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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자료실 스크랩 곽암선사의 심우도 해설
푸대화상 추천 0 조회 22 09.08.09 09:0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곽암(廓庵)의 심우도<尋牛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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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修行)은 곧 훈련(訓練)입니다. 훈련(訓練)으로써 모르는 것을 알게 되고 잘못된 습관을 고칠 수 있고 과거의 업(業)을 바꿀 수 있습니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 훈련을 반복하는 것을 반복(反復)의 도(道)라 하고 반복해서 훈련하는 것을 우리 불가(佛家)에서는 수행이라 합니다. 수행의 분상에서 공부하는 방법이 천만방편(千萬方便)이 있고, 그 방편에 특색이 있어 수행자의 근기(根機)에 따라 맞는 방편을 택합니다.

십우도송(十牛圖頌)은 선(禪)의 실참수행(實參修行)방법을 알기 쉽게 제시(提示)해준 법문으로서 방황하는 중생 심리상태를 길 잃은 소에 비유하여 잃어버린 소를 찾듯이 무명으로 허덕이는 중생이 어둠을 벗어나 바른 길에 이르러 해탈을 구가하는 과정을 열 가지의 그림으로 그리고 거기에 송(頌)을 붙여 수행자의 귀감으로 삼게 한 것입니다.

이 십우도(十牛圖)는 대웅전벽화(大雄殿壁畵)에 빠지지 않고 그려져 있어서 우리에게 이미 널리 알려져 친숙하지만 막상 그 내용은 확실히 알지 못하는 실정이어서 십우도송(十牛圖頌)을 풀이하고자 합니다.

십우도(十牛圖)는 심우도(尋牛圖)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1) 잃어버린 소를 찾아나서고(심우:尋牛) (2) 그 발자국을 보고(견적:見跡) (3) 그 소 자체를 보고(견우:見牛) (4) 소를 붙잡고(득우:得牛) (5) 소를 길들이고(목우:牧牛) (6)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기우귀가:騎牛歸家) (7) 집에 와서는 소를 잊고(도가망우:到家忘牛) (8) 소도 사람도 함께 잊고(인우구망:人牛俱忘) (9) 무위(無爲)의 경지에 이르러(반본환원:返本還源) 시정(市井)으로 나와 세속을 교화하는 (입전수수:入廛垂手)과정을 그림으로 그린 것입니다.

이러한 십우도(十牛圖)는 송대(宋代)에 이르러 성행하여 여러 작품이 있었으나 유명한 것은 곽암사원(廓庵師遠)의 작품입니다.

곽암(廓庵)은 벽암록으로 유명한 원오극근선사와 동문인 대수원정(大隨元淨)의 제자이며 이들은 모두 임제종 양기파에 속합니다.

십우도(十牛圖)에는 곽암선사가 지은 십우도(十牛圖)제목과 송(頌)과 도(圖)에 자원(慈遠)이 지은 총서(總序)와 소서(小序) 그리고 석고(石鼓)와 만송(萬松)이 지은 화답송(和答頌)을 한데 묶어 유포되어 온 것이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전해집니다.   -- 혜거스님/ 금강선원 원장

참고) 위 서론은 필요할 것 같아 임의로 붙인 것입니다. 


불가에서는 선의 수행단계를 소와 동자에 비유하여 도해한 그림으로서, 수행단계를 10단계로 하고 있어서 십우도(十牛圖)라고도 한다. 중국 송나라 때 만들어진 보명(普明)의 목우도(牧牛圖)와 곽암(廓庵)의 심우도(尋牛圖)가 있다.


깨달음을 찾는 수행자는 에스키모가 눈의 상태를 관찰하는 것만큼 의식을 세밀하게 관찰해야 한다. 깨달음이 하얀 색채를 넓게 펼쳐놓은 것이 아님은 눈과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그것은 다양한 주기적 변화를 통해서 발전하는 과정이다. 12세기 중국에서 나온 심우도를 보면 깨달음의 10계절이 나타난다. 여기에는 영적인 탐구에 대해, 비 내리는 숲 속을 거칠게 배회하는 잡기 힘든 황소를 찾는 과정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황소는 의식의 내면 본성, 즉 우리 존재의 신비를 상징하고 있다. 불교의 가르침을 보면 우리가 아무런 내면 본성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으로 드러난다(무아), 즉 우리 의식의 본성은 비어 있고 열려 있다는 뜻이다. 이 열 장의 그림이 암시하는 깨달음의 차원들은 이 의식의 핵심(진정한 자아)이 분명해짐에 따라서 더욱 포용력이 커진다.


다음은 곽암(廓庵)의 심우도이다.


1 尋牛(심우): 소를 찾아간다.

 

 

 

소를 찾는 동자가 고삐를 들고 산 속을 헤매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처음 발심한 수행자가 아직은 선이 무엇이고 본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것을 찾겠다는 열의로써 공부에 임하는 것을 상징한다.


從來不失 何用追尋 由背覺成以疎 在向塵而遂失 家山漸遠 岐路俄差 得失熾然 是非鋒起

종내불실 하용추심 유배각성이소 재향진이수실 가산점원 기노아차 득실치연 시비봉기

본래 잃지 않았는데 어째 쫓아서 찾으려 하는가.

