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조명 ②
송경애
송경애 신작시 1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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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외 9편
허공에 지은
기둥 없는 집
무심히 지나다 무너뜨렸네
나를 잡으려 덫을 놓은 거미
거미의 성을 허물은 나
무안한 거미
미안한 인간
무안과 미안 사이에서
헛웃음 흘리는 나
내가 없는 시간 속에서
나의 하루는 12시간
지구라는 시간을 먹은 몸이 빙빙 돌아
초점을 세워보려고 손 없는 눈의 촉수가
허공의 먼지 알갱이를 붙잡고
게오르규의 스물다섯을 보낸다
아주 어릴 적 할머니가 입에 넣어 준
술지게미를 삼킨 것처럼 잃어버린 시간이
나의 시간을 돌린다
안개 같은 풍경에 내 시간의 달빛을 걷어 내리면
나를 마시던 커피 잔 속에서 귀 잘린 시간을 건져 올릴 수 있을까
손톱 밑 가시가 몰래 돋아나
저 연둣빛 꽃 속에 웅크리고 있는 뇌의 망각
그 망각의 촉수가 골수에 숨어서
나를 조정調停하며 달려오는 아침
나는 없다
어디론가 분해 된 내가
허공에 둥둥 떠 회색의 모모가 된다
드라이플라워
어느 교실에서도 배운 적이 없는 꽃의 언어 장미의 언어
투탕카멘의 피라미드 속에서 미라가 된 언어 미라가 된 장미, 고비 사막의 바람에 날리는 모래알 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잠이 덜 깬 나에게 날이 선 말소리, 고막에 생채기를 그으며 뇌의 회로로 향한다 아주 오래전에 살았던 사막여우의 빙의憑依인가 빙빙 도는 내 뇌의 회로를 타고 오는 저 꽃의 말 심해보다 더 깊은 언어 속에서 나는 장미의 말꼬리를 놓쳤다
어느 그믐밤 석궁에 묻힌 샤자한 왕비의 무덤 속 그 무덤 속으로 내 숨소리가 벼락처럼 내리치는 듯 천둥의 장대 끝에 서서 내 정수리를 내려다본다 장미의 말을 프리즘에 가둔 나를
마른 꽃 갈피갈피에서 멈춘 시계 바늘이 내 옆구리를 툭 치고 간다
아우슈비츠의 하늘
시간이 멈춰 선 아우슈비츠
그 멈춘 시간 속에서 내 심장 돌이 되었다
유대인들 머리 위로 트럼펫 소리처럼 울려 퍼졌다던 나치의 말
“여러분 깨끗이 샤워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시오.”
샤워실 문앞이 마지막 황천길 된 가스실
그 가스실 앞에 벗어 놓았던
혼으로 남은 신발들
입 다문 빈 가방들
아이들 손때 묻은 장난감들이 혼으로 울고 있다
가스실 앞에 쌓여 있던 외투들이 쓰러지고
유리관 속 아우성들이 유령처럼 살아난다
귀향을 꿈꿨던 나무들이 무너지고
바람이 쓰러지고 노란 별들이 윙~윙~ 혼백으로 울고 있는 전시실
붉은 벽돌과 벽돌 사이에 낀 그들의 축축한 혼
그 얼음, 얼음돌이 된 붉은 심장의 별들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두 무릎 꿇은 지붕 위로
노란 민들레 홀씨, 하얀 혼으로 날아오른다
구천을 떠도는 별들
이승을 떠나지 못한 노란 별들이 민들레 홀씨로
아우슈비츠의 철조망에 걸려 있다
잠들지 못한 검은 새떼들, 철조망에 걸려 있다
*유대인 묘소 앞에서 무릎을 꿇어 사죄했던 독일의 전 총리
화花 화火
봄春川의 분지에 봄, 화花가 환하게 피었어요
꽃들이 0.1초도 가만히 있지를 못 하네요
뉴스에서는 매일 우크라이나 포격 소식
그 소식에 슬프고 화火가 나요
천사 같은 어린 생명들 머리 위로
포탄이 떨어지고 또 떨어질 것이라는데
나는 이렇게 꽃구경에 목 길게 늘여도 되나요
하나뿐인 목숨이 미치광이의 손 안에 있는 형제들에게
물 한 병을 위한 후원금 눈곱 만큼 보내놓고
마음 조금 가벼워져도 되나요
죽었던 땅이 꽃 잔치로 환하게 살아나는 봄, 봄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한 시인은 예언자인가요
우크라이나의 비명과 신음으로 2022년의 4월은
엘리엇의 예언처럼 잔인한 달이네요
전쟁광狂 악마의 궁 침대 위로
하늘의 벌, 천둥번개 내리치면 좋겠어요
봄, 봄이 죽어가는 이 화怒의 지상에
나는 spring처럼 spring으로 튀어 올라
화花를 피워내듯 화火를 들고
저 화염 속 천사들을 만나고 싶어요.
