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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1장, 2장
믿음의 시험, 말씀을 듣고 행함, 편애의 죄(부자와 가난한자)
저자와 제목, 저작 연대
이 책의 제목은 책의 저자인 예수님의 형제(마 13:55)이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행 15장), (일명) 의인 야고보가 이 편지를 썼다는 데 대해서는 일반적인 의견 일치가 있지만 어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에 도전했다.
(1) 팔레스타인을 떠난 적이 없는 사람이 썼다고 하기에는 헬라어가 너무 세련되고 수사법이 너무 그리스적이다. (2) 저자는 자신을 결코 예수님의 형제라고 부르지 않는다. (3) 저자는 믿음과 행위, 칭의, 자유 등에 대한 바울 서신의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따라서 야고보가 글을 쓸 수 있었을 때보다 훨씬 늦게 이 편지를 썼어야 한다. 야고보는 주후 62년에 처형(순교)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인 야고보가 저자임을 부정할 만한 타당한 이유는 없다. 학자들이 현재 인정하듯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상당한 접촉이 있었고 특히 야고보가 성장한 갈릴리 지역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더구나 야고보는 바울 서신의 주제들에 대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말해서 자신의 교회 안에서 비슷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야고보가 바울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를 다룰 가능성도 있지만 바울은 주후 48년에 갈라디아서를 썼으므로 그 시기는 매우 빨랐을 것이다. 야고보가 너무 일찍 이 편지를 써서 바울의 편지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었을 가능성도 있다.
야고보가 주후 62년에 죽었으므로 이 편지에 연대는 그보다 이전이어야 한다. 더 나아가 이 편지가 예루살렘에서 열린 사도 공의회(주후 48~49년) 이후에 기록되었다며 분명 그 중요한 상황에서 나온 주제들을 언급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편지는 40년대 초에서 중반 사이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야고보서의 일차적인 주제는 믿음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 단지 말씀을 듣는 자만이 아니라 실천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 주제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사회적 갈등과 교회 안의 여러 파벌들 사이의 영적인 갈등을 염두에 두고 전개된다. 야고보는 독자들의 세속적인 마음을 책망하고 그들에게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함에 있어서 신적인 지혜를 추구할 것을 촉구한다.
목적, 계기, 배경
야고보의 편지의 독자들은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1:1)나 "회당"(헬. '쉬나고게', 2:2) 이라는 명칭, 전반적인 유대인적 추론, 자주 등장하는 토라(모세 율법)에 대한 야고보의 생각이 입증하듯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임이 거의 분명하다.
"흩어져 있는" 이란 말이 비유적인 동시에 문자적인 말이라면(행 2:9~11) 이들은 팔레스타인 밖에 있는 일단의 유대인 그리스도인 가정 교회들이며 이는 이 편지에 나오는 박해와 가난의 상황과 잘 들어 봤는다.
그 이상은 말할 수 없지만 편지에서 사회적인 상황을 유추할 수는 있다. 환난의 결과 교회의 갈등이 생겨났고 그들은 서로 싸우는 여러 파벌들로 쪼개졌다. 더 나아가 어떤 이들은 세속적인 생활 방식에 빠졌고(약 1:27, 4:4) 믿음을 실천하지 않았으며(1:19~26) 그 결과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동요하는 "두 마음을 품은"(1:8, 4:8) 자들이 되었다.
문예적 특징
야고보는 서신서 특유의 인사말로 편지를 시작하지만 책의 나머지 내용은 서신의 형식을 지닌 것이 아니라 구약에 나타나는 지혜 문학 장르와 매우 비슷한 지혜의 격언들의 모음집이다. 그러한 지혜 문학의 일반적 형식은 잠언 모음집이다.
