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정산 금선사
|
|||
김해 장유사
경상남도 김해시(金海市) 장유면(長有面) 대청리(大淸里) 불모산(佛母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梵魚寺)의 부속 사찰로서, 서기 48년 인도 아유타국의 태자이며 승려인 장유화상(長遊和尙)이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후가 된 누이 허씨를 따라 와서 세웠다고 한다. 시설물로는 인법당(因法堂)·관음전(觀音殿)·칠성각(七星閣)·응향각(凝香閣) 등이 있다. 응향각에는 <장유선원>이라는 편제(扁題)가 있다. 문화재로는 가락국 8대 질지왕이 세운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의 장유화상사사리탑(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31호)과 가락국장 유화상기적비가 있다. 사찰 부근에는 장유화상이 수도하였다는 토굴이 있고, 질지왕이 허씨왕후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고 하는 왕후사(王后寺) 터가 남아 있다.
성주사의 가을
『성주사사적기』에 따르면 흥덕왕 때 왜구들이 자주 신라에 출몰하여 피해가 극심하므로 왕이 늘 근심하였는데, 어느 날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지리산에 있는 무염화상(無染和尙)과 논의하면 물리칠 것이라고 하였다. 왕이 곧 사자를 보내 이런 사실을 전하자 무염이 신통력으로 이를 물리쳤다고 한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무염을 국사로 봉하고 밭 360결(結)과 노비 100호(戶)를 내렸으며 즉시 절을 창건하였는데, 성인이 머무는 절이란 뜻으로 성주사(聖住寺)란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 설화에 따르면 성주사는 신라시대인 835년(흥덕왕 10) 무염국사(801~888)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염은 821년(헌덕왕 13) 입당했다가 845년(문성왕 7)에 귀국했으므로 이 창건 설화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조선시대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1604년(선조 37) 진경(眞鏡)이 중건하였으며, 이때 곰이 불사(佛事)를 도와 하룻밤 사이에 목재를 날라주었다고 하여 웅신사(熊神寺)라 하고 그로 인해 곰절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최근 성주사의 시왕상(1681년 조성) 복장물에서 나온 기록에 불모산웅신사(佛母山熊神寺)’라고 되어 있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1682년(숙종 8) 한 차례 중수를 거친 뒤 1817년(순조 17) 범어사의 승녀 등암(藤巖)이 이곳에 주석하면서 크게 중흥하였으나 그 후의 연혁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전하지 않는다. 최근 한 차례 화재로 인해 도량의 모습이 바뀌고 교세 확장에 따른 대규모 불사가 이어지면서 이제는 예전의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현재 경내의 주요한 전각으로는 1681년 건조한 대웅전을 비롯하여 영산전, 삼성각과 최근에 건립한 설법전·종각·지장전 등이 있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아미타불,약사여래 등 목조삼존불을 모시고 있으며 또한 창건자인 무염국사를 비롯하여 포암당(抱巖堂) 대총(大聰), 서봉당(棲峯堂) 의정(義定), 등암당(藤巖堂) 찬훈(璨勛) 등 네 분 조사(祖師)의 진영(眞影)이 모셔져 있다. 원래의 절 터는 현재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500m쯤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그 주변에는 지금도 많은 석물과 탑의 기단석이 발견되고 있어 원래의 자리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건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시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관음보살입상이 성주사 입구에 있는 용화전(龍華殿)에 안치되어 있으며 사찰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는 부도군에는 1773년(영조 49)에 세워진 원혜(圓慧)의 부도와 1781년(정조 5)에 세운 경세(慶世)의 부도 등 원통형(圓筒形) 석조부도 4기가 있다.
|
첫댓글 전국 사찰을 모아 놓은 곳입니다
필요하거나 보고싶거나 가보고싶은 사찰이 있으시면
댓글로 달아 주세요
자료를 검색하여 올려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