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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서양음악의 개척자 현제명 글쓴이:서울대 철학과 교수 차인석
음악의 영역에서 이론과 실천의 통합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다 현석 현제명은 그리 흔치 않은 이 경우에 속한다 그는 작곡을 하면서 노래를 불렀고 악단을 조직하고 음악학교를 세우는등 음악가, 교육자 그리고 행정가의 역할을 맡았던 다재다능한 사람 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음악은 삶의 전부이기도 했다
1928년 시카고 소재 건(Gunn)음악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당시 연희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것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서양음악사의 초창기에 계몽의 개척자로서 쌓아 놓은 업적은 지대했다 그는 김성태,김생려,이인범 그리고 김천애와 같은 "한국음악사의 찬란한 장"을 메꾸었던 음악가들과 함게 최초로 교향악단을 만들었고 오늘날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의 모체가 된 경성음악학교를 창립 하기도 했다
현석은 실로 팔방미인이라고 불리울만큼 여러가지 일을 했고 또 매번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재주꾼으로 알려지기에는 너무나도 진지한 예술가였으며 또 그의 민족애는 그로하여금 이나라에 음악세계를 건설하는데 몸과 마음을 바치게 했던 애국자였다 그가 음악계에 남겼던 업적은 말할 수 없이 컸다 "고향생각" "그집앞" "희망의 나라로" 그리고 "산들바람"등은 계속 애창되고 있으며 그랜드 오페라 "춘향전"과 "왕자호동"은 이나라 오페라사의 빛나는 성취였다 이 두 작품은 현제명이 민족의 음악적 우수성 을 국제사회에 과시하려는 시도였다
현석은 1902년 12월8일 경상북도 대구에서 기독교가정의 2남2녀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종교적 환경에서 성장했고 그의 신앙은 그의 음악생활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주일학교 시절부터 음악적 재질을 보였다 그는 소학교때 노래를 잘부르기로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으며 장로교 계열인 계성고교에 입학 후부터 그의 음악 자질은 크게 인정 받았다 그당시 재질있고 장래가 촉망된다고 여겨졌던 학생들은 같은 교파에 의해 운영됐던 평양의 숭실전문학교로 진학하는 행운을 누렸었다
현석은 1920년 이 교육기관에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는 영예를 갖게 되었고 그는 음악을 본격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숭실전문학교에는 주로문화계통의 학과만 설치 되었고 음악과는 없었다 음악과는 이화여자 전문학교에만 있었다 그러나 숭실전문에서는 미국선교사들이 음악교육에 특별한 역점을 두었기 때문에 비록 과는 없었지만 학생들이 원한다면 음악을 전공 하다시피 깊이 공부할 수 있었다 이학교에서 배출된 훌륭한 음악인들 가운데는 박태준, 김세형, 그리고 피아니스트겸 지휘자인 박경호가 있으며 오늘날 서양음악의 개척자대열에 들어가는 김인식도 있었다 그리고 김동진 정봉초도 숭실전문 출신이다 장남 상열씨에 따르면 현석은 음악에 큰뜻을 두고 숭실전문학교에 진학 했다고 한다
그의 음악인으로서의 출발은 이학교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미국인 솔토(Solto)부인에게서 피아노 레슨을 받았고 료트(Retos) 부인에게서 성악지도를 받았다 그가 4학년때 릭릭테너로서의 선천적인 미성이 선교사 로디히버(Home A.Rodeheaver)의 인정을 받아 그의 주선으로 시카고에 있는 무디신학교로 유학할 수 있었다 그후 로디히버 박사는 현석의 후견인이 되었다 이분은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았던 복음전도자였을 뿐만아니라 음악출판가이며 복음찬송가 지휘자이기도 했다 그가 1955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현석을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었으며 현석이 그의 별명을 Rody로 삼았을만큼 두사람은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다
현석은 1926년 가을부터 무디신학교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했으며 음악을 선택으로 이수했다 그가 신학에 먼저 전념하도록 했던 것은 그의 후견인 로디히버박사의 의도였다 그가 음악가로 성장하려면 우선 기독교 교리에 대한 철저한 지식과 신앙을 깊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석은 귀국후에 순회 음악단을 이끌고 지방공연을 다니면서 음악을 보급하면서도 복음선교의 역할을 했던것은 그가 유학시절에 받았던 신학교육의 영향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음악평론가 이상만씨에 의하면 그가 다녔던 신학교는 실천적 기독교인을 양성하는 곳이었으며 현석이 이론과 실천의 통합을 배운 곳이었다
