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성문 종합 영어'를 졸업하자
유럽에도 "종합영어"같은 교재가 있을까?
우리나라 영어학도들 치고, 학창시절 성문 기본영어 내지는 성문종합영어를 한 번쯤 공부해 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또 어지간한 집이라면 아마도 책꽂이에 꽂아두고 형, 동생 대물림을 하면서 보는 책일 것이다. 그런데, 다른 서방국가에서도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문법책이 있을까?
문법책은 여러가지가 있다. 하지만 아무리 '문법책'이라고 해도 영어를 공부하는 목적과 동기가 모두 제각각인데, 모든 사람이 같은 책을 사용한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유럽인이나 미국인들에게는 씨알조차 통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쪽에는 우리나라의 "성문종합영어"와 같이 일종의 '바이블(The Bible)'과 같은 역할을 하는 문법책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인기있는 문법 교재는 영국의 Oxford University Press가 출판한 "A Practical English Grammar"나 "Practical English Usage"정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그쪽 사람들에게 어떤 교과서와 같은 노릇을 하지는 않는다.
우리보다 영어를 훨씬 빠르고 쉽게 습득하는 서방국가의 학생들이 문법책을 활용하는 모습을 관찰하면, 그 방법적인 면에서 우리와 큰 차이가 있다. 우리는 주로 문법책을 첫 페이지부터 펼쳐서, 처음부터 끝까지 마스터하는 식으로 공부하는 반면에, 유럽 학생의 경우 문법책을 마치 사전을 이용하듯이, 모르는 부분을 index(색인)를 통해 수시로 찾아서 그때그때 확인하고 익히는 방법을 취한다. 결국 우리는 문법책을 어떤 '참고서'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반면, 그들의 경우는 문법책을 어떤 '백과사전'의 개념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다른나라에도 문법책은 존재하지만, 우리같은 '종합영어'개념의 그런 책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보지 않는다. 언어를 그렇게 공부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어는 어휘나 독해나 문법같이 여러 과목으로 딱히 분리해서 공부할 만한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법공부만을 따로하는 것을 개인적으로 바람직하게 여기지 않는다. 실제로 문법책을 백과사전식으로 이용하는 유럽 학생들(영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나라의 학생들)과 우리의 '문법수준' 차이를 보면 어느 방법이 효과적인지를 대번에 알 수 있다.
한국 영어학도들의 문법학습에 있어서의 방법적 문제는 다음 글에서 논하기로 하고, 이 글에서 문제로 삼고자 하는 것은, 문법책의 대명사처럼 지금도 아성을 지키고 있는 우리나라의 '성문종합영어'의 질적인 측면이다. 이 책은 처음 출판된지 3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한 번의 내용개정 없이도 여전히 국내 영어학습서적 최정상의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다. 그리고, '문법이 부족한데 무슨 책으로 어떻게 공부해야 하느냐'고 물으면 단연 '성문종합영어를 봐라. 없는 게 없다.'라고 조언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가장 많다. 정확한 수치는 모르지만 그런 사람들이 고졸학력 이상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중에, 그 조언을 구한 사람이 성문종합영어로 공부하다가 어려움을 호소하면, 다시 그 학도에게 "열심히 해라. 하다 보면 될 것이다." 하는 말을 반복하기 일쑤이다.
만약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가 우리나라 영어교육계에 몸담고 있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교육자의 역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으뜸되는 것이 '안내자'로서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을 때, 특정 방법으로 하다가 고충을 호소하는 이에게 '그래도 그냥 열심히 해라'는 것은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질문에 대한 회피이다.
해보지도 않고 대뜸 "영어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두서없는 질문을 냉큼 던지는 경우라면 '일단 열심히 하려는 마음자세부터 먼저 갖추어라'는 답변이 가능하겠지만, 특정 방법으로 하다가 고통을 호소하는 이에게도 똑같이 답변해 주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선 안된다. 똑같은 답변이라고 해도 어떨 때는 질문에 대한 명답이 될 수 있고, 또 어떤 경우는 정반대로, 안내자로서의 책임 유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전국의 영어지도자들에게 목놓아 울면서 탄원하고 싶다. 수영은 전적으로 실습을 통해 가르치기 때문에 처음 수영을 배우는 이들을 수영장에 넣고 물에 대한 공포심을 없애며 자율적으로 물과 친해지도록 하지만, 물에 빠진 경우는 건져 주어야지 알아서 헤엄쳐나올 것이라고 방치하고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영어를 가르침에 그 무엇이 다르겠는가! 결국 교육자의 일차 역할은 '안내'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국인들의 뿌리깊은 고정관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열심히 하다 보면", 그 '열심히'라는 것 자체가 어떤 절대적 가치, 궁극의 가치를 갖는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다. 한국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하다 보면 되겠지요 뭐."하는 말은 얼핏 들으면 아주 우직하고 끈기있고 사내답고 패기있게 들리지만, 실제로 그 말 이면에 숨은 심각한 논리적 착각은 이제 누군가가 상기시켜 줄 때도 충분히 되었다고 필자는 본다.
