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세 직재 달성서공 휘 방경 사적 >
公(공)의 諱(휘)는 方慶(방경)이요,字(자)는 君吉(군길)이며,계출은 달성서씨니 시조에 고려 版圖判書(판도판서) 諱(휘)는 晉(진)이요. 세번째 전하여 諱(휘) 穎(영)은 三重大匡(삼중대광)에 達城君(달성군)을 봉하여 자손이 이로하여 살게 되었다. 諱(휘) 鈞衡(균형)은 吏部尙書(이부상서)에 諡號(시호)는 貞平(정평)이요,세종조에 미쳐 諱(휘) 沈(침)은 호를 龜溪(귀계)라 하며,정포은 문하에서 배워서 重望(중망)이 있었으며 龜巖書院(귀암서원)에 제향하다. 諱(휘) 義亨(의형)은 遺逸(유일)로 봉산에 주거하였으니 公(공)에게 증조가 되는지라. 조의 諱(휘)는 修健(수건)이니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으며,고의 諱(휘)는 龜瑞(귀서)이니 벼슬은 樞密(추밀)이요,비는 의성김씨에 金萬緖(김만서)의 따님이니 부덕이 있었다. 중종37(1542)임인년에 3월 19일에 縣城南里(현성남리) 자택에서 公(공)을 낳으니 용모가 범인과 달리 뛰어났다. 6세에 樞密公(추밀공)에게 배울 때 忠孝(충효) 두 글자에 이르러 문득 이르기를 효도는 마땅히 힘을 다할 것이요,충성인 즉 명을 다하여야 한다 하니 선공이 심히 기특하게 여기며 사랑하였다. 20세에 추밀공 상을 당하여 또한 이와 같았으며,탈상한 뒤에 정사를 짓고 현판을 直齊(직제)라 하였다. 연못을 파고 菊圃(국포)를 지으니 연화 국화가 사귀어 비치니 뭇사람들의 隱(국화를 은일화라 함)을 사랑하는 취미가 스스로 그 가운데 있는지라. 때에 책상을 떠나지 않고 三戒箴(삼계잠)을 지었으며,역리를 미루어 演義(연의)하고 陰符經(음부경)을 강석하였다. 앞길을 바라보고 용기있게 나아가는 뜻이 있었으며,옛것을 익히며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아는 학문을 취하니 한 때 많은 선비가 흠모하지 않는이가 없었다. 일찍이 李訥(이눌),崔東輔(최동보)등과 더불어 天山寺(천산사)에서 모임을 가졌을 때 노승 武甘(무감)이 생각보다 훨씬 총명하고 또한 선견지명이 있어서 말하기를 몇해 안에 병란이 크게 일어날 것이니 죽기로 지키며 대의를 온전하게 하는 것은 오늘 여기 계시는 여러 군자에 있습니다 하니 公(공)이 크게 망령되어 천기를 논한다고 꾸짖었다. 신묘년에 종질 克仁(극인)과 더불어 시사를 강론하며 말하기를 太白星(태백성)이 나타나니 시사를 가히 알겠구나. 미리 활쏘기와 말달리기를 익히며 두루 읍지를 살피고 동악에 집을 지어서 겨레의 안존을 이루어야 한다 하였다. 과연 이듬해 임진년 4월에 부산포 앞바다에 가득하니 왜적이 지나가는 곳에는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니 公(공)이 분연히 칼을 뽑아들고 종질 극인과 함께 죽기를 맹서하고 급히 향교로 달리니 李大任(이대임),李訥(이눌)이 또한 이르렀다. 곧 오성팔현의 위페를 받들어 임시로 龍巖窟(용암굴)에 안치하고 곧 義兵旅團(의병여단)을 제창하니 소리에 응하지 않는이가 없었다. 관군과 합세하여 적의 선봉을 꺽고 남아있는 성을 보수하더니 적진이 울산으로부터 월성(경주)으로 달린다는 소리를 듣고 곧 여단을 거느리고 달리고 경주부윤 尹仁涵(윤인함),판관 朴毅長(박의장)과 더불어 알천에서 합세하니 중인이 이르기를 삼천이라. 북을 울리며 교전하여 백여급을 참수하였다. 열읍에 병영하던 여러 의병장들이 금오산에서 합세하여,왜적 사백여급을 쏘아 죽이고 또 문천에 진을치다. 왕의 칙서를 읽으니 눈물나는 유시였다. 일군이 용완에 계시는 임금 곁에서 순직코자 서쪽을 향하여 조령에 이르니 적세가 천지에 가득한지라. 능히 통하지 못할 줄 헤아리고 사이 길로 쫓아 鼎津陣(정진진)에 도달하니 망우당께서 보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그대들이 이르니 내가 걱정이 없는지라 하고 드디어 더불어 협모하여 적을 참수하여 얻은 것이 심히 많은지라. 때에 대구 대왕산(현재 앞산)에 모여 맹서한 분으로 유서애,이오리,권화산 모모하는 여러 선배의 聲氣(성기)가 상응하여 향하는 곳은 다 이기니 왜란이 이에 지연되는 지라. 집으로 돌아오니 무술년이라 무릇 칠년 풍파에 수고로워도 자랑하지 않고 공이 있어도 공 있는 체하지 않으니,公(공)에서 비로소 우는 학의 소리가 하늘에 들리는 것을 보는 것 같다. 선조38년(1601)신축년에 종사랑을 제수하고 인하여 경주판관을 배수하고 제용감봉사에 오르다 壽(수)로서 嘉善(가선)을 더하셨다. 광해6년(1628)무진년 2월 26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팔십칠이요. 이해 모월에 瑞花(서화) 茱葡山(수포산) 해좌 두던에 예장하였고 貞夫人(정부인) 파평윤씨에 鵬(붕)의 따님이요,公(공)보다 칠년 먼저 돌아가시니 합봉하였다. 公(공)이 일남을 두었으니 大營(대영)이니 훈도요,훈도의 아들에 處精(처정)이니 첨정이요,첨정의 아들 삼형제니 유원이요,승원.이요,취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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