본래 면목을 잃음으로 말미암아 이룸이 멀어(疎)지고 속세에 향해 있으니 잃고 말았다.

가산은 점점 멀어지고 기로에서 어긋난다. 이해득실이 치열하니 시비는 칼날같이 일어난다.

茫茫撥草去追尋 水활山遙路更深 力盡神疲無處覓 但聞楓樹晩蟬吟

망망발초거추심 수활산요로갱심 역진신피무처멱 단문풍수만선음

망망한 수풀을 헤치고 소의 자취를 찾노니  강물은 넓고 산은 험하며 길은 더욱 깊기만 하다

힘이 다하고 기력이 떨어져 지쳐도 찾을 길 없는데  다만 숲 속 나뭇가지엔 매미 우는소리만 들리네.


이것은 우리가 깨달음의 과정을 분명히 의식하는 순간을 나타낸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본성을 탐색의 대상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소를 찾아가기」에 앞서 우리의 영적인 성장이 일상적 삶의 가면에 나타났던 셈이다. 모든 욕망이 어느 정도 명백하게 궁극적인 성취를 향한 열망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하여 공식적인 영혼의 탐구자가 된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본성을 향한 의식적인 에너지를 집중시키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발전 단계이다. 하지만 이러한 발전 단계 역시 선가의 전통이 분명하게 노출시키고 있는 근본적인 미망(迷妄)을 포함한다.

<심우도>에 관한 전통적인 경전 주석은 이러하다. 『소는 절대 사라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소를 찾는가?』 진정한 자아를 찾아감으로써 우리는 찾는 사람과 찾아주는 대상 사이의 환상적인 이원성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미 「있는」 진정한 자아를 왜 찾아가는가? 그 의식이 없다면 어떻게 찾아가는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한 번도 상실된 적이 없었으므로 절대로 발견될 수 없다. 우리는 「왜 찾아가는가?」라는 수수께끼에 대해서 만족스러운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이 대답을 찾을 수 없는 상태가 탐구를 끝나게 해준다.

고대의 주석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자기의 진정한 자아에 등을 돌렸기 때문에 그 사람은 진정한 자아를 볼 수 없다. 그는 자기의 잘못 때문에 소를 놓쳐버린 것이다. 그는 갑자기 꾸불꾸불한 미로 한 가운데 서게 되었다.』 추적자는 깊은 산 속이나 비오는 숲 속을 온통 헤매 다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미로는 주어진 문화권과 각 개인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생각과 행위의 복합적인 가능성을 나타내 준다. 추적자는 소가 이런 길 또는 저런 샛길을 따라갔다고 상상한다. 하지만 그가 이 다양한 길을 제아무리 성실하게 따라간다고 해도, 그는 절대 어떤 특정한 길을 따라서는 진정한 자아라는 소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소는 완전한 미로, 그 미로를 헤매는 추적자, 무한정한 비오는 숲 속으로 이해된다.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선사들이 「근본 마음」이라 부르는 존재의 기본 원리에 다름 아니다. 주석서는 결코 상실될 수 없는 이 「근본 마음」을 향한 착각(추적, 탐구)을 다음처럼 기술하고 있다.

『숲 속의 황량함과 밀림 속의 두려움을 안고 그는 나타나지 않는 소를 찾아가고 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어둡고 이름 모를 넓은 강을 품고 있는 깊은 산 덤불 숲에서 그는 숱한 샛길을 밟는다.』 이런 단계의 추적에는 흥분과 모험심이 뒤따르지만, 그래도 고독과 절망의 느낌이 계속 고개를 든다. 그는 초월하려는 야심에 빠져 일상적인 욕망을 뒤에 남겨 놓았던 것이다. 이것은 불가능한 탐색이다. 탐색의 개념 자체가 우리가 찾아가고, 현재의 보고 듣는 상태를 초월해 있지 않은 진정한 본성을 흐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첫째 <심우도>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이 매우 암시적인 내용을 담고 끝나고 있다.

『저녁이 되어 그는 나무에서 매미가 맴맴 우는 소리를 듣는다.』

매미의 음악은 추적자의 진정한 자아에 미묘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이 맴맴 소리가 숲 속 전체에 퍼져 있는 것이 마치 「근본 마음」이 추적자의 존재 전체에 퍼져 있는 것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그는 지치고 맥빠진 처지에서 길도 없는 황무지를 조사하고 있다. 그런데 마음을 부드럽게 매만져주는 매미의 울음소리가 사방 도처에서 들려온다. 모든 차원의 정신과 감각에 미묘하게 스며드는 것이 아닌가!

 

 


2 견적(見跡): 발자국을 찾는다.

 

 

소 발자국을 찾은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서, 순수한 열의를 가지고 꾸준히 공부를 하다 보면 본성의 자취를 어렴풋이 나마 느끼게 된다는 것을 상징화 한 것이다.


依經解義 閱敎知종 明衆器爲一金 體萬物爲自己 正邪不辨 眞僞奚分 未入斯門 權爲見跡

의경해의 열교지종 명중기위일금 체만물위자기 정사불변 진위해분 미입사문 권위견적

경서에 의하여 분별을 하게 되고, 가르침을 점검하여 종적을 알게 된다,

그러나 많은 그릇이 일금(一金)임을 밝혀, 만물이 자기가 됨을 체험하게 되어,

정사(正邪)가 분별되지 않고서 참됨과 거짓이 어찌 나누어지리.