게다가 야고보서는 '디아트리베'( 통렬한 비판의 글)라고 알려진 고대 그리스의 풍자 형식에 속하며 그 특성에는 (질문과 대답의 구문을 포함하는) 가상적 대화, 돈호법(부재한 사람이나 사물을 마치 그 자리에 있어서 내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직접적으로 호명함), 자연과 일상생활에서 취한 비유, 과거의 유명한 사람들(상투적인 사례들, 또는 논의 중인 특성을 대표하는 잘 알려진 것들)에 대한 암시, 독자들에 대한 거친 호칭, 과장된 대조 등이 포함된다.
야고보서에서 가장 흔히 나타나는 기법은 고대 지혜 선생들의 방식을 따른 잠언 또는 경구다. 그 다음으로 빈도가 높은 것은 동사의 명령법으로 표현되는 직접 명령이라는 수사적 장치다(예컨대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는]....자가 되지 말라", 1:22).
실제로 이 책의 108개 구절 안에 50개가 넘는 명령문이 있다. 이처럼 명령이 넘쳐나는 것은 저자가 실제적인 기질이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구별 지어 주는 특성으로서 단지 믿음만이 아닌 행동에 관심이 있다는 표시다. 또한 저자는 독자들을 설득하여 행동하게 하려 하므로 이 편지는 매우 설득적인 자세도 있다. 어조는 끊임없이 정력적이고 풍자가 결코 암시적이지 않아서 때로는 다소 꾸짖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핵심 주제
1. 하나님은 은혜롭게 베푸시는 분,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신 변함없는 창조주, 심판자, 유일하신 한 하나님, 질투하시는 하나님, 은혜로우신 하나님, 치유하시는 하나님으로 간주된다(1:5, 17~18, 2:5, 13, 19, 4:5~6, 5:1~3, 9, 15).
2. 지혜는 "위로부터" 오며 사람으로 하여금 시련을 견뎌 내는 동시에 불화가 아닌 평화를 가져올 수 있게 한다(1:5, 3:13, 17).
3. 하나님은 시험과 시련을 허락하시지만(1:2~4) 유혹은 하나님이 아닌 자아와 사탄에게서 나온다. 거기에 필요한 반응은 참을성 있는 인내다(1:3, 13~14, 4:7, 5:7~8).
4. 일차적인 시련은 가난과 부한 자들의 압제다.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보호의 특별한 초점이고 하나님의 백성이 돌보아야 하며 편견을 보이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부유한 자들은 주제넘은 교만과 가난한 자들에게서 도둑질하는 행위로 인해 정죄받는다(1:9, 27, 2:1~5, 15~16, 4:13~17, 5:1~6)
5. 미래의 심판과 보상이라는 관점에서 묵시적인 주제들이 널리 퍼져 있다(1:12, 2:5, 12~13, 3:1, 4:12, 5:1~7, 9, 20).
6. 멸망시키거나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혀의 권세가 중간 단락을 지배하는 주제다(3:1~4:12).
7. 말씀을 듣는 것은 넘어서서 말씀을 일상적인 행동 속에서 실천하라는 윤리적 명령이 처음부터 명시되며 편지 전체에 걸쳐 암시되어 있다(1:19~27, 2:14~26).
8. 기도는 시련에 대한 올바른 반응이지만 자기중심적이어선 안된다. 기도는 고통 당하거나 아플 때만이 아니라 기쁠 때도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는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위대한 치유의 능력이 있다(1:5~7, 4:2~3, 5:13~18),
9. 믿음은 행위와 칭의와의 관계에 있어서 바울의 가르침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을 보완한다. 야고보와 바울은 칭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만 찾아오지만 필연적으로 행위로 귀결될 것이라고 가르친다는 면에서 동일하다. 결과인 행위가 없다면 처음부터 칭의도 없었다(2:14~26).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어울리는 지혜(잠 1:2, 7)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야고보서 1장, 2장
시련 중의 기쁨, 말씀을 듣고 행함, 편애의 죄
<믿음의 시험>
1~18절
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예수님은 '열두 지파'를 상징하고 이로써 교회를 새로운 이스라엘로 규정하기 위해 열두 제자를 선택하셨습니다. 야고보는 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모으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그들의 영적인 유산을 상기시킵니다. '흩어져있는', 이스라엘의 지파들은 앗수르사람들과 바벨론사람들에 의해 전 세계로 흩어졌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 백성으로 다시 모이기를 고대했습니다(1절).