꽃들이 웃음으로 피어나는 이 4월에
피치카토pizzicato
책들이 귀를 닫고
식탁도 귀 닫은 얼음 거실에
티브이가 토르록 톡톡 던진 얼음알갱이들 노래
그 노래 현絃 위에서 돌고 돈다
피치카토, 피치카토
얼음 줄絃 튕겨 화음 기둥 세운다
이끼 마른 우물 펌프질하는 거친 숨소리
현絃과 현의 바람길 갈피갈피
검은 현絃 둥글게 감던 폭설暴說, 질퍽한 말의 늪이 된다
생명의 불기둥 세우는 저 활絃의 춤
하얀 세포를 깨우는 저 바람의 활
생명의 맥박으로 살아나는 피치카토
심장의 북소리여 피치카토여
북채를 돌려라 둥둥둥 두둥~둥
태풍의 눈 속에서도
길처럼 서 있는 저 삼나무 숲속에서도
푸르게 푸르르게 한 옥타브 두 옥타브 기둥을 세워라
오대산 선재길
나무뿌리에 걸리네
전나무 숲길
하늘이
숲속을 기웃거린다
숨소리는
바위에 부딪혀 돌아오는데 나는
문수동자가 슬쩍 숨겼을 것 같은
신발 속 왕모래 한 알을 찾는다.
아직 갈 길은 아득한데
털어도 털어도 숨어 있는
신발 속 그
압침 하나
페루에서 온 미라
일간지에 기사화 되어 타임머신을 타고 온 그
정강이를 가슴에 꼭 붙이고 백 살을 열 번쯤 살아야 하는
세월을 거슬러 온몸 꽁꽁 묶인 채 안데스 등허리에 숨어 있던 사람
사람들이 ‘미라’라고 부부르는 그가 신문 한 구석에 웅크린 알몸으로
데모 중이다
안타라*의 구멍마다 숨을 불어 넣었을 입술
제 이름도 잃고 영혼도 잃고
제물이었는지 죄인이었는지
반쯤 가린 얼굴이 손가락 사이로 휑하고 뚧린 두 눈이 깊다
동굴 같은 눈 그 속으로 천 년 동안 쌓인 말들이 숨죽이고 있다
간헐천으로 뜨겁게 솟아오를 때를 기다리는 기류가
안데스 등줄기처럼 까마득하다
죽어서도 죽지 못하고 천년을 숨죽인 그의 죄
흙으로 돌아가지 못 한 뼈와 살의 반란 저 반기反旗
굳은 몸을 높이 쳐들어 천 년 동안 얼었던 그의 심장
불꽃으로 솟아 화산으로 터져나가게 하면 안 될까?
저 긴 침묵, 하늘 높이 들어 자유로운 깃발로 펄럭이게 하면 안 될까
영혼의 나라에 닿을 수 없는 돌이 된 주검
자유의 몸으로 돌아가게 하면 안 될까
아, 억울한 저 미라의 입
따뜻한 국물에 밥 한 그릇 말아 얹은 소반을 내어주고 싶은 저
웅크린 돌, 구천을 떠 도는 도깨비
*페루의 민속 관악기의 일종
사이의 바람
바람과 구름이 기차를 탄다
구름과 별의 레일이 빨갛게 달린다
별과 하늘은 허리가 무거워 출렁 휘고 허리 휜 하늘은 새의 깃털 속에 고개를 묻는다 새는 겨울 나뭇가지 위에 달그림자로 얼어붙는데 다리가 긴 바람은 초가지붕 위에 눕는다 달의 둥근 얼굴이 박 속으로 숨고 은빛 가루처럼 쏟아지는 달빛은 간이역 난간에 어깨를 기댄다
역과 역 사이
달과 달그림자 사이
그 사이에서 나는 늘
떠도는 바람이다
모음모음의 물구나무서기
오래된 움직임의 반복이다
그 궤도에 숨은 바람
바람의 뒤에 숨은 입들이 연두 알을 슬고 있다
길가에도 강둑에도 먼 산 능선에도 연둣빛 너울이 아롱거린다
연두 알들 토독~톡 지구 겨드랑이에서 터지자 쿡 웃던 지구가
오른쪽으로 0.0001mm 밀려난다
연두 알의 입을 빼꼼 열고 풀들이 목을 길게 늘인다
카렌족 여인들처럼 목 길게 늘이며 휘파람을 분다
여린 귀들만 들을 수 있는 풀들의 노래
풀의 노래로 물드는 세상
세상이 연둣빛 물결이다
세상의 귀속으로 밀려드는 잎들의 말
모음모음모…… 음모음모음이 거꾸로 선다
‘음모’라고 흉내 내는 저 입, 잎, 뾰족 내민 잎들
‘봄’도 음모라고 할 입들
거꾸로 기울어진 잎, 그 입들이 깊게 눙쳐 놓은 늪으로
우수수 우수수 쏟아지는 그들의 입들이
모음모음의 늪으로 눕는다
음모의 입꼬리들이
송경애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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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깨에 손을 얹은 시