아직도 이 문(깨달음)에는 들지 못하니, 발자국이나 보았다고 하자.

水邊林下跡偏多 芳草離披見也마 縱是深山更深處 遼天鼻孔즘藏他

수변임하적편다 방초리피견야마 종시심산갱심처 요천비공즘장타

물가와 나무 아래 수많은 발자국

풀이 우거졌으나 이를 헤치고 찾아본다

비록 이곳이 산이 깊고 골짜기가 깊다 해도

요천(遼天)의 비공(鼻孔)이 어찌 그것을 감출 수 있겠는가.


『경전과 가르침을 통해서 그는 소의 발자국들을 알아낸다. 지금까지 제각기 다른 황금 사발들이 기본적으로는 모두 황금이듯이, 각자 와 삼라만상도 참 자아의 드러남이라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사실 그 는 문에 들어선 것이 아니고, 소의 발자국을 시험적으로 보는 것이다』

발자국들은 다양한 깨달은 존재들이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매미의 울음과 사실 모든 현상이 「근본 마음」내지 「진정한 자아」의 같은 빛이라는 지혜의 가르침이다. 찾아가는 사람이 이제 찾은 사람이 된 것이다. 찾아가는 과정 자체에 이미 환상이 잠재되어 있었듯이 찾는 과정에도 환상이 도사리고 있다. 소의 발자국들은 자기 자신의 의식을 거쳐 나온 추적자 자신의 발자국들에 지나지 않는다.『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발자국들을 그는 숲 속과 물가에서 본 것이다. 저 건너에 밟힌 잔디가 보이지 않는가?』 소가 지나간 흔적은 어디서나 발견된다. 숲은 더 이상 쓸쓸하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발자국들을 따라가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주석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아무리 깊은 산골짜기나 아무리 높은 산꼭대기라도 이 소의 코를 감출 수는 없다. 그것은 곧바로 하늘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첫째 단계의 추적자와 둘째 단계의 초보 실행자가 발자취를 도처에 남기면서 탐색하고 있는 의식의 전체 영역이 바로 소인 것이다. 그러나 이 발자국들을 따라가는 것은 효과적이고 불가결한 환상이다. 그런 환상이 없다면 모든 현상의 내면적인 본성에 관한 본격적인 명상에 더 들어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3 견우(見牛): 처음으로 소를 본다.

 

 

동자가 멀리 있는 소를 발견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본성을 보는 것이 눈앞에 다다랐음을 상징한다. 물에는 짠맛이 있으나 보기만 해서는 모르고 맛을 보아야 짠지 아닌지 알 수 있고, 그림의 색깔만 보아서는 그 그림을 채색할 때 아교가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고 자기가 집적 그림을 그려보아야 알 수 있다. 남이 하는 것을 보기만 해서는 소용이 없고 자신이 집적 체험을 깨칠 수 있고 본성을 찾을 수 있게 된다.


從聲得入 見處逢源 六根門著著無差 勸用中頭頭顯露 水中고味 色裏膠靑 貶上眉毛 非是他物

종성득입 견처봉원 육근문저저무차 권용중두두현노 수중고미 색리교청 폄상미모 비시타물

소리를 따르니 들어감을 얻고, (소가) 있는 곳을 보게 되니 근원을 만난다.

육근문(眼耳鼻舌身意)이 드러나고 드러나지만 차이가 없고,

사용중이라야 뚜렷이 길이 나타난다. 물 속의 소금 짠맛이요. 물감의 아교로다.

눈 한번 껌벅이면 다른 것이 아닌 것을.

黃鶯枝上一聲聲 日暖風和岸柳靑 只此更無回避處 森森頭角畵難成

황앵지상일성성 일난풍화안류청 지차갱무회피처 삼삼두각화난성

나뭇가지 위에 지저귀는 금빛 꾀꼬리

따뜻한 날 화창한 바람에 언덕 위 버들가지 푸르네

다만 이것이니 어찌 다시 회피할 것인가?

삼삼한 두각 그림으로도 그릴 수 없노라.


주석은 매미의 노래에 암시된 것에 대해서 이렇게 부연되고 있다.『만일 그가 매일 매일의 소리를 의도적으로 듣고자 한다면 그는 깨달음에 이르러 바로 그 「근원」을 보게 된다.』 노변의 소음은 소의 울음소리이다. 소와의 이러한 만남은 따라서 은밀한 가르침을 듣는다거나 경전의 추상적 연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소는 말하자면 밀림 속 어딘가에 더 이상 숨어 있지 않다. 주석은 이렇게 비치고 있다.『어떤 움직임에든 「근원」은 분명히 존재한다. 내면 꼭 통찰력에 제대로 초점이 맞춰지면, 그는 「진정한 근원」과 동일하게 보이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렴풋이 소를 본 수행자는 의식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소를 찾아가거나 그 발자국을 찾지 않기 때문이다. 소는 어디에 나 있다. 추상적인 사색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 속에 있는 것이다. 주석을 다시 보자.