열심히 하는 태도도 물론 중요하다. 실제로, 기본적으로 부지런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하다보면 되겠죠"식의 사고는, 방법적인 면,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에 대한 고찰이 없이 '그냥 열심히만' 하면 모든 것이 만사 땡이라고 생각하는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뭐, 성문종합 '영어'도 분명히 영어책은 영어책이니까, 그냥 하다보면 어떤 식으로든 내 영어학습에 도움이 되어 줄 것이고, 종내에는 영어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이 아니냐 하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이 영어학습에서 실제로 얼마나 아둔한 생각인가에 대해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각도로 생각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영어학습에서는 방향을 잘못 잡아서 잘못된 공부를 하게 되면 그 폐해가 마치 세균처럼 학습자의 몸속 곳곳으로 스며들게 되어, 아예 처음부터 하는 것보다 후에 그것을 비워내는 데에만 경우에 따라서 몇 곱의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우리나라 영어학도들에게 필요한 태도는, 그저 묵묵히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을 수용하기만 하는 자세가 아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며, 내 궁극의 목표는 무엇인데 지금 하는 것이 그 목표와 과연 부합하는지의 여부를 수시로 점검해 보고,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건가?"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하는 것을 자주 자문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성문종합영어가 방에 지금 있는 사람은, 그 책을 뽑아서 펼쳐 보자. 1장은 명사(Noun)에 대한 내용이다. 그리고 거기에 나오는 독해지문은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사이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이 글은 지금도 희대의 명문으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그런 지문에서 "교육적 효과"를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그 글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글을 영어참고서가 시작하자마자 여봐라 하고 내어걸어서 이 글은 영어학도들의 필독문이라는 인상을 주어서는 아무런 교육적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성문종합영어는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고등학생, 또는 최상위권 중학생들이 보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들이 케네디나 러셀이나 아인슈타인의 명문을 해독해 내기 위해서 5독 10독을 하고도 몰라서 사전을 뒤지고, 단어는 다 해결했는데 이번에는 문장 구조가 이해가 가지 않아 해설판을 참조하고, 그렇게 그 책을 끝까지 강행돌파한 후에 맨 처음으로 돌아와서 보니까 또 몰라서 위의 과정을 다시 반복하고 하는 데 소모하는 시간들이 교육적으로 어느 정도의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진지한 토론이 이제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필자는 그런 명문들을 읽어서 얻는 모든 이로움을 송두리째 부정할 생각은 없다. 거기 나오는 글들이 하나같이 세계 영문학 역사상 손꼽히는 명문들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주옥같은 글들을 읽어서 얻는 이로움이 아주 없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명문모음집"이 아니라 "영어학습서"라는 점을 제작진은 망각해서는 안된다. 이 글이 물론 좋은 글들이긴 하지만 고교생용 영어학습서이므로 '영어학습'의 좁은 측면에서 본다면 '교육적으로' 그리 효과적인 방법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필자와 비슷한 때에 고등학교를 다니고 그 당시에 성문종합영어를 10독 20독을 하던 이들이, 10년이 지난 지금 대단히 현학적인 영문을 쓰면서 지극히 초보적인 면에서의 오류를 남발하고, 보편적이고 쉬운 어휘나 문장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는 것을 본다면, 우리는 거기에 수록된 글들의 문학적 가치만을 가지고 이 책은 좋은 책이다라고 강변하지 말고, 어느 독자층을 겨냥한 어떤 목표의 책인지를 근본적인 시각에서 다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영어라는 언어를 다소 깊이있게(여기서 깊이있게라는 것은, 단순히 시험 준비용으로가 아니라, 영어를 그 자체로서 즐기면서 공부하는 태도를 말함) 공부한 사람들이 '성문종합영어는 쓰레기'라고까지 극언하는 것은, 그 책의 지문의 질을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 책의 다른 문제들을 언급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른 문제들'이란, 잘못된 번역을 버젓이 옳은 번역인 양 제시하는 것들과, 또 별로 알 필요 없는 지식들을 잡다하게 모아 놓았다는 이유가 가장 크다. 1940-50년대에나 쓰이던 표현들을 마치 전형적인 문장인 양 용례로 삼고 있는 것이 이 책의 현실이다. 결국 성문종합영어라고 하는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정말 알아야 할 내용에 있어서의 결여, 그리고 현재로서는 아무 의미없는 내용들에 대한 풍부함. 이 두가지가 빚어내는 불협화음에 있다. (예를 들어서 "To be frank with you"라는 표현이 성문종합영어에서 '솔직히 말하면'의 뜻이라 해설되고 가장 전형적인 표현인 양 학습시키고 있지만, 그것이 실제 영어에서 무슨 뜻이며 성문종합영어의 설명이 어떻게 잘못인지는 다음을 참고하기 바란다(이런 예가 전체 책에서 한둘이 아니다).