현석의 전문적 음악교육은 시카고의 건(Gunn) 음악학교에서 부터였다 그는 이곳에서 2년간 성악을 전공하고 작곡공부도 전념했다 그는 여기서 음악학사와 석사를 취득했다 특기 할만한 것은 일제말 많은 사람들이 서러움을 삼키고 불렀던 "고향생각"은 이때 작곡 되었다는 사실이다
해는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
내 동무 어디 두고
나홀로 앉아서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고향하는 바라보니
별떨기만 반짝거려
마음 없는 별을 보고
말 전해 무엇 하랴
저 달도 서쪽산을
다 넘어 가건만
단잠 못 이뤄 애를 쓰니
이 밤을 어이해
천리만리 먼 곳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물론 컷겠지만 현석에게는 무엇보다도 일제에 강탈당한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나라를 잃은 그에게는 이국땅에서 겪은 서러움은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떠난 고국은 바로 고향 이었으며 이에대한 그의 사랑은 커져만 가는 것이었다
1929년 마침내 그가 그처럼 그리워 했던 고국에 돌아 왔을때 많은 할 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연희 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음악과가 없었기 때문에 영어과목을 전담 했었다 그리고 그는 교양과목으로 설치된 음악과목을 전적으로 맡게되어 후학 양성에 호기를 맡게 되었다 그의 연전시절의 업적은 오늘에 이르기 까지 높이 평가되어 있다 그는 관현악단과 합창단을 조직했으며 연주회도 자주 열었다 1인 4역이었다 그는 작곡도 하고 편곡도 했으며 그리고 지휘도 맡고 무대에 서서 노래도 불었다
연전시절의 제자들은 중앙대 교수직을 지냈던 이유선, 서울대 음대 학장이었던 김성태,김생려,이인범, 그리고 한양대 총장이었던 김연준 등이다 이무렵에 '산들바람' "가을" "해변의 노래'등이 왔고 "조선의 노래" "희망의 나라"가 일제말에 작곡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두곡은 관헌에 의해 금지곡으로 지정되는 수모를 감수했다 <백두산 뻗어 나려 반도삼천리>라는 가사가 거슬렸던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리고 희망의 나라 를 두고 일제당국은 그 희망의 나라가 어디있는냐고 트집을 잡기도 했다 이처럼 관헌의 주목을 받게된 현석은 미결수로서 10개월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일제의 사상교화까지 받게 되었다
그의제자 김성태 교수는 현석의 연전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즉 연전음악대는 제주도만 빼놓고 팔도강산을 두루 누볐다고 한다 음악대가 찾는곳마다 환영은 열광적이었다 연전 음악부는 브라스밴드와 관현악단 그리고 글리 클럽이라는 합창단으로 구성되었고 남성4중창단은 특히 그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현석은 이 모든그룹을 지도했고 한번 지방공연에 나가면 일주일식 곳곳을 돌아다니며 시골사람들을 위로했는데 현석의 공연목적은 이들의 민족혼이 잠들지 않도록 깨우치는데 있었다는 것이다
현석의 지도아래 있었던 연전음악부의 사명은 민족의 계몽에 있었다 젊은 이들의 공연은 단순한 음악행사를 넘어선 의식화운동 이었다 일제의 총칼로 갈기갈기 찢어진고 그들의 압박에 시달렸던 민족의 정서에 단비를 뿌리듯 연전음악대는 병든마음의 치유자 구실을 했다는 것이다
김성태 교수에 따르면 현석은 연전 설립자 언더우드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이 젊은 음악가의 맑고 밝은 그리고 박력적인 성격과 일에대한 헌신적인 태도에 큰 호감을 가졌으며 현석이 끼어있는 모든 일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는 것이다 현석은 체격이 비교적 우람한 편이었으며 풍채도 당당했다 그는 미국교육에서 합리적 사고를 배웠고 공과사를 분명히 가리는 생활윤리를 가졌었다 그는 한시도 잠자코 있지 못했으며 끊임없이 움직여야했다 그의 박력적 성격은 사생활에서도 유별했다고 한다
평양 숭실전문을 졸업하고 그는 전주의 명문 신흥중학교에서 음악 교사직을 잠시 맡고 있을 때 그곳 출신 이화여전 여학생과 열렬한 사랑에 빠졌으며 이 관계에서도 그의 대담함이 역력히 표출되었다는 것이다 전통과 인습이 압도했던 전주에서 대구 출신이 교사가 된것부터가 이변이었지만 그곳 처녀와 연애를 가졌다는 사실은 보통사람의 생각과는 다른 것이었다 1926년 그가 열애했던 양신선이 이전을 졸업하자 현석은 그녀와 백년해로를 약속했다
