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모 사이트에서 며칠 전 세상을 뜬 회원의 유품 정리에 대한
글을 읽고 울컥 생각나는 옛친구가 있어 쓴다.
그는 40대 중반의 미남이었다.
외적으론 모든 것을 다 갖춘 멋쟁이었다.
그와 나는 (市)사진작가협회에서 활동하면서 알게 되었다.
180센티미터가 넘는 키와 건장한 체격에
잘생긴 배우들의 이목구비를 모아 만든 조각같은
얼굴을 가진 그는 피부까지 하얗고 목소리 또한
성우처럼 아름다워 늘 여자들이 따랐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그는 이혼을 하고
고등학생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그가 나를 형님이라 부르며 밥 한번 같이 먹자고 했다.
그가 협회 사람들에게 형님이라 부른 것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와 나는 가까워지고 서로의 집에까지 오고가곤 했다.
어느 날은 적당한 오디오 한 세트를 추천해달라고 했다.
그의 부친이 유명 회사의 간부로 있을 때
유복한 학창 시절을 보내며 아버지의 오디오를 만지던 추억이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로선 꽤나 고가 오디오를 처음 들여놓은 그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나는 적잖게 놀랬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흐르고 있었다.
첨엔 튜너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턴테이블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 때까지 나는 30년 넘게 클래식 음악을 들어왔지만 모던 음악을 별로 듣지 않았는데
처음 오디오를 갖춘 사람으로선 의외였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고등학교 때 밴드부에서 트럼펫을 불면서 이 곡을 자주 연주했다고 했다.
멋진 그가 듣는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은 참으로 멋지게 들렸다.
그때부터 나의 취향도 조금씩 바뀌어 현대 클래식음악을 듣게 되었다.
그러던 중 나는 학교를 중간 퇴직하고
출판사 편집 일과 문예지 장기 연재, 오디오 평론 등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며 그와 만나는 시간이 차츰 줄어들고
대신 당시 처음 생긴 카카오 스토리를 공유하면서 서로의 소식을 주고받았다.
그의 카카오 스토리는 평소 그의 성격대로 늘 활발하고 그늘이 없었지만
어느 땐가부터 소식이 뜸해졌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나갈 무렵 그의 큰아들 소식을 지인을 통해 듣게 되었다.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여 첫 MT를 나가 익사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낙천적이고 활달했던 그는
점점 평소의 모습을 찾아가고 다시 음악 이야기가 카스에 올라왔다.
그러던 어느 날 카스에 올라온 그의 글은
“ 아 ~ 아프다...”
짧은 한 문장이었다.
기분이 이상해 전화를 했더니 몸이 좀 안 좋아
병원에 다녀왔다며 별 일 아니라고 했다.
그렇게 1주일 정도 지나고 전화 한 통화를 받았다.
그의 고등학생 둘째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유품들을 정리해야 하는데
오디오를 얼마에 장터에 내놓으면 좋을지 묻는 것이었다.
내가 전화를 한 그 다음날 아침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아들에게
내 전화번호를 알려주며 나에게 상의를 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했다.
나는 친구의 유품보다 형도 아버지도 없이 혼자 남은 그의 아들이
먼저 걱정되었지만 이혼한 엄마는 찾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에게 추천해준 스피커가 다인 오디오 SP25이고
나 역시 같은 스피커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가 떠난 후 내 스피커도 시름시름 앓더니
소리가 나지 않아 수리점에 가져갔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이 잘 나왔다.
하지만 우리 집에 가져오니 다시 소리가 나지 않았다.
같은 앰프에 같은 스피커 선으로 다른 스피커를 연결하면 잘 나오는데..
몇 번을 다시 연결시켜도 소리가 나지 않아
가게에 가져가 인기 품이어서 신품 구입가보다 높은 3백만 원을 받았다.
스피커를 팔고 돌아오는 길 옆 철로를 지나가는 열차 위로 눈이 날렸다.
문득 일본 영화 <철도원>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일 년의 절반이 눈으로 덮인 산골 역에서 평생을 보낸 철도원이
할 줄 아는 일은 들어오는 기차를 맞이하고
떠나는 열차를 보내는 수신호를 흔드는 일과 호각을 부는 일이었다.
그는 아내의 죽음을 맞이하고 딸도 떠나보냈다.
아내와 딸이 자신의 곁을 영원히 떠나는 날에도 일지에
‘금일 이상 없음’
이라고 쓸 줄밖엔 몰랐다.
나는 늙은 철도원의 가슴으로 나의 친구와 스피커를 떠나보내며
나의 가슴에 한 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음’
이라고 쓰고 눈보라는 나의 차창을 매섭게 때렸다.
십 수 년이 지난 오늘 며칠전 세상을 떠난 회원을 생각하며
다시 나의 가슴에 한 줄 쓴다.
‘0선생님, 저 세상에선 못 다한 일 이루시고 행복하세요.’
** 20년 전, 친구가 처음 마련한 오디오로 내게 들려주던 곡
https://youtu.be/bnIpfLpUt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