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시중을 지낸 제현(齊賢)의 손자이며 시랑공(侍郞公- 문하시랑門下侍郞-정2품) 서종(瑞種)의 첫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풍산 홍씨(豊山洪氏)로 밀직사(密直使) 유(侑)의 따님이시다.
생몰년(生沒年-태어나고 죽은 해) 미상(未詳)으로 공민왕과 우왕 때의 문신(文臣)이다.
1357년(공민왕 6) 우사간(右司諫-종5품)으로 있을 때 우간의(右諫議) 이 색(李 穡)·전녹생
(田祿生)·정 추(鄭 樞) 등과 함께 염철별감(鹽鐵別監)을 여러 도에 보내려고 하자 그 폐단
을 들어 혁파하라는 상소(上疏)를 올렸으나, 재상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1359년 남원부사(南原府使)때에는 재정계획을 정하고 재정을 집행하게 하여 백성들에게 함부
로 걷는 것이 없게 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는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경산 부사(京山府
使)에 재임시에는 어려운 송사(訟事)를 잘 처리하여 명성을 날렸다.
1375년(우왕 1) 판안동부사(判安東府事-정3품)로 부임하여 치적(治積)이 뛰어나서 대사헌(大
司憲-정2품)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임박(林박)이 북원(北元)에 보내는 글에 서명하지 않자 그를 탄핵하여 유배시켜 당시
사람들로부터 이인임(李仁任)의 뜻에 아부하는 지조없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 후 밀직부사(密直副使-정3품)가 되었을 때에 제주도에서 바친 고력(빈묵양牝黑羊- 검은
염소?)를 여러 주에 나누어 기르게 했는데 죽는 것이 많아지자 한 고위 관리가 사사롭게 분
양을 요구하며 백성들에게 그 값을 물리므로 권중화(權仲和)와 함께 부당성을 지적하여 정지
시켰다.
정사를 처리하매 엄하고 밝았으며 그 사적이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되어 있다.
뒤에 정당문학(政堂文學-종2품)에 이르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 배는 문화 류씨(文化柳氏)로 문화군(文化君) 진(鎭)의 따님이며 아들 봉승(鳳升-司諫)을
두었다.
* 판안동부사(判安東府事) - 안동부사 앞에 판(判)을 붙이는 까닭
안동부사의 정식 명칭은 판안동대도호부사(判安東大都護府事)로 조선초기에만 있었던 관직명
으로 정3품이 맡았는데 이 벼슬에 판사(判事-종1품)급의 높은 관리가 임명되었기 때문에 앞
에 판(判)을 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