『종달새가 나뭇가지에서 지저귀고, 햇살이 출렁이는 버드나무에서 환히 빛난다. 거기 소가 서있다. 어디 숨을 수 있겠는가?』 「근원」은 감추지 못한다. 해와 종달새와 버드나무처럼 비록 구조와 외형은 다르지만 모든 형체 속에 바로 그 「근원」이 실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번째 깨달음의 단계는 오직 술 취한 사람이 언뜻 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 심한 싸움과 수행이 그런 통찰력의 섬광을 확장시키고 안정시키기 위해서 필요해진다.

 

 


4 득우(得牛): 소를 붙잡는다.

 

 

동자가 소를 붙잡아서 막 고삐를 낀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경지를 선종에서는 견성(見性)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땅 속에서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금강석을 찾아낸 것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 때의 소는 검은 색을 띤 사나운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아직 삼독(三毒, 탐하는 것, 성내는 것, 어리석은 것)에 물들어 있는 거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상징화 한 것이다.


久埋郊外 今日逢渠 由境勝以雜追 戀芳叢而不已 頑心尙勇 野性猶存 欲得純和 必加鞭달

구매교외 금일봉거 유경승이잡추 연방총이불이 완심상용 야성유존 욕득순화 필가편달

오랫동안 교외에 파묻혔던 그것을 오늘 만났으나

아름다운 경치로 인해 뒤쫓기가 번잡하고 방총(芳叢)을 그리워함이 그치지 않는다.

완고한 마음은 오히려 세고 야성이 남아 있으니

순화하려 하거든 반드시 편달(鞭撻)해야 하리로다

渴盡精神獲得渠 沈强力壯卒難除 時有재到高原上 又入煙雲深處居

갈진정신획득거 심강역장졸난제 시유재도고원상 우입연운심처거

정신을 가다듬어 소를 얻었지만 사납고 힘이 세어 다루기 어렵도다

어느 때 높은 산 위에 이르고 혹은 깊은 구름 속에 숨으려 한다.

『오늘 그는 거친 들판에서 날뛰던 소를 우연히 만나 실제로 붙잡게 되었다. 소가 너무 오랫동안 이 주변을 뛰어다녔으므로 옛 습관을 부수기란 쉽지 않다. 아직도 달콤한 향취가 스며 나는 풀이 그립고, 고집이 남아서 고비가 거추장스럽다. 그 소를 완벽하게 길들이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채찍을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밧줄을 단단히 잡고 놓치지 않아야 한다. 소가 여전히 나쁜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 겪은 소의 용맹한 기질은 「거친 힘」이라고 잘 표현되어 있다. 이것이야말로 깨달음의 천연에너지이다. 곧 창조와 파괴를 하나로 기각하는 완전한 포기가 그것이다. 그러한 에너지는 세련과 순화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것은 「근원 마음」의 편재성(遍在性)을 꿰뚫을 수 있는 심오한 통찰력을 생성해내고 나서야 시작할 수 있는 진보된 영적 수행의 기능이다. 왜냐하면 그런 통찰력에 앞선 영적 수행은 단순히 찾아가는 환상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소를 붙잡아 껴안고, 전체적인 자비와 완벽한 비폭력, 흔들리지 않는 성실성과 같은 수행으로 「진정한 본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계속 지속시켜야 한다. 이것들이 곧 「채찍」과 「밧줄」이다. 우리는 지금 위험할 수도 있는 소의 「거친 힘」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진지한 영성의 왜곡이 가능하다. 만일 배우려는 자세와 질서 잡힌 실행이 너무 일찍 포기된다면, 깨달음의 에너지가 제멋대로 분산될 수 있다. 소가 「아직 고집을 부리고 고삐를 싫어하면서 달콤한 풀을 그리워한다」는 사실은 최초의 인식이 인간의 관습으로 제한되지 않은 무한한 벌판에서 영원히 움직인다는 뜻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작용하는 관습적인 표면 층위의 생각은 분명히 「진정한 본성」의 열린 벌판에서 나온 샛길로 발전해 나왔던 것이다. 이 환상의 샛길이 뚫리고 나서야 야생의 황소가 관습적인 인간의 인식에 들어올 때, 진보된 수행자의 가치관과 나아가서 물리적인 신경계까지 깨달음의 에너지를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존재 양태와 조화를 이를 수 있도록 다시 편성되어야 한다.

 

 


5 목우(牧牛): 소를 길들인다.

 

 

거친 소를 자연스럽게 놓아두더라도 저절로 가야 할 길을 갈 수 있게끔 길들이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삼독의 때를 지운 보임(保任)의 단계로서 선에서는 이 목우의 과정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는데, 이때의 소는 길들이는 정도에 따라서 차츰 검은 색이 흰색으로 바뀌어 가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前思재起 後念相隨 由覺故以成眞 在迷故而爲妄 不由境有 唯自心生 鼻索牢牽 不容擬議

전사재기 후염상수 유각고이성진 재미고이위망 불유경유 유자심생 비색뢰견 불용의의

전사(前思)가 조금이라도 일면 후념(後念)이 이어 따르니

각(覺)으로 말미암아 진(眞)이 되고 미(迷)로 말미암아 망(妄)이 된다.

경(境)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자심(自心)에서 생긴다.

