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일생에도 운명을 바꾸는 갈림길이 있듯이 걷는 길에도 전환점이 있다.
진안고원길 9코스 ‘운일암반일암’ 길은 2021년 6월이 터닝포인트가 되는 해다.
이 길은 이 때를 기준으로 길의 표정과 모습이 달라졌다.
그 이전엔 천길단애와 용소, 쪽두리, 대불바위 등 작은 기암괴석이 물가를 장식하고 있는 계곡숲길을 걷는 길이었다. 좌우로 울창한 숲과 물소리가 청량한 나무데크길은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폭염에도 시원하다.
하지만 설악산, 지리산, 주왕산, 오대산 등 대한민국의 내노라하는 명품 계곡길을 섭렵해왔던 마힐로에겐 왠지 단조롭고 밋밋했다. 한껏 높아진 눈을 충족시키려면 뭔가 인상적인 한 방이 필요하다.
이 길에 생동감과 입체감을 불어넣은 것이 구름다리다.
진안군은 2년전 이맘때쯤 관광경기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46억5000만원의 귀한 예산을 들여 해발 800m 대의 명도봉과 명덕봉을 잇는 높이 72m에 길이 220m의 구름다리를 준공했다.
이 구름다리의 효용성에 대해선 논하고 싶지 않다.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바닥판이 뻥 뚫린 '스틸그레이팅'으로 설치해 전망은 끝내준다.
이름처럼 구름위를 걷는 느낌에 기분이 업된다.
실제 높이보다 훨씬 더 높아보이는 아찔한 구름다리에서 바라보는 스펙터클한 협곡의 전망은 장관이다.
그렇다고 구름다리의 높이에 주눅들 이유가 없다. 의외로 가파른길을 오래 올라가지도 않는다. 그래서 체력소모량도 많지않다.
칠은교 인근의 이정표를 따라 20분 정도 산길을 올라가면 구름다리가 내려다 보이는 운일정이라는 이름의 팔각정을 만나고 이 곳에서 10분만 걸으면 구름다리에 도착한다.
이 다리 입구를 담당하고 있는 친절한 60대 안전관리원은 감탄사를 쏟아내고 있는 우리 일행에게 “골짜기가 불이 붙은듯 단풍이 화려한 가을에 오면 더 멋있다”고 했지만 다리밑 초여름 녹음도 산뜻하다.
구름다리위에서 내려다보니 우리가 걸어 갈 5km에 달하는 협곡이 더욱 근사해 보였다.
구름다리를 건너 원시림처럼 나무가 빽빽한 숲속을 마치 산림욕하듯 천천히 내려가는 테크계단길 풍경도 일품이다. 이 맘때 쯤이며 울창한 숲에 숲 특유의 향이 가득한 길을 선호하는 편이라 걷는 내내 즐거웠다.
이 길을 내려가면 온통 초록이 우거진숲과 협곡에 일곱빛깔 페인트로 포인트를 준 다리가 나온다.
이름도 무지게다리다. 그 작은 아이디어가 가상하다.
‘무지개다리’를 건너다 위를 쳐다보면 ‘구름다리’가 하늘에 걸린듯 까마득해 보인다.
'헐~~ 우리가 무시무시한 저 다리를 건넜다고?"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 곧바로 운일암반일암 야영장까지 이어진 그늘이 짙은 계곡데크길로 이어진다.
여기까지만 걸어도 짧기는 하지만 일단 본전은 뽑는다.
주양교에서 주천면소재지까지 1.5km는 여름에 걷기엔 부담스럽다.
가수 비의 히트곡 '태양을 피하는 방법'이 떠오를 만큼 강렬한 햇볕을 견디며 시골길을 걸어야 한다.
그나마 차가 안다녀서 다행이다.
하지만 길의 종착지엔 보너스가 기다리고 있다. 주천면소재지 외곽으로 이어진 숲길은 주자천 계곡을 따라 조성된 그늘진 길이다. 내가 이 동네 사람이면 매일 산책하고 싶은 한적하고 고즈넉한 오솔길이다. 이 길의 끝에 돌다리를 건너면 자연암반을 깔고 앉은 3칸짜리 와룡암(臥龍庵)이라는 이름의 누각이 짠하고 나타난다.
1654년 유학자인 김중정이 지은 세월의 풍상(風霜)이 켜켜히 쌓인 고풍스런 누각은 주자천 용소와 어울려 한폭의 한국화를 그려낸다. 세상을 등지고 운일암반일암 골짜기 마을에 터를 잡은 김중정은 물길이 휘어지면서 바위가 용틀임하듯 수려한 터에 세칸짜리 작은 누각을 지어 유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입신양명의 꿈을 버리고 한양을 떠나 자신만의 삶의 가치를 찾아 진안땅 운일암반일암에 터를 닦았다. 그리고 유유자적 자연을 벗삼아 노후를 보낸 그의 발자취는 와룡암에 남아있다.
1654년산 누각과 2021년산 구름다리 그리고 과거와 현재 400년간의 간극을 이어주는 계곡숲 데크길은 이 길에서만 볼 수 있는 파노라마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