내 영역 밖의 세계, 그 세상이 궁금하여 기웃대다가 발을 들여놓은 시작詩作의 영토.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심상. 멀어질수록 놓고 싶지 않은 시작과의 줄다리기로 쌓은 시간들. 시간의 탑은 보이지 않으니 다행히도 무너질 리 없다는 어리석음으로 탑돌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시인은 무엇을 말하지 않을까? 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는 데 내 안에서 회오리로 일어나는 숱한 말들을 여백을 두고 그려 내야 하는 화선지 앞에서 나는 늘 심장이 멎을 것 같다. 이런 순간의 절절함을 저 비밀의 우물 속에 숨겨 놓고 조금씩 퍼 올릴 수 있다면 좋겠다. 이 간절함을 한 올 한 올 불태우다 보면 그 어느 시인도 생각해 내지 못한 나만의 시어로 한 편의 시를 써낼 수 있을까? 아직도 마침표보다 물음표가 더 많은 이 주체 하기 어려운 호기심과 열정 뒤에서 조심스레 그러나 다부지게 가속 페달을 밟아야겠다.
더 자주 바다의 모래톱에 하염없이 앉아보고 숲길도 걸어야겠다. 예리한 언어의 끝날에 심장을 베이더라도 사람들의 땀 냄새의 근원을 꿰뚫어 보는 시선을 길러야겠다. 더 낮게 소리를 죽이며 숨을 쉬고 더 넓게 시선을 넓혀 보고 더 깊게 숨죽여 나직이 노래도 불러야겠다.
여고 시절 작곡을 하려고 처음 손에 들었던 노란 표지 소월의 시집 <못잊어>. 그렇듯 그 누군가 가락을 붙이기 위해 내 시집을 들여다보는, 감히 범접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시의 세상에서 내 분신 시가 부끄럽지 않을 날 있을까? 그러기 위해 쓰고 또 쓰고 지우고 다시 쓰는 낮은 자세의 시인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35년 교직 생활 명퇴 후 내 귀한 삶의 시간을 함께하게 된 시를 쓰는 일에 감사한다. 겸허한 자세로 뚜벅뚜벅 시마와의 치열한 싸움의 길을 오늘, 내일모레 허락되는 날까지 가야겠다. 내일은 오늘보다 좀 더 나은 시작詩作을 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송경애 시인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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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2003년『문학예술』여름호 시로 등단.
❙시집
2012년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말』, 지혜 간. 2012년 춘천시 문화재단 지원금.
2020년 : <영상시집> 춘천시문화재단 지원금.
2021년 : 『바람의 암호』, 시와소금 간. 2021년 강원도 문화재단 후원금.
2023년 :『계보의 강, 그 얼음 성』, 상상인 간. 강원특별자치도 강원문화재단 후원금.
❙문학 활동
현, 강원여성문학인회 회장
한국시인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원.
강원문인회, 춘천문학인회 이사.
전, 춘천여성문학인회 회장. 삼악시 동인회장.
❙수상
제40회 이효석 백일장 산문 최우수상.
제9회 강원여성문학상 우수상.
제13회 춘천문학상.
제14회 춘천여성문학상.
❙학력 및 경력
가톨릭대학교 음악과(작곡 전공) 졸업.
강원대학교 교육대학원(음악교육전공) 졸업.
유봉여자중․고등학교(1972.3-2007.8) 재직 2007년 명퇴.
❙기타 수상 및 표창
강원도지사, 교육부장관, 한국교원단체연합회 회장, 강원도교육감 표창과 옥조근조훈장.
제23회 강원도 평등문화상/강원도지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