그리고 그는 6개월후 다시 도미유학을 떠났다 현석이 연전시절에 이룩해 놓은 것들은 많다 그 주요업적은 앞에서 소개된 것들 이외에 춘추음악회 정착 중등학교 현상음악대회 개최 등이다 그는 탁월한 기업가적 능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조직력도 뛰어나 모든 계획을 그는 척척 실행에 옮기곤 했다 그러기에 그는 교육가로서 작곡가로서 그리고 성악가와 지휘자로서 다양한 기능을 마찰없이 거뜬히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1932년 현석은 음악계 원로와 중진들과 함께 조선음악가협회를 결성하고 초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홍난파,안태영,채동선,김영환 그리고 윤성덕등이 회원 이었다 1936년 그는 다시 도미 모교 건음악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다가 1년만에 자연발성법이라는 논문으로 음악박사 학위를 받는등 끊임없는 학구열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해 만주와 유럽각지로 그는 연주여행에 나섬으로써 그의 음악활동은 스스로 더욱 깊게 하게 되었다
현석은 스스로 일을 찾아다니는 사람이었다 무엇을 한번 이루어 놓으면 그만 쉬는 것이 아니라 도다시 새로운 것을 이루어 놓아야만 적성이 풀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남보다 앞서가는 선구자가 되려고 했던 것이다
태평양전쟁의 발발로일제의 탄압은 점차로 심해 갔으며 현석의 음악활동에도 제재가 가해지기 시작했다 1940년 11월 추계음악회를 마지막으로 한반도에서의 음악운동의 숨은 꺼지고 말았다
그래도 현석은 그대로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컬럼비아 레코드등 음반취입쪽으로 정성을 기울였다 그러나 일제관헌의 간섭은 날로 심해졌고 그는 마침내 연희전문학교 교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조선총독부는 미국유학출신 교수들을 모두 해임했다 그이유는 명백했다 그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해방 되던날까지 대화숙이라는 총독부 산하의 사상교육기관에 끌려 다니면서 교화과정을 강요 받기도 했다 그러나 현석은 완전히 굴하지 아니했다 그는 경성음악학원을 설립해서 20명 가량의 젊은 음악도를 모아 놓고 교육하는데 심열을 기울였던 것이다
1945년 해방직후 현석은 이 음악학원을 경성음악전문학교로 개칭하여 남산에 세움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정규 음악학교를 건립하기에 이르렀으며 이것이 서울대학교로 편입되어 오늘의 음악대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같은해 그는 한국최초의 교향악단인 고려교향악단을 창립하고 단장직을 맡아 40명 단원의 살림을 꾸려 나갔다
고려교향악단의 출발은 한국음악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창단 멤버에 현석 이외에 문학준, 김생려, 김성태, 계정식등이 참여했다 문씨는 일제때 NHK 교향악단에서 한국인으로는 유일한 제1바이올린 주자로 교려교향악단의 악장을 맡았으며 계씨의 지휘로 부민관에서 창단공연을 가졌다 그리고 하르빈 음악학교와 동경음악학교에서 지휘법을 전공한 임원식의 부임으로 고려교향악단은 힘찬 전진을 거듭하게 되었다 바이올리니스트 박민종, 피아니스트 윤기선, 성악가 김자경과 마금선등 젊은 음악가들의 데뷔도 이 시기였다
경성음악학교 교장시절의 현석에 대한 회고에서 김성태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현석은 행운도 있었지만 행운을 창조하는 노력가였다는 것이다 음악학교와 교향악단의 경영을 위해 그는 백방으로 쫓아 다니면서 재정지원을 얻어내는 일이야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애를 썼다는 것이다
음악학교가 들어선 장소는 지금의 남산 드라마센터 부근에 있었던 조그마한 유치원이었고 70여명의 학생들과 함게 조촐한 출발을 했지만 얼마후 조선 신궁을 개조해 새교사가 마련될 수 있었던것은 현석의 탁월한 사업가 기질 탓이었다고 김성태 교수는 피력한다 1946년에 서울대학교가 설립되자 이 음악전문학교는 예술대학 음악부로 편입되었다 사실은 연희전문학교에 음악부가 생기면 과거의 연고로 보아서도 그쪽으로 가여한다는 제안도 있었지만 국립대학에서 국고지원을 받아 음악교육이 더욱 진작할 수 있었던 기대에서 그는 서울대학교를 택했다고 한다
김성태 교수에 따르면 현석은 고려교향악단 멤버들의 봉급 때문이라도 여름이면 비지땀을 뚝뚝흘리면서 친구에게로 은행으로 돈을 돌려대기 위해서 선이 닿을 만한곳이면 어디든지 뛰어다녔다는 것이다 이처럼 현석은 고생하면서도 해야 할일이면 끝까지 밀고 나갔던 것이다 이래서 주위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칭송을 받기도 했건만 동시에 그는 많은 일을 혼자 다 한다고 해서 남들의 시기의 대상이 되었다 1940년 10월에 한국최초의 오페라 “춘향전”이 부민관에서 발표되었다
이가극은 음악가로서의 현석이 내놓은 최대의 야심작이었다 이곡은 사랑가, 추천가등 일반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이중창과 아리아 그리고 합창으로 구성된 전5막의 오페라이며 가사는 극작가 이서구씨가 썼다 제2막의 사랑의 2중창 “한번 보아도 내사랑 열번 보아도 내사랑”은 곧 널리 퍼져 불렸으며 오페라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춘향전”은 국내창작 오페라 작품가운데 가장많은 무대에 올랐다
