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수저
16-02 흙수저 논쟁
교육평론 원고
저자 : 안재오
제목 : 흙수저 논쟁
1. 서론 : 흙수저와 황금두뇌
요즘 우리 사회에 흙수저란 말이 종종 회자되고 있다.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말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말이다. 또 그런 상황이 지금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는 말이다.
흙수저는 지식 IN 오픈 국어에서 이렇게 정의되고 있다.
부모의 능력이나 형편이 넉넉지 못한 어려운 상황에 경제적인 도움을 전혀 못 받고 있는 자녀를 지칭하는 신조어이며 금수저와는 전혀 상반되는 개념.
원래는 금수저 혹은 은수저란 말들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흙수저”라는 새로운 관련어가 하나 더 추가 되었다. 금수저란 말은 출신의 배경이 높다는 것을 의미했으나 이제 새로 각인된 흙수저는 반대로 출신 배경이 저급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자료를 보면 부모의 연간 수입이 2000 만원 이하 혹은 자산이 5000만원 미만인 경우를 소위 흙수저 가정이라고 한다.
특히 최근에 수저 계급론 - 수저 사이에 계급이 있다는 이론 - 을 말하며 어떤 서울대 학생이 자살을 해서 사회에 큰 충격을 준 바 있다. 그 학생은 작년 12월 18일 자살을 하면서 유서를 인터넷에 유포를 했다.
수업을 마치고 8 동을 나오는 길에 든 생각이 잠자리까지 이어졌습니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학문을 하는 것은 정신적 귀족이 되는 것이라 표현했습니다. 그때만큼은 제가 그 정신적 귀족이 된 느낌이었습니다. 서로 수저 색깔을 논하는 이 세상에서 저는 독야청청 ‘금전두엽’을 가진 듯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금전두엽을 가지지도 못했으며,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전두엽 색깔이 아닌 수저 색깔이군요. (유서)
불과 만 19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지 모른다. 하물며 본인은 얼마나 힘들었기에 그런 일이 있었을까? 그런데 위의 유서에서 보는 것처럼 이 서울대 학생의 큰 문제는 그의 자살이 완전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책임을 묻고 있다는 점이다. “저는 금전두엽을 가지지도 못했으며,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전두엽 색깔이 아닌 수저 색깔이군요” 라는 구절에서 그것을 알수 있다. 이 학생은 금전두엽 즉 똑
똑한 두뇌를 가지지 못했고 그것을 보완해 줄 가정환경(금수저)도 가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 학생의 말처럼 우리 사회가 서로 수저 색깔을 논하는 사회가 되었다는 점이다. 흙수저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궂이 그런 말을 만들고 거기에 상응하는 실체가 있는 것처럼 믿고 싶은 것이다.
(출처=연합뉴스 TV)
국회의원들도 이제는 서로 비난할 때, “당신 흙수저를 알아?”라는 말을 쉽게 쓰고 있다.
2. 본론 -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
이런 금수저 흙수저 이야기가 비단 어른들의 세계만이 아니라 어린이들의 세계에서도 공공연한 사실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서울에 사는 초등학교 6학년 박준영 군(13)은 한 달 용돈이 2만 원이다. 더 풍족한 용돈을 받는 친구들이 부러울 때가 많다. 박 군은 “친구들과 용돈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엄마 아빠의 직업, 수입으로 화제가 옮아간다”고 했다. 그에게 “금수저, 흙수저가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박 군은 별걸 다 묻는다는 표정으로 “반 친구들끼리도 잘사는 집 애는 금수저, 그냥 그러면 흙수저로 부른다”며 “인터넷 찾아보면 금방 나온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16. 01. 08 기사)
이처럼 초등학교에서도 “반 친구들끼리도 잘사는 집 애는 금수저, 그냥 그러면 흙수저로 부른다”.
이는 아이들 간의 평등성이 사라져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들 간의 상호 인정과 그 바탕이 되는 평등성이 없다는 것은 실은 심각한 정신적인 손상, 공동체 기초의 훼손(毁損)을 의미한다. 혹자는 그게 사회의 반영이라고 하면서 큰 문제 삼지 말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성의 중요한 일부인 우정과 “또래집단”의 형성은 평등과 상호인정을 토대로 이루어 진다. 그 뿐 아니다. 어린 아이들까지 흙수저 운운하면 이런 추세는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다시 계급사회, 봉건사회로 역행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민주주의의 금과옥조(金科玉條)인 인간의 존엄성은 인격의 평등성을 전제로 한다. 인간이 차등하다면 인간의 존엄성은 성립할 수가 없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금수저 인간 흙수저 인간이 규정되면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식으로 인간의 자유와 주체성 보다는 “사물화(事物化 = Verdinglichung)”가 일어난다.
