사람들과는 같은 호텔에도 묵지 않았고 술집도 같이 가지 않았다. 이것이 오늘날 미국의 양대 정당인 공화당과 민주당의 기원이다.
연방파는 1812년 영미전쟁을 계기로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으나 노예제 폐지를 외치며 남북전쟁을 통해 다시 이전의 세력을 회복하고 공화당으로 당명을 변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화민주파는 1820년대에 제임스 먼로 대통령의 후임을 둘러싸고 당이 한때 분열되기도 했지만 앤드루 잭슨의 영도하에 다시 세력을 결집하고 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거듭나 오늘에 이른다.
연방파와 공화민주파는 이념적으로는 귀족주의와 민주주의, 지역적으로는 북부와 남부를 대표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미국 독립전쟁까지만 해도 반영 공화주의를 표방하던 북부가 프랑스혁명을 전기로 연방파의 본거지가 되었고, 반대로 귀족주의적 경향이 강했던 남부가 공화민주파의 산실이 되었다는 점이다.
오늘날에는 아예 양 정당의 이념과 본거지가 뒤바뀌어 있다. 연방파를 이어받은 공화당은 보수적 이념을 내세우며 주로 남부와 중부에 지지 기반을 갖고 있는 반면, 공화민주파의 후신인 민주당은 진보적 성향을 보이며 주로 북부와 서부 주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이것을 놓고 보면 연방파와 공화파의 대립은 이념 못지않게 지역적 대립의 성격이 강했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해밀턴과 제퍼슨의 개인적 대립이 원인이었다고는 하지만, 그 시원은 헌법 제정을 둘러싼 연방주의자들과 반연방주의자들의 대립, 나아가 개척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남부와 북부의 여러 가지 차이점들에서 비롯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출처 : https://m.blog.naver.com/PostList.nhn?blogId=sambolove 《미국사 100장면》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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