춘향전 초연 8개월만에 6.25동란이 발발했다 현석은 서울을 빠져 나오지못해 절간 등지에 숨어 지내다가 마침내 부산으로 피난갈 기회를 가졌다 해운대 부근에 판잣집을 얻어 그는 음악교육을 시작했다 부산 피난시 “춘향전’이 재공연 되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기여수절춘향독보”라는 휘호를 보냈다는 일화는 잘 알려진 이야기다
1951년 현석은 국립극장 운영위원이 되었고 1952년 서울시 문화위원 부원장을 역임했으며 1953년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이 설치되면서 초대학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음악대학을 세계굴지의 교육장으로 키우겠다는 결의에서 해외에서 악기를 싼값으로 사들이는등 당시의 어려웠던 국가경제의 여건에서 음악대학 육성에 헌신적이었다
1954년 또 하나의 오페라 “왕자호동”이 초연되었다 악극의 창시자 바그너가 그랬던 것처럼 현석은 대사를 직접쓰고 또 바그너처럼 그가 속한 민족의 역사에서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그는 권위있는 사학자들의 고증을 받아 고구려왕자 호동의 사화를 극화했다 그것은 전례없는 대범한 시도였다 현석은 이악극에서 한민족의 자주성을 보여주려고 했다 애국과 사랑의 갈등을 줄거리로 하는 사화에서 모티브를 잡았다 호동의 애국,애족에 불타는 모습은 현석자신의 나라사랑이었다
음악가 계정식은 이 오페라가 민족음악의 찬란한 개화의 촉진제가 되었다고 한다 “왕자호동”의 초연은 서울음대가 발족된지 1년반이 지난 1954년 11월이었다 서울음대교향악단과 합창단이 임원식의 지휘아래 공연에 참여했다 그리고 재학생들이 배역되었다 이 오페라의 제작은 서울음대의 제작이었다 현석은 이와 같이 서울음대를 최고의 음악교육의 장으로 만들기 위해서 교수와 학생들의 혼연일체를 도모했던 것이다
한편으로 현석은 음대에 국악과를 설치함으로써 국악진흥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음악평론가 이상만이 지적하는 바와같이 이작업이 비록 초대 국악과장인 이혜구 교수와의 공동노력 이었지만 서양음악 일변도의 수용에서 우리전통문화의 계승으로 음악문화의 발전에 진취적인 업적을 남긴것은 전적으로 현석 자신의 노력이었다는 것이다
현석은 아무리 어려운 일에 부딪히더라도 굴하지않고 실망하지 않는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지만 그는 선천적으로 낙천가였다 그는 언제나 밝은 미래를 보는 사람이었다 그가 쓴 곡들에는 절망적 선율이 드물다 설령 그에게 어려움이 있었다해도 그는 결코 비통에 사로잡혀본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오로지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내적강요만 있었을 뿐이었다 이것은 “희망의 나라로”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배를 저어가자 험한 바다물결
건너 저편 언덕에
산천 경개 좋고 바람 시원한곳
희망의 나라로
돛을 달아라 부는 바람 맞아
물결 넘어 앞에 나가자
자유 평등 평화 행복가득한 곳
희망의 나라로
이노래가사에서 현석은 평생을 통해 나라를 설계하고 그 실현을 위해 노력했음이 잘 증시되고 있었다 현석은 어려운 일제 강점기에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나 미국유학을 했고 또 선망의 박사학위까지 취득했고 음악활동에서도 유별나게 자기성취를 이룰 수 있었으니 그가 행운아 였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이행운이 그에게 예정되어 주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만든 행운일 뿐이었다 그의 제자 성악가 이경숙 교수는 현석에게서 배운 것은 노력만 하면 무었이든지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이었다고 말한다
숭실전문학교 시절에 학비를 충당하기 위해 현석은 고학을 했다 교내에 설치된 목공부에서 그리고 선교사 집에서 집일을 하며 스스로 생활비를 조달했다고 한다 그는 학교공부에도 열심이었지만 음악에도 남달리 열의를 가지고 임해서 그의 재능이 인정을 받아 자신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또 그는 그에게 주어진 기회에서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냈다
현석은 제자들에게 대기만성의 교훈을 물려주었다 그리고 기다리고 보자는 대륙적 여유를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죽음은 그에게 너무나도 빨리 찾아왔다 그가 이루어 놓고 싶은 것은 많았다 애석하게도 그모든 것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현석은 1960년10월16일 58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한국음악계의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 글쓴이:서울대 철학과 교수 차인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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