이런 의식의 사물화 혹은 카스트화가 민주사회, 생산사회, 자유사회의 발전에 얼마나 해(害)가 되는지는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물론 어린 시절에도 언제나 빈부의 차이는 있었고 이것이 인격형성에 대단히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가령 가난하게 자란 아이는 그 가난이 싫어서 열심히 공부하고 또 일해서 돈을 모은다는 이야기는 거의 상식에 가깝다. 사실 어린 나이에도 친구들 간의 물질적인 환경의 차이는 상상이상으로 클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런 차이는 개인적인 의식에 머무르는 수가 많았다. 그것은 요즘처럼 공개적으로 “누구 누구는 흙수저 혹은 금수저” 라고 낙인이 찍히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다른 통계 자료를 보면 이렇게 흙수저로 낙인이 찍힌 사람들 혹은 가난한 집의 자녀들은 미래에 대해서도 우울한 경우가 태반이라고 한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이 2015년 8월 19~34살 청년 1500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자신의 노력에 따른 계층 상승 가능성’에 대해 부모의 경제적 계층이 중상층 이상인 경우에는 33.7%가 긍정적으로 인식한 반면, 중하층에서는 20.0%, 빈곤층에서는 11.7%만 긍정적으로 답해 “부익부 빈익빈이 더 심화되고 있다”는 청년들의 인식과 맥을 같이했다. (한겨레 16.01.01)
위의 기사를 요약하면 결국 “가난하면 꿈도 빼앗긴다” 라고 할 수 있다. 청소년 혹은 대학생들이 꿈을 잃은 것이 아니라 가난한 청소년, 대학생들이 꿈을 잃은 것이다. 이건 정말 큰 문제이다. 부유할수록 물질의 구속을 덜 받기 때문에 물질 모으는데 관심을 적게 기울이고 그 반대로 가난할수록 그 가난이 싫어서 이를 벗어나려고 많이 노력하는데서 사회의 계층이동이 일어나고 변화가 생기는데 그 정반대로 부유할수록 더 부유해지려고 악을 쓰고 가난할수록 “나는 부모의 (물질적, 경제적) 상태를 넘어설 수 없을 거야” 라는 의식이 강화되는 것은 결국 그 사회의 유동성이 사라지고 신분화, 계층화가 경직되어 간다는 것을 말한다.
3. 결론 - 해결책의 탐구 (과도한 학습으로부터의 해방)
위에서 우리는 현재 한국에 만연해 있는 계층화 논쟁에 대해서 흙수저- 금수저 라는 유행어를 가지고 파헤쳐 보았다. 그러면 그 해결책은 무엇일까? 필자의 견지에서는 우선 극심한 학벌주의와 이로 인한 청소년들에게 부과되는 과도한 학업의 부담을 줄이는 것이다. 물론 이것 하나만으로 모든 문제가 풀리지는 않지만 우선 학벌주의와 과도한 학습 억압으로부터 학생들을 해방시킬 수 있는지를 알아 봐야 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학습의 압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인간의 정신은 경직화된다. 특히나 한국처럼 수능시험 같은 객관식 시험이 판을 치는 경우 학습자들은 과도한 학업 부담을 가지게 된다. 수업시간도 과도하다. 거기다가 학원까지 부담해야 되면 거의 쉴 시간이 없게 된다. 어른들은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지금 40대쯤 되는 사람들이 만약 수업을 7~8 시간 받고 학원까지 가라고 하면 다들 금방 쓰러질 것이다. 이렇게 자신들은 못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아무런 걱정 없이 시키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전에 어떤 초등학생은 자기가 아빠보다 더 많이 일한다고(공부한다고) 하면서 목숨을 끊은 적이 있었다.
