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바탕에 흰말은 무슨 색으로 그리나요
정재리
파란시선 0113
2022년 10월 30일 발간
정가 10,000원
B6(128×208)
134쪽
ISBN 979-11-91897-38-8 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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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간 소개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을 어떻게 그리워하나요
[흰 바탕에 흰말은 무슨 색으로 그리나요]는 정재리 시인의 첫 번째 신작 시집으로, 「표현」, 「흰색을 향하여」, 「수면」 등 50편의 시가 실려 있다. 정재리 시인은 2017년 [서정시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흰 바탕에 흰말은 무슨 색으로 그리나요]를 썼다.
정재리 시인은 순서 바꾸기를 제안한다. 그는 “그리기도 전에 고삐를 지”우자고 한다. “집도 짓기 전에 마을로 초대”하자고 한다. “약속하기도 전에 악수하고 헤어”지자고 한다.(「먼 곳에서 온 이야기들」) 이토록 간명하고 쉽게 세계를 재배치할 수 있을까? 고삐를 그리고 난 후 지우개로 지우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다. 약속하고 악수하고 헤어지는 것이 보통의 순서이다. 그는 결과를 먼저 행한다. 그렇게 하면 이 세계는 덜 지겨워질까? 정재리는 그것을 실험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토록 인과관계에 묶인 지루한 세계를 왜 재현하고 싶겠는가? 그는 다른 세계를 꿈꾼다. 그는 다른 세계를 언어로 짓는다. 그는 납작하고 평면적인 세계를 창조하고, 빠르게 이목구비를 생략하며, 안정적 구도에 기울기를 주면서 원인 없는 행동을 한다. 정재리 시인은 자신이 창조한 이 이상한 세계에 우리를 초대한다. 이 시집을 읽는 독자는 이 납작한 세계에서 순서 바꾸기 놀이를 통해 자신의 삶을 새롭게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 임지연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정재리 시인의 시는 다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 말하지 않음, 그것을 보여 준다. 단순하게 절제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이런 매력은, 구름을 그려 달을 드러낸다는 동양화의 화법 중 하나라고 하는 홍운탁월(烘雲托月)을 생각나게 한다. 절제의 여백을 통해 그 여백을 중심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이 그려 내는 마음은 오래도록 묵직하게 다가온다. 말없이 “칼로 긋듯//그런 눈물”을 보여 주고(「유성」), “한 번 간 사람을 열 번 보내고 돌아서”는 마음을 보여 준다(「흰색을 향하여」). 그런 마음은 내게로 돌아오는 사람의 말 같고 동시에 나를 떠나는 사람의 말 같아서 시를 읽는 마음은 오도 가도 못하고 사로잡히고 만다. 그의 시를 읽는 가장 큰 즐거움이자 고유한 매력이다.
또한 시인은 말을 감추고 감춘 말을 사랑해서 아프다. 그리고 넌지시 감춰진 마음의 빈 곳을 바라본다. 그렇게 시인의 시선을 따라가며 숨겨 둔 마음을 만나는 일은 즐겁다. 아니, 아프다. 쓸쓸하다. 그의 시를 몇 번씩 거듭 읽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인의 마음은 “달팽이 혼자 들어간 길”이거나(「내이도」) “빈 병 속으로 스르르 들어가는/뱀 한 마리” 같지만(「불현듯 빛나는 테두리」), 그의 시를 따라가다 보면 시인이 만든 어떤 장소에 닿을 수 있다. 그 장소에는 외딴집 한 채가 있고, 그 집은 빈집이다. 방금 누군가 머물렀던 온기로 따뜻한 그런 집이다. 아무도 없지만 쉽사리 떠날 수 없어 가만히 나를 돌아보게 된다.
시인은 제 마음을 지우고 또 지운다. 그러나 지운 흔적을 보면 그가 지워 낸 말이 보인다. 희미하게 유리창에 쓴 글씨처럼, 그는 시를 읽는 이에게 속삭이듯 말한다. 귓속말을 한다. 그러나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속삭임을 듣다 보면 우리는 그의 시로부터 달아날 수 없을 만큼 깊게 목덜미를 물리게 된다. 아름답게.
―이승희(시인)
•― 시인의 말
양이
물고기가
아픔을 모른다고요?
