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성을 지나 이제 바야흐로 한국 축구의 중심은 손흥민이다. 유럽에서 선수생활을 하는 다른 선수들도 있지만 공격수라는 점이 우리의 마음을 끄는 대목이다. 축구의 승패는 결국 골이 결정하는 것이니 말이다. 이영표라는 선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박지성과 한 시대에 함께 공존했으나 분명 공격수 박지성이 수비수 이영표보다 큰 관심을 받았다. 물론 리그, 소속팀의 규모와 영향력을 배재할 수는 없으나 나 개인적으로는 이영표를 더 영민한 선수로 생각했으나 대중의 관심은 박지성이었다. 골을 넣을 확률이 많은 공격수였기 때문이다.
그랬던 박지성이 가고 손흥민이 왔다. 게다가 박지성보다 골을 잘 넣고 있다. 그 나이에 그보다 경험이 많은 수비수들을 상대로 골을 잘 넣는다는 것은 분명히 정서적으로, 심리적으로, 기술적으로 뛰어나기 때문이다. 어쩌면 독일의 분데스리가는 영국, 스페인 리그보다 더 강한 리그일 수 있다. 최근 독일 팀들이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타 리그보다 더 좋은 성적표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리그에서의 두드러진 활약은 그의 실력에 대한 반증임이 분명하다. 그의 팀 레버쿠젠이 올 해에도 유럽 챔피언스리그에 나갈 수 있는데도 지난 시즌 손흥민의 활약상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물론 이번 시즌 플레이오프에서도 그의 골로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손흥민은 리그에서도 잘 한다. 주말에 있었던 슈투트가르트와의 경기에서는 2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였다. 팀의 3골에 모두 기여한 것이다. 그런데 그의 동료이며 스트라이커인 슈테판 키슬링이 그를 비판하여 타블로이드판 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그의 요지는 그러한 듯하다. 3-2로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손흥민이 반칙을 하여 제공한 프리킥이 그 다음 실점의 빌미라는 것이다. 글쎄 손흥민이 반칙을 안 했더라면 골을 안 먹을 수 있었겠지만 손흥민이 골을 넣지도 돕지도 못했다면 패했을 것이다. 무승부로 이끈 공로가 보다 클 것인데 실점의 먼 빌미를 제공했다고 동료가 비판을 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이것은 동료의 질투이다. 스피노자의 말을 빌려, 질투(invidia)란 타인의 행복을 슬퍼하고 반대로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도록 인간을 자극하는 한에서의 미움이다. 질투는 미움의 한 종류인 것이다. 키슬링은 손흥민의 골과 도움의 활약에 슬픈 것이며 손흥민의 반칙으로 인한 실점을 부각하여 손흥민을 불행하도록 함으로써 본인은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손흥민이 밉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도 질투이다. 질투와 관련된 속담이 있는 것을 보면 질투는 보편적인 사람의 감정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질투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질투는 완전히 무가치한 감정은 아니라고 한다(강신주, 2014). 가령 부부간의 질투, 애인 간의 질투는 다소 둔감했던 상대방에 대한 새로운 관심인 것이다. 만약 나의 여자라고 생각했던 애인이 다른 남자와 너무 즐겁게 대화하고 웃고 스킨십을 한다면 그것에 감정적인 반응을 하지 않는 남자는 없을 것이다. 애써 무감한 척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자신의 감정에 대한 최선의 반응인지는 모르겠다. 나라면 똑같은 상황을 지속적으로 받아줄 생각이 없을 것이니 나의 감정을 표현할 것이다. 왜냐하면 반대의 상황이라면 나의 애인도 기분이 안 좋을 것이니 말이다. 역지사지라구! 만약 나의 의견이 수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두 사람이 연인의 조건이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하고 서로의 갈 길로 가야 할 것이다. 사랑은 두 사람 만의 관계이며 두 사람이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데, 한 명이 조연으로 분류되기 시작하면 그것은 두 사람만의 관계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질투는 관심으로부터 발생한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문제는 관심과 사랑에서 질투가 발생하지만, 질투에서 사랑이 발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강신주, 2014). 손흥민의 동료 키슬링이 그를 질투한다면 어쩌면 그들의 관계는 다시 회복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약 동생같은 손흥민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마음이었다면 좋은 관계로 남겠지만, 자신의 역량을 넘어서는 불안감에서 발생한 감정이라면 그들은 공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동료 키슬링의 질투는 그가 주인공의 자리에서 내려온 듯한 상실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질투는 자신이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고 싶은 감정이 그 기반인데 레버쿠젠의 간판이었던 즉 레버쿠젠의 주인공이었던 자신이 이제 조연으로 전락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손흥민에게 질투를 느끼고 비판을 했던 것이다.
질투라는 감정은 운동과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경쟁이라는 감정이라면 키슬링은 손흥민의 긍정적 타인으로 존재하면서 상호간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겠지만 질투는 발전을 위한 초석이 되지 않는다. 자신의 능력을 보다 더 발전시키려는 노력과 의지, 그리고 좋은 친구로 손흥민에게 경탄할 때 자신이 다시 레버쿠젠이라는 극장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