아이들에게 자유시간이 없고 성적 지상주의에 함몰되다 보니까 부모와 가정 이 자녀 성적 올리는데 전력을 기울이게 되고 따라서 자녀들은 자기의 미래가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가족의 지원에 달려 있다고 보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흙수저 논쟁의 실마리가 있다. 결국 흙수저 운운은 학벌주의와 성적만능주의 그리고 여기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성적의 환경결정론 등이 생산하는 산물인 것이다.
이런 학벌주의와 성적만능주의 그리고 성적의 환경결정론을 해체하기 위한 대책은 필자가 여러 번 강조한 (독일식의) 교육의 국가주의인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직업교육 중심의 진학체계를 지향하고 고교 졸업시험제를 통해서 대학 전형을 대신하고 또 대학간의 이동을 쉽게 만들면 현재 한국의 거의 모든 교육관련 폐단이 사라지게 된다.
지금 한국은 극단적인 고령화의 속도와 저출산율 그리고 기술 낙후 등으로 인해 해방이후 미증유(未曾有)의 난관에 봉착하고 있다. 거기다가 흙수저 현상을 통한 사회의 경직화까지 겹치면 사상 초유의 위기를 맞이할 것이다.
그러나 기득권층과 기성 정치권은 이를 대응할 준비가 전혀 없는 상황이다. 올해 초부터 중국의 증권시세가 폭락을 하고 곧 중국의 산업과 경제 마저 휘청거리게 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녀의 주어진 여건 안에서는 훌륭히 과업을 수행한 인물로 평가될 것이다. 그러나 다가올 (가까운) 미래는 그녀의 역량(力量)을 완전히 초과하는 무시무시한 쓰나미 폭풍이다. 이 쓰나미는 집권 여당 : 새누리당, 문재인의 더민주당, 안철수의 신당 등을 걸레짝처럼 만들어 버릴 것이다.
벌써 그 징조가 피어올랐다. 바로 위에서 말한 중국의 증시 풍파와 한국의 기둥기업 삼성전자의 영업이익률 하락이다. IT 기업의 퇴락은 비단 한국의 문제가 아니다. 초거대 IT기업인 미국의 애플사도 스마트폰 예상 출하량을 줄인다고 한다.
핀란드 같은 나라는 한국의 삼성보다 훨씬 독점력이 높은 거대 재벌기업인 “노키아” 가 망했어도 그 나라의 산업과 경제는 의외로 잘 버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만약 삼성이 휘청거릴 경우 그 파장이나 충격력이 노키아의 경우보다 훨씬 클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바로 학벌주의와 흙수저 현상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취업준비생들은 거의 다 삼성과 현대 같은 대기업을 목표로 공부한다. 따라서 만약 삼성, 현대 등이 흔들리고 신규 채용을 못하는 일이 오면 이 나라의 젋은이들은 모두 현 체제에 돌을 던질 것이다. 마치 386 세대들이 군부 정권에 돌을 던진 것처럼. 그 때는 독재만 타도하고 민주주의만 수립하면 모든 게 잘될 줄 알았다. 그러나 역사를 바꾸는 것이 쉽지는 않다. 6월 항쟁으로 이루어진 민주화는 다만 제대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자유의 쟁취에 불과했다. 그 때 쟁취한 자유를 바탕으로 제대로 국가와 사회를 건설을 하지 못했다. 가령 대통령 5년 단임제를 보자. 문제가 많다. 그러나 고칠 생각을 못하고 있다. 그 뿐 아니다.
지역 간의 불균형이 심해졌다. 노무현은 이를 행정수도 같은 정부기관 지방옮기기 정책으로 밀고 나갔으나 현재 보는 것은 엄청난 비능률이다.
국회는 비리(非理), 무능력과 집단이기주의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국민들은 국회의원 욕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다. 정부는 소위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오명을 덮어쓰고 있다. 역대 단임제 대통령들은 항상 측근비리와 인척비리에 시달렸다.
이를 고치기 위해서 우리는 “내각책임제”와 “연방제” 그리고 “양원제”를 도입해야 한다. 그리고 지난 호 교육평론에 실은 것처럼 시급한 현안인 출산율의 향상을 위해서는 “공민종교(civil religion)” 이라도 도입을 해야 한다. 다가올 파국을 막고 참다운 국가를 수립하고 통일을 준비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중국 동삼성(東三省)과의 합병을 위해서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변화와 개혁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