코뚜레를 하여 외양간으로 끌어 의의(擬議)를 용납하지 말라.

鞭索時時不離身 恐伊縱步入埃塵 相將牧得純和也 羈鎖無拘自逐人

편색시시불리신 공이종보입애진 상장목득순화야 기쇄무구자축인

채찍과 고삐를 쉼 없이 사용하여 곁에서 여의지 말라

그대가 한 걸음 한 걸음 애진(埃塵)으로 들어감이 두렵다

그러나 끌어내어 길들이고 순화되어

채찍과 고삐에 구애되지 않더라도 스스로 사람 따르네.


「진정한 본성」과의 매우 강한 친밀감을 나타내고 있다. 「소를 붙잡는」 앞 단계는 모든 상황하에서도 영적인 통찰력을 지속시키고 통제하는 것이다. 소를 길들이는 것은 이보다 더욱 미묘하다. 노력하지 않아도 만나게 되는 소와의 친밀감 또는 우정이 지금 막 세워지고 있는 중이다. 모든 사고 작용은 「진정한 자아」의 깨달음에 통합되어야 한다. 모든 현상은 이제 진보된 수행자의 차원에서 벗어나 깨달은 현자가 되는 사람의 어린이 같은 우정으로 길들여진다. 다시 주석을 보자.

『한 생각이 일어나면서 다른 생각, 또 다른 생각이 태어난다. 깨달음은 그런 생각들이 우리의 진정한 본성에서 일어나므로 비현실적이지 않다는 인식을 가져온다. 그런 생각들이 비현실적이라고 상상되는 것은 오직 미망(迷妄)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를 길들이는」것이 모든 생각, 아니 적어도 부정적이고 불순하고 비현실적이라고 여겨지는 생각을 제거함으로써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깨달음의 길은 아니다. 깨달음의 길은 배제(거부)가 아닌 포함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소를 길들이는」것은 앞선 단계에서 중요했던 수행과 순결과 차별에 대한 확신을 가진 수행자가 과거를 잊고 다시 배우는 것이다. 다양한 경전들의 가르침으로 나타나는 황소의 발자국을 따라갈 때, 우리는 현실과 비현실, 인간의 뿌리 깊은 환상과 성자들의 지혜를 분간하는 길을 배우게 된다. 이제 우리는 모든 생각이 내면적으로 같음을 발견한다. 그 생각들은 각각 근본 마음에서 솟아나기 때문이다. 오직 아직껏 남은 환상의 자취 때문에 생각이 깨달음과 다르게 되는 것이다 궁극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 통찰력과 무지 사이를 분간해내는 잠정적인 영적 환상이 없다면, 진정한 본성이 절대로 드러나지 않고 오직 일상적 욕망의 혼돈만이 출렁일 따름이다.

황소 길들이기는 영적인 삶과 일상의 삶 사이의 이러한 헛된 식별을 흐트리는 데서 시작된다. 성자가 되어 가는 사람은 영적인 탐구자나 진보된 수행자의 초월적 자아로 물러나기보다 일상적 자아의 한계와 곧잘 어울린다. 이것이야말로 그 성자가 영원히 자취를 감추는 신비한 평범성의 첫 번째 암시이다. 이 단계의 소를 묘사하는 주석을 보자.

『제대로 보살핌을 받았으므로 소는 분명하고 부드러워진다. 그 소는 고삐가 풀린 채로 기쁘게 주인을 따라간다.』 이 길들이기의 요점은 소를 풀어주는 것, 즉 우리가 특정한 육체와 정신이라고 초점을 맞춰 왔던 최초의 인식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소는 깨달음의 밭을 가는 도구가 아니라 자유로운 친구가 된다. 이것은 난폭한 에너지의 해방이 아니라 우아한 과정이다. 모든 운동이 균형을 갖게 된다.

 

 


6 기우귀가(騎牛歸家):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동자가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면서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오는 정경을 그리고 있다. 이 때의 소는 전체가 완전한 흰색을 띄고 있다. 이 때 흰 소는 동자와 일체가 되어서 피안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뜻하며, 구멍 없는 피리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깊은 마음 자리에서 흘러나오는 본성의 소리를 의미한다.


干戈已罷 得失還空 唱樵子之材歌 吹兒童之野曲 身橫牛上 目視雲소 哮喚不回 撈籠不住

간과이파 득실환공 창초자지재가 취아동지야곡 신횡우상 목시운소 효환불회 노롱불주

간과(干戈) 이미 끝나니 득실도 공이라.

나무꾼은 노래하고 아이는 피리 불며 소를 타고 하늘을 쳐다보니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끌어내도 서지 않는다.

騎牛이麗欲還家 羌笛聲聲送晩霞 一拍一歌無限意 知音何必鼓唇牙

기우이여욕환가 강적성성송만하 일박일가무한의 지음하필고진아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네  강적의 피리 소리 저녁 노을 속에 울리고 있네

한 박자 한 곡조마다 무한한 뜻이 담겨 있으니  그 지음 어찌 헛된 말하리.

진보된 수행자는 이제 깨우친 성자가 된다.

『이제 싸움은 끝났다. 이기고 지는 것이 더 이상 그에게 아무 영향도 미칠 수 없다. 그는 시골뜨기 나무꾼의 가락을 흥얼거리고 아이들의 동요를 부른다. 소의 등에 탄 채로 하늘을 떠가는 구름을 평온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낮에는 들판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저녁에는 등잔불 곁에서 목각 부처를 깎는다. 마침내 그는 최후의 상대자를 만나서 선사나 수행자의 역할을 초월하게 된다. 하지만 그 무기는 그가 목각 부처를 깎으면서 계발한 힘과 존경심에서 이끌어 낸, 철제 칼이 아닌 목제 칼이다. 그는 목제 부처와 목제 칼을 창조한다. 나무는 바로 땅에서 자라 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자의 이러한 토성(土性)이 항상 촌스러움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 나타난 상징은 단순성, 자연스러움, 자발성이다. 자기 자신과 모든 존재를 해방시킨 성자는 일상적인 삶의 흐름과 섞이기 시작한다. 그는 소등에 편안하게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마치 공기처럼 자유롭게 그는 유쾌히 저녁 나절의 안개를 헤치고 밀짚 모자를 쓰고 집으로 돌아온다. 어디를 가든 그는 신선한 산들바람을 만들어 낸다. 그의 가슴에는 심오한 고요가 흘러 넘친다.』 그 성자는 자발적으로 깨달음의 빛을 퍼뜨리기 시작한다. 그 빛은 이제 더 이상 그의 내면에만 개인적으로 존재하는 통찰력이 아니라, 그의 존재에 들어오는 모든 이가 느끼는 축복의 미풍이다. 여기에는 더 이상 소를 찾아가거나 발견하거나 붙잡거나 길들이는 따위의 문제가 없지만, 아직도 미묘한 환상이 남아 있다.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도 아무 힘 안들이고 탈수 있을 만큼 친숙해졌지만, 성자는 아직도 소를 분리된 존재로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는 순전히 분리된 실체로서 사라져야 한다. 우리 자신의 인격을 통해서 충분히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7 망우존인(忘牛存人): 소를 잊고 자아만 남는다.

 

 

집에 돌아와 보니 애써 찾은 소는 간데 없고 자기만 남은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결국 소는 본성을 찾기 위한 방편이었으므로 이제 고향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방편은 잊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뗏목을 타고 피안(彼岸)에 도달했으면 뗏목을 버려야 한다는 교종(敎宗)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금을 얻으면 폐광석을 버리고 달이 뜬 다음 구름에는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함)


法無二法 牛且爲宗 喩蹄免之異名 顯전魚之差別 如金出鑛 似月離雲 一道寒光 威音劫外

법무이법 우차위종 유제면지리명 현전어지차별 여금출광 사월리운 일도한광 위음겁외

법에 두법(二法)이 없거늘 잠시 소를 종(宗)으로 삼았다.

비유컨대 토끼 잡은 그물과 전어 잡는 통발이 잡고 나면 필요 없는 것이 아닌가.

금은 광산에서 나오고 달이 구름을 여의는 것과 같다.

일도(一道)는 빛을 차갑게 하고, 위엄 있는 소리는 밖으로 퍼진다.

騎牛已得到家山 牛也空兮人也閑 紅日三竿猶作夢 鞭繩空頓草堂間

기우이득도가산 우야공혜인야한 홍일삼간유작몽 편승공돈초당간

소를 타고 본향으로 돌아오니

소는 간 곳 없고 사람은 한가롭다

해가 석 자나 떴는데도 늦잠을 자니 오히려 꿈이러니

소용없는 고삐와 채찍은 초당간에 던져두노라.


성자는 마지막에 이르러 자기 자신을 진정한 본성의 완전한 표현으로 간주한다.

『둘이란 없다. 소는 그의 원초적 본성이다. 이제 알았도다‥‥소잔등에 타고 나서야 비로소「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아, 그런데 소는 이미 사라져 버렸구나. 사람만이 혼자서 고요하게 앉아 있도다.‥‥‥저기, 초가지붕 아래 한가한 채찍과 하릴없는 밧줄이 누워 있구나.』

모든 영적 수련과 개념은 이제 아무 쓸 데가 없다. 관조의 길도 일상 생활과 다르지 않게 되었다. 꼭 무엇을 성취해야 한다거나 무슨 수행을 거쳐야 한다거나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없다. 걷고 숨쉬는 일이나 다를 바가 없는 명상은 이제 성자의 자연스러운 운동이 되어 더 이상 분열이나 동기를 갖지 않는다. 『소잔등에 타고 나서야 비로소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수행자와 그의「진정한 본성」 사이에서 어슬렁거리는 이중성은 집에 돌아오는 단계까지 필요했다. 여기서 새로운 이미지가 나타난다. 소는 환상적인 추구를 하는 동안에 수행과 성취를 상징했지만, 집의 이미지는 이런 환상들을 포함하지 않는다. 분리된 소는 자취를 감췄지만, 깨달은 성자 자신은 여전히 진정한 본성의 특별한 구체화로 존재하고 있다. 그는 평온과 고독을 즐긴다. 성자 자신의 분리된 실존이 만들어 낸 이 미묘한 이중성은 「근본 마음」의 완벽한 단일성으로 용해되어야 한다. 추적자와 수행자의 역할이 점차 사라져감에 따라서 성자의 역할은 더 이상 깨달음을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8 인우구망(人牛俱忘): 소와 자기자신 모두를 잊는다.