•― 저자 소개
정재리
2017년 [서정시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흰 바탕에 흰말은 무슨 색으로 그리나요]를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행잉 – 11
표현 – 14
유성 – 16
구조 – 18
영 – 20
흰색을 향하여 – 22
다른 테이블 – 24
테이블 – 26
티 테이블 – 28
틸란드시아 – 30
나는 괜찮아 – 32
마리네이드 – 34
제2부
블루 라이트 – 39
기울기 – 42
어반스케처 – 44
직립의 시간 – 46
Dettagli – 48
수면 – 50
꿈의 형식으로 – 52
네 개의 침대가 놓여 있는 게르 – 54
불현듯 빛나는 테두리 – 56
물병자리 운세 – 58
섬들의 바다 – 60
제3부
내이도 – 65
캔버스 – 66
소묘 – 68
십일월 호수공원 – 70
환원 – 72
에델바이스 – 74
인터뷰 – 76
흑백 – 78
선원근법 – 80
야외 테이블 – 82
렘수면 – 84
십일 층의 상상 – 86
포식자 – 88
오감 – 89
제4부
불면 – 93
연 – 94
캠프파이어 – 96
1분 크로키 – 98
20색상환 – 100
건너편 – 102
2분 크로키 – 104
팔월 헤를렌강 – 106
악어 – 108
초식 – 110
서스테인 드로잉 – 112
먼 곳에서 온 이야기들 – 114
후일담 – 116
해설 임지연 납작하고 빠르게 기울(이)기 – 118
•― 시집 속의 시 세 편
표현
설원에 서 있는 하얀 말을 본다
긴 속눈썹 긴 다리에 관절 마디가 볼록한 어린 말
혼자 서 있다
언덕 너머엔
요정을 믿는 소수의 사람들이 살고 있고
사람보다 많은 말들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궁금해
평원에서 눈을 들어 가장 먼 곳을 바라보면
돌아오는 항해의 시간
자신의 그림자를 알지 못하는 말
조용한 두 귓속으로 바람이 훅 들어오면
외로움을 배울 것이다
문득 키가 자랄 것이다
아, 또 눈이 온다 눈이 와
흰 바탕에 흰말은 무슨 색으로 그리나요
온통 하얀 그림 속에서 하양을 잃고
자칫 떨어트린 잉크 방울로 검푸른 눈동자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을 어떻게 그리워하나요
악천후처럼 지나가 버린 마음을
다시는 못 보게 된 것을
또 어떻게 그리나요 ■
흰색을 향하여
누구를 그려도 빨리 마른다 붓을 헹구면서 다른 얼굴을 떠올릴 수 있도록
다른 색을 고르도록
팔레트를 채우고
그 아래로 건너는 물
추월하는 물
잡고 싶어도 내색하지 않는 습성
흐르면서 깊어지던 물고기의 눈동자는 간혹 멈추어
부분과 대면한다
흰자 위에 검은 눈동자
위에 응시하는 흰 점
독백이나 방백
이제 빛을 색이라 말해도 좋겠다
다음엔 마음이란 말 그다음엔 사랑이라거나 행복 어쩌면 영원까지도
한 번은 스치고
세 번 네 번 열 번은 기꺼이 머금고
한 번 간 사람을 열 번 보내고 돌아서서
옅은 색보다 옅은 색
까맣게 잊은 색
겉을 덧칠하는데 속이 깊어지는 이상한 구도
세로선을 먼저 그은 적은 없지
어디에 그려도 빨리 마른다 두꺼운 아크릴물감
위에 파스텔
그 위에
흰 구름 ■
수면
블루에는 블랙이 가라앉아 있다
눈 감고 있다
참고 있다
피콕블루 마조릴블루 한블루 미드나잇블루 가로로 그으면 먼 물결
잠들기 전에
수심에 대해 말하려 하지만
말줄임표와 느낌표 사이의 어조를 결정하지 못해
깊이 잠긴다
견디고 견디다 마침내 견고해지는
바위가 될 것이다
그러는 사이 언덕은 그림자로 뛰어내리고
죽고 못 살던 애인은 옛 애인이 되어 버리고
돌아누울수록 불어나는 이야기들
배를 뒤집을 꿈이라도 꾸겠네
파랑이 인다 파랑은
물고기가 돌아와 주기를 기다리는 물결 파 물결 랑
어쩐지 벨벳 같아 손바닥으로 쓸어 보면
야옹, 새벽잠을 깨우는 환청
항구의 빛나는 푸른 눈 그 검은 고양이 안아 본 적도 없는데
환상통을 앓는 이유
깊은 바닷물로 지붕을 들어 올리는 시간
알고 보면 가벼운
프러시안블루다 ■