시련 중의 기쁨', 시련은 영적인 성숙을 낳기 위해 개입된 것이며 따라서 기쁨으로 여겨야 합니다. '시험'은 믿음에 도전하는 '검증 과정'입니다. 시험이 생기면 우리는 이를 온전히 기쁘게 여기어야합니다. 이 기쁨은 단순히 세속적이고 일시적인 행복이 아닌 시련을 포함한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주님안에서의 영적이고 지속적인 '온전한 기쁨'을 의미합니다(2절)
'믿음의 시련'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시련의 의미를 이렇게 규정합니다. 즉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것처럼 신자들도 시험을 받습니다. 헬라어 '도키미온'은 한 사람의 믿음을 참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의도된 긍정적인 시험을 지칭합니다. 그 결과는 인내, 즉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서도 진실하게 인내하는 삶입니다(3절).
인내는 궁극적으로 완전함으로 이어집니다. 신자들은 거룩함에 있어서 성장하지만 아직 완전히 거룩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완전함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비로소 실현될 것입니다(4절).
야고보는 지혜가 부족한 신자들을 대상으로 시련에 대해 다룹니다. 구약에서와 같은 지혜는 삶의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한, 하나님이 주시며 하나님의 중심적인 분별력입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후히'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십니다(5절).
'믿음', 성경에 계시된 바와 같은 하나님의 성품과 약속에 근거한 확고한 신뢰와 확신입니다. '의심',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세상 또는 자신의 선천적 능력에 대한 신뢰 사이에서 요동하는 것, 이는 사람을 '바다 물결'같이 만듭니다. 바다 물결은 불안정함과 불안을 묘사하는 그림입니다(6절).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선하신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 즉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갈라진 두 마음의 소유자이며 따라서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입니다(7~8절).
<하나님 앞에서의 부자와 가난한 자의 위치>
가난과 재물은 둘 다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아닌 세상에 초점을 맞추도록 엄청난 압력을 가합니다. 따라서 야고보는 가난한 자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높은 지위를 자랑하라고 권면합니다. '낮은 형제'는 하나님에 의해 높아지거나 변화 받을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야고보는 부한 자에게는 (1) 재물은 일시적이며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이점도 되지 못함을 깨달음으로써, (2) 고통 중에 있는 가난한 자들과 마음을 함께 함으로써, 자신의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권면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가치관을 둬엎는 '대항 문화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야고보는 곧바로 시험을 참는 자들의 복된 상태를 강조하는 모습에서 암시 되듯이 가난과 부의 도전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큰 시련 중에 하나일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또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숨기지 못하느니라"(마 6:24)는 예수님의 경고를 떠올리게 합니다(9~11절).
인내하는 자들의 대한 보상, 야고보는 이전에 소개된 주제로 되돌아갑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보석이 박힌 통치자의 면류관이 아니라 운동 경기의 승자와 승리한 자에게 주어지는 월계수관을 가리킵니다. 신실한 인내에 대한 보장은 영원한 생명과 그 모든 풍성한 복입니다(12절).
'끌려 미혹됨이니', 먹이감을 치명적인 낚싯바늘로 낚기 위해 그 은신처에서 멀리뛰어넘는 것을 뜻하는 낚시의 비유입니다. 여기서 덫에 걸려들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람의 악한 욕심입니다(14절).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이는 영적인 구원을 말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신자들을 뜻하고 "진리의 말씀"은 복음이며 "낳으셨느니라" (즉, 태에서는) 거듭남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 추수의 '첫 열매'는 먼저 믿은 신자들이며 그들은 장차 있을 추가적인 회심의 전주곡입니다(18절).