<to be frank with you 에 대한 예>
저하고 쉬운 작문 예제 한가지만 해 봅시다. 다음을 영작해 보세요.
[문제] 전 당신 아버님과 이야기하는 게 즐거워요. 그렇지만 솔직이, 그의 정치관은 약간 완고한
면이 느껴져요.
별별 답이 나오리라 생각되지만,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택하는 구문은 대충 다음과 같습니다.
I enjoy talking with your father. But to be frank with you, I
think his political ideas are somewhat stubborn.
필자가 걱정하는 것이 실은 위같이 영작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잘못일까요?
문제는 'to be frank with you'입니다. 이 말은 듣는 사람의 예상이나 느낌에 개의치 않고 의견을 직선적으로 표현할 때 씁니다. 따라서, 이 말을 쓰면 화자의 말이 상대에게 도전적으로 들리거나 말할 때의 예절에 어긋나 무례하거나 지나치게 둔하고 무뚝뚝하게 보이는 등의 위험을 무릅쓰겠다는 속뜻이 내재됩니다.
따라서, 위 문장의 경우는 'to be frank with you'이하의 내용이 뒤통수를 치는(shocking) 것도 아니고 무례하지도 않으니 'to be frank with you'라는 말을 쓸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오용 예를 하나 더 볼까요?
To be frank with you, I have two brothers and one sister. ( X )
(Frankly speaking)
: (단순한 사실의 열거에 불과하다)
한국인들은 to be frank with you를 빈번하게 쓰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듣는 쪽으로 하여금 왜 솔직함을 새삼 강조하고 확신시키려 하는지 의구심을 갖게 하기도 하니 바람직하지도 않다. 말할 때 'to be frank with you' 라고 하기는 했어도, 이는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도 있으니 받아달라는 요청에 불과한 것이지 상대방이 내 말을 받아들여 내 솔직성을 인정해 준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니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고등학교때 '독립부정사'라는 것을 가르치면서 to be frank with you 가 들어간 예문은 꼭 나오지요. 기억나십니까? 고교영어 참고서의 양대 산맥이라는 성문 시리즈와 맨투맨 시리즈가 모두 이렇습니다. 그 결과, 한국인의 절대 다수가 'to be frank with you' 의 개념도 정확히 모르면서 '솔직이' 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to be frank with you또는 Frankly speaking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물론 그 책들에서 저자가 학생들에게 가르치려는 것은 '구문 형태(pattern)'이지 'to be frank with you(또는 frankly speaking)'의 정확한 개념이 아닌 것은 이해하지만, 하필이면 구미인이 평생동안 열 번이나 쓸까말까인 그 표현 to be frank wity you를 가장 전형적인 표현인 양 가르쳐서, '솔직이' 라는 한국말을 보기가 무섭게 'to be frank with you'를 퍼뜩 떠올리게 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 부분이지요.
혹자는 위의 우리말을 영작할 때 '솔직이'라는 표현을 옮길 때 to be frank with you 라는 표현을 쓰지 않으면 이거 무엇인가 소홀한 느낌이 들어서 꼭 자기가 확실히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 표현을 써야만 마음이 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확실하게 아는 것을 써먹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도 하니 그런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위같은 말을 영어로 옮길 때 '솔직이'라는 우리말이 주는 시각적 제약에서 벗어나서, 다음과 같이 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1) I enjoy talking with your father. But fact is, I think his political ideas are somewhat
stubborn.
(2) Fact is, I have two brothers and one sister.
그리고 다음의 예도 같이 보자.
FAO said that 37 countries around the world, including Iraq, North Korea, are critically short of food. Some 3.5 billion tons of food should be distributed in 1998, less than half the level of the early 1990s, the U.N. agency revealed.
이것을 상당수의 영어학도들은 이렇게 해독하곤 한다.
" FAO 는 이라크, 북한을 포함한 세계 37개국이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다고 밝혔다. 약 35억톤의 식량이 1998년에 보급되어야 하며, 이는 1990 년대 초기의 절반에 못 미치는 수준이 될 것이라고 UN의 한 사무국이 보고했다."