 

 

소 다음에 자기 자신도 잊어버린 상태를 묘사한 것으로 텅빈 원상(圓相)만을 그리게 된다. 객관이었던 소를 잊었으면 주관인 동자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는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기 이전의 상태를 상징한 것으로서 이 경지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일컫게 된다.


凡情脫落 聖意皆空 有佛處不用오遊 無佛處急須走過

범정탈낙 성의개공 유불처불용오유 무불처급수주과

兩頭不着 千眼難窺 百鳥어華 一場마羅

양두불착 천안난규 백조어화 일장마나

번뇌를 탈락하니 깨침의 세계가 모두 공(空)이다.

부처 있는 곳에 놀지 않고 부처 없는 곳에서

급히 달려가는 둘에 집착하지 않으니

천안도 엿보기 어렵다. 백가지 새가 꽃가지를 물어오니

한바탕 웃음거리로다.



鞭索人牛盡屬空 碧天遼활信難通 紅爐焰上爭容雪 到此方能合祖宗

편삭인우진속공 벽천요활신난통 홍로염상쟁용설 도차방능합조종

채찍과 소와 사람이 모두 공하니

맑고 푸른 하늘 멀고 높아 소식 전하기 어려워라

끓는 솥에 어찌 흰 눈이 남아 있겠는가

이에 이르러 비로소 조종(祖宗)과 하나가 되도다.


최후의 장벽이 증발해버린 것이다.

『모든 미망적인 감정이 소멸하고, 성스러움의 관념까지 사라져 버렸다.』

이전 단계의 성자는 자신의 성스러움에 대한 개인적 감각을 갖지 않고, 자신의 의식적 존재를 통해 표현되는 진정한 본성을 향한 감각을 마음에 품고 있다. 진정한 본성과 완전히 혼합되는 대신 그는 관조적인 분위기에 여전히 잠겨서 이중성의 흔적이 채 가시지 않은 희열을 체험한다. 그러나 텅 빈 공간으로 표시되는 여덟 번째 단계에 이르면, 오직 깨어난 큰 깨달음만이 있을 뿐이다. 관조자도 없고 관조행위도 없으며, 평온함도 없고 소란스러움도 없는 것이다. 『그는 부처 근처에서 얼쩡거리지 않고 부처가 없는 곳에서도 머뭇거리지 않는다.』

깨어난 큰 깨달음은 「내가 부처」라고 주장하지도 않고 「부처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런 주장은 주장하는 사람의 존재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아무도, 하나도 없다. 물론 성자도 없다.「소와 자기 자신 모두를 잊어버린다」는 그림이 전통 선가에 전 해지고 있다. 문을 닫기 직전에 답안을 전부 작성해버리는 것이다. 만일 이 단계가 없다면, 더 이상의 성장이 일어날 수 없고 깨달음의 과정이 빈 공간으로 들어가 얼어서 붙을 것이다. 이처럼 심오한 빈 상태는 확 차기 위해서 반드시 열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깨달음이 삶의 흐름을 바깥으로 밀어내고, 또 다른 환상의 이중성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빈 원형(圓形)은 반드시 풍경을 포함해야 한다. 빈 것이 빈 것으로 끝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삶의 구체적 흐름은 나무나 고기나 곤충으로 흘러가야 한다. 깨달음이라는 이유로 삶에 자물쇠를 채워서는 안 된다.

 

 


9 반본환원(返本還源): 근원으로 되돌아간다.

 

 

이제 주객이 텅빈 원상 속에 자연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비치는 경지를 표현하고 있다. 산은 산, 물은 물 그대로의 모습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한 경지를 상징화한 것이다.(눈앞에 보이는 것 모두가 환상과 같다)


本來淸淨 不受一塵 觀有相之榮枯 處無爲之凝寂

본내청정 불수일진 관유상지영고 처무위지응적

不同幻化 豈假修治 水緣山靑 坐觀成敗

불동환화 기가수치 수연산청 좌관성패

본래 청정하여 한 티끌도 받지 않는다.

유상(有相)의 영고성쇠를 보고 무위의 응적(凝寂)에 이르니

환화(幻化)와 같지 않음으로 어찌 수치(修治)를 가(假)할 것인가.

수록 산청하여 앉아서 성패를 본다.

返本還源已費功 爭如直下若盲聾 庵中不見庵前物 水自茫茫花自紅

반본환원이비공 쟁여직하약맹롱 암중불견암전물 수자망망화자홍

본향으로 돌아옴도 이미 헛된 공이니 모두 장님과 귀머거리와 같이 되어

암자에 앉아 앞의 것을 보지 않아도 물은 저절로 잔잔하고 꽃은 스스로 붉다.


산과 소나무, 구름과 파도가 「나오는 곳을 모르게」 나타난다. 빈 공간은 봄으로 녹아든다. 그리고 형체 없는 인식이 그 형체 없는 본성을 잃지 알고 다시 형체로 돌아간다. 깨달은 존재는 더 이상 깨달음의 환상과 만나지 않는다.

『시초부터 내면의 순수를 해치려는 먼지는 그리 많지 않았도다.』 처음으로 소를 본 다음, 수행자는 모든 움직임을 근원에서 직접 나오는 것으로 느끼지만, 그래도 정말 그 「근원」으로 돌아가려면 모든 발전의 미묘한 중간 단계를 건너야만 한다. 성자의 귀환은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근원만 남기 전에 빈 원으로 용해되어야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의 소멸은 아니다. 나타나는 모든 것은 깨달음의 확산으로 보이 게 된다.

『이처럼 삶이 차고 이지러지는 것은 환상이나 허상이 아니라「근원」의 나타남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애써 구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물은 푸르고 산은 울창한데.』

깨달음이란 그저 푸른 호수이고 울창한 산이다. 앞선 단계에서는 극적인 실현이 있었다. 하지만 여기 아흡번째 단계에서 이 드라마는 스러진다. 오직 신선하고 소박한 여운만을 남길 뿐이다. 물은 그냥 푸르고 산은 그냥 울창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디 있는가? 이 「근원 회귀」에는 미묘하게 인간을 넘어서는 향취가 남아 있다. 숱한 단순화를 거치고도 깨달음의 과정은 너무나 멀어서 인간성과 사회의 구조를 알고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이 많이 생긴다. 『마치 그가 지금 눈이 멀고 귀가 먹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자기 집에 앉아서 외부 세계를 전혀 열망하지 않는다.』 소나무나 벚나무 같은 「근원」의 꽃피어남과 인류 문명의 만성적 미망과 고통 사이에는 미묘한 이원성이 도사리고 있다. 바로 이 「근원 회귀」가 보다 깊은 차원에서 세속적인 삶을 포함해야 하는 것이다.

 

 


10 입전수수(入廛垂手): 도와주는 손에 힘입어 장터에 들어간다.


 

동자가 지팡이에 큰 포대를 메고 사람들이 많은 곳을 향해 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때의 큰 포대는 중생들에게 베풀어 줄 복과 덕을 담은 포대로서, 불교의 궁극적인 뜻이 중생 제도에 있음을 상징화한 것이다.


柴門獨掩 千聖不知 埋自己之風光 負前賢之途轍 提瓢八市 策杖還家 酒肆魚行 化令成佛

시문독엄 천성불지 매자기지풍광 부전현지도철 제표팔시 책장환가 주사어행 화영성불

울타리 문 닫고 홀로 앉으니 천성(千聖)도 모른다.

자기의 풍광을 감추고 전현(前賢)을 뒤쫓던 길도 모두 저버렸다.

표주박을 차고 거리에 나가 지팡이를 끌고 집집마다 찾아가,

술집, 생선가게 아주머니도 교화하여 성불케 한다.

露胸跣足入廛來 抹土塗灰笑滿시 不用神仙眞秘訣 直敎枯木放花開

노흉선족입전래 말토도회소만시 불용신선진비결 직교고목방화개

가슴을 헤치고 맨발로 거리에 서니

흙을 바르고 먼지투성이지만 얼굴 가득 웃음

신선의 비결 쓰지 않고

바로 가르쳐 마른나무에 꽃이 피게 한다.


이원성과 일원성 모두를 없애버리는 깨달음은 살찌고 명랑한 촌뜨기 꼴을 하고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면서 이런 인생 저런 인생을 살아간다. 그의 몸은 생명 에너지로 넘쳐서 흐른다. 그의 존재는 자비로운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열린 손은 완벽한 공(空)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초가집 사립문이 닫혀 있으니, 아무리 현명한 이라도 그를 찾아낼 수 없도다.』

그는 넘어간 것이다. 완전히 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인간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나간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사람들이 사는 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왜 아무도 그를 찾지 못할까?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이 그가 아니라 깨어난 깨달음의 움직임일 뿐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과 마을 사람들, 심지어 마을의 풍경과도 전혀 다른 점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정신적인 파노라마가 마침내 자취를 감춘 것이다. 앞선 성자의 길을 따르려 하지 않고 그는 자기 길을 계속 간다.』 진보된 수행자와 성자들까지도 앞선 성자들에게 강렬한 존경심을 느낀다. 그리하여 자신들을 저 위대한 「하나」와 미묘하게 분리된 존재로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열번째 단계에 나타난 깨어난 깨달음은 현재, 과거, 미래의 모든 부처들의 깨달음과 완전히 동일하다.

그럼 누가 따라가는가? 깨달음을 완전히 체현한 명랑한 사람은 아무런 길도 따라가지 않는다. 미망에 싸인 인간 세계를 독에서 꿀로 바꾸는 밀교식 무아경의 상징인 「술 호리병」을 들고 다닌다. 『그는 술병을 들고 장터를 떠돈다. 그는 객점 주인과 생선 장수를 부처의 길로 이끈다. 그는 맨가슴, 맨발로 장터에 나타난다. 진흙과 먼지에 덮였어도 얼마나 크게 웃는가! 신비한 힘에 의존하지 않고도 그는 시든 나무를 금세 꽃피게 만든다.』

내면적으로 부처라는 인식을 가짐으로써 생선 장수와 객점 주인뿐만 아니라, 욕망의 장터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곧 활짝 꽃피어나게 되는 것이다.

 

출처:http://cafe.daum.net/muyous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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