<말씀을 듣고 행함>
18~27절
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야고보는 혀를 잘못 사용하는 일과 그 결과 생길 수 있는 분노에 대한 유대 지혜의 전승을 떠올리게 합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듣는 것이 부족한데다 말을 자제하는 능력까지 부족하면 난폭한 행동이 초래됩니다. '성내기도 더디 하라', 이는 인간의 모든 분노가 다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 성미가 급하고 이기적인 세상의 분노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타인에 대한 사랑의 결핍을 드러낸다는 뜻입니다(19절).
자기 의존적으로 '사람이 성내는 것'은 어떤 잘못을 향한 것일 때조차 인간적인 질책만으로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음을 인식하지 못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또한 진실로 그런 분노가 그 자체로 완전히 의로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자기 백성이 자신의 의로운 성품을 본받기를 요구하십니다(20절).
'모든 더러운 것....을 내버리고', 이는 다시는 먼지(여기는 도덕적인 악)를 가까이 하지 않고 싶은 욕구로 인해 더러운 옷을 벗어버리는 모습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심어진 말씀'이 하나님의 백성 안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이런 개념은 신명기 30장14절("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이 있은즉") 에레미아 31장 33절("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의 새 언약을 반영합니다.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이는 여기서 점진적 성화와 궁극적으로 마지막 날에 있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완성을 가리킵니다(21절).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는 자가 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복음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을 자신의 삶 속에 뿌리내리게 하는 말씀에 대한 유일한 올바른 반응입니다(22절).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고 나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잊어버리는 모습은 하나님의 "심어진 말씀"의 "거울"로 자신을 살펴보고 나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의 어리석음을 예를 들어 보여줍니다. 거울 속을 들여다볼 때 결점이 눈에 보이면 그것에 대해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이 상식입니다(23~24절).
'자유롭게 하는....율법', 야고보서에서 "율법"과 "말씀"은 똑같은 실제로 묘사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입니다. 앞에서 진리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여기서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해석되고 성취된 바와 같은 구약 율법을 가리킵니다. 구약 율법은 거룩 그 자체로는 죄로 가득한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에 순종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구약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을 해방시킨 것이 아니라 바울이 가르친 대로 그들을 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복음의 말씀과 마음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과 함께 갈 때 자유의 법이 됩니다(25절).
순종에 대한 이 단락은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을 가진 사람 말씀을 행하는 사람의 세 가지 특징과 함께 마무리됩니다. 첫째, 그는 자기 기만을 거부하고 자기 혀에 제갈을 물립니다. 이는 그가 마치 제갈이 말을 제어하는 것처럼 자신의 말에 대해 고삐를 단단히 조는 것을 뜻합니다. 둘째, 그는 억눌린 자들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풉니다. 고아와 과부는 특별히 무력한 그들의 상태 때문에 구약에 자주 등장하는 억눌린 자의 예입니다. 셋째, 그는 세속에 물들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순전하고 경건한 사람을 묘사하기 위해 흠 없는 어린양이라는 제사상의 표현을 사용합니다(26~27절).
편애의 죄(부자는 높이고 가난한자는 낮추는 차별)
이미 강조된 빈자와 부자의 문제는 이제 그리스도인의 모임에서 부유한 자를 더 선호하며 가난한 자를 차별하는 일에 대한 이러한 경고와 더불어 전면에 등장합니다.
1~7절
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믿음의 삶에는 편견이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차별"이란 단어는 '외모에 따라 받아들이다/판단하다'라는 뜻의 일군의 어휘들과 결합되어 사회적 지위를 바탕으로 하는 편애를 가리킵니다. 야고보에 따르면 예수님은 높임 받으신 영광의 주이자 그리스도이며 언제나 그렇게 여겨져야 합니다(1절).