이렇게 읽어서 안되는 이유는, 맨 처음에 나오는 FAO는 유엔의 한 기구이며, 마지막의 the U.N. agency라는 것은 다름아닌 FAO를 그대로 받는 말이며 이 둘은 정확히 일치하는 개념이고, 만일 이 둘이 위에 풀이해 놓은 꼬라지처럼 진짜 별개의 개념이라면 'U.N. agency'앞에 'the'라는 말을 사용할 수가 없다. 결국 마지막 부분의 뜻은 "FAO 는 아울러 이러이러한 내용을 함께 보고했다."는 의미가 된다. 정관사 the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관사 the는 이미 언급된 사항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정관사 the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무리며, 아무 의미도 없는 행동이다. 숫자도 채 배우지 않고 구구단부터 외게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성문종합영어에는 정관사 the를 찾아보면 어떻게 설명되어 있는가?
[ 정관사 the ]
1. 강, 산맥, 군도의 이름 앞에는 the 를 붙인다.
2.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것 앞에는 the 를 붙인다.
3. 칭호나 서수 앞에는 the 를 붙인다.
4. 여러 나라, 주가 합쳐진 국가 앞에는 the 를 붙인다.. (이하 생략)
.......
이렇게 20 가지에 가까운 항목들을 나열식으로 보여주고 그것을 암기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그렇게 해서 20 여 가지의 정관사 용법을 암기한들, 도대체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렇게 20여가지를 나열식으로 외우게 해 놓고 정작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것은 결여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고, 이는 또한 대학생 이상의 영어학도들이 만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병폐이기도 하다.
필자의 솔직한 생각을 좀 상스럽게 표현하면, 누군가가 영어의 기본기를 닦기 위해서 성문종합영어를 보고 싶다면 치맛자락을 물어뜯고 말리고 싶은 심정이다. 이 책을 수십번을 보았다고 자신의 영어실력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사변적인 에세이나 편지조차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자기소개 하나 영어로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정말로 그 책을 수십번을 보는 데 허망하게 낭비해버린 그 인고의 시간들이 너무나 아깝고 안타깝게만 생각된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지적 풍요로움을 얻기 위해 이 책에 있는 지문들이 탐이 나서, 이 책으로 영어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하지만, 그런 경우라면 차라리 그럴 비용과 시간을 들여서 전체 원문과 제대로 된 번역본, 또는 다른 명문 전체글 모음집을 읽는 쪽을 더 권하고 싶다. 성문종합영어에 나와있는 두어 단락 정도의 토막낸 글들을 여러 개 읽는 것보다는, 차라리 명문 전체를 하나 돌파하는 것이 그 사람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서는 훨씬 의미있는 방법이다. 우리나라에는 성문종합영어같은 책을 통해서 그런 글을 읽으려는 사람은 많아도, 그 글 자체를 글로서 직접 접하려는 사람들은 어쩐 일인지 거의 없다.
성문종합영어가 양산해 내는 사람은 언어학적으로 매우 불균형한 사람이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나오는 독해 지문들보다 훨씬 문제인 것은, 성문종합영어의 "주"가되는 문법설명이다(이 책은 굳이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이분법논리를 적용한다면, 사실 독해교재라기보다는 문법책에 가깝다). 그 문법설명들의 옳고 그름에도 문제가 많지만, 성문종합영어에서는 있어야 할 내용들이 없는 그 결여성, 그리고 없어도 될 내용들의 풍부함이 이루는 그 악랄한 대조가 극을 이루는 이 형태를 가지고는 영어학도들에게 교육적으로 아무런 효과나 성과도 기대하기 어렵다(앞에서 예로 든 정관사 'the'를 보라). 이 책의 제작진이 언어교육학적인 면에서 어느 정도나 연구를 하고서 이런 책을 썼을까 하는 의구심이 강하게 든다.
이제는 성문종합영어에 대한 맹신을 과감히 떨쳐버리자. 다만, 그 결과야 어땠든간에 지난 수십년간 한국의 영어교육을 홀로 외로이 책임지다시피 해 온 그 나름대로의 업적까지도 평가절하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우리는 성문종합영어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성문종합영어를 '졸업'해야 하는 것이다. 성문종합영어가 이끌어 온 20세기 후반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묻자. 세상 만사 모든 것은 변한다. 천하의 조훈현도 밥먹여 키운 자신의 제자 이창호가 이제는 우리나라 바둑의 최고수라는 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 아, 젊은시절 하늘 높은 줄 모르던 그 꿈은 간곳 없고 검은 머리 파뿌리 되고 등은 굽었건만, 내가 못다 이룬 꿈을 이제는 내 자손이 이루어 주길 하고 바라며 모든 사람은 일생을 그렇게 살아간다.
문제점이 명명백백한 시점에서 지금까지 '어떻게 해 왔느냐'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무엇이든 문제의식을 가지고 원점에서 생각해 볼 때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성문종합영어가 후발 주자에게 바통을 넘겨 줄 때는 이미 지났다. 우리는 변화를 두려워하며 시류를 보지 못한 흥선 대원군이 되어서는 안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