회당은 그리스도인의 교회를 가리킬 것입니다. 여기에 두 종류의 사람이 옵니다. '금 가락질을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또한 다른 한 사람입니다. 부유한 사람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라는 말을 듣는 반면 가난한 사람은 멸시를 받으며 거기 '서 있든지' 종처럼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는말을 듣습니다. 그렇게 '차별'하는 이들은 스스로가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서로를 "판단"해선 안되며 그렇게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악한 "생각"으로 가득함을 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2~4절).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야고보는 선택의 어휘를 사용하여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에서 특별한 위치를 갖는다고 선언합니다. 그들은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되므로 영원한 의미에서 부요합니다(5절).
'너희를 억압하며', 이러한 억압 내지 착취는 상인과 지주들이 가능한 이들에게서 땅과 재산을 빼앗는 1세기의 극단적인 사회적 양극화의 상황에 반응합니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인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을 '비방'하는 자들은 세상의 '부자' 불신자들인데 왜 그들은 모임에서 부자를 존귀하려 하는지에 대해 이유를 제기합니다. '법정으로 끌고 가지', 구약에 자주 기록된 대로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의 것을 빼앗기 위해 사법 제도를 자주 이용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갈릴리에서 주후 66~70년의 전쟁으로 이어진 반란이 일어난 주된 이유였습니다(6~7절).
<사랑의 법, 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것>
8~26절
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사랑이라는 최고의 법', 편애와 차별은 하나님 나라의 사랑의 법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법', 즉 여기에서는 윤리적인 행위에 대한 천국의 법의 정점으로써 레 19:18("네 이웃 사랑하기를")에 있는 하나님의 법과 관련된 '왕에게 속한 법'입니다(8절).
'차별'은 사랑의 계명과 정반대입니다. 부자를 향한 편애는 가난한 자를 공평하게 대하라는 구약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며 하나님의 법에 대한 심각한 위반입니다(9절). '자유의 율법', 참된 자유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복음을 통해 죄에서의 자유를 제공합니다. 야고보는 빈부에 대한 논의의 맥락에서 또한 하나님의 법은 가난한 자를 편견, 억압, 착취에서 자유롭게 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마지막에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것을 생각해야합니다(12절).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이 잠언적인 말은 1~12절의 함의를 요약하며 14~26절의 행위 없는 믿음에 대한 논의로 이어집니다. '당신이 남에게 행한 일이 심판 때 당신에게 행해질 것이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이는 이 문맥에서 심판때 신자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베풀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자의 긍휼의 행위(즉 가난하고 상처받은 이들을 돌본 일)는 그들이 심판 때 의롭다고 인정받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긍휼은 가난한 자들을 대함에 있어서 필수적인 구약의 전제 조건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긍휼은 신약에서도 신자들의 필수 조건입니다. 긍휼이 없으면 신자들은 하나님의 긍휼이 아닌 심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13절)
행위 없는 믿음이 일상생활에서 어떤 모습을 띠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실례.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는 말은 그 자체로는 경견한 소망이자 가난한 자가 행복해지기를 비는 기도지만 실제로는 궁핍한 사람은 돕기를 거절하고 이를 감추기 위한 핑계입니다. 그런 기도에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15~16절).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단일신론에 대한 이러한 확언은 '쉐마'(신 6:4)라고 불리는 유대인의 핵심적인 신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 말의 불충분함을 강조합니다. '귀신들도' 이를 '믿고'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정신적인 동의만 가지고는 아무도 구원하지 못합니다. 구원하는 믿음은 바울과 야고보가 둘 다 확언하듯이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19절).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야고보는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데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온전하게 돼다'라는 말은 보통 '성숙으로 이끌다'라는 뜻입니다. 장성하게 자란 진정한 믿음은 그것이 낳는 선한 행동으로 나타납니다(22절).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야고보는 또다시 언뜻 보면 사랑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바울의 가르침(롬 3:28)을 반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둘은 양립 가능합니다. 야고보에게 있어서 "믿음으로만"이란 말은 거짓된 종류의 믿음, 삶 속에서 열매 맺는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개인적 신뢰가 없는 단순한 지적 동의